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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집 (李宇集)
이우집(1761~1801). 세례명은 미상. 전라도 영광(靈光) 출신으로 사돈인 유관검(柳關儉)의 권유로 입교,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양선박청래사건’(西洋船舶請來事件)에 관련되어 3월에 체포되었고 전주감영(全州監營), 포청, 형
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이해 10월 24일(음 9월 17일) 김유산(金有山, 토마스)과 함께 전주에서 참
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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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천주교 박해
학술부장 노상경
Ⅰ. 머리말
조선후기사회에 전개되었던 천주교의 수용과정은 성리학에서만 보편적 가치와 의미를 추구했던 조선사회에 문
화적, 사상적 다양성을 가져다 줄 수 있었으며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명 '천주교 박해'라고 불리는 1785년 이후부터 1882년까지 약 1백년동안의 시간들이 말해
주듯이 당시 조선사회·기존이념과 새로운 종교·사상간의 충돌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수용과정
과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한 연구는 조선후기 사회변동의 일단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가 아닐 수 없
다. 또한 우리는 천주교 수용과 그 영향을 검토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수용되고 있는 외래사상·문
화가 우리 사회의 변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연구를 위해 먼저, 천주교 수용의 역사적, 사상적 배경과 조선교구 설정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조선정부의 대응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발생된 100년간의 박해를 주요 교난을 중심으
로 경위를 알아본 다음, 마지막으로 천주교가 사회개혁에 미친 영향까지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천주교 수용 배경
1)서세동점의 세계정세와 조선후기 시대상황
15세기 말 지리상의 발견 이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비롯한 중상주의국가는 그들의 원료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시아 진출에서 무역과 포교를 배합하는 방법을 채
택하였고 이에 포르투갈은 예수회를 통해 중국에 진출하였는데 1582년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전도기지를 꾸
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서학 즉 서양 선교 신부들이 중국에 전해준 서양의 종교, 윤리, 과학, 기술에 관한 중국
황실과 사대부들의 관심을 매개로 하여 즉 이러한 서학에의 관심을 이용하여 천주교전도에 기적적인 성공을 거
두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에서의 서학수용 역시 학문적 관심이었고 이러한 관심은 당시 사변화되고 획일화
되어가는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상에 대한 변혁과 개혁을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
조선후기 새로운 사상·종교로서 천주교의 수용은 당대의 사회변동이 그 전제로 되고 있다. 17세기 이후의 정치체
제 및 수취체제의 개편은 이 시기의 경제발달과 사회변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우선 농업생산력이 급증하여
사회변동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상업·수공업에 있어서도 사업자본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도 부의 축적에 다른 신분의 상승이 일반화되어 양반사회의 신분구조가 동요되었다. 이러한 신분제의 동
요상은 성리학에 기초한 양반사회의 체제를 그 기반에서부터 동요시키는 것으로 되어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봉건사회해체를 촉진시키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구조의 변화와 신분제도의 동요에 못지 않게 사상계
도 크게 변화하였다. 지식계층을 중심으로 실학이 발생하였고, 기층민들에게는 민간 신앙이 흥행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이러한 각 방면의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채 벌열정치의 말폐가 세도정치로 진전되었
고. 이에 따른 삼정을 문란 등으로 국민생활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와 재난
속에서도 정치적 지배계층에 있는 계급들은 정권쟁탈을 일삼는 당파싸움만을 계속하고 있었고 조선왕조는 전체
적으로 개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를 위하여는 새로운 이념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주자학의 덕치주의 재검토
하고 새로운 이념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쟁을 배경으로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학자들 이였다. 관
념적인 공리론을 비판하고 정치, 경제, 사회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학문 곧 실학과 함께 서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2) 한역서학서를 통한 서학 수용
이러한 조선사회 내적인 요인들에 의한 서학수용은 어떤 선교사의 도움이 아닌 우리 스스로 특히 진보지식인들
이 한역서학서들을 공부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즉, 조선에 서학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성으로는 외국
선교사의 선교를 위한 직접적인 노력이 없이 조선인 스스로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자
발적 노력은 명말 청초 이래 중국에 입국하여 그리스도교를 전하던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서학서를 구해 읽음으
로써 시작되었다. 이때 당시 일차적으로 북경을 방문한 연행사들에 의해 많은 서학서들이 들어왔는데 이수광에
의해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한역서인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이외에도 {칠극(七克)}, {진도자증(眞道
自證)}, {교요서론(敎要序論)} 등이 있었다.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직접 조선에 와서 전도할 수는 없었으나 조
선사신들을 통한 간접적인 시도는 가능하였다. 중국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한역서학서 등의 서적들이 계
속 조선에 도입되어서 남인학자들 사이에 연구되어 실학 운동에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된다. 여기서 서학은 서양 종교(천주교)와 서양 학문을 내포하는 개념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서학이
학문적인 관심에서 연구되기 시작되었다.
2. 천주교 수용과 조선교구의 설정
1) 초기 서학수용과그 특성
18세기에 들어와 학자들이 개별적인 차원에서 서학과 천주교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인학자들을 중심으
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익은 서학수용의 선구자라 할 수 있으며 그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성호좌파로 대표되는 권
철신을 중심으로 이기양, 권일신, 정약전, 이벽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은 서학과 천주교를 갈라서 전자
는 긍정하고 후자는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것은 조선의 지식층이 주자학으로 일색화된 환경 속에서 주자
학으로 대표되는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적 충돌을 회피하면서 서학을 수용하기 위해 가졌던 이해체계라 하겠다.
이들은 대개 양반신분층이었고 기호남인으로서 중소지주적 특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육경(六
經) 중심의 고학(古學)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당시의 성리학적 학문풍토에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
이 직접 선진(先秦)시대의 유학을 연구하며 성리학 이외의 여타 사상에 대해서도 탄력적인 입장을 나타내었다.
이렇듯 초창기 서학에 접근했던 인물들 가운데 양반 출신 신도들은 서학에 입교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단적'사상
에 관심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들은 성리학을 대체할 수 있는 신문화를 수용하려는 입장에서 서학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서구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침투라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주자학에 대체하여
근대적 사유체계를 수립하고자 하는 진보적 학자들의 노력의 발로였다. 봉건적 신분과의 부정, 가부장주의에 대
한 도전 등이 바로 이들 사상의 주내용이였으며 따라서 서학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이들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모
색되었다.
그러나 서학 내지 천주교 수용이 일부 양반지식층만의 사상적 동향은 아니었다. 천주교 신앙은 수용초기부터 중
인, 농부, 또한 부녀자 등 연령에 무관하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791년에는 조상제사문
제가 발생하였다. 천주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조상제사를 거부하던 윤지충(尹
持忠, 1759∼1791) 등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다루던 조정에서는 왕의 명령에 의해서 이제 서학도들
은 선비의 반열에 끼워주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 이후 양반신분층 출신 신도들은 상당수가 서학사상을
포기하고 유학의 입장으로 회귀해 돌아갔다. 이에 따라 서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신분적 특성에도 큰 변화가 일
어났다. 즉 1791년 이후에는 교회의 지도층이 양반으로부터 중인 이하의 신분층으로 이동되어갔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서학에 계속 관여하고 있던 양반들은 양반으로서의 특권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거나 양반의 특권을 이
미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도층뿐만 아니라 신도들 구성에서는 그 민중적 특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가 시작될 수렵에 정부 당국자들은 서학도들 가운데는 무지몽
매한 서민이나 아녀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요컨대 조선후기 사회에서 서학은 주로 성호 좌파계열의 지식인들이 한문서학서의 학습을 통해 수용하기 시작했
고 이들의 서학 수용은 신문화 수용운동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양반 지식층의 사상으로만 머
물지 아니하고 곧 만인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들은 '민중종교운동'의 일환으로 천주교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2) 조선교구의 설정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는 1784년(정조8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과 함께 신앙의 공
동체를 구성하면서,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승훈은 이벽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입교를 원하는 사람에게
는 세례를 주고, 중인인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가졌다. 1786년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고백성사, 성체 성사
도 집전하기 위하여 이승훈, 유항검, 권일신등 10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유항검은 그들의 성사 행위가
불법임을 알고, 북경에 윤우일을 파견하여 조선교회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조선 국경까지 온
선교사는 조선교우들과 어긋나서 북경으로 되돌아간다. 한편 북경교회의 주교 구베아는 조선에 천 주교가 탄생
한 것을 로마 포교성상에 알렸고, 이에 로마포교성상은 조선 교회를 구베아의 보호와 지도아래 맡긴다.
