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 무엇을 지심至心이라 하는가? 지심의 표준은 무엇인가?
오도悟道 법사, 《천수천안관세음보살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절록
무엇을 지심이라 할까요? “나는 매우 지심으로 염불하고 있다. 매우 열심히 염불하고 있다.” 이러면 지심이라고 할 수 있나요? “내가 하루 십만 번 소리내어 염하면 지심으로 염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이것이 우리가 깊이 이해해야 할 부분입니다. 지심, 이 두 글자는 대승경전에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지장경》을 포함해서 매우 많은 대승경전에서 이 두 글자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지심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것의 표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전에 저도 이러한 경전을 계속 찾아보았습니다. 그 후 저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보았는데, 이 경전에서 지심을 가장 상세하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점찰선악업보경》에서 부처님이 지심을 해석하는 것을 인용하겠습니다.
《점찰경》은 부처님께서 지장보살에게 설법을 청한 경전입니다.
“이때 견정신堅淨信 보살마하살이 지장보살에게 여쭙길, ‘말씀하신 지심은 몇 가지 차별이 있습니까? 얼마나 지심이어야 좋은 서상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는 《점찰경》의 경문 한 단락입니다. 견정신보살은 우리를 대신하여 지장보살에게 청문합니다. “보살이시여, 지심에는 도대체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까? 무엇을 지심이라 합니까? 어느 정도의 지심이어야 좋은 상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저는 이 경문에서 바로 제가 찾던 답안을 보았습니다. 지장보살마하살께서 답하시길, “선남자여! 내가 말한 지심이란 간략히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 막 학습을 시작하는 구원지심求願至心이고, 둘째 의근을 거두어 전일하게 정진하여(專精) 용맹심을 성취하는 상응지심相應至心이니라. 이 둘째 지심을 얻은 자는 좋은 서상을 얻을 수 있느니라. 이 둘째 지심에는 다시 하중상 세 가지 차별이 있느니라.”
지장보살께서 견정신 보살에게 지심은 대략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초시학습初始學習 구원지심求願至心입니다. 초시학습은 곧 우리가 막 학습을 시작한다는 뜻이고, 구원은 매우 간절히 발원한다는 뜻입니다. 즉 매우 간절하게 발원하여 막 학습을 시작하는 구원지심입니다. 우리가 현재 경전의 말씀을 듣고 발원하여 매우 진지하게 불보살의 거룩한 명호를 염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의근을 거두어 순수하게 전념하여 용맹심을 성취하는 상응지심相應至心입니다.
이 둘째 지심에서 비로소 좋은 서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두 번째 지심에서 그것의 효과가 비로소 현전하게 됩니다. 첫째 지심에서는 여전히 감응이 없고, 두 번째 지심이면 감응이 있습니다.
둘째 지심에는 또한 세 가지 차별이 있는데, 하중상 세 가지 지심으로 나뉩니다.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일심一心이니, 이른바 망상을 매어 어지럽지 않고, 마음이 또렷하고 분명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첫째 지심은 일심이라 합니다. 《아미타경》에서는 일심불란이 보입니다. 무엇을 일심불란이라 할까요? 망상(想)을 매어 어지럽지 않게 하여 마음이 또렷하고 분명한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상은 곧 망상입니다. 망상이 섞여 들어오지 않도록 「나무아미타불」 한마디 부처님 명호로 이미 번뇌 망상을 조복시켜 마음을 머물게(伏住)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 곧 부처님 명호로 한마디 아미타불 혹은 관세음보살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생각도 없이 텅 비어 어지럽지 않는 경지가 곧 일심불란입니다. 이것이 첫째 일심입니다.
“둘째는 용맹심이니, 이른바 전일하게 구함에 게으르지 않고 신명을 돌보지 않는 것이니라.” 둘째 지심은 용맹심이라 합니다. 이 용맹심은 전일하게 구함에 게으르지 않고 신명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내걸고 염불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말 매우 용맹하여 며칠 몇 밤을 잠자지 않으며 염불하지만 경전에서 말하는 이런 효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매우 용맹한 사례를 많이 보지만, 마에 붙어 미쳐버리기도 하고 염불할수록 번뇌. 습기가 늘어가기도 합니다. 이는 바로 마음을 잘못 사용하여 마음 상태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관조觀照를 얻을 줄 몰라 잘못된 마음 상태가 출현합니다. 이것이 나타나지 않아도 당신은 옳다고 여기고 이런 상태가 발전하여 마지막에 이런 결과를 초래합니다.
