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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강연(1984)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pp. 7-55.(P. 524) .
- 박홍규(1919-1994), 1984년 6월 15일 강연,
* 철학은 시대의 삶에서 나온 일상어와 새로운 학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시대 그 인민들의 삶이 녹아 있다. 탈레스도 이오니아 지방의 삶의 양식이 바뀔 때 였고, 특히 소크라테스는 라케다이몬의 스파르타와 엘류시우스 평원의 아테네 사이의 긴 전쟁 중에서 인민의 삶에서 인민의 주체의식에서 출발하였으며, 플라톤이 기하학을 받아들인 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을 정립한 것도 시대 상황의 산물이었다.
플라톤에서는 그 시대의 자료가 책의 제목뿐만 아니라, 우주도 고유명사로 되어 있다. 그 자료가 변하지 않게 주어져있다는 가정이 들어있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한 반복에는 법칙이 있다. [여기서 고유명사란 하나라는 의미보다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대상이다. 모든 것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해야 모든 지식이 성립한다. 이데아로서 동일성이 유지되어야 인식이 성립한다.]
그리고 동일성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이 도형의 에이도스(eidos)이고, 이런 에이도스란 용어가 플라톤에서 쓰임의 용도를 분류해하여 정리해야 한다. 형상 또는 도형의 성립의 법칙에는 공간이라는 것이 있고, 공간 안에서는 운동이라는 질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운동이라는 성질은 물리적 세계의 것이고, 그 세계 속에서 성질들에는 제1성질과 제2성질이 있다. 형상 또는 도형(사각형)은 공간이 끝나는 곳에서 성립하며, 즉자적으로 존재한다. (53LKI)
** 외부의 이데아의 정지와 내부의 아페이론의 운동 사이에서 학문은 여러 정도 차에 따라 다양한 과학들이 있다. 상층이론은 천문학, 물리학이 심층이론으로 생물학, 의학 생리학, 심리학이 있고 이 둘의 종합으로(표면에서) 사회학(역사학, 정치경제학), 인류학(인종학, 문화론)이 등장할 것이며 정신분석학과 분열분석학도 나올 것이다. 일반적으로 형상이론의 몰락으로 개별과학이 성립한다고 한다.
상층의 정지와 심층의 운동 사이에 다양한 학문들과 달리 새로운 질료형이상학은 자기발생과 자기생성을 설명할 것이다. 이 자연(본성)의 자발성으로부터 철학이 직관이라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안으로부터” 사유를 강조할 것이다. 이 사유는 정지와 운동 사이의 표현들이 아니라, 운동 또는 흐름의 자기 변화, 변형, 창안을 제시할 것인데, 이를 위상학에 비추어서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마도 벩송일 것이고, 이를 이어받은 수학자는 르르화(Le Roy, 1870-1954)이다.
이 자연 또는 본성의 문제제기, 즉 ‘이뭣꼬’라고 물었던 이는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사물은 무엇인지를 다룰 수 있었는데, 영혼은 무엇이라고 하기에는, 물체의 이동과 변화에 대해서 설명과는 달리(차이) 그 자체의 본성을 유지(?)하면서도 변형성, 변화성, 과정성, 완전성,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지하게 문제거리였을 것이다. 이런 설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생명의 자발성과 능동성이 시간(흐름) 속에서도 설명되어야 한다. 이 힘을 벩송은 작동하는 권능(puissance d’agir)이라 하였다.