1794년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인도로 국경을 넘어서 조선에 들어와서 성사를 집전한다. 그러나 곧 배신자의 고
발로 수색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술활동과 교리 연구,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조선교회 는 크게
발전하였는데, 주문모가 입국할 당시 4천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6년 사이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로 선교사와 지도자들은 대부분 순교하고 성서도 압수된다. 하지만 1811년
에는 동지사 편을 이용하여 조선교회의 참상을 알리고 선교사의 파견과 파견된 선교사의 체류보장을 요구하였
다. 그런데 당시 북경교구의 사정으로 선교사를 파견할 수 없게되자, 1824년에 교황에게 직접 선교사 파견을 요
청한다. 이에 포교성상은 더 이상 북경교구에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파리외방 전교회의 브뤼기에르를 초대교구장에 임명한다. 그러나 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눈 앞 에 두
고 중국에서 병사한다. 그 후 브뤼기에르가 개척한 길을 따라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고, 1837년에는 앵베르가 2대 교구자가 되면서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춘다. 이리하여 정
약전 3형제, 중국어 역관 김범우(金範禹)·최인길(崔仁吉), 상인 출신의 이단원(李端源) 등 수십 명에게 대세를 주
어 84년 겨울, 역관 김범우 집 대청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고 최초의 조선천주교회를 설립하였다.
조선 천주교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 선교사가 전파한 것이 아니라 1779년 광주군 천진암에서 남인 시파의 학자들
이 모여 마테오리치가 쓴 <천주실의>등 서적으로 스스로 강학회(세미나)를 열어 자기들끼리 성직과 성사를 행했
다는 데 있다.
4. 조선정부의 대응
천주교가 수용된 18세기 후반기, 조선왕조에서는 일종의 정교일치적 입장에서 정부 당국은 성리학적 가치관에
입각한 대민통제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새롭게 수용된 천주교 신앙은 그 수용 직후부터 정부
당국 내지는 지배층과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 갈등은 천주교의 신조 자체에 대한 지배층의 거부와, 그 유포현
상에 대한 그들의 위기의식 때문에, 그리고 신도들의 이질적 행동양태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조선 정부의 당국자들은 이미 왕조 개창 직후부터 성리학적 가치관 이외의 여타 사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해왔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사상통제정책은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도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들은 전통적인 '벽이단(闢異端)', '척사학(斥邪學)'이나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입장에서 천주교의 신앙을 인식했
고, 이를 일종의 이단사설(異端邪說)이나 민중종교로 파악했다.
천주교의 내용은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인 주자학(朱子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주자학에서는 비인격
적인 태극(太極)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는 데 반하여 천주교의 '한역서학서'에서는 주자학의 태극에 관한 학설을
정면으로 배척하고 인격적인 천주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안배하고 다스린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현세를 경시하고 죽은 다음에 천당에 올라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내세에 주된 초점을 맞추어 죽은 다음에 복을
받고 벌을 면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천주께 기도하고 간구하며 예배하고 미사를 드리는 등의 방식으로 천주를 공
경한 데 반하여 주자학에서는 마음이 항상 이기적인 욕망에 이끌리지 않고 공정한 이치에 따라 발동하게 하는 공
부를 통해 현세에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주자학의 입장에서 보면 현세를
경시하고 사적인 자신의 구원을 바라는 천주교는 반사회적이고 반교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러
한 인식은 조선에 교회가 창설된 1784년 이전부터 신후담 등에 의해 제시된 것이었고, 18세기의 80∼90년대에 이
르러서도 안정복을 비롯한 일단의 관료적 지식인들에 의해 강조되었던 견해였다. 이로써 이들은 성리학과 천주
교신앙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사상체계임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주자학사상에 사로잡힌 지배층들은 명분론과 존화의식에 근거하여 이질적인 사상체계에 대하여 탄압을 가했다.
이는 그들의 주자학체제를 수호함으로써 체제의 동요를 막아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그것은 봉건
사회의 신분이데올로기에 대해 서학·천주교가 갖는 진보성에 대한 억압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척사 상소문이나
대간대책문을 보면 천주교도들을‘무부무군지도’(無父無君之徒)·‘금수지도’(禽獸之徒)·‘패륜난상지도’(悖倫亂常之
徒)라 하였으며, 천주교를 ‘절륜패살지도’(絶倫悖殺之徒)니 ‘황탄괴설불경지외도’(惶呑怪說不敬之外道)라 규정하
고 있다. 더 나아가 정부는 천주교를 조사하여 탄압하였는데, 천주교도들이 조선사회의 전통적 예속인 조상숭배
를 거부하고 신주를 철폐하는 신앙행위와 신분과 문벌을 초월한 평등논리가 신분차별·서얼차대·문벌중시에 입각
한 조선사회의 봉건적 지배질서를 파탄시킬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천주교는 주자학적 신
분질서에 터전한 조선사회를 근본으로부터 동요시키는 사학체계(邪學體系)로 인식되어 천주교를 탄압하는 척사
논리가 강화되었다. 더군다나 천주교가 학문적 차원에서 종교적 차원으로 나아가면서 봉건지배층의 의구심은 가
중되었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신자라 할 정약종의 경우, 유교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비판하였다. 심지어 그는
“나라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요, 집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이다”(國有大仇 君也 家有大仇 父也)라 하
여 종전의 유교지배질서를 부정하였다.
또한 18세기 말 예수회의 퇴진과 함께 제례를 둘러싸고 북경당국과 천주교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
선에서도 제사문제를 둘러싸고 소규모이긴 하지만 이른바 윤지충 사건을 시발로 전면화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국왕인 정조와 재상 채제공의 경우, 정학(正學)을 강화시키면 사학(邪學)은 자연히 소멸한다는 입장에서 온건하
게 처리함으로써 이 문제의 확산을 방지하는 한편 서양학문을 지속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
순히 제례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가 갖는 반체제적 입장에 대한 봉건정부의 탄압을 알리는 단초였다.
정조 사후, 순조의 등극과 함께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반대파인 남인의 정치적 잔명마저 일거에 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대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봉건정부의 대응은 정적의 제거를 넘어서서 봉건이데올로기에 대한
천주교의 도전을 물리치고자 한 봉건지배층의 사상통제의 일환이었다. 여기에서 봉건정부는 천주교도들을 '세상
의 변혁을 바라는 자', '반란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자'로 파악하여 중국사상에서 등장하는 민중반란집단인 황건
적·오두미적(五斗米賊)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봉건정부는 천주교도들을 흉도(凶盜) 또는 사적(邪賊)으로
인식해서 이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시켜 ‘서학쟁이’를 색출하
는 데 혈안이 되었다. 한편 향촌사족 역시 통문을 돌려 향촌제를 강화하고 천주교서적의 유포를 금지한다든가 천
주교도들을 색출하는 데 더욱 열을 올렸다. 더군다나 종전의 교화주의적 방법을 버리고 강상지변(綱常之變)으로
파악하여 엄형으로 처리했다.
조선후기의 정부 당국자들은 천주교가 타지 민중종교와 유사하다고 파악했으나 그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
로운 민중종교로서 기존의 '이단사설(異端邪說)'보다 월등히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고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어 가
고 있음을 주목했다. 그리고 천주교도들의 질적인 특성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결속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을 유념했고 또한 정부관리들의 일부도 천주교도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어 파당을 형성할 조짐 때문에
천주교도들을 흉도(凶道)이며 사적(邪賊)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규제대책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5. 박해와 발전
천주교는 약 1백년동안 10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가 있었으며, 그러한 박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여러 번의 박해를 받음으로 처음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계급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
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처음 사회를 개혁해 보려던 강한 의욕은 사라지
고 현세 도피적이고 내세 구원적인 신앙으로 변천되어 갔다. 또한 도시에 집중되었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
간 벽지에 들어가서 교우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 압슬(무릎을 꿇려 무거운 돌로 짓누르는), 주리(묶은 다
리 사이에 막대를 넣어 정강이를 누르는) 등 잔인한 고문과 노인에 대한 고문이 금지되었으나 천주교 박해 때 다
시 부활되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배교를 하지 않는 자는 처형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
녕 오히려 하늘가는 영광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먼저 1785년에는 전해 겨울에 창설한 조선천주교회가 형조 금리에게 발각되어 서적·성화가 압수되고 김범우가
희생되었고, 1787년에는 이승훈·정약용·강이원 등이 반촌의 김석대 집에 모여서 비밀리에 천주교 교리의 성경 강
습회를 열었다가 발각되는 반회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그 여파로
1788년 8월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8도에 영을 내려, 천주교의 서적을 모두 불사르게 하는 등 탄압이 가중되
었다.
