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한국, 2013.
[감기]에서는 비열한 전직 군인, [노리개]에서는 정의로운 기자, [반창꼬]에서는 희생정신의 소방관,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매형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우직한 처남, [퍼펙트 게임]에서는 묵묵히 공을 받는 포수.
이런 인물들로 영화 속에서 배우 마동석을 만났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이 보다는 훨씬 더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대충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모든 작품들 속의 인물을 열거하지는 못했다. 조연이다 보니 출연작이 많다. 그런데 어느 작품이든 존재감이 드러난다. 체구 만큼이나 묵직함을 자랑하는 조연배우 마동석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다.
냉혈한 살인자와 그의 아들을 그린 영화 [살인자]는 어쩐지 영화는 공공재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공공재 : 도로, 하천, 항만 등과 같이 일반 대중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건이나 시설.
2014년 초부터 [변호인]이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600만 관객을 넘어 애니메이션 사상 초유의 기록을 쓰고 있다고 한다. [수상한 그녀] 역시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니, 영화는 단순히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가 보다. 정말 공공재다.
문화를 접하는 대중들에게 미술전시회나 음악회는 너무 전문적이고, 뮤지컬은 다소 비싸고, 연극이나 콘서트에 연령대와 상관 없이 참가하려면 상당한 짬을 내야 한다.
그런데 영화는 일단 영화관이 가깝다. 가격이 저렴하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을 정도로 상영횟수가 잦다.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리고 각종 매스컴에서 아주(?) 친절하게 소개해준다.
역시 영화는 다른 문화 콘텐츠와는 다르게 대중친화적이다. 그래서 공공재가 맞다.
이런 공공재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면 좀 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다양성, 독창성, 예술성, 실험정신 뭐 이런 것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대중은 안전하게, 편리하게, 편안하고 즐겁게 이용할 수 있는가 고려해 주어야 한다.
거기다가 감동이나 추억, 교훈이나 지식적인 습득, 결심의 모티브 등을 제공한다면 금상첨화다.
줄거리 조차 요약하기 어려운 영화 [살인자]는 개인 정원에 모셔놓고 집주인 혼자 바라보려는 관상수다. 영화의 전반적인 느낌을 얘기하려 해도 막연하다.살인자가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권선징악? 그것도 중1 정도 밖에 안되는 핏덩이에게, 짧디 짧은 잭 나이프 한 방에 간다는? 그런 아들의 성장배경에는 살인자 아버지의 유전적 기질과 후천적인 성장 환경이 작용했다는? 어떻게 뽑아내야 할 지 난감하다.
사실 다른 이들의 영화평이 내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되지 못한다. 속된 말로 내 꼴리는 대로 보는 것이지, 어느 영화가 좋은 평을 얻었다고 해서 영화관으로 한 달음에 달려가지는 않는다(잘못된 표현이다. 바로 다운 받지는 않는다. ㅋㅋ.).
[변호인] 같은 영화는 너무나 보고 싶어서 바쁜 근무시간을 쪼개(?) 다녀오기도 했다.
비단 [살인자] 만은 아니다. 실망스런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
싸움은 주상욱(준석 역)이 훨씬 잘할 것 같은데, 주구장창 양동근(창식 역)에게 밟히는 영화 [응징자]도 그랬다. 20년 전 고교 시절에 준석은 빵셔틀이나 해야 했고, 창식에게 얻어터지기도 했다. 성장기에 큰 상처를 받았으니 가슴 속에 커다란 응어리가 자리 잡았을 법도 했다.
그런데 20년 후 문득 복수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복수하는데 그리 통쾌하지도 못한다?
창식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이고, 제법 머리도 좋은가 보다. 동급생 미옥을 성폭행 하고, 미옥이 자살하기도 하는데도 멀쩡히 졸업 잘 하고, 명문대도 진학하니 말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엄친아 스타일 탄생을 알린다.
왕따 준석은 어떤가?
성인이 되어서도 변변한 직장 하나 잡지 못하고, 대형 음식점에서 발레파킹 하는 준석의 처지가 과연 자라면서 겪은 환경에 기인하는가? 아니면 그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패배자적 기질에 있는가는 곱씹어 볼 일이다.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관객들의 숙제. 역시 ㅋㅋ.
임창정이 3류 양아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창수]는 또 어떤가?
남들 대신 징역이나 대신 살아주던 양아치 창수에게 찾아온 사랑. 하지만 그 여인은 조폭 두목의 내연녀였다네. 창수에게 찾아올 비극은 뻔하지 않은가? 여인의 죽음. 3류 양아치 창수는 그 애절한(?) 사랑의 복수를 위해 감히 조폭 두목에게 대든다. 돌아온 건 불구의 몸. 그런데도 또다시 복수를 감행한다. 어라, 양아치 수준은 아닌데.
결국 조폭 두목에게 죽음의 응징을 내리는 창수. 두목의 흡연 습관을 어찌 그리 잘 파악했을까? 그 정도의 계획과 실행력이었다면 그녀가 죽기 전에 이미 해피엔딩을 준비 할 수 있었을텐데.
아, 그렇지. 고난이 3류 양아치 창수를 키웠구나.
복수는 그런 것이다.
[올드 보이]에서 처럼 치밀하고, [아저씨]에서 처럼 잔인하고, [26년]에서 처럼 철저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공 임창정의 일인극 [창수] 역시 공공재의 의무를 망각했다.
영화는 공공재,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