이 권능은 생명에게 내재하는 자발성이며 고유한 것이며, 운동하며 지속하는 무엇이다. 이로부터 철학하다는 것이 가능하다. 이 관점에서 철학사의 과거를 보면,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벩송이 이들과 사유를 공유하는 위상이 성립한다. (53LLB)
** 선생님은 철학사를 죽 개관하면서 철학의 주류는 데이터를 다루는 그리스, 로마, 프랑스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냐 공간이냐 둘 뿐이에요. 플라톤은 둘 다를 놓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이론(form theory)을 놓았고, 베르그송은 시간에서 정리했습니다. 그 이외는 없어요. (54)> 선생님이 교육에서 평생 플라톤과 베르그송을 다룬 이유이기도 하다. (53LLB)
# 고별강연(1984) 7-55쪽 **********
[*1. 데이터로서 문헌]
나는 지금까지 이런 강연을 한 적이 매우 드물어요. 강의 시간에는 주로 문헌(text)을 읽고 토론(discuss)하는 식으로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질서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적고 눌변입니다. 그 점이 우선 죄송하고, 또 원고를 써온 것도 아니고, ... (7, 시작문단)
[원문(text)에 관한 한] 칸트 정도면 아무 문제가 없은데, 플라톤의 경우는 문제가 굉장히 많아요. 왜냐하면 그는 2천 년 전 사람이거든요. .. 고대에는 파피루스에 중세에는 양피지에 손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 플라톤 문헌은 여기 저기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지금 있는 4, 5종의 인쇄본은 우리가 읽기 쉽게 인쇄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8)
... 플라톤은 제목만 보고는 무엇이 쓰여 있는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문장이 어디에서 끊어지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 말도 전문 용어(technical term)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장사꾼 얘기, 농사, 기하학, 해전(海戰), 시(詩) 등 안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 그러니까 거기에 씌어진 말들의 뜻이 무엇이냐를 알려면 우선 그 문헌에 나오는 말 하나하나의 의미를 할고, 또 도대체 이 말이 어디서 나온 말이냐를 여러 가지 다른 문헌과의 관계에서 조사를 해봐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때그때의 문맥(context)에 따라 의미를 정해야 합니다. (9) [벩송의 철학도 쓰여진 단어가 정해진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일상에서 쓰여진 말들이며, 그 말들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예로 내재 또는 내부라는 의미를 전치사 “그 안에서(dedans)”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물 안에서, 우주 안에서, 나 안에서 사회 안에서, 그렇다는 거지요. (53LKH)
가령 로스(David Ross 1877–1971)는 대표적인 고전 연구자인데, 로스의 연구라는 것이 무엇이냐? 번역도 없고, 앞에 서문(introduction)을 썼는데, ... 스테파누스((Henri Estienne, lat. Stephanus, 1528-1598)의 번호에 따라 ... 구분을 합니다. 그러고는 거기에 나오는 용어들에 대해서 어휘목록(glossary)을 답니다. (9)
... 가령 물리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 물리학이니 플라톤 물리학이니 다 알고 나서 주석을 달아야죠. 그러니까 그 주석과 요약(summary), 그리고 뒤에 말에 대한 목록(index)을 정리해서 붙이는 것, 그것이 연구입니다. 그것이 아주 전형적(typical)[유형적]인 연구죠. (10)
... 이러한 작업은 요컨대 데이터의 정리입니다. 학문적인[문헌학적인(philologisch)] 저 정리. (10)
그러면 전혀 확실한 것이 없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대화편을 통해서 내용상으로도 확실한 것이 있죠. 있긴 있지만 소수라는 말입니다. 어째든 플라톤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 개관적인 것을 찾는다면, 문헌학적(philological)인 문체, 문장 쓰는 방법, 말 쓰는 용법입니다. 우리가 가령 문장의 의미 내용은 주관적으로 해석을 달리할 수가 있지만, 말을 쓰는 용법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달리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 고전은 기본적으로 전부 문헌학에서 출발하죠. 그것을 안 거치면 안 됩니다. 로스(Ross, 1877–1971) 판, 버넷(Burnet 1863–1928) 판 등, 판이 있다는 것은 서양의 고전 학자들이 필사본을 문제 삼은 것이지, 인쇄본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1)
그런데 플라톤은 애매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대화편을 주석하는 데에 있어서, 학파마다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 신플라톤학파는 자기들 나름대로.. 신칸트학파는 자기 나름대로.. 헤겔은 헤겔대로 .. 후설의 현상학적 입장에서 플라톤은 보는 사람도 있고 ... 가형 논리실증주의적인 잘못하면 플라톤의 책을 논리학 서적이나, 언어분석 책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 그러나 이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이라 하면 문제가 생기죠. 플라톤이 전부 다 왜곡되어버리죠. .. 가령 오웬(Gwilym Ellis Lane Owen, 1922-1982)같은 사람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아까 말한 문체론적 용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데, 거기에 또 반론이 나옵니다. (12)
대화편에서 객관적인 것이 무엇이냐? .. 그러니까 플라톤의 원문이 100퍼센트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 것이지요. (12-13) , ..
* [* 2. 데이터의 특징: 고유명사, 재다(동일반복, 동일성).