1)신해교난
조선 천주교회는 가성직제(假聖職制)를 몇해동안 실시하는 사이에 권일신 등이 교회 서적을 다시 검토하여 본 결
과 1789년에 이르러 의문이 생겨 이를 중지하고 북경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0월에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이성원 일행을 따라 교우 윤유일 바오로로 하여금 밀서를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 이를 북
경주교 구베아(Gonvea, 탕사선(湯士選))에게 전달하고 조선 교회의 사정을 자세히 알리게 하였다. 북경 주교는
이 편지를 받고 크게 감탄하는 한편 곧 가성직제의 옳치 못함과 세례 이외의 어떠한 성사도 집행할 수 없음을 적
은 답서를 만들어 주니 윤유일은 이것을 가지고 이듬해 3월에 서울로 돌아와 이를 권일신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권일신 등은 북경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그 때까지 집행하던 여러 가지 성무(聖務)를 중지하고 곧 그해 5월에 떠
나던 사은사(謝恩使) 황인점 일행을 따라 다시 윤유일로 하여금 밀서를 가지고 북경으로 가게 하였다. 이 밀서에
서는 신부의 파견을 간청하는 한편 조선에 있어서의 조상제사 등의 문제도 문의하였다.
이런 편지를 받고 북경 주교가 다시 감탄하고 머지 않아 한 분의 신부를 보내 줄 터이니 모든 준비를 갖출 것과 조
상 제사는 미신 행위이므로 금지한다는 뜻을 적은 답서를 만들어 주니 윤유일은 이것을 가지고 그해(1790) 10월
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 편지를 받은 조선교회는 신부를 맞게 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에 즐거워하였으나 조상제
사를 엄금한다는 가르침으로 많은 신자들이 용기를 잃고 반대자들에게 박해의 좋은 구실을 주게 되었다. 그 결과
이듬해인 신해년(辛亥年, 1791) 겨울에는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정약용의 외종제(外從弟)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신해교난(辛亥敎難)이 일어나게 되었다.
윤지충은 한의업에 종사하던 윤경의 아들로서 진산에서 태어나 1783년 봄에는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이
듬해에는 서울로 올라와 대과(大科)를 치르기 위해 글을 닦고 있었는데 때마침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칠
극』등을 얻어 보고 내종형(內從兄) 정약전의 가르침에 따라 1787년에 세례를 받고 굳게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북경 주교의 명령에 따라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神主)를 불태워 재를 집 뜰 안에 묻으며
1791년 5월에 어머니 권씨(權氏)가 별세하자 외종형 권상연과 더불어 모든 예절을 갖추어 8월에 장례를 치렀으
나 오직 그 신주를 만들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장례에 참석했던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로부터
불효자식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반대자들의 고발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서울에 살던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홍낙안은 그 해 10월에 장문(長文)의 고발장을 좌의정 채
제공에게 올려 윤지충을 처벌하여 줄 것을 주장하는 한편 진산군수 신사원에게는 그의 집을 수색하여 그들을 체
포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런데 홍낙안은 이에 앞서 1787년과 이듬해도 천주교를 몹시 반대하는 글을 정조에게 올
려 이를 근절하려는 일을 일으켰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한 윤지충은 한 때 광주(廣州) 마현 고모댁으
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숙부가 대신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곧 귀향하여 권상연과 함께 10월 26일 진산 군수에게
자수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30일에는 전라감사 정민시가 있는 전주로 옮겨져 또한 신문
을 받고 임금의 허락을 얻어 그해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그곳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이 진산 사건이 알려지자 반대파의 유생들은 11월부터 한달 동안에 30여통의 글을 임금에게 올려 천주교를 엄히
다스려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 결과 11월 3일에는 권일신과 평택현감 이승훈이 잡혀 이승훈은 벼슬을 빼앗기고
권일신은 그 달 16일 충청도 예산으로 귀양가던 도중 형벌에서 얻은 몸의 상처로 죽었다. 이승훈은 가성직을 그
만두게 된 1789년부터 임금의 특명으로 평택현감을 지내다가 파면되었는데 그 후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건이 발
각된 1795년 9월에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밖에 진산 사건을 기틀로 하여 그해 11월에는 내포(內浦)의 사도(使
徒)라고 불리우던 이단원도 잡혔다가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욕함으로써 석방되고, 충청도 홍주지방에서 친척·친
지 30여명을 입교케 했던 원시장도 잡혀 온갖 악형을 받다가 1792년 12월에 옥사하였다.
이 사건으로 교회창설기 수용주체세력 가운데 양반계층은 거의 이탈하고 중인 계층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수용
주체세력이 구성되었다.
2)신유교난
1795년 교회가 창설된 지 11년만에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이다. 주신부의
내한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4,000명의 신도 수를 헤아리게 되었으나 그의 밀입국을 밀고한 자가 있어, 주신부를
피신시키고 신부로 가장하였던 지황·윤유일은 포도청에서 타살·순교 당하였다. 주신부의 전교활동으로 교회가
크게 발전하고 있던 1799년 1월에 천주교를 감싸주던 남인 시파의 영의정 채제공이 별세하고 이듬해 6월 28일에
는 시파선비들을 사랑하던 정조가 49세로 갑자기 창덕궁에서 서거함으로써 마침내 첫 번째의 천주교 대박해인
신유교난(辛酉敎難)이 1801년에 일어나게 되었다.
총회장 최창현이 투옥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써서 교인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임금의 교서가 전국에
내려지자, 포졸들이 전국에 퍼져 2월 5일에는 내포에서 이단원을 잡음을 비롯하여 겨우 20일 사이에 전판서 이가
환, 전현감 이승훈, 전승지 정약용, 전정언, 홍낙민, 권철신, 명도회장(明道會長) 정약종, 여회장 강완숙 등 교회의
주요 인물 수백명을 잡아 가두니 서울의 의금부, 형조,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감영(監營) 감옥이 모두 교인들로 가
득 차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잡아 가둔 교인들은 곧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혹은 옥사하고 배교(背敎)를 선언하면 귀
양을 가고 주동자들은 참수형(斬首刑)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2월 24일에 권철신이 서울 서소문밖 네거리(서소
문공원자리)에서 목을 잘림을 비롯하여 26일에는 이승훈·정약종·홍낙민·홍교만·최필공·최창현 등이 같은 곳에서
목을 잘리고 이단원은 충청도 감영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한편 배교를 선언한 정약전·약용 형제는 9월 29일에
각각 전라도 강진군 신지도와 경상도 장기현(동래)으로 귀양보내졌으나 그해 9월 29일에 이르러 도움을 청하는
백서(帛書)를 만들어 북경에 보내려던 조카 사위 황사영이 처형되자 각각 전라도의 흑산도와 강진으로 귀양터가
옮겨지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주신부는 그로 말미암아 이번의 큰 박해가 일어나게 된 줄로 여기고 박해가 시작되자 서울을 떠나
의주까지 이르러 청국으로 돌아가려다가 이곳에서 뉘우쳐 다시 서울로 돌아와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그런데 주신부는 우리나라가 대국으로 섬기던 청국인(淸國人)이었기 때문에 16일에야 간단한 문초를 받고 한달
동안 갇혔다가 4월 19일에 처음으로 30대의 매질을 정강이에 맞은 후 남대문 밖 10리 거리인 한강가의 새남터(서
부이촌동)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참수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이후 외국인 성직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목을
잘리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곧 지방으로 퍼져 4월에는 전주에서 유항검·관검 형제, 윤지헌, 이우집, 김유산이
잡혀 5월 16일에 서울로 압송되고 이어 지방 교우 200여명이 잡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유교난은 옥중에 갇혔던
교인들을 그해 마지막 날까지 처형하게 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는데, 이 박해로 300여명이 순교하게 되었다.
