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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23) :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 본 문 : 요한계시록 14장 1절 - 5절 (신약 412쪽)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사탄 마귀를 상징하는, 붉은 용의 공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으며,
그리고 13장에서는 그 붉은 용의 두 수하인 두 짐승의 공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12장과 13장은 좀 어둡고 음산하고 무섭게 묘사가 되었으나, 오늘 본문 14장에는 그와 정 반대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며 선포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이렇게 시작된 오늘 본문 말씀은, 두 짐승의 공격을 끝까지 잘 이겨낸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영광을,
누리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눈을 감고 묵상해 보면 너무 아름답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 서 계시고, 그 주변에 하나님의 자녀들로 상징되는 십사만 사천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앞장에서 전투로 인한 살벌하고 음산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계시록 12, 13장과 같은 처절한 싸움에 노출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4장을 통해서, 우리가 훗날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게 될 영적인 아름다운 삶을 생각하면 그로 인해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4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악한 두 짐승의 무서운 공격을 끝까지 이겨낸,
사람들의 행동에서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 앞부분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지라.”
이 말씀에서 나오는 여자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요한계시록 17장 1절, 5절입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아멘! - 이런 내용들을 볼 때 4절에 나오는 여자는 세상의 타락한,
모든 악한 마귀의 일들과 악한 사람들의 모습과 똑 같은, 바벨론을 상징하며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지라.” 하는 표현은 타락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세상과 짝하여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답게 사는 모습을 말합니다.
더 설명을 드린다면 로마서 12장 2절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는 말씀처럼, 예수님 잘 믿고,
오직 믿음으로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두 짐승과 끝까지 싸워 이겨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비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쫓아가지 않고 세상을 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우선으로 쫓아 살지 않고, 세상을 우선으로 쫓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윤리 도덕적으로는 세상보다도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하게 우리 윗대 어른들의 순수했던,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의 신앙생활이었던 모습에 비춰볼 때, 많이 세속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 피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내 옷에 담배 냄새가 배는 것처럼,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생각과 삶의 모습이 세상을 닮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양심이 변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아닙니다. 세상을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씻음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자라는 평가를 얻을 수 있도록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무서운 짐승! 마귀의 공격을 끝까지 이겨낸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아멘! - 이 말씀처럼 우리가 악한 짐승의 공격을 이거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부르심에 순종해서 온전히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맡기며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킴 워스(Kim Weeks)라는 한국인이면서,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살아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6.25 전쟁 때에 시력을 완전히 잃고, 고아원에서 있다가 미국 어느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다행이 좋은 양부모님을 만나, 명문대에 진학하여 성악을 전공하고, 유명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부흥집회에서 찬양과 간증 사역자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분의 간증입니다.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인 나를 인도할 때, 100미터 전방에 장애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 물이 있다고만 말했습니다. 그래서 한 걸음만 옮기면 됩니다.
그래서 나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 2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단지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만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여준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시고 계획한 그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의미 있는 간증입니까? 우리는 너무 먼 곳에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나를 인도하시고,
그러나 우리는 오늘 내가 내딛는 지금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만을 믿고 따라가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따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어느덧 영광스러운 자리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온전히 따를 때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수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따라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다가 “고난의 길! 고통의 길!” 을 걷게 되었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죽기까지 십자가 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비장하게 순교자가 되겠다고 각오하고 달려드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걸어갈 때, 놀라운 사역의 자리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두 짐승의 무서운 공격을 이겨낸 사람들은, 그 입에 거짓과 흠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이다.” 아멘!
요한계시록 12장, 13장에서 본 거짓으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악한 영과 거짓 선지자와 대조가 됩니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끌려가면 안 됩니다. 진리의 영이신 말씀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장로님이고, 우리 기독교의 정의를 부르짖는 손봉호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1+1=2 라는 과학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1+1=3 이라는 신비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손봉호 장로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신비한 복음이지만, 1+1=2 라는 과학만을 믿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우리가 전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1=3 이라는 신비의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1+1=3 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의 신비를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네가 말하니 1+1=3 이 진짜인가보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자리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설교자인 제가 강단에서 1+1=3 이라는 복음의 신비를 전하고 있는데도 “진짜구나” 하고 믿지를 않습니다.
목회자인 제가 많이 기도하고, 선포하고, 확신을 가지고 하는 1+1=3 이라는 사역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물론 첫째는 저의 책임입니다. 그만큼 제가 진짜를 진짜로 믿어지도록 신뢰를 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부터 아예 불신을 가지고 덤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믿을 수가 없어.
장로들을 믿을 수 없어. 당회를 믿을 수 없어.” - 그러면서 사실과 전혀 다른 말을 만들어 냅니다.
교회 안에서 1+1=3 이라는 복음의 신비를 믿는다는 사람들끼리의 불신은 정말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아예 마음 문을 닫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1+1=3 이라는 우리가 믿는 신비의 복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믿게 하는 신뢰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에 대한 통계 조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1위는 “진짜?” 라는 말이고, 2위는 “솔직히 말해.”
3위는 “인간적으로.” 4위는 ‘까놓고 말해서’ 였습니다. 대부분 신뢰가 없을 때 나오는 말들입니다.