지금까지 한 얘기는 요컨대 고전의 학문 정신은 데이터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 신화라는 것은 데이터가 없습니다. 데이터가 없는 얘기를 합니다. (13)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는 <이것은 무엇이냐(What is it)>라고 묻습니다. 그 <it>이 바로 데이터입니다. .. 그 데이터가 <무엇(What)이냐>를 묻는 것이지, 그 데이터에 대해서 내 의견이 이렇다, 저 사람 의견이 이렇다 하는 것은 그만두자는 얘기입니다. (13)
그 데이터가 만약 없다면, 그것은 공중에 뜬 어떤 주관적 견해나 사상이죠. 물론 그런 철학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인생관이나 또는 세계관이라고 말하죠. (14)
그러면 도대체 플라톤에서 데이터는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하고 비교해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사람이지, 늙은 사람, 누구누구의 아들, 어디서 온 사람 등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이에요. .. [그런 것은] 우연적 속성이기 때문에 학문에서는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데이터라는 것은 벌써 체계에 의해 추상화된 데이터입니다. .. 그러나 플라톤의 데이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늙었는데, 이름은 무엇이며, 누구누구의 아들이고, 어디서 왔고, 무엇하러 온 사람이라는 등등으로 자세히 나옵니다. .. 철학적인 데이터라는 것은 개별과학적인 데이터와는 달리 모든 데이터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14-15)
데이터의 총체에 접근할 때, 우선 직접적인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추상적 사고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상태에서부터 데이터를 이해합니다. .. 플라톤에서는 데이터가 항상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고유명사로 표기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는 어떤 사건으로서 있게 됩니다. .. 또 플라톤 자신은 대화록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그 이름만 파이돈편과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한 번씩 나올 뿐입니다. 대체로 남이 말하는 것을 자기는 옆에서 듣고, 기록하는 식으로 씌어져 있어요. (15) [고유명사의 의미가 이데아 학설로 나갈 것이다.]
플라톤의 우주론은 봉쇄적인 체계니까 우주도 하나의 고유명사입니다. 플라톤에게만 있으며, 고유명사로 지칭될 수 있고,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사물이죠. 그러니까 그런 고유명사의 극한에서 본다는 것이 플라톤의 데이터의 특색입니다. (16)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 즉 개별명사의 상위로서 류적 개념으로 일반명사이다.]
그 다음에 그 데이터를 정리하는데, 사실 대화록에 있는 것이 플라톤 사상인지 아닌지 자세히 모르니까 우선 플라톤 사상이라고 일단 가정하고 논의하지만, 그 내용이 대화록마다 다르지요. .. [플라톤에게는] 하나의 전형적(typical)인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잰다>[mesurer]는 점입니다. 그러면 왜 재느냐가 문제입니다. (16)
왜 재느냐? 요컨대 데이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연장성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것은 연장성 속에 들어 있는 질(quality)이죠. 그런데 우리가 촉각으로 이렇게 만져볼 때는 상관이 없지만, 시각으로 볼 때 – 특히 시각을 희랍 사람은 중요시 합니다 – 인식에는 어떤 가정이 들어갑니다. .. 그 주체자는 아무리 인식을 해도, 주체자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하나 들어갑니다. 또 대상도 우리가 어떠한 인식을 하든지 간에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들어갑니다. (16-17) [주체와 대상의 불변이라는 가정, 이 가정에서 이데아가 나올 것이다. 이데아의 기원은 원운동이 그려놓은 원이라는 점이다. 직선은? 그것은 측정에 따라 ‘잘려진’ 부분일 뿐이다. 잰다 다음에 자른다(분석)가 나올 것이다. 자르면 두 점의 관계가 있을 것이고, 점은 크기가 없어야 할 것이다. (53LKI)]
가령 멀리 떨어져 있는 저 집의 높이 얼마냐고 물으면, ... 10미터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 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라면 모든 것은 - 망막에 비찬 상은 - 2밀리미터밖에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저 집의[대상의] 입장에 서서, 저 집을 저 집에 있어서 인식하라는 얘기입니다. 집의[대상의] 자기 동일성(identity)이 주어져야 돼요. 자기 동일성이 주어지지 않으면 인식하나마나입니다. .. 결국 그리로[대상으로] 가서 재는 수밖에 없습니다. ... 실제 아무리 눈으로 봐도 내 눈에 비치는 것은 1밀리미터, 2밀리미터의 길이 밖에 안 되는데, 어째서 10미터라고 하느냐는 인식론적인 문제가 나옵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죠. 사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것을 풀려고 하지 않죠.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작용이나 기능만을 고찰할 뿐입니다. (17)
어쨌든 요점은, ... 잰다는 것은 또한 그것이 되풀이[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어진 것[한 번]과 재어진 것[두 번]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고 그것이 되풀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법칙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있었던 그러한 학문이 바로 기하학이죠. 기하학(la géométrie)[측지학(la géodésie)]은 땅을 잰다는 뜻입니다. 또 지금은 양을 가지고 얘기 했지만, 모든 질(quality)에 있어서도 다 마찬가지예요. 데이터가 연장성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다 같고, 다만 질을 잴 때에도 정도 차(degree)가 문제된다는 것만 다릅니다. (18)