3)기해교난
이리하여 천주교는 다시 지하로 잠복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36년간이나 목자(牧者) 없이 지내다가 강원도로 피신
하였던 신대보와 그의 고종사촌인 이여진 등의 노력으로 재건되었는데, 이여진은 수차 베이징에 가서 조선 교회
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재건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인 11년, 조선 국왕은 다시 전국에 명령하여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게 하여 이른바 ‘지방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도·강원도 등에서 수백
명이 잡혀 사형 또는 귀양을 갔으며, 일부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박해가 일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교회
재건운동을 일으킨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 하상(夏祥) 바오로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두 번의 박해가 더 일어나는데, 1815년(순조 15년)의 을묘박해는 신유박해 때 피신한 교인들을
상대로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자행되었고, 1827년의 정해박해는 경상도 일부지역과 전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헌종 조에 이르러 두 번째의 큰 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교인의 후예들이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
고, 다시 선교사 영입운동을 하여 천주교가 활기를 찾았는데, 1839년(헌종 5년)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 조 씨와 안
동 김씨의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른바 기해박해이다. 조만영은 세도가 김유근이 때마침 병상에
누워있었으므로 외손자인 헌종을 더욱 가까이 하여 1838년에는 왕명을 만드는 홍문관 대제학이 되어 오직 하나
의 대신(大臣)이던 우의정 이지연과 손을 잡고 그해 12월에 교회 성물(聖物)을 만들고 있던 권득인을 잡아 가둠으
로써 천주교 박해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기해년(己亥年) 2월 20일에는 조만영의 조카이던 조병현이 형조판서
로 되어 곧 경향 각지에서 많은 교우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3월 초에는 궁녀 박희순 등 수십명이
잡힘을 비롯하여 6월에는 정하상· 유진길 등이, 7월에는 범주교, 정(鄭)·나(羅)신부 등이 잡히었다. 이 때 형조판
서는 5가작통법을 써서 교우들을 남김없이 잡게 하였으므로 경향 각지의 감옥이 교우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따라
서 이들의 신문이 끝나는 대로 사형이 집행되게 되어 4월 12일에 권득인·박희순 등 9인이 서울 서대문 밖 네거리
에서 목을 잘림을 비롯하여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죽게 되고 8월 14일에는 범주교, 정·나신부가 한
강가의 새남터에서, 다음의 추석에는 정하상·유진길 등이 서대문 밖에서 피를 흘리고, 이후 이러한 참수형은 그해
12월 28일까지 이르는 사이에 경향 각처에서 집행되어 이번 박해로 모두 200여명이 순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가 진행되는 사이에 조만영은 실제로 세도를 잡고 그해 10월 18일에는 동생인 조인영이 지은 척사윤
음(斥邪綸音)을 전국에 내려 천주교를 뿌리 뽑도록 명령하고 그달 21일에는 이 동생으로 하여금 우의정 · 좌의정·
영의정의 자리를 겸하고 있던 독상(獨相) 이지연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함으로써 풍양 조씨 세도 시절을
가져오게 했다. 그 후 정부는 청나라에 박해가 불가피 했음을 해명하며, 이어서 박해의 종말을 알리는 척사윤음을
전국에 선포하여 박해행위를 변호하였다. 이 무렵 순교 당한 정하상이 남긴 "상재상서"(上宰相書)가 있다.
4)병오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때에는 김대건 신부 외에 9인이 순교하였다. 조선의 교회가 새 성직자를 맞이하여 크게 발전
할 움직임을 보이자 고주교는 청국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메스트로 이(李)신부와 최양업을 맞아들이기 위한 길
을 김대건으로 하여금 찾게 하였다. 이 김신부는 그들에게 편지와 바닷길을 알리는 지도를 보내려고 1846년 병오
5월 14일(음력 4월 18일) 임성룡의 배를 타고 7명의 교우와 함께 마포를 떠나 백령도 근해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
것은 때마침 조기를 잡기 위하여 이곳에 나오고 있던 청국 교우들에게 편지 등을 넘겨주고자 한 상황에서 발각되
어 김대건 등은 6월 21일게 서울 포도청으로 끌려와 이후 한달 동안에 40여 차례의 고문을 받게 되고 현석문 등
20여명의 교우가 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프랑스 동양함대 사량관 세실(Cecile)이 3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8
월 초순에 충청도 홍주 외연도에 나타나 앞서 기해년(己亥年)에 그 나라 성직자 3인을 죽인 일의 책임을 묻는 서
한을 섬 사람에게 주면서 이것을 영의정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문책서(問責書)를 받게 된 영의정
권돈인은 크게 놀래어 9월 5일에 헌종에게 김대건 등을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에 처할 것을 아뢰고 9월 15일에
이것이 윤허(允許)되어 9월 16일(음력 7월 26일)에는 한강가의 새남터에서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어 9월 19
일에는 현석문이 같은 곳에서 목을 잘리고 20일에는 임성룡의 부친 임치백이 교살됨을 비롯하여 남경문 등 6명
의 남녀가 매에 맞아 죽었다. 이 밖에 박해로 잡혔다가 배교함으로써 석방된 교우 중에는 이승훈의 아들인 이기원
등 6명이 있었다.
1860년(철종 11년)의 경신박해는 교회측 기록에만 남아있는데, 이는 박해의 주동자가 조정이 아니고 포도대장이
개인적인 원한과 탐욕에서 박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5)병인박해
마지막 박해인 1866년(고종 3년)의 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것으로 그 규모나 기간 등으로 보아 매우 혹
독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배교자 이선이의 진술로 교회의 내막을 샅샅이 알게 되어 1월 9일부터는 장주교(張主敎) 등 9명의 성
직자와 홍봉주 등 많은 교우를 잡아들임으로써 병인대박해(丙寅大迫害)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이번 박해를 일으
키는데 앞장을 섰던 조대비는 1월 24일 전국에 명령을 내려 서양인과 교인을 남김없이 잡게 하고 고발한 자에게
는 상을 주며 숨긴 자는 죽이고 황해도 충청도 해안에서 청국배에 왕래하는 자는 곧 잡아죽인 후에 정부에 알리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방법을 쓰게 하였으므로 전국에 걸쳐 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거의 그 해 봄에 잡혀 순교(殉
敎)하게 되었다.
1866년 이후 3년을 두고 학살한 교인의 수는 무려 8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때에 프랑스 신부는 9명이나 순교했
다. 그리하여 3만에 가깝던 천주교 신도들은 거의 종적을 감추는 사태에 이르렀다.
6)개화기·일제강점기의 천주교
그 후 외국 함선의 내침으로 박해를 거듭 겪어오다가 86년 한·프랑스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가까스로 전교의 자
유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용산신학교의 개설, 성 바오로수녀회의 진출, 성서 활판소를 개설하였고, 98년에는
명동 대성당의 축성식을 올렸다. 1900년 전국에는 프랑스 성직자 40명, 한국인 신부 12명, 41곳의 성당과 4만
2000명의 신자가 있어 그 교세가 제주도에까지 퍼졌는데, 1901년 제주도에서 다시 한 번 교난을 겪어 700여 명
의 교인이 희생을 당하였다.
5. 천주교 수용이 사회개혁에 미친 영향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이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사회에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와 민인들
에게 순기능을 발휘했던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서학이 발휘하고 있었던 순기능으로는 변화된 사회
상을 인정해주고 있음과 동시에 사회의 변화를 촉진시켜 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당시 사회에서는 신분제도의
문란과 함께 민인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어 가던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관과 평등성에 대한 자각이 강화되고 있
었다.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정당성을 교리를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었으며, 또다른 변화를 촉진시키고자
했다.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도들은 당시 사회의 변동과 천주교 서적들의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인간관과 사회관
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 이해하
고 천주로부터 부여받은 불가침적 양심법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가부장적 가
족주의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전환시켜 나갔다. 이러한 이
들의 서학 수용논리와 실천적 행동은 봉건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체제보수적 입장에 서 있던 정부 당국자들이나 양반 지배층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
행시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학의 수용자들이 드러내고 있었던 이와 같은 특징들은 조선 후기 사회의 발
전을 반영하는 일임과 동시에 또다른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
신앙은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지도이념에는 배치되었고 조선왕조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인식되었다. 그러
므로 당시의 지배층에서는 이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탄압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학이 계속하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민인들이 던지는 의문에 그
나름대로 응답하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앙이 조선후기 사회를 재
편하고 그 발전을 위해 발휘하던 기능은 순기능적 측면만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후기 서학도들이 가
지고 있던 체제 부정의 논리는 조선왕조에 대한 직접적 거부로 나타나기도 했고, 이 경우에 있어서는 흔히 외세와
의 결탁이 논의되기도 했다.
