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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양의 문이신 예수님
설교본문 : 요한복음 10:1~18, 31~42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15년 2월 15일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요한복음의 말씀 중에서 중요한 구절들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예수님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 태초부터 계셨던 분으로 그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신 것을 성자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셨으므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의 역할을 담당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아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새로운 약속의 말씀(복음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우리 육신이 양식을 먹어 그 생명을 이어가듯, 우리가 장차 영생을 누리게 될 영의 생명 또한 주께서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고 그 생명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우리의 영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여 영의 생명을 이어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태양빛을 받아 그 생명을 이어가듯 우리의 영 또한 주님의 빛을 받아 그 생명을 이어갑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이 곧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6)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9)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1~2)
오늘 본문 말씀은 위의 5번째와 6번째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양의 문과 선한 목자의 뜻이 무엇인지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1) 양의 문이신 예수님(7절)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양의 우리를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약 3미터의 돌로 만들어진 담이 있었고 그 위에는 가시덤불이나 지붕을 얹었습니다. 팔레스틴의 양의 우리의 특징은 반드시 그 출입문은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입문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우리는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목자가 그 출입문에서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나오면 그 양들을 데리고 가서 꼴을 먹인 다음에 저녁에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2)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매일 보는 이 양의 우리를 이용하여 오직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을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3장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에덴동산 동편에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영검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했습니다(창 3:24). 이것은 죄를 범한 사람은 결단코 낙원(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화영검으로 막혀 있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생겼습니다. 누구든 그 문으로 들어가면 낙원(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 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주께서 주시는 그의 이름을 가지고 그 문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3)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신 예수님
팔레스틴의 양의 우리의 담은 높이가 3미터나 됩니다. 그러므로 아주 힘 있는 자가 아니면 그 담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면 어린아이도 장애인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십니다. 벽이 아니라 문이므로 누구나 그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병든 자도, 죄를 지은 흉악한 자도, 누구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천국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갑니다.
4)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11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의 평강이 목적입니다. 양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양을 향한 주님의 생각은 단순히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양으로 생명을 얻고 건강하게 최고의 삶을 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①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② 우리에게 참 기쁨과 참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과 참 행복을 주십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이 세상 것보다 훨씬 맛좋은 포도주를 만드셔서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세상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즐거운 것임을 보이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주께서 주시는 행복이 세상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고 풍성한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은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③ 우리를 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늘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이미 주께서 여러 번 주께로 온 양들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돌보시는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④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멸망 받게 된 것이지만, 주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은 참 좋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4) 그의 양을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예수님(4절)
예수께서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십니다. 당시 목자들은 돌팔매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 돌팔매는 짐승을 쫓기 위해서 사용하지만 때로는 양들이 위험한 길로 가려 할 때 양의 앞에 돌팔매를 던져 양들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당신을 돌보십니다. 그러다 당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할 때 당신 앞에 고난이라는 돌팔매를 던져 위험한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하십니다.
2. 강도와 절도
1) 절도(1절)
절도로 번역된 ‘클레프레스’는 어떤 일을 몰래 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에게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들이 하는 일은 다른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물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백성들 앞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거룩한 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과 권세입니다. 이것을 남모르게 하고 있으니 그들은 유대인을 이끄는 목자가 아니라 ‘절도’라는 것입니다.
2) 강도(1절)
강도로 번역된 ‘레스테스’는 위의 절도의 행위를 폭력적으로 행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마당에 장사치들을 두어 그들에게서 아주 거액의 상납을 받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돈을 로마에 매수하여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을 바로잡으려 하고, 참된 말씀을 전파하시니 그들이 원하는 돈과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폭력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강도입니다.
3) 도적(10절)
도적은 위의 두 가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을 가리킵니다. 남모르게 하는 일, 거기에서 더 발전하여 그 일을 폭력적으로 하는 일의 결과 사람들의 것을 빼앗고 결국에는 그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들의 최종 목적입니다.
●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바르고 참된 영을 분별할 지혜를 주께 구하십시오.