기하학을 가지고 얘기를 해 봅시다. ... 4평방자[2x2, 직각(정) 사각형] .. 사다리꼴의 경우 ... 6평방자(2x3)[장방형 사각형] .. (18-19)[세 도형이 면적이 각각 다 다른 경우를 예시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것이 직각 사각형이라는 데 있습니다. ... 수직하는[만나는] 두 직선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 (플라톤이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지금 그렇게 해석한 것이지.) 요컨대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변을 곱하면 면적이 나올 수 있다는 법칙은 수직이라는 그 도형의 형태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도형의 형태를 우리가 형상(eidos)이라 합니다. .. 그래서 플라톤에서 형상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면, 대화편에서 형상이라는 말을 전부다 찾아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전부 분류해서(classify) 이 대목은 이 말이고 이[다른] 대목은 이[다른] 말이고‥… 등등으로 밝혀야 됩니다. (19-20)
기하학적 차원에서 법칙적으로 잰 사각형, 그리고 형상으로서 사각형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죠. 사각형이 어디서 성립하냐는 것입니다. 변에다 변을 곱하면 면적이 나온다는 법칙으로서 원인과 그것을 설명해주는 원인이 다릅니다. (20) [재는 사각형은 땅이든 종이든 현실적으로 길이를 재는 평면인데 비해, 사각형의 형상 또는 이데아는 요즘 표현으로 절대공간 또는 유클리드 공간에서 성립한다. 재는 법칙과 절대공간에서 성립하는 설명은 다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부터 이해를 해야 돼요. .. 그런데 공간이라는 것은 항상 정지해 있는 것, 구별되는 것, 이것은 여기에 있고 저것은 저기에 있다고 구별될 수 있는 것들에만 씁니다. .. 그런데 질이 각각 자기 동일성(identity)을 가지고 있으면 운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운동이라는 것은 따라서 질이 연결되어야만, 묶여져야만 성립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간, 운동이라는 것은 질의 연속과정 연결된 과정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20-21)
플라톤에 있어서 데이터는 시ㆍ공간 속에 들어 있는데, 만약에 운동이 빠진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질들은 모조리 연결에서 떠나서 전부 흩어집니다. 흩어져서 그 자체 전부 유(有)로 됩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보통 분석이라고 하죠. 희랍어 <analysis(분석)>란 <ana->. 즉 위로, 되돌려서(zurück), <-lyô>, 즉 풀어놓는다는 뜻입니다. 그 분석이라는 말은 플라톤에서는 안 나오고 - <-lyô>라는 말은 나오지만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오는 말이에요. ... <풀어서 돌려준다> 또는 <자기 본성대로 놓는다>는 뜻입니다. .. 어쨌든 물리적 세계는 질로 꽉[가득]차 있는데, 그것들을 묶어주는 것이 바로 운동이라는 그 요소입니다. (21) [운동이 빠지면 흩어지는 것, 흐르는 것, 운동하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데, 선생님은, 제논처럼 무한히 분할된 부분들이 흩어져 있으면 운동의 부정이 될 것이라 이것을 연결해 주는 것을 운동이라 보았다. - 운동이 기능으로서 흩어진 요소들 또는 가루들 사이에 개입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 벩송은 운동이 원래 또는 시초에 또는 원인으로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로서 플라톤주의자들과 달리, 운동이 실재성이고 정지(형상)이 상징성(정지, 형식)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면 공간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운동과 갈라지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제 있는 사물은 운동과 결합되어 있지 않느냐? 물론 그렇죠. 실제 있는 사물은 운동과 결합되어 있고, 그것[사물]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나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부터 공간이 시작합니다. 그것을 유동(flux)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동[흐름]에서는 운동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지만, 또한 동시에 공간도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 [흐름(유동)에서] 운동과 시간이 점점 분리되어 나갑니다. 그래 가지고 형상(eidos) 자체에 이르면 운동은 완전히 빠집니다. 즉 운동이 공간 바깥으로 나가버립니다. 완전히 나갑니다. 완전히 나가서 운동은 운동이요 공간은 공간이다, 그렇게 구별되어 나옵니다. 그 때 형상이 나옵니다. 형상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22) [형상은 운동과 공간 사이에서 나오는지? 또는 운동없는 공간에서 나오는지, 나로서는 이둘 사이에 나온다. 윤구병이 이 둘 사이를 아페이론의 영역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 영역은 심층과 상층 사이의 표면과 같다. 형상은 시뮬라크르가 될 것이다. 상층을 모방한 시뮬라크르와 심층의 생성의 시뮬라크르. (52WLI)]