「나무아미타불」 한마디 부처님 명호를 보리심과 상응하도록 염하면 반드시 경전에서 말한 효과에 도달할 것입니다. 번뇌심과 상응하여 끝까지 염하면 정말 관정대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비지옥에 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경전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리심을 발하여 일향으로 전념하라(發菩提心 一向專念)” 말씀하십니다. 번뇌심을 발하여 일향전념하면 당연히 염불하여 성불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 이는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건이 되는 경문은 반드시 또렷이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지심으로 용맹정진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반드시 생사를 끝마치는 이런 보리심과 상응하는 마음으로 염불하면 이런 효과에 도달할 것입니다.
셋째 “깊은 마음이니, 이른바 법과 상응하여 구경에 물러나지 않는 것이니라.” 셋째 지심은 최고인 깊은 마음입니다. 깊은 마음은 바로 법에 상응하여 구경에 물러나지 않습니다.
깊은 마음은 곧 상응입니다. 번뇌를 끊고 심지어 무명을 깨뜨리면 법과 상응합니다.
《관무량수경》에서는 보리심은 바로 지성심至誠心. 심심深心. 회향발원심이라고 말씀하샙니다. 깊은 마음은 곧 개오開悟하여 법과 상응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참회법을 수습함에 있어서 내지 하지심을 얻지 못한 자는 청정한 좋은 서상을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니라.” 하지심, 곧 일심으로 망상을 매어 어지럽지 않도록 하여 공부성편에 도달하지 않으면 좋은 서상에 이르지 못합니다.
우익대사께서 우리들에게 지심에 대해 역주하여 말씀하시길, “막 학습을 시작하는 구원지심으로는 산란한 망동을 여의지 못하고 장애의 종자를 조복하지 못하는 명자위 초심인 까닭에 청정한 윤상輪相을 획득할 수 없다.” 발원하여 학습을 시작하고 있는 이런 마음으로는 여전히 산란한 망동을 여의지 못합니다. 망념을 조복할 수 없고, 누를 수 없으며, 염불을 할지라도 여전히 망념을 멈출 수 없습니다. 명자名字는 천태종 육즉불(이즉불, 명자즉불, 관행즉불, 상사즉불, 분증즉불, 구경즉불)의 하나입니다. 초심은 막 시작한 것으로, 우리는 현재 막 학습을 시작하여 부처님 명호를 염하고 있어 여전히 번뇌를 조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공 노화상께서는 늘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번뇌를 여전히 조복할 수 없습니다.” 번뇌를 조복하지 못하여 우리는 왕생할 자신이 없으므로 임종시 운이 좋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임종시 운이 좋으면 선지식을 만나 조념을 받아서 왕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임종시 업장이 현전하면 왕생에 여전히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막 학습을 시작하는 구원지심으로는 좋은 서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중하지심中下至心이란 곧 의근을 거두어 전일하게 정진하여(攝意專精), 욕계에 마음이 미세하게 머물러, 혹 수희심을 내어 신해를 얻는 초수희품이거나 혹 명자후심인 까닭에 또한 청정한 윤상을 얻을 수 있어 은밀히 이익을 얻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지심은 하중상 세 가지가 있는데 하지심이 가장 낮은 것입니다. 가장 낮은 지심은 일심으로 망상을 매어 어지럽지 않게 하여 마음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머무는 것입니다.
한 가지 지심마다 그것의 공부 층차도 등차가 있어 이런 범주를 말합니다. 「섭의전정」에서 의意는 곧 의근입니다. 당신의 의근을 다잡아(收攝) 당신이 이 한마디 부처님 명호에 매우 순수하게 전념하고, 이 한마디 부처님 명호를 제기하면 모든 망념을 조복하여 머물 수 있고, 욕계에 미세하게 머물 수 있습니다. 욕계는 우리가 사는 욕계천입니다. 삼계안에서 욕계천은 제3층 천계 이상입니다. 욕계는 선정에 이르지 못하여 선정과 비슷한 공부가 있지만, 여전히 색계선정의 표준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초수희품初隨喜品은 천태종 《교관강종敎觀綱宗》에서 말하는 공부의 한 층차입니다.