수용주체세력들이 정치적 제도권에 머물지 못하였다는 점과 천주교의 인간평등사상과 내세사상이 지배체제의
성리학과 너무나 이질적이었다는 점에서 천주교수용이 갖는 사회개혁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공동체를 통해 실천한 신분계급의 타파, 남녀평등의 실현, 어린이의 보호활동, 한글
의 보급, 근대교육의 실시 등은 조선사회가 근대사회로 전화하는 과정에서 사회개혁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천주교 수용이 사회개력에 갖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외래문화 수용에 나타나
는 서구문화 우월주의 경향과, 종교가 지니는 내세지향적 성격이 현실도피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조선사회가 근
대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영향도 미쳤음을 지적할 수 있다.
Ⅲ. 맺음말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배경과 조선후기 상황의 시대적 요청에 의해 학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신문화수용운동
으로서 '서학'은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졌으며, 민중종교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과
정에서 양자간의 사상적 상이성으로 인한 신구간의 갈등은 수차례의 교난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천주교 신자의
대규모 희생을 초래하였다.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가 조선 후기 사회에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와 민인들에게 순기능을 발휘했던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조선사회가 근대사회로 전화하는 과정에
서 사회개혁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는 많은 한계점들과 기존 체제에 일정한 도전의
성격을 내재하고 있었으며, 점차 현실도피·내세구복적 성격을 띠면서 수용 초기 사회개혁적 성격을 잃고 서구우
월이나 외세의존의 경향띠었음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이제 조심스레 그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감히 내려보려 한다. 역사는 가치의 학문이므로 그 사건에 대한 가치부
여가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가치 중립은 역사적 진실을 바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며,
역사의 진실에는 가치판단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몫이며, 이제 이 무거운 바
톤을 여러분께 이어드리면서 미흡하기 짝이 없는 이 글을 맺음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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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와 전주교구의 순교자들_김진소 신부
1. 천주교 종자를 씨 말려라
한국천주교는 1784년 한국인의 자발적인 연구 노력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러나 불과 반 돌 된 젖먹이 때부터 박
해를 당하기 시작하여, 100여년의 세월동안 탄압을 받아 왔다.
왜 그랬을까? 조선 사회는 유교의 한 갈래인 주자학 하나만을 숭상하여 다른 학문과 사상?종교를 이단으로 단죄
하였다. 더구나 천주교 교리는 유교와 아주 다른 사상을 갖고 있었다. 조선사회는 아래와 위를 분별하는 유교의
명분론에 따라 신분계급질서로 유지되었다. 그래서 양반은 죽어서도 양반이며, 민초들은 양반의 밥이었다.
천주교는 이러한 세습적 신분제도와는 달리 사람은 신분, 성별의 구분 없이 모두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존
엄하다. 천주는 우주의 대왕이시고,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시므로 세상만물 위에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당
시 조선의 양반들이 지내던 유교식 조상제사에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하여 제사를 금지하였다.
그래서 천주교는 집권층과 지배계급으로부터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다.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를 배반한다. 오랑
케와 짐승들의 종교다. 이렇게 저주를 받으며 박해의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천주교도를 처형하기 보다 유
교를 부흥시키고, 천주교도를 타이르고 감화시켜 유교로 돌아오도록 하는 온건한 교화정책을 썼다.
1799년 남인당의 우두머리이면서 바람막이였던 채제공이 죽고, 1800년 6월 온건한 교화정책을 쓰던 정조 임금
이 죽었다. 그리하여 1800년 11월 죽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고, 왕실의 최고연장자인 정순왕후 김대왕대비가 수
렴청정을 하여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노론당 벽파가 정권을 거머쥐었다.
김 대왕대비는 1801년 1월 10일 척사윤음을 발표하고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척사윤음은 정조의 교화정책을
비판하며,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의 종자를 씨 말리도록 했다. 한편 노론당 벽파의 입장으로는 천주교를
탄압하면 자연히 천주교와 연루되었던 정적(政敵)인 남인당 시파를 재거하는 일거양득의 결과가 되었다.
1801년 2월 초, 박해는 서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남인당 시파의 거물들과 천주교 창설기에 활약했던 남인당 시
파인 유수한 신도들을 신속하게 체포하였다. 그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났건 관계없이 한번이라도 천주교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을 모조리 처단코자 했다. 집권층은 그 문장이 온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훌륭한 이가환, 남인당 시
파의 학문적 우두머리인 권철신, 천주교 창설의 주역인 이승훈, 그 재주와 기지가 누구보다 뛰어났던 정약용과 형
정약전, 그리고 천주교의 주요 인물들을 2월 안에 서둘러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2. 나라의 문을 열고 서양의 도적을 불러들이려 하는가
신유박해의 불길은 전주에서 다시 타올랐다. 포도대장은 전라감사에게 전라도 천주교의 두목인 유항검을 체포하
도록 비밀리에 지시했다. 유항검은 3월 초에 체포되어 즉시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또한 유항검의 동생 유
관검과 큰아들 유중철을 감영에 수감했다. 그리고 포졸들은 사방 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전주?금구?김제?고산?금
산?무장?흥덕?함평?무안?영광 등지에서 200여명의 천주교도를 잡아 왔다.
전라감사는 전라도 신도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집권자들은 천주교를 믿은 죄 외에 새로운 죄목을 찾아냈다. 그
들이 서양 선교사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칠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단초는 선교사 영입이었다.
한국교회창설이후 가장 큰 과제는 선교사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다. 그래서 천신만고의 노력으로 1795년 1월 중
국인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입국 사실이 탄로되어 포도청은 주 신부를 잡으려 하자 피신해서 못
잡고 대신에 주 신부를 은신시켜 왔던 최인길, 주 신부의 입국을 주도했던 윤유일?지황을 6월 27일 잡아다가 다
음 날 때려 죽였다.
이 지경을 당하자 한국교회는 주문모 신부 한사람으로는 불안했다. 만약 주 신부가 죽을 경우 목자없는 교회가 되
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를 영입할 계획을 세우고 전주의 유항검이 중심이 되어 몇몇 신도들이 추진하였다.
신도들은 중국교회의 역사를 생각하며 선교사들은 으레 서양의 큰배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처럼 선교사가 큰배를 타고 입국하면 조선 정부가 허락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선교사의 교통수단인
서양 큰배를 불러오기로 했다.
전라도 지도급 신도들은 높은 학식을 가진 선교사가 서양 큰배에 금은보화와 서양의 풍금, 기중기, 천리비차 등
과학기기들을 가득 싣고 들어와 임금에게 선물을 바치고 친선외교를 통해 신교의 자유를 얻도록 기대했다. 이처
럼 서양 큰배는 선교사의 교통수단일 뿐 아니라 서양과학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천주교를 통하여 신분 위주의 인재등용이 아니라 실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하는 새로운 제도가 실현되기
를 희망하였다.1798년부터 1799년까지 박해가 치열하고, 남인당의 영의정 채제공이 죽고, 온건한 교화정책을 쓰
던 정조가 1800년 6월에 죽었다. 신도들은 천주교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유관검 같은
이는 서양 큰배를 불러들일 계획을 추진하면서 만약 정부가 서양 큰배를 타고 친선외교를 청하는 선교사를 순순
히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무력으로 위협해서 신교의 자유를 얻어내려는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그러다가 위기의
식을 느끼면서 더 강경해졌다. 서양 큰배의 무력을 이용하여《정감록》비결에서 민중들이 희원하는 이상적인 왕국
을 건설하고자 야욕이 생겼다.
이러한 사실이 전주감영에서 밝혀져 4월 26일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8월5일에는 형조에서, 9월 11일에는 의금
부에서 죄상이 거듭 확인되었다. 유항검?유관검?윤지헌?이우집?김유산 등이 서양 큰배를 불러들이려던 전모가
밝혀지자 문무백관들은 나라 문을 열고 서양 도적을 불러 들여 나라를 바칠 계획을 만들어 냈다하여 이를 갈았다.
