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 앉다
맹난자
무자년 제야(除夜), 침잠되는 마음을 붙들고 고요히 자리에 앉는다. 생의 궁극적인 물음이 저 우주의 끝에 닿는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가고 오는 것은 무엇이며, 보고 듣는 그것은 대체 또 무엇인가? 무엇이 보는가? 눈이 보는가, 눈 뒤의 안식(眼識)이 보는가. 안으로 참구해 들어간다.
손바닥을 힘껏 마주쳤다. 딱!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닐까? ‘눈과 그것을 보게 하는 능력, 존재자와 존재의 간격도 없이 딱! 이렇게 봅니다.’ 답을 써 본다.
욕망 덩어리, 에고인 내가 보는 것이다. 4차원의 어떤 신령한 능력이 3차원의 나를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3차원인 그대로의 선험(先驗)에 물들지 않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4차원은 좋고 3차원은 열등하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거기에 포함되어 별안간 딱해진다. 눈가가 젖어들며 몸 안에선 부스럼딱지[에고] 같은 것들이 떨어져 내린다. 손바닥을 마주치니 3차원과 4차원의 간격이 없다. 존재자와 존재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긴 존재자(인간)가 없다면 존재(성령)가 어디에 깃들 것인가? 조건이 맞아 ‘딱’하고 하나로 나오는 그것. 생명이 보는 것 아닐까?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잇고 있었다. 애써 찾아낸 답 ‘생명’은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작용하는 무엇에 붙여진 이름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머리로 찾은 답은 몸 안의 무명(無明)을 어쩌지 못한다. 온몸이 통째로 의단(疑團)과 한 덩어리가 되어 칠통 같은 무명 업식(業識)을 뚫어야만 생사(生死) 없는 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천지 허공이 갈라지는 경계를 몸으로 체득해야 비로소 안목(眼目)이 열리며 ‘붉은 화로에 떨어지는 일점설(一點雪)’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겉마음[의식]이 속마음의 부처[自性] 보는 일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나는 선지식의 이 같은 충고를 상기하면서 다시 화두를 든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일귀하처의’의 화두를 나는 좋아한다. 만공(滿空)선사도 이 화두로 깨쳤다.
어느 날 벽에 기대어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空)이 없어지고 눈앞에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마침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법계를 관할진대 모두가 마음의 지음이라)’를 외우던 중이었다. 그때 두우둥 둥 새벽 종소리가 울려 왔다. 한순간에 미망의 경계가 벗겨지고 어두웠던 눈앞이 환하게 열리더라고 했다.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을꼬?
만법(萬法)이 만 가지로 벌어짐은 온갖 존재의 차별을 뜻한다. ‘하나’로 돌아간 ‘귀일(歸一)’의 자리는 자취를 감춘 평등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차별과 평등의 문제가 대두된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서 차별적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사물의 실체 없는 공성(空性)을 안다면 일체의 차별이 근원적인 한 가지 이치로 회통된다는 뜻이리라.
요즈음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주목하게 된다. 생기를 잃고 점차 시들어 가는 감각, 눈의 초점이 뿌옇고 흐릿하다. 입안이 마르고 눈이 뻑뻑한 것은 몸 안에 물이 준 탓이다. 그것들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五蘊, 존재의 요소)의 변화이다. 시간이 점차 오온의 공성(空性)을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게 되고 마음에는 생주이멸(生․․․의 파고가 이어진다. 한 생각이 일어나서 머물다가, 다르게 변화해 가더니 그만 사라져 없어지고 마는 일념(一念)의 생멸(生滅),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 생멸을 거듭한다.
조건만 맞으면 연기상황으로 일어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돌아간다. 귀일(歸一)이다.
“생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며, 가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어느 노파가 세존께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생은 쫒아오는 것이 없고, 가서도 가는 곳이 없으며 늙음도 병사(病死)도 모두 쫒아오는 곳이 없고 가서 이르는 곳이 없느니라. 비유컨대 두 나무가 비벼서 불 을 내면 도리어 그 나무를 태우고 나무가 다 타면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생사의 문제를 촛불에다 비유했다. 촛불이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기(氣)는 우주 안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아, 사람도 죽으면 보이지 않는 우주 속에 그대로 있다. 죽어 흩어짐은 형체만 흩어질 뿐이요, 담일 청허한 기운의 뭉침은 끝까지 흩어지지 아니한다고.
그 사람은 죽음과 삶을 다만 기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흩어짐과 뭉침을 있게 하는가? 그것은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가 그러하다는[自然] 것이다. 자연이다. 모든 사물은 극(極)에 달하면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시작된 근원으로 마침을 돌이킴이니 시작과 끝을 알기에 생사(生死)의 문제 또한 알 수 있다고《주역》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원시반종(原始反終)이다. 하므로 돌아갈 자리가 바로 떠나온 그 자리인 것을.
어느 선사는 ‘전(前) 3․, 후(後) 3․’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의 그 자리를 짚었다.
서산(西山)대사의 임종게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80년 전에는 저게 나이더니 80년 후엔 내가 저인가’ 하고는 앉은 채로 열반에 드셨다. 만공스님도 앉은 채로 입적했다.
밤은 깊고 사위는 적막하다. 나는 지금 혼자 앉아 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일찍이 난[生] 적도 없고 죽지도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적멸상(寂滅相)인 때문이다. 이대로 앉아서 요달(了達)해 마쳤으면 좋으련만.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앞서 떠난 그리운 이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일귀하처(一歸何處)’하고 소리 내어 외쳐 본다. 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곳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창 밖에선 마침 눈발이 날린다. 제야를 장식하듯 눈꽃송이가 춤추며 허공을 선회한다. 찰나 찰나 거기에도 일념(一念)의 생멸(生滅)이 따라붙는다. 눈꽃처럼 망념(妄念)이 녹아내린다. 무엇인가가 내안에서도 뜨겁게 넘어간다. 초점이 흔들리는 저 눈밭 속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한 사내. 눈은 밤새도록 내려 무릎에서 그의 허리까지 차올랐다. 흰 눈밭을 붉은 피로 물들인 혜가(慧可)의 단심(丹心). 그의 사생결단은 감히 흉내조차 낼 수도 없거니와 나는 다만 이렇게 앉아 숨고르기를 할 뿐이다.
기축 년(2009년) 여명 앞에서 숨쉬는 당체(當体)를 돌아다본다.
숨쉬는 이 물건은 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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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난자; 이화여대 국문과, 동국대 불교철학과를 수료. 1980년 이래 주역명리에 관하여 공부.
2002년부터 5년 간 <에세이문학> 발행인, 한국스필문학진흥회장. 다수의 수필집, 저서 발
간. 2012년 <주역에게 길을 묻다>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