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경주까지 걸어오다........................강대춘
오랜 세월 산을 오르다가 또 백두대간을 혼자서 종주하다가 한 번씩 생각해 본 것이, 산줄기 능
선을 타고 걸어가면 길을 둘러가지 않고 무척이나 빨리 갈 수 있는데, 산 주위로 구불구불 돌아
나 있는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얼마나 멀리 둘러갈까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예전에 소설에서나
읽었던 축지법, 그것은 큰 산 주변의 둘레길을 따라 둘러 가지 않고 산줄기를 제대로 파악한 상
태에서 산줄기 능선에 올라 그 능선을 따라 목적지를 직선 코스로 달려갔던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문경새재 이남을 말하던 영남지방에서는, 아마도 영남지방의 그 ‘영(령)’이란 지금의 백
두대간을 말하지 싶은데, 과거시험 치르러 한양 천리 길을 걸어서 한 달을 걸어갔다느니 하는 말
들이 있어, 언젠가는 나도 그 길을 한번 걸어보는 것이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재미 또는
의미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뚜렷한 계획도 없이 2001년 여름에 서울에 올라
갈 일이 있어 그 참에 서울-경주를 한번 걸어서 내려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종주에 필요한
가벼운 준비를 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볼 일을 보고 하루를 보낸 뒤 그 다음날 새벽 일
찍이 서울 남대문에 서서 경주까지의 도보 종주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오는 일에 출발
점과 도착점이 의식되었는데 출발점은 예전의 의미대로 서울에 입성하는 대문인 남대문을 출발
점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그날 새벽에 남대문에 섰다.
종주는 여유 있게 진행되었다. 속도도 내지 않고 그냥 나그네처럼 구름에 달 가듯이 여유 있게
걸어가다가 어두워지면 주변의 숙박업소에 들어가 하루 밤을 묵고 다음날 다시 걷고, 배고프면
밥 사먹고 어두워지면 들어가서 자고.......이렇게 종주는 정처 없는 나그네 걸음으로 진행되었
다. 경주까지 오는데 11일이 걸렸지만 때마침 그 해 여름에는 엄청난 불볕 혹서기가 닥치고, 도
심지에서 무릎까지 차오르는 홍수 등의 난제를 만났는데, 그런 문제들만 아니었다면, 또 작심하
고 속보했더라면 아마 7, 8일이면 종주가 가능했을 것이다. 걸어가는 길이 명산 등반도 아닌데
목적지가 중요하지 무슨 코스가 필요하겠는가? 지도를 펴고 서울에서 경주까지 긴 자를 대어서
직선을 그은 뒤, 그 선에 가장 가까운 도로를 찾아 내려오는 최단거리 코스를 잡았는데 공교롭게
도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가또 기요마사가 한양으로 치고 올라왔던 길과 거의 같았다.
한 여름의 10여일은 변화무상한 날씨와 상황을 내게 경험시켜 주었다. 첫날부터 예기치 못한 일을 당했는데, 남대문을 떠난 지 1시간이 못 되어 갑작스러운 폭우로 서울역 지나 남영동 부근에
서 도심지인데도 물이 무릎까지 차올라서 서울 시내 거리에 아무도 없는 소위 ‘잃어버린 도시’의
상태가 되었다. 그 지경에 비 피할 데도 없어 그대로 걸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폭우는 이태원 근
방에 오면서 잦아들었다. 그러나 한강 물은 순식간에 불어나 나는 곧 폐쇄되는 잠수교를 건너기
위해 뛰어야만 했다. 이미 막힌 잠수교의 바리케이드를 몰래 넘어 들어가 잠수교를 빠르게 달려 건넜고, 건너고 난 뒤 바로 뒤를 돌아다보니 잠수교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경찰은 그 위험한 지경에 이리저리 상황을 처리한다고 사람 한사람이, 잠겨가는 잠수교 위를 뛰는 모습을 잘 보
지 못한 듯했다.
요새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예전에 '나그네'라면 어떤 사람을 의미했을까? 목적지 없는 방랑자였을까? 그저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먹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했던 것일까? 혼자서 걸어가면
서 늘 생각했던 것은 이런 나의 모습이 바로 ‘나그네’라는 신세일까 라는 것이었다. 종주 내내 내 몸은 도착할 목적지가 있지만 내 마음은 정처 없이 떠도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걷다가 시간 되면 먹고, 자고, 또 일어나서 걷고, 너무 더우면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고,.........그것은 하나의 자유였다. 일상에 쫓기어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런 시
간은 미칠 것 같이 좋은 자유였다. 이 종주는 별 생각 없이 시작했다고 했지만 어쩌면 나는 자유를 간절히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던 자유에 대한 갈망이 본능적으로 이런 행위를 시작하게끔 나를 내몰았는지도 모르겠다.