그 바탕에는 신뢰가 없기에 “제발 나 좀 믿어. 이건 진짜야. 진짜란 말이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미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이런 말도 있잖아요. “이 기름은 100% 진짜 순 참기름”
참기름이면 그냥 참기름이지 “100%에, 진짜에, 순” 까지 붙여서 말해도 안 믿어주는 현실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정직하게 사는 것도 참 어렵습니다. 불신의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 안에서부터 우리 서로 믿어 줄 수 있는 사람, 믿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그래야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믿는 예수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믿어 줄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 곁에 섭시다. 옆에 분들과 나눕시다. “주님 곁에 섭시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악한 두 짐승의 공격을 끝까지 이긴 사람들은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고 따랐으며, 또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 가지 삶을 살 수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악한 두 짐승의 공격을 끝까지 이긴 사람들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곁에 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우리는 주님 곁에 서 있어야 합니다. 보통 성경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 그런데 1절 말씀에 보면, 지금 주님은 앉아 계시지 않고 서 계십니다.
그 이유가 계시록 12장 17절 때문입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지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서 서 있더라.”
사탄 마귀를 상징하는 용이 격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러 나서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사탄 마귀에게 맞서시고자, 보좌에 앉아 계시지 앉고 일어나 서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계시록 12장에 나오는 격분해서 서 있는 용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영안을 열어서, 우리를 잡으려고 격분해서 서 있는, 붉은 용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붉은 용만 보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보좌에서 서 계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늘 뭔가 두렵고, 불안하고, 근심 걱정하고, 불신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를 잡으려고 서 있는 붉은 용! - 사탄 마귀만 보고, 그들의 하수인 악한 사람들만 보아서 그렇습니다.
거기에 맞서기 위해 하늘 보좌에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영안이 열려 있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와 그의 젊은 사환 게하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를 잡으려고 도단 성을 에워싸자, 그 모습을 본 게하시가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렇게 안심시킨 다음, 하나님께서 젊은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보게 됩니다.
그가 눈을 열어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른 것을 보게 되자 안심합니다.
엘리사는 젊은 사환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젊은 사환은,
선지자 엘리사가 본 것을 보지 못했기에 죽을까봐 절망하면서 두려워했고, 불안에 떨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빗대어 말하면 엘리사의 사환은 용만 보았지만, 엘리사는 하늘의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두 가지 마음의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성도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 두렵고 불안할 때, 보좌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게 하소서.
다른 하나는 저와 여러분이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엘리사와 같은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불안하고, 놀랄 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가 말씀으로, 기도로, 찬송으로, 하늘문을 열어 보여 주어야죠.
그래서 하나님이 불 말과 불 병거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보여 주어 안심시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하늘 보좌에 서서 마귀와 싸워 이길 준비를 하고 계심을 보여 주며,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해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 고 안심시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모인 저와 여러분에게 그런 영적인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아멘!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부터 영안을 열어서 봅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둘째로, 이렇게 눈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새 노래로 노래합니다. 아멘입니까?
하는 보좌에서 서 계시는 주님과 함께 두 짐승의 공격을 이겨낸 사람들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오늘 본문 3절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아멘! 아멘!
새 노래는 아무나 부를 수 없습니다.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만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성도들만 부르는 노래가 새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새 노래가 있습니까? 아니면 “죽겠다. 끝났다.” 고 절망하십니까?
우리는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해야 합니다. 패배를 선포하고 절망을 노래하면 안 됩니다.
새 노래는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저절로 습득되고, 그래서 입만 열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새 노래는 예수 믿고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천국에 갈 확신이 있어야 부를 수 있습니다.
새 노래는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그리고 새 노래는 자꾸 불러야 합니다.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죽겠다고 절망의 소리를 토해내지 말고,
“됩니다. 잘 됩니다. 갈수록 더 잘 됩니다.” “살겠네. 그래도 살겠네. 아무리 힘들어도 살겠네.”
날 위해 하늘 보좌에 서 계시는 주님을, 눈을 열어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어리석고 미련한 종에게만 이 교회를 맡겨두지 마시고, 친히 갈 바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지금 저의 눈을 열어 마땅히 나아갈 길을 보여 주시옵소서. 지금 저와 우리교회가 살 길은 무엇입니까?”
그때마다 제게 주시는 응답이 있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라.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라.” 아멘!
그리고 저는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4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응답으로 주신 말씀을 확신하면서,
결단하고 결단했습니다. “아, 내가 복음에서 많이 멀어졌구나. 내가 십자가에서 많이 멀어졌구나.
주님! 내가 지금 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붙들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와 우리 성도님들과 우리교회를 이기게 하시려고 보좌에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하늘 보좌에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새 노래를 부르며,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주님의 치유와 회복! 놀라운 기적의 축복을 누리며 살겠습니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아멘 한 대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 기도는 저의 기도요. 지금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붉은 용! - 사탄마귀의 공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 보좌에 서서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노래를 부릅시다.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십자가로 돌아갑시다. 복음과 십자가의 능력으로 진정한 승리를 맛보시고,
세상에 감동을 주고, 신뢰를 주어, 주께로 돌아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