3.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전주감영에 끌려온 신도들 중 김제출신 양반인 한정흠?고창출신 양반 최여겸?유항검의 종 김천애 외 8명이 포도
청에서 문초를 받았다. 5월 16일 포도청에서는 한정흠?최여겸?김천애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련하여
마음을 고치지 않은 채 계획적으로 천주교를 넓히며 점점 서로 빠져 들어갔으므로, 모두 용서하기 어려운 데 관계
되므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배교한 8명은 유배형을 내려 유배지로 보냈다.
형조에서는 죄질이 가벼워 전주 옥에 갇혀있던 137명의 죄수는 전라감사에게 명하여 처형토록 조처했다. 이들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현재 알 수 있는 유배자 명단은 42명이다.
형조는 7월 13일 한정흠?최여겸?김천애 등은 이른바 ‘서양큰배 청래’의 역모사건과 분리하여 판결을 내렸다. 이
들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하여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하고, 독실하게 믿고, 따라붙어 익혀서 ‘십계명은 버리기
곤란하고 한번 죽음을 달게 받는다’ 고 말했다.” 그래서 전라도로 압송하여 각자 고향에서 처형토록 했다. 죽음을
목격한 향촌민들에게 천주교를 믿지 못하도록 전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리하여 7월 18~19일 고향에서 참수형
으로 처형되었다. 판결문은 그들의 신앙을 확실하게 밝혔다..
한정흠(다니슬라오)은 김제사는 가난한 양반으로 유항검과는 먼 친척이었다. 유항검의 집에 여러 해 동안 유숙하
며 그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독선생이었다. 유항검을 통하여 입교한 후 신실하게 믿었다. 그의 법정 진술이다. 사
당을 헐고 제사를 폐지함을 일찍 못한 것이 한스럽다. 천당과 지옥을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라고 비교했다. 그는
“좌도의 미혹한 무리들이 벌써 주륙을 당했거늘, 예부터 이단을 막는데 죄를 물어 죽임으로써 금한다는 것은 듣지
를 못했다“ 면서 처형이 부당함을 당당하게 따졌다. 7월 18일(양력 8월 26일) 46세를 일기로 김제에서 참수되었
다.
최여겸(마티아)은 고창군 공음면 양반이다. 처음 천주교 교리를 윤지충에게 배우고,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들어서
는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고향에 돌아와 전교한 결과 신유박해때 체포된 사람
중 28명이 끼어 있었다. 박해가 일어나자 한산으로 피신했다가 자기가 교리를 가르친 사람의 밀고로 4월 13일 체
포되었다. 해당 도인 전주로 보내져 한정흠?김천애와 합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형조는 말했다. 최여겸은 널
리 남녀를 가르치고, 종당에는 자신을 망치고 남들까지 그르쳤으니 만번 죽여도 애석함이 없다고 했다.
공권력은 천주교를 믿지 못하도록 경각심을 주는 효과적인 장소로 전국에서 유명한 소(牛)시장인 개갑장터를 사
형집행 장소로 정하고, 7월 19일(양력 8월 27일) 참수형에 처하였다.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김천애(안드레아)는 유항검의 종이었다. 그는 유항검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신분
을 초월하여 고결한 마음으로 신앙의 본분을 지켰다. 그는 형조는 말했다. 천주교를 큰 진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골수에 젖었으며, 형벌은 영화로운 것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
까. 스스로 원하여 죄를 범했으니 빨리 죽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는 7월 19일 또는 20일(8월 27일 혹은 28일) 42
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4. 남문 누각에 매달린 유항검의 머리
조선의 집권층은 유항검?유관검?윤지헌?이우집?김유산 등이 서양 큰배에 선교사를 승선시켜 입국토록 추진하
려던 계획을 대역모역죄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건이 정계에 알려지자 소름끼친다, 간담이 서늘하다,
두려워 몸과 머리털끝이 쭈뻣하여진다, 사백년동안 일찍이 듣지 못했던 역변이라는 등 저주하는 소리가 높았다.
9월 15일 조정에서는 천주교 전파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방법으로 죄수들을 대중이 보는 앞에서 처형토록 하
여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전주로 내려보내 지체하지 말고 처형토록 했다. 형장은 사람들의 왕
래가 잦은 남문 밖, 1791년 윤지충?권상연을 처형했던 현재의 전동성당 터로 정했다. 그리하여 9월 17일 유항검
을 주모자로 몰아 대역부도죄로, 유관검?윤지헌은 공모죄로 몰아 세 사람은 능지처참되었다. 그리고 이우집?김
유산은 불고지죄로 참수되었다.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1784년 늦가을 입교하여 호남지방의 사도로서 활약하였다. 한국교회 지도급 신도들은
1786년 봄에 모여 신도들을 지도하고 효과적으로 전교하고, 성사를 집행할 목적으로 가성직제도를 설정하였다.
이때 유항검은 호남지방의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교리서를 연구하다가 신품성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성
사를 집전하는 것은 독성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대표자인 이승훈에게 성사 집전을 중
단토록 한 것이 선교사 영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호남의 양반이며 대부호로서 자기 집의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나눔의 생활을
실천하였다. 신유박해 때 체포된 200여명의 사람들은 유항검이 입교시켰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선교사 영입운동의 막대한 자금을 헌납하며 교회 건설에 봉헌정신을 기울였고, 이른바 ‘서양 큰배 청래’ 운동을
주도하여 추진하였다.
의금부는 이렇게 단죄하였다. “유항검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마음을 합쳐 강습하여 주문모를 받들어 신부로 삼고
서 신주를 땅에 묻으며 제사를 폐지하는 등 그의 죄악이 이미 용서할 수 없는데 도달했다. 심지어……400냥을 변
통해 내어서 북경의 천주당에 김유일을 행장을 꾸려 보내어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하여 우리 나라를 위협해서 한
바탕 결판을 낼 계교를 꾸며 그 죄가 대단히 흉패하여 만 번 법을 물어 죽여도 오히려 가볍기에 대역 부도죄로써
결안하였다.”
그는 1801년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현재의 전동성당 터에서 사지를 찌저 죽이는 육시형을 받았다. 그의 목은
전주 남문 누각에 매달아 놓아 남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면 처참하게 죽는다는 경각심을 우리
는 종이 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윤지헌(프란치스코)은 한국최초의 순교인 윤지충의 동생이며 유항검은 외사촌이고, 정약용은 고종사촌이었다.
형이 처형된 후에도 끝까지 고치지 않고, 유항검 형제와…주문모 신부를 높이 받들었다. 고향을 떠나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사하여 은신해 있으면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의금
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유항검의 형제와 부화뇌동하여 빠져 들어가 천주교를 널리 선전하여 인도하고… 몰래 이
역(異域)과 통하여 서양인에게 서찰을 주어 전후 세 차례나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한 음모와 흉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였으니 모역동참죄로 결안했다”. 그는 유항검과 같은 장소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유관검은 유항검의 이복동생으로 형을 따라 입교하여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재주가 있고 생각
이 번뜩이었다. 그러나 참을성이 부족했다. 그는 정부가 서양 큰배를 불러들이려던 계획을 역적행위로 보이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의금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서양인을 맞아오는 일을 적극적으로 주관하여 맡았고, 신주를 땅
에 묻고 인륜을 깨뜨려 없앤 죄와,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한 계책은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려워 모역동참
죄로 결안했다.” 그는 형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우집은 영광 양반으로 유항검의 친사돈이었다. 당시 양반들의 꿈처럼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그는 유
항검의 인격과 신앙에 감화되고, 유관검의 권유를 받아 입교하여 그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의금부는 말했다. 이우
집은 “유관검의 권유를 받아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으며, 유항검과 같이 몰래 이류(異類, 오랑케)와 통하여 큰
선박을 나오도록 청하는 일에 놀라서 달려가 고하려는 마음은 없이, 수컷이 암컷을 부르면 화답하는 것같이 적극
적으로 수작하였으며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불고지죄로 결안했다.” 그는 유관검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날 참
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김유산은 본래 충청도 청양 금정(金井) 역에 살았다. 의탁할 곳이 없어 중이 되었다가 환속했다가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을 만나 입교했다. 1791년 이후 이존창이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피신하자 뒤 따라 왔다. 그는 대판
리에서도 살았는데 충청도 진잠에서 살 때 이존창의 권유로 1798?1799년 두 번에 걸쳐 서양 큰배를 불러 올 계획
을 추진하는 밀사로 중국을 왕래하였다. 의금부는 “몰래 서양 사람이 사는 당에 들어가서 편지를 전하고 회답까지
받아와서, 큰배를 청해올 음모를 활발하게 교류시켰다. 정상을 일면서 고발하지 않은 불고지죄로 참하였다” 이우
집과 같이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5. “누이여 천국에서 만나자”
9월 15일 의금부는 연좌형에 따라 유항검?유관검?윤지헌의 가족을 노비로 만들어 버리는 노적법을 시행토록 하
였다. 그래서 유항검의 가족은 모두 전라감영에 갇혔다. 그리고 9월 24일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역적의 집은 헐
어 버리고, 집터는 웅덩이를 파서 연못으로 만드는 형률대로 파가저택(破家?宅)토록 했다.