그 사이에는[공간과 시간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공간이 있습니다. 가령 기하학을 봐도, 유클리드 기하학도 있고, 데카르트적인 해석[분석] 기하학도 있고, 리만 기하학과 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도 있고, 얼마든지 많습니다. (22) - [유클리드 기하학은 분석적이고 운동을 나중에 개입시켜서 자르고 재는 설명을 한다. 그런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재는 방식은 인정하되 자르는 방법이 무수히 많다는 점을 제안한다. 그러나 위상학은 자르는 것이 없고 경계를 갖는 방식만을 제시하기에 재는 방식을 제시할 수 없다. 즉 단위 안에는 경계든 분석이든 잰다는 것은 없으며, 단위 밖은 이미 차원이 다른 수많은 공간들의 방식을 사유할 수 있다. 그 무수한 공간들의 방식은 각각의 재는 법이 있을 것이다. - 위상적 공간의 데이터는 (단위의)경계가 무너질 때, 자료로서 의미를 상실한다. 생명체의 경우는 죽음이다. 영혼의 경우에 정체성을 상실하고 온자연으로 흩어진다고 하기보다, 온자연의 흐름 안에 있다. 형상이 없기에 없다고 하듯이 온자연 안에 영혼이 없다. 없는 것은 없다. 그러면 새로운 생성은 달리 단위를 형성하는 방식(경향)에 의해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있는 것은 있고, 있는 것은 운동하고 변하고 지속한다, 이 경향으로서 영혼이 지속한다. 이제 온자연이 있고, 그 속에 단위로서 신체도 있고 또한 영혼도 있고, 벩송 표현으로 상상하고 사유하며, 공감하고 공명하고 지낸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인류의 고등지식이고, 이 과정을 걷는 것이 예상참여이며 다음 측정이다. 언제난 다음측정의 욕망이 있다. 니체가 다음인간이라 부른 것과 같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다음인간을 스스로 만들어보자, 어렵고 드물지만 해보자는 것이다. (53LKJ)]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데이터를 취급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모든 데이터가 들어가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 가령 운동이나 시간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인식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사물을 정의(定義)한다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입니다. 정의란 형상(eidos)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23) [플라톤의 길일 수 있다. 사물이 아니라 아페이론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아페이론 정의되지 않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 없는 것은 없다고 가는 경향(방향)은 철학을 상층으로 올리는 길이다. - 벩송이 안으로부터(dedans)으로 시작하자고 한다.]
정의는 그 형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전부 기술해야 할 텐데, 과연 그 기능 전부 기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가정(hypothesis)이라고 하죠. 그런데 철학이 모든 데이터를 취급하려면 모든 데이터가 들어가는 공간이 있어야함 하는데, 모든 것을 정의해 버리면 모든 것은 공간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3) [모든 것을 포함하는 공간은, 플라톤에게서는, 원주(圓周)의 나열들이고 이것들을 전부로 연결하는 것은 원일 수밖에 없다. 다자의 공존은 원주의 점들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보기에 가정상 원주의 점들은 천체의 원운동에서 온 것으로 원래 운주란 운동의 궤적일 뿐이고, 천체의 원이란 원래 운동이지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 플라톤주의의 오류는 원주의 운동을 정지로 고정시키고 완정성을 부여하고, 그 각점들이 원의 완전성을 모방한 완전성으로 착각한 것이다. 추론상으로도 오류인데, 운동을 정지로 가정한 것이 제논의 운동의 부정과 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52LKJ)]
그러면 이제 모든 데이터가 동일한 공간 속에 들어갈 때에 그 일반적인 성격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이냐는 문제가 나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전부 나의 플라톤 해석입니다. .. 플라톤이 말한 대로 무(無)는 없다. 그러니까 데이터는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준재(ousia)라고 합니다. (23) [정지를 우선으로, 운동 대신에 공간이라는 토대위에 일반적으로 학문들을 세운 것은 플라톤주의의 성과일 것이다.]
그러니까 학문이라는 것은 데이터를 취급할 때 언제든지 모순을 회피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은 데이터 속에 모순이 들어있다, 그러나 모순을 회피하라, 그것이 첫째 조건이라 하는 말입니다. .. 모조리 여기서 출발해요. (24) [여기서 데이터는 이미 잘려진 여러 형상들이고, 이 형상들의 고정, 고착, 불변, 영원으로 대상화 될 때 학문이 성립하는 것이다. (52WLI)] .
존재와 무 사이에는 단절이 있고, 양자택일이죠. 공존할 수 없습니다. .. 삼각형들(직각 삼각형, 예각 삼각형)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 삼각형은 저 삼각형과 각이 다르냐는 것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항상 존재론(ontology)은 원인론(aitiology)입니다. 이유를 물어야 돼요. .. 왜 이렇게 여러 가지로 갈라지느냐? 그 갈라지는 차이(difference)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 원인 무엇이냐? (24) [여기서 갈라지는 것은 분할(division)의 차이와 정도의 차이인데, 윤구병은 ‘0와1’의 차이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벩송과 들뢰즈가 말하는 차히는 세분화의 차이이다.]