① 혹시 나는 절도(竊盜)는 아닌지
겉으로는 교회 부흥을 외치지만 실상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 과정에서 내 잇속을 챙기려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겉으로는 거룩을 표방하지만 실제로 그의 마음에 숨겨놓은 다른 것이 있는 자들이 바로 절도(竊盜)입니다.
② 혹시 나는 강도가 아닙니까?
실제로 내 마음에 있는 나의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이나 강제력을 사용했다면 이것이 바로 강도입니다.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났는데 내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폭력이나 강제력을 사용했다면 이것이 바로 강도입니다. 이들 역시 말로는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검은 마음을 아십니다.
③ 이 모든 것이 다 멸망으로 향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거룩이고 그 마음에는 다른 것이 있는 자들은 결국 멸망을 당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을지라도 주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의 속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주께 드리기에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3. 당신은 예수님을 누구라 하는가
예수께서 ‘하나님과 자신은 하나’(30절)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명을 따라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보였는데 왜 자신을 돌로 치려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의 참람함(하나님을 모독한 일)을 인하여 돌로 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언제나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던 것과 같이 결심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적대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도 안티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이상한 일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들은 기독교 역사상 언제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마음 상해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의 봉사와 섬김의 삶을 통해 묵묵히 보이려 애를 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행하시는 일을 보고서라도 믿으라(37~38절)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말을 반박하십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편 82:6)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신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물며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기적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보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으로 고발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그들이 계속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교리상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다면, 적어도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들 중에 거짓이 있었는지, 그 행하시는 일들에 속임이 있었는지 그 기적이 권세를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 당신은 예수님을 누구라 합니까?
문제는 예수님을 향한 이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당신이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진 그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예수님을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이시라고 믿으신다면 당당하게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당당하게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은 주께서 그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2) 그러면 깨달아 알게 되리라(38절)
그들이 눈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30대의 젊은 청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자기도 하나님이라고 하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고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신 일을 제대로 보았다면 구약의 그 어떤 선지자도 하지 못한 일을 예수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일이라든지, 말씀으로 죽은 자까지 살리신 일은 그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혼란스러운 마음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없는데, 하는 일을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하니 이 어찌된 일인가 싶었을 것입니다.
그때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이 혼란에서 나를 도와주옵소서. 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보내신 사람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하고 바르게 판단할 지혜를 주시기를 구했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볼 수 있는 분별력을 주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주께 지혜를 구하지 않았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여 영원히 멸망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 깨달아 알게 되리라는 것은
그저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 깨달음의 과정 속에 있게 되리라는 것으로,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혼란에서 나를 도와달라고 주께 구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주님과 참된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 혼란 속에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주께 구하십시오.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니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혼란 속에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갈등과 혼란은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갈등과 혼란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과 혼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하는 일입니다. 주께 지혜를 구하여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4. 내가 온 것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가 죄를 범하여 벌어진 일이나 그 죄의 결과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친히 자신이 지시고, 그 대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단지 주께 요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없으나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나라의 영광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주께서 주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1) 나도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고(15절)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양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압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과 이런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이런 신비로운 연합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의 태아처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신비로운 연합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 ‘야다’에서 나온 말인데, 50년쯤 해로한 부부가 서로 아는 것과 같이 깊은 인간관계를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주님과 이렇게 서로 아는 관계를 이루어 주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받는 자들이 됩니다.
2) 영지주의가 ‘아는 것’과의 차이
초대교회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이단 중에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신령한 지식을 가지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그 신령한 지식을 아는 것에서 오는 것이니 이 지식을 아는 자들은 그 육체로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를 범하였더라도 그가 아는 지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에서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지식에 대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았으면 그것이 곧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관계를 말하는 요한복음 본문의 ‘안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임을 기억합시다.
● 혹시 영지주의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신앙이 혹시 영지주의와 같은 것인지 각자 자신을 살펴봅시다. 내가 성경을 몇 번 읽었으니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든지, 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이 곧 영지주의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예배하고 섬기는 자, 이런 자들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주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오니
나의 삶을 주관하여 주옵소서.
주님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 아직 고쳐야 것들을
선하고 아름답게 고쳐주옵소서.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지게 하셔서
주님의 음성과 악한 영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이 나를 알고 나도 주님을 아는
신비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나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