그리고 10월 6일 의금부는 3월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던 유항검의 큰 아들 유중철(요한, 23세)과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 18세)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고, 유항검의 처 신희?유관검의 처 이육희?조카 중성(마테오)?유항검의 9세
된 딸 섬이?6세의 일석? 3세의 일문을 유배지의 노비로 보내도록 조처했다. 그리하여 10월 9일(11월 14일) 유중
철과 유문철은 전주 옥에서 교수형으로 죽였다. 유중철은 23세, 유문석은 18세였다.
유중철은 1797년 이 순이(루갈다)와 동정생활을 조건으로 10월에 결혼하고, 1798년 9월에 동정서약을 했다. 두
사람은 5년 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4년 동안 동거하며 오누이처럼 순결을 지켰다. 유중철은 처형되기 전 누이인
이 루갈다에게 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낼 옷 속에 넣어 두었다. “나는 누이를 권면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
납시다.” 이 루갈다는 이 편지를 집에 남아있던 종들을 통해 옥에서 받아 보았다.
10월 12일에는 윤지헌의 처인 유종항?아들 종원(15세)?종근(13세)?종득(4세) 딸 영일?영애 등은 모두 유배지의
노비로 떠났다.
10월 13일에는 유항검과 유관검의 남은 가족들이 유배지로 떠났다. 그러나 이 루갈다는 떠나기 전 전라감사에게
우리들은 천주를 공경하였으니 모두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하고 항의하였다. 신희?이육희?유중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유배지를 향하여 100 여리를 가다가 유배가 취소되고 사형에 처하기 위해 전라감영으로
다시 끌어 왔다. 그리하여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모두 참수되었다.
이순이(루갈다)는 태종의 아들 경령군의 후손으로 지봉 이수광의 9대손이었다. 아버지 이윤하는 성호 이익 밑에
서 공부하고 천주교 창설기에 활약했으며, 권철신은 큰 외삼촌이었다. 본가와 외가가 훌륭한 학자가문이었다. 그
는 어려서부터 성인전과 복음해설서를 읽으며 동정생활을 원하였다. 그러다가 1795년 14살 때 첫 영성체를 하고
성체를 모신 거룩한 몸을 보존하기 위해 동정생활을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1797년 주문모 신부의 중매로 겉보기
만 부부로 지내고 실제는 동정생활을 한다는 조건으로 유중철과 결혼하였다. 그는 20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는데
그의 목이 잘릴 때 흰 피가 줄줄 흘렀다고 한다. 다블뤼 주교는 “전 조선 순교자 중 우뚝 솟은 하나의 진주 정화”라
고 찬탄했다.
신희는 유항검의 아내이다. 유배지로 떠난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겼지만 잘 이겼다. 전라감사는 말했
다. “천주교는 형벌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남편이 그 의(義)로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있으면서 승봉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빨리 죽기를 원할 뿐이다” 그는 참수형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40세 가량이었다.
이육희는 유관검의 처이다. 그는 “국법도 엄하지만 천주교도 소중하다. 살기를 탐하여 배교하기보다 순절하는 편
이 낫다. 이제 어찌 여러 말을 하겠는가. 오직 죽기를 원할 뿐 이다.” 그는 당당하게 순교하였다. 그의 전주 숲정이
에서 처형 될 때 그의 나이 35세 가량이었다.
유중성은 유하검의 형 익검이었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자주 서울에 머물렀다. 그는“천주교는 곧 집안에서 내려오
는 학문이다. 둘째 작은 아버지 유항검은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나도 따라서 죽기를 원할 뿐이다. 다시 무슨 말
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형장으로 가면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뜨겁도록 설교했다. 그의 나이 18세 가량이었다.
이 외에 최여겸의 제자인 이화백이 영광에서 참수되고, 최여겸의 조카 최일안이 전주에서 죽고, 영광 복산에 살던
오씨도 참수되고 금산 솔틔의 원씨도 참수되어 전주교구에서는 모두 20명이 순교했다.
6. 무엇을 본받을까
“인간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배울 줄 아는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사실 교회의 역사는 교훈적인 의미가 크다. 신유박해 순교자중 백미(白眉)는 아무래도 부부
동정순교자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일 것이다. 여기서 부부동정생활이라는 말은 성략해도 좋다. 그 까닭은 당시 수도
원이 없어서 창안해 낸 비상수단이었다.
유 요한과 이 루갈다 부부에게서 배울 것은 두 사람이 서로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점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천사처럼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루갈다는 유 요한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존
경하고 건실하고 믿을 만한 남자라고 했다. 이렇게 서로의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
그러나 동정부부의 성소를 허락하고 끝까지 지켜 준 유항검을 배재하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식을 존경
하고 아끼고 믿으며, 부부동정생활을 지켜 주었다. 유항검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녀와 가족을 교육하였다. 유항
검 가정에서 한 사람도 배교자가 없다는 것으로 유항검의 가정교육을 증명할 수 있다. 교회역사에서는 순교자들
중 배교한 가족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유 요한과 이 루갈다가 동정생활을 결심한 것은 자신들의 독창적인 생각에서 창출한 것이아니다. 그들의 동정생
활이 그리스도적인 까닭은 그 시대 신도들이 읽었었던 복음의 해설서와 묵상서, 그리고 윤리생활을 인도하던《칠
극》(七克)의 영향이었다. 복음해설서와 묵상서의 강론과 《칠극》의 해설은 교부들의 말씀으로 꾸며졌다. 교부는
교회의 아버지이며, 그리스도교 전통을 이어오는 증거자였다. 교부들의 말씀은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의
올바른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책들은 하나같이 천주께 온전히 의탁하고, 사랑하고, 봉헌하는 생활로서 동정생활을 높이 평가하며 강조하였
다. 또한 성체교리에는 성체를 모신 사람의 본분을 이렇게 가르쳤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
하고 공경하며 자기의 영혼과 육신 일체(一體)를 예수께 드리는 일”이라 했다. 그래서 성체의 은혜를 보전하기 위
한 방법으로 동정생활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동정생활은 복음과 교회의 전통에 바탕을
둔 신심생활이었다. 두 사람이 인간의 본능을 이긴 것은 인간적 의지도 주요한 작용을 했지만 십자가에서 피를 흐
리시는 예수의 성혈공로를 묵상하며 이겼다. 이것은 이 루갈다의 고백이다. 아무튼 자기 경험의 세계에서 얻은 교
훈과 지혜를 복음과 교회의 전통에서 승화시킨 삶을 본받는 것이 순교자들에게서 배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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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5년(1791, 신해), 순조원년(1801, 신유), 순조 27년(1827, 정해), 헌종 5년(1839, 을해), 고종 3년(1866, 병
인) 박해가 있을 때마다 전주지방은 순교의 피로 점철되고, 전주·여산·고산·진산·김제 등에도 교세가 확장되었다.
전라감사 김달순은 정조 8년(1801) 3월 유항검과 그의 서제(庶弟) 유관검, 평신도 윤지헌(윤지충의 동생), 김유산,
이우집 등을 체포하여 유항검 형제는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육시형(戮屍刑)을, 그 외는 교수형을 당하였다. 1839
년(乙亥) 박해에 잊을 수 없는 순교자는 신태보(베드로)로서 1827년 4월 22일 전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13년
간의 옥고를 치른 후 다른 5명과 함께 1839년 4월 참수 치명하였다.
