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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영선생기념사업회 본격 가동 수원 화성지역의 뜻있는 학자, 언론인, 경제인, 문화예술인 등이 실학자 우하영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발족됐다. 기념사업회의 목적은 선생의 경륜을 토대로 우리 고장 수원·화성의 인문지리적 특성을 정리하여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한 것이다.
방대한 실학이론서 『천일록』의 저술과 농업개혁을 주장하는 우하영의 농가총람·관수만록 등은 화성지역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체험한 현실진단서였고 사회적 병폐에 따른 처방전이었던 것이다.
“소위 양반들은 농사를 직접하지 않고 머슴이나 노비들의 손에 맡김으로써 파종, 제초, 수확하는데 농민들의 자력으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러므로 소출이 또한 상민들이나 천민이 직접 짓는 것보다 적다.”
선생의 기본입장은 토지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부농들의 광작(廣作) 확대를 반대하고, 소농 중심의 기술노동력을 집약적으로 투입함으로써 토지생산성의 증대를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광작으로 큰 이익을 얻는 대농·부농층의 경영확대가 한층 농민들의 경제구조를 분해하는 현실을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경기지방 농촌현실을 직시하며 끊임 없는 현실 개혁논리를 평생의 학문으로 삼아 농촌경제향상에 일관한 우하영 선생의 높았던 학문에 비해 남겨진 유산은 묘역과 초라한 생가뿐 남은 것이 없다.
‘우하영선생기념사업회’가 뒤늦게 발족을 본 것도 이 같은 위대한 실학자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자 함이다. 그의 학문이 불꽃을 태웠던 고향마을 어천리에 후세가 기리는 기념관을 개설하고 사적비를 건립하는 일은 정체성 확립을 위한 당면한 문화사업으로 추진돼야 한다.
1741(영조 17)~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농학자. 본관은 단양. 자는 대유(大猷), 호는 취석실(醉石室). 아버지는 정서(鼎瑞)이다.
수원 출신으로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당시 만연해 있던 과거시험의 부정 등으로 인해 회시(會試)에서만 12번이나 낙방하고, 이후 과거와 관직에의 뜻을 버린 채 시골의 유생으로 빈한한 가운데 평생을 보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사회실정을 조사, 수집하는 한편 스스로 농업경영을 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조사자료, 옛 문헌과 당대 제가의 글들을 참고하여 국가 및 사회개혁의 방안을 강구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촌지식인이었다.
그의 개혁론은 1796년(정조 20)과 1804년(순조 4) 왕의 구언교(求言敎)에 응지상소(應旨上疏)의 형태로 올린 글들에 잘 나타나 있다.
1796년에 올린 〈수원유생우하영경륜 水原儒生禹夏永經綸〉과 뒤에 이를 보완하여 〈천일록 千一錄〉이라는 표제로 상정한 책자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전제·군제·국방·관제·농업기술 등에 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가 실려있는데, 특히 농업과 관련한 관행 조사와 농업기술, 농업정책 등에 관한 건의는 조선 후기 농학사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 특히 농업론의 기조는 부유한 지주층에게로 토지가 집적되고 농촌사회가 분해되는 18세기 말엽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농촌사회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고,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데 있었다.
특히 그는 근검역행(勤儉力行)하는 소농생산, 소농층의 집약적 농업생산으로의 유도, 소농층의 경제적 안정과 국부(國富)의 증진을 위한 정부 농업정책의 개선을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정부에서 양전(量田)과 조세(租稅)를 공평히 하여 소농경제를 안정시키고, 수차(水車)의 보급과 아울러 농서(農書)를 편찬하고 보급함으로써 농사를 지도하고, 권농기구(勸農機構)를 개선하여 게으르고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을 근면한 농민으로 교도하며, 나아가 강력한 사회정책으로서 모든 농민을 인(隣)·통(統)의 향촌조직에 묶어둠으로써 농업생산을 강화하는 등의 방안을 개진했다.
그리고 농지의 확보와 관련해서는 신전개발(新田開發)과 아울러 광작(廣作)하는 대농경영(大農經營)을 보다 집약적인 소농경영으로 전환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소농경제 안정책은 지주들의 토지집적을 기득권으로 인정하면서 봉건적지주제를 인정하는 한계를 지니는 토지개혁을 핵심적 관건으로 보았던 실학파의 농업론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업적 농업과 시장경제에 의한 정당한 이윤추구를 인정하고, 공명첩(空名帖)에 의한 부농의 신분상승을 긍정하기는 했지만, 농민의 상업 종사를 환영하지 않았고, 농업의 상업화가 농본억말(農本抑末)에 기초한 중세적 상업의 틀을 넘어서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농업론은 당시 농촌지식인들의 의식성장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지주층에 기반한 중세적 농학사상의 한계는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우하영(禹夏永)
그러나 당시 만연하였던 과거 부정이나 관직 구걸 운동을 마다하고 시골의 유생으로 평생을 보낸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촌지식인이었다.
그는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고 사회실정을 체험하는 한편, 옛 문헌과 당대 제가들의 논설을 널리 읽고 수집하여 국가·사회의 경영 및 개혁방안을 종합 저술하였는데 그것이 《천일록 千一錄》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전제(田制)·군제·국방·관제·농업기술문제 등에 관한 그의 독창적인 사상과 정책을 기술한 것이다. 1796년(정조 20) 조정의 구언교서(求言敎書)가 내리자 그는 이를 간추려 정리하여 책자로 만들어 바쳤고, 1804년(순조 4)의 구언 때 이를 다시 보완하여 《천일록》이라는 제명으로 조정에 상정하였으나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농민층의 분화에 의한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를 우려하였고, 상민들의 양반 멸시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의식에 실학적 근대성이 형성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전통적 양반사회의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하영의 천일록에 관하여 알아보자.
우하영은 조선 영.정조때의 유생으로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는 취석당(醉石堂)이다.
그의 본관은 단양이며 고려말의 애국 장군인 우인열(禹仁烈)을 시조로 하는 정평공파(靖平公派)의 23손인 우정서(禹鼎瑞)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3형제에게서 유일한 아들이었던 취석당은 큰아버지인 우정태(禹鼎台)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양자로 입양된 것은 아들이 귀한 집안이기도 하였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한 집안 사정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신분상으로는 충청도 단양의 우씨 가문에서 태어난 양반으로 어려서부터 유교교육을 받았다. 그가 지은 짧막한 자서에 의하면 우하영은 나이 7세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0세때 할아버지가 죽어 글을 배울수 없었고, 집에 큰 불이 나서 가세가 곤궁하였고, 그나마 있던 책도 전부 불에 타버려서 글 공부를 할 수 없었다. 불난 시기가 우하영의 집안으로서는 가세가 극도로 곤궁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때에 큰아버지댁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입양된 뒤에도 한동안 글공부를 하지 못한 우하영은 그의 나이 15세때부터 과거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6세때(1756)에 사마시 초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후에도 우하영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회시에서 모두 12번이나 떨어졌다.
한번도 관도에 나아가지 못하고 평생 시골 유생으로만 지낸 학자이었다.
하지만 우하영이 전국을 돌아다닌 것은 단순한 산수유람이 목적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의 산천.풍토.민요.속상을 알지 못한다면 우물 안에서 벽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그가 보고 들고 경험한 우리 나라의 풍토를 소상하게 기록하려한 노력때문이었다
출처 : 단양우씨, 단양 우씨, 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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