[*2.1 차이들에 의한 개별학문들의 성립]
우리 데이터라는 것은 항상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이거든요. 이 차이의 원인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모순이 아닌 것, 즉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입니다. 모순율에서 출발하니까, 우리는 헤겔처럼 존재와 무가 합쳐진 것이라는 따위의 얘기는 안 합니다.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 요컨대 그것만 가지고 출발합니다. / 그러니까 다름[차이]의 원인은 존재도 무도 아닌 것인데, 희랍어에서는 <apeiron(무한정자)>라고 합니다. 무한정자는 모순율에서처럼 단절이 없으니까 연속이 있고, 또 무규정적(indefinite, [무정의])입니다. (24-25) [윤구병이 “0와 1사이”에 아페이론을 설정하려는 의도도 이와 같다. 그러나 0은 들뢰즈 표현으로 (비)-존재((non)-être)로서 다른 차원, 즉 위상적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있기는 한데 어떤 규정에도 정의 내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도 아니며, 심리적으로 ‘없는 것’으로 배제할 수도 없다. (비)-존재로부터 모든 생명종의 분화가 일어났다고 설명하면 플라톤의 그럴듯한 이야기보다 훨씬더 타당한 이야기(우주발생론)일 것이다.]
그런데 모순율에 있어서의 존재라는 것은 언제든지 배타적이니까 하나입니다. .. A라는 것이 .. 반복한다. 되풀이 된다. 그러나 다름(difference)이라는 것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점점 다름의 정도(degree)를 극대화시키면 반대적(opposite)인 것이 되고, 반대인 것은 모순으로 갑니다. 그러나 다름은 반대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름의 성격 자체가 공존과 비공존의 양면을 지니고 있죠. 그래서 비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시간이라 하고, 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컨대 어떤 것이 무한정자(apeiron)에서 나타나는 것은 항상 시간과 공간과 함께 나온다. 다름(difference, 차이)을 통해 나올 때에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다 나온다고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25-26)
그 다음에 플라톤은 이러한 형식적 존재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다른(differnt) 사물들의 질서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질서라는 것은 어떤 것 하나만 똑 떨어져 있으면 성립하지 않고 연속적인 사물에서만 있습니다. (26)
플라톤은 그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이 우주의 질서를 전부 한번 정리해보자는 것입니다. .. 그 우주론이 아테네 역사, 그 발전사로 연결이 됩니다. 티마이오스편이라는 우주론은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뒤 근세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기본적인 책입니다. (26)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반대되는(opposite) 것이어서 동시에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그 두 개의 동일성이 반대되기 때문에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점점 경험적인 세계로 내려가서 관계를 맺으면 어느 정도는 압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 우주를 논할 적에 자기가 하는 것은 하나의 우화(fable), 이야기(mythos)라고 합니다. (26) [이 ‘모른다’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당장 10대(카르네아데스(Carnéade Καρνεὰδης, Karneadēs, 219-128)에 이르면 회의주의 문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존재론(ontologie)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그 말은 플라톤에는 없습니다. 존재론이라는 것은 추상적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각 사물의 기본적인 자리 매김(classification)이 거기서 가능하고, 우주 내부에 있어서의 각 사물의 위치를 정의(definition)의 차원에서 정하려는 것이에요. (27)
그러니까 정의의 차원에서 각각의 개별과학이 완성될 때에 비로소 존재론이 완성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철학은 백과사전(l’encyclopédie)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고 플라톤이고 철학은 <all-wissen>,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습니다[소크라테스]. 물론 그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지 실지로는 불가능합니다. .. 그러나 좌우간 희랍에 있어서 개별과학의 성립이라는 것은 일반론인 존재론이 선행했다는 것을 우리가 꼭 알아둬야 합니다. (27) [개별과학의 선행(先行)이란, 원리 또는 정의가 개별자들의 정리(분류) 다음에 오는 것이지만, 사유에서는 그것을 앞에다 놓아야 한다(가정, 선전제)는 점이다.]
* [§3. 학문들의 계승, 발전과 분화]
그 다음에 그러한 종합적인 철학을 누가 계승했느냐 하면, 예전에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4-270) 학파도 있긴 하지만 대표적인 것은 스콜라철학입니다. 예컨대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받아들인 종합적인 철학입니다. (27)
학원을 지배하는 어떤 사회적인 최고의 기능에 의해서 지배를 받습니다. 중세기에는 그것이 로마 법왕[교황]이죠. .. 학원 철학은 요컨대 주입식이며,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세뇌작용이죠. 그러니까 폐쇄적이죠. 요컨대 데이터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28) [요즘 검찰이든 법원이든 법에 대한 관점은 실정법(實定法)이란 이름으로 조문(條文)에 한정되어 폐쇄적일 수 밖에 없다.]