1866년(丙寅) 박해는 전주에서 치명한 수만도 22명이나 되며, 그 중 숲정이에서 치명한 분은 7명에 이른다.
현재는 진북동 동국아파트 단지 옆에 있지만, 이 곳이 당시의 형장으로써 논밭으로 경작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 곳을 매입하여 1935년 자그마한 순교십자비를 세웠다. 그러나 해방 이후 토지개혁령으로 지가증권만 가지고
있고, 토지는 경작자에게 넘어갔다. 이 토지를 재차 매입하여 숲정이 치명탑(致命塔)을 다시 크게 세웠다. 그러나
원래의 자리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서게 되었다.
유항검과 온 집안의 희생
1801년 신유교난 때 전주에서의 박해는 3월 유항검(柳恒儉)의 체포로부터 시작되었다. 유항검은 전주부 초남리
(현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에 사는 거부(巨富)로서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전도를 받고 경기도 양근의 권일신
·권철신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천주교의 교리를 배우고 감화를 받아 입교했다. 항검의 아우 관검(觀儉)도 처
음에는 윤지충에게서 전도를 받았으나 형 항검의 지도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하였다. 유항검은 윤지충보다는 조금
늦게 입문했으나 더 열성적이었고 전도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으므로 세례를 3년 먼저 받고 전라도 천주교 지도자
로서 그의 존재는 뚜렷했으며 윤지충의 순교 후에도 살아 남아서 선교사 영입운동 등에 그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
놓아 전라도 전교 확장에 진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801년 그 당시 전라감사 김달순(金達淳)이 관헌을 보내 유항검을 체포할 때 그 집안에 신주(神主)가 없음을 발견
하고 동생 관검과 가족들을 체포하고 여러 연척들까지도 연루시켜 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이 때 체포한 전라도의
신도들은 200명에 달했다. 전라감사는 유항검·유관검·윤지헌(尹持憲, 持忠의 동생)·이우집(李宇集)·김유산(金有
山)을 소위 전라오수(全羅五囚)라 하고, 심문 과정에서 ‘일장판결(一場判決)’이란 말을 억지로 지어내어 이를 죄목
으로 삼아 서양의 큰 배를 불러들일 것을 청원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라 하고, 드디어 1801년 9월 17일에 이
들의 머리를 자르고 팔·다리의 사지를 잘라내는 혹형인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전주 남문 밖(지금의 전동성당
터 근방)에서 집행하고 그 머리는 효수했다. 유항검의 남은 가족들은 심문 과정에서 천주교를 배교하면 용서하겠
다는 감사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구동성으로 거절하고 모두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기쁨으로 교수형을 받았다.
특히 15세의 소년 중성(重誠, 恒儉의 형인 益儉의 아들, 일명 강주 도령)은 형장에 끌려 가면서 구경나온 군중에게
소리쳐 전도했다. 이들이 처형된 날은 1801년 12월 28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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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1801년(순조 1년),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을 하면서
금교령을 내리고 전국의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일으켰는데, 그 규모가 하도 커서 '신유대박해'로 불릴 정도이다.
정조의 국상이 끝나자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최필공, 최창현, 강경복, 김현우, 최인철 등이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됐다.
전주에서는 이우집, 윤지헌, 김유산 등이 잡혀 순교했으며
이존창은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백서'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이 때 황사영과 함께 옥천희, 현계흠 등이 참수됐다.
신유박해로 희생자 수가 100여명, 유배된 자 가 4백 여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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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2권 1년 4월 25 일 (신미) 005 / 전라 감사 김달순이 도내의 사학 죄인 유항검·유관검·윤지헌 등의 나국을 건
의하다
전라 감사 김달순(金達淳)이 계문(啓聞)하기를,
“도내의 사학 죄인(邪學罪人) 유항검(柳恒儉)·유관검(柳觀儉) 형제와 윤지헌(尹持憲)·이우집(李宇集)은 요사하고
황탄하여 스스로 윤리와 기강을 단절하고 많은 무리를 불러 모아 호남(湖南)의 거괴(巨魁)가 되었는데, 최창현(崔
昌顯), 황사영(黃嗣永)·윤지충(尹持忠)·이존창(李存昌)의 무리와 난만(爛漫)하게 화응하고 주문모(周文謨)를 아비
처럼 섬겨 맞이하여 머물러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서찰을 받아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들여 보내고
사상(邪像) 및 이른바 영세(領洗)할 때 쓰이는 성유(聖油)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모의(謀議)한 바, ‘신부(神
父) 한 사람으로는 그 형세가 매우 고단하니, 반드시 하나의 큰 선박을 서양국에서 맞이해 와서 나라 안에 그 교
(敎)를 널리 선양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으니, 허다하게 주무한 자취가 지극히 간교하고 흉악하였습니다. 따라서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불러 유혹하여 두서너 고을의 백성들이 절반은 변하여 이적(夷狄)과 금수(禽獸)가 되었는
데, 점차 서로 끌어들였으니 그 수가 또한 많아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치(拿致)해서 엄중히
추핵(推覈)하여 해당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원전】 47 집 384 면
【분류】 *사상(思想) / *사법(司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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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동 성당의 순교자들 ◆
*윤지충(바오로 33세)
/전라도 진산 출신. 폐제분주로 참수형/순교일 :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권상연(야고보 41세)/
전라도 진산 출신. 폐제분주로 참수형/순교일 :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48세)
호남의 사도/전주 초남리 출신.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형 /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윤지헌(38세)
윤지충의 아우/고산 저구리 거주.역적모의죄로 능지처참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윤관검(34세)
유항검의 아우/전주 초남리 출신. 역적모의죄로 능지처참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김유산(토마스 41세)
북경 왕래 밀사/전라도 진잠 거주. 불고지죄로 참수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이우집(40세)
유관검과 친척/전라도 영광 사람. 불고지죄로 참수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유항검은 배교자 아닌 순교자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 보호하려 거짓 증언했을 뿐
신유박해가 발생한 1801년 10월24일 참수 당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 배교자가 아니라 '순교자' 라는 주장이
제기돼 교회사학계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초대 지도자였던 유항검은 지금까지 '배교자' 로
단정돼 왔던 인물.
'한국 천주교회사' 를 저술한 샤를르 달레는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에 대해선 그의 나약함과 배교를 인정하였고,
사촌 매제인 윤지헌(프란치스코)의 신앙에는 의심을 나타냈으며, 먼 인척인 이우집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반면 달레는 유항검의 배교 사실은 단정짓지 않고 보류하는 입장을 나타냈다(한국 천주교회사 상, 527~531쪽).
조선 신자들이 교황과 북경주교에게 보낸 '신미년의 서한' 에서는 유항검 뿐만 아니라 배교한 것이 분명한 유관검
김유산도 순교자로 기록하였다.
황사영은 '백서' 에서 1801년 4월에 체포된 전라도 신자들 가운데서 한정흠과 최여겸만이 순교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굴복한 것으로 보았다 (백서 73~74행). 황사영이 이렇게 작성한 이유는 '백서' 의 작성 날짜가 9월22일(양력
10월29일)이어서 9월17일에 처형된 유항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현대 교회사학자들의 공
통된 입장이다.
현재 유항검이 배교자가 아닌 '순교자' 임을 가장 강력히 주장하는 학자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차기진 박
사이다.
차 박사는 "제2차 성직자 영입운동 때 북경 파견 밀사 황심(토마스)을 보호하기 위해 이미 순교한 윤유일(바오로)
을 밀고, 자신이 알고 있던 신앙 활동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내용들만을 진술하려고 한 의도가 다분히 나타나므로
그의 순교 여부는 관련 기록을 다시 검증한 뒤에 판단을 내려야 할 것" 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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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 이
많이 체포되었다.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몇 일만에 200여명이 옥에 갇히였는데, 대부분은 배교
하여 석방되었다.
이들에 대한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 소위`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이 탄로되어 이와 연관된 이우집(李宇集), 윤
지헌(尹持憲), 황심(黃沁), 김유산(金有山) 등이 잡히게 되고, 이 연줄로 옥천희(玉千禧) 등이 잡히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