명자초심은 명자즉불로 발원하여 막 학습을 시작한 구원지심을 말합니다.
명자초심은 막 시작한 단계이고, 명자후심은 그 후면의 공부에 깊이 들어간 단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부성편에 도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일심불란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그래서 청정한 윤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명익에서 명冥은 바로 감응이 여전히 매우 밝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은밀히 감응함을 말합니다.
“중지심이란 곧 용맹심을 성취함으로, 모름지기 관행 후심에서 대부분 겸해서 여러 나머지 좋은 서상을 얻는다.” 중지심은 바로 둘째 지심으로 용맹심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용맹정진을 성취하여야 비로소 관행 후심에 있습니다. 관행이 이루어지면 관행즉불觀行卽佛입니다. 앞면은 명자즉 후심으로 여기서 관행으로 들어갑니다. 관행위에서 공부가 이미 매우 깊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관조공부로 득력하고, 선정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분히 여러 나머지 좋은 서상을 얻습니다. 다분多分은 곧 비교적 많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이런 좋은 상을 얻고 서상을 보게 됩니다.
“상지심上至心이란 곧 상응지심相應至心으로, 모름지기 상사초심相似初心에서 감응하여 보살이 현신하여 설법할 수 있는 까닭에 구경불퇴위를 얻는다.” 상지심은 곧 상응지심입니다. 상응지심으로 비로소 상사초심 곧 상사즉불이 가장 처음으로 상응하는 마음이니, 최소한 번뇌를 끊어야 합니다. 번뇌를 끊음은 최소한 원교보살 초신위입니다.
소승초과인 사다함은 삼계의 88견혹을 끊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사초심으로 최소한 견혹의 번뇌를 끊어야 상사즉불에 들어가지만, 여전히 진정한 부처가 아니고 여전히 십법계 안에 있습니다. 최소한 상사초심이라야 감응을 얻어 보살이 현신하여 설법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지장보살과 감응할 수 있지만 다른 어떠한 제불보살을 염하여도 모두 마찬가지로 감응할 수 있어 제불보살께서 현신하여 당신에게 설법해 주십니다. 비유컨대 우리가 정토법문을 닦으면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여 모두에게 설법하여 주시고,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여 우리에게 설법해 주십니다. 그래서 불보살을 친견하여, 불보살님이 우리에게 설법하여 주시면 우리는 구경불퇴를 얻고, 불퇴전을 얻습니다. 현재 이번 생에 불퇴전을 얻는데, 이 상지심의 공부이면 최고입니다.
“그러면 감응의 명현冥顯은 또한 논하지 않지만, 반드시 셋째 지심이라야 불퇴를 증득한다. 앞 두 가지 지심으로 비록 좋은 서상을 획득할지라도 서둘러 선정과 지혜를 수행하여야 공관과 가관, 두 가지 관과 상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업을 없앨지라도 새로운 업이 다시 생겨나니, 또한 두렵다.” 우익대사께서는 주해에서 다시 우리에게 반드시 셋째 지심을 얻어야 불퇴전을 증득하고 앞 두 가지 지심은 좋은 서상을 얻을지라도 여전히 불퇴를 얻지 못하므로 반드시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점찰경》에서는 두 가지 관도觀道를 닦아 다시 이런 경계를 제승提升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통도通途수행의 법문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정토법문을 닦아 앞의 두 가지 지심이 있어 왕생을 자신할 수 있고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삼불퇴를 원만히 증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일심으로 망상을 매어 어리럽지 않게 할 수 있기만 하면 업을 진 채로 왕생하여 문제가 없습니다. 이는 최소한입니다. 이런 지심은 우리가 경전으로써 경전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즉 기타 경전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말씀하신 것으로써 이 단락, 이 두 글자를 비교적 상세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심에 대해 하나의 개념이 있어 두루뭉술한 생각에 이르지 않습니다.
최후까지 염불하여 경전에서 말씀하신 효과를 도달하지 못할 까 두려워하고, 또한 불보살이 영험이 없다고 의심하지만, 실제상으로는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