지도 상에서 서울-경주를 직선으로 그어 그 선에 가장 가까운 도로를 걸었는데 그 도로는 큰 도로, 작은 도로, 심지어는 임도 비슷한 길도 있었다. 실제로 도로를 걸어보니 우리가 평지라고 말하는 도로는 편평한 노면이 아니었다. 길가는 배수 관계로 바깥쪽으로 약간씩 기울어져 있었는데 걸어가면서 발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계속 걸어가니 연이어 발 측면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 수시로 주저앉아 이쑤시개로 물집을 따는 것을 반복했는데 할 짓이 아니었다. 첫 숙박지인 성남의 어느 모텔에서 온 발에 생긴 물집을 전부 따고 꼭꼭 눌러서 청테이프로 튼튼하게 붙여놓았다. 또 걷다 보면 팬티가 사타구니에 스쳐 찰과상이 생기기 시작하여 중간에 팬티를 벗어 버리기도 하고 낭심 밑에 찰과상이 생겨 연고를 구해 윤활제 역할을 하게 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종주 중 직장 문제로 중간에 경주로 와야 했기에 종주를 두 시기로 나누었다. 첫 시기에는 서울-문경(6일간)까지 하였고, 얼마 뒤에 문경-경주(5일간)까지 종주하여 서울-경주 종주를 마쳤다. 백두대간 문경새재는 서울-경주 간의 거리에 꼭 중간지점이 되었다. 이 종주는 살아가면서 어떤 의미 있는 것을 찾다보니 우연히 생각이 나서 급작스럽게 하게 된 것인데, 다리가 튼튼해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다르게 산행에 비해 고통스러웠던 경험들이 많아, 두고두고 생각이 날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산악 등반에서 벗어나 외도를 해 봤으나 역시 나는 등반이 제 격이지 이런 도보는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다. 다만 종주 뒤에 다소나마 자신이 대견하다는 스스로의 위안감, 그렇게 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성취감 같은 것들은 있었다. 서울-경주 종주는 옛날 선비들의 한양 과거시험 길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장기간의 걷기에서 얻는 성취감은 산악등반하고는 다소 다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고통이 정신적인 것 보다는 하체(근육통, 물집, 접촉성피부염 등)쪽에 집중되어서 내게는 그것이 많이 고통스러웠다. 예를 들자면 종주 뒤에 다리 근육 속의 근육이 미세하게 찢어져 염증이 생긴다는 근염이 생겨 한 달 가까이 정형외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런 종주는 우리와 같은 장년 세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젊은이들에게는 한번 시도해 보라고 권유해보고 싶다. 만약 하게 된다면 반드시 혼자서 해 보라고 강조하고 싶다. 혼자서 오랫동안 걸으면서 한번 많은 생각들을 해 보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미, 가치 등을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부터 넓은 국토의 여기저기를 지나오면서 자연 속에서의 내 존재의 의미, 더 나아가 넓은 공간 속에서의 나의 실존 문제까지........혹 이러한 행위들이 어떤 이기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 나름대로는 나의 피곤하고 고단한 삶의 행간에 기름을 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에서 시작하여, 자연과 나와의 관계, 더 넓게 보자면 이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철학적인 사유로 까지 생각의 세계를 넓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종주 10여일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러한 경험도 자신을 성숙시키는 데에 조그만 보탬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찌 사람이 살면서 이기적인 행위만 추구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문화적, 사회적 존재 더 나아가 실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 보려고 고민하는 것은 인간들이 오랫동안 행해 온 일들이 아니었던가? 나를 위시한 우리들은 늘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행위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이 바로 삶이지 싶다.
다음은 내가 걸어온 이정표이다.
제 1일 서울 남대문-잠수교-서초-송파-성남 모란
제 2일 성남 모란-광주-초월-곤지암
제 3일 곤지암-신둔-이천-영동고속도로-가남-이황
제 4일 이황-장호원-음성 감곡-충주 앙성-가금
충주 가금-충주 탄금대(반나절)
제 5일 충주 탄금대-세성-수안보-소조령
제 6일 소조령-문경새재-문경-불정
제 7일 불정-점촌-예천 풍양(반나절)
제 8일 예천 풍양-의성 다인-안계-비안-도리원
제 9일 도리원-일산-금성-군위 우보
제 10일 군위 우보-의흥-영천 신령-화산
화산-영천-고경(반나절)
제 11일 고경-경주 현곡-경주 황성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