데이터를 취급하지 않으니까 ... 거기서 논리학이 발달합니다. 본래 논리학은 말로 증명할 때, 즉 논증(argument)할 때 생긴 겁니다. 희랍 사람들은 자꾸 논쟁하거든요. 플라톤 대화편이 전부 토론 아닙니까.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증 과학자라, 말로 해봤댔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데이터가 증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9) [선생님의 기존 설명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이 실증에 대해 고민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화에서 출발하는 논리를 강조했다고 하셨는데...]
* [§3-1. 천문학에서 물리학으로]
그런데 점점 중세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데이터를 취급하는 능력이 발달하고 여러 가지 기구도 발달하면, 스콜라철학의 결론이 의문시되죠. 맨 먼저 천체에 관한 운동이죠. (29)
요컨대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선생은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기원전 287-212), 유클리드 기하학하고, 플라톤, 이 셋이라고 하죠. (29) [갈릴레이가 말년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깊이 탐독했다는 것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갈릴레이가 과연 그런지 망원경으로 보니까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는데, 그것은 요컨대 학문을 학원에다가 정착시킬 것이냐, 데이터에다가 정착시킬 것이냐는 문젭니다. .. 어째든 방해물이 없으면 가속도로 떨어진다는 정량적인 법칙을 이 사람이 발견했죠. (30) [벩송은 하늘의 원리(실재성)가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는 상대성의 인정, 관성의 법칙의 발견에 강조점을 둔다.]
이 지상에 있는 운동가지고 천체 운동까지 전부 다 한번 설명해보자는 것입니다. .. 단 플라톤은 우주론을 쓸 때에 수학이나 기하학을 사용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적인 우주론을 내세웠는데, 근세 철학은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플라톤으로 넘어간 셈입니다. (31)
* [§3-2. 근세 물리학]
근세 철학은 이제 갈릴레오, 뉴턴(Isaac Newton, 1643-1727) 물리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그 중요한 진로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를 봅시다. 데카르트는 뭐든지 의심스럽다는 것이죠. 그것은 요컨대 유동이론(flux theory)[아페이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1) [일반적으로 데카르트의 역학을 정역학(靜力學)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우주의 운동량 총체는 일정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써 그는 원운동이 직선운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정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유동이론에서 출발합니다. 또 플라톤의 인식론도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 <science(학문)>란 말은 라틴어 <scire(알다)>, <scientia(앎)>에서 나온 말인데, 그 말은 우리의 주관적인 어떤 견해나 생각, 자의적(arbitrary)인 사고는 다 빼버리라는 뜻입니다. .. 그런데 데카르트는 데이터에서 도피합니다. 믿음(belief)을 갖든 또흔 <ego cogito(생각하는 자아)>를 갖든, 그런 것들은 데이터를 데이터 그 자체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증과학자는 우선 데이터를 잽니다. 잰다는 것은 데이터를 데이터로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데이터를 회피합니다. (32)
* [§3-3. 실증철학]
그런데 그와 반대되는[데이터를 회피하는 데카르트와는] 사상이 나옵니다. 바로 프랑스의 오귀스트 꽁트(Auguste Comte, 1798-1857)입니다. 꽁뜨는 갈릴레이처럼 중세기의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다 잘못이라고 합니다. .. 갈릴레이처럼 형이상학과 신학 다 그만두자, 요컨대 우리에게 데이터로서 주어진 것에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상(phénomène)이니 사실(fait)이니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 그런데 이 사람(꽁트)은 갈릴레이 물리학과 같은, 그러한 엄격한 학을 물리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에 적용시키자는 겁니다. 생물학 등의 모든 학문에 적용하여 그것을 모조리 부류(classfy)으로써 그 전체를 종합하자, 그 종합이 철학자의 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흄(David Hume)이나 칸트와 데카르트하고는 정반대로 갑니다. (33) [흄은 경험의 축적과 종합을 중요시한 점으로 보아 꽁트와 유사한 길을 간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수학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일반적인 것에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 가는데, [꽁트에서는] 수학을 맨 먼저 놓고, 그 다음에 무기물을 놓고, 그 다음에 유기물을 놓습니다. .. 그리고 그 다음에 사회학을 놓았어요. 그래서 그것을 종합(synthèse)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33-34)
이제 그 실증적인 학문이 물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에서 여러 방면으로 퍼져나갑니다. 화학이라든지, 레비브륄(Lévy-Bruhl, 1857-1939)이나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같은 사회학, 또 특히 주목해야 할 병리학 등이 발달합니다. (34) [라브와지에의 화학, 다음으로 베르나르의 의학, 그리고 심리학의 태동과 발달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병리학이 발달하고, 최면술 같은 것이 발달합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프로이트(Freud, 1856-1939)도 샤르꼬(Charcot 1825-1893) 밑에 가서 히스테리를 2년[1년]동안 연구했죠. 그런 것들이 모두 프랑스에서 발달합니다. 전부 오귀스트 꽁트의 영향입니다. <cogito> 가지고는 소용없다. 실증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실어증의 연구도 발달합니다. 또 레비-브륄처럼 전 논리(pré-logique), 소위 논리 이전의 사고가 무엇이냐를 찾기 위해 미개인[토착민, 원주민]의 사고의 특징을 여러 데이터를 통해서 밝혀냅니다. (34)
많은 그런 학문이 독일하고는 정반대로 나갑니다. 생리학도 발달하고, ... 도대체 과학이란 것은 무엇이냐 하는 반성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오귀스트 꽁트처럼 나가면, 결정론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꽁트는 사회학을 사회적 물리학[자연학](la physique sociale)이라 불렀습니다. (34-35)
철학은 모든 데이터를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다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입장이 나옵니다. 수학에 기반을 두고 그 위에 물질을 놓았는데 그렇게 양자를 구별한다는 것은 분명히 물질 속에 수학으로 흡수될 없는 것이 있으니까 물질을 놓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꽁트는 그렇게는 하지 않거든요. 분명히 수학은 수학이고, 물리학은 물리학이고, 생물학은 생물학이라고 했거든요. (35) [수학의 방법으로 모든 과학을 체계화할 수 있다는 방식은 논리실증주의가 대표적이고 통일과학 이론으로 간다. 이에 비해 각 학문의 고유성이 있다면서, 학문의 위상을 달리한다고 하는 쪽이 프랑스이다. 1800년 초반에 생명변형설 논쟁에서부터, 수학적 차이(différentiation)[미분화]와 생명의 차히(différenciation)[세분화]를 구별하였고, 들뢰즈가 동일반복과 이질반복의 설명으로 이 두 차이/히를 다시 다루었다.]
도대체 꽁트처럼 나가면 결정론이 될 텐데 과연 결정론이 옳으냐, 비결정론적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여러 차원에서 제기됩니다. 모든 것이 물질과학으로 환원된다면, 결정론적이며 유물론적인 형이상학[질료형이상학]까지 갈 것입니다. (35)
[비결정론에 관하여] 그리고 또 그 반대로 물리학적인 세계, 아니 수학적인 세계에까지 결정론이 아니라 우연이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나옵니다. 뒤엠(Duhem, 1861-1916) 같은 사람, .. 뿌앙까레(Henri Poincaré, 1854-1912), 보렐(Émile Borel, 1871-1956) 같은 사람이 있지요. .. 또 에밀 부트루(Émile Boutroux, 1845-1921)는 아무리 이론을 논의해도 이론과 사실(fait)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36) [수학에서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와 달리, 직관이론 쪽은 르르화(Édouard Le Roy, 1870-1954)이며 그는 새로운 철학: 앙리 벩송(Une philosophie nouvelle: Henri Bergson, 1912)을 썼다. 또한 벩송은 실재성에 관한 한 부트루 쪽이 아니라, 라슐리에(Jules Lachelier 1832-1918)쪽이며 라베송(Félix Ravaisson, 1813–1900)에 가깝다.]
이러한 논의들[결정론과 비결정론]은 결론이 안 납니다. 많은 메타-과학(meta-science)이 나옵니다. .. 그 사람들은 전부 꽁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 그 사람들의 입장는 수학에 대한 메타-과학을 하려면 수학을 먼저 다하라, 그러고 나서 그 전체를 다시 한 번 반성하라는 것입니다. 또 물리학에 대해서 메타-과학을 하려면 물리학을 일단 다 알아라... (36)
그렇지만 불란서의 철학자는 거의 대부분이 수학자입니다. 데카르트도,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도,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도, 오귀스트 꽁트도, 베르그송도 수학자이고... 수학은 그 사라들에게 있어서 기초 지식입니다. 그 다음에 물리학, 생물학, 사회학과 같은 풍부한 개별과학의 지식을 가져야 됩니다. (37) [수학과 더불어 의학을 공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3-3. 생명철학]
결정론이냐 비결정론이냐에 대해 결론이 나지 않고 있을 때, 한 철학자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입니다. 베르그송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정론이냐 비결정론이냐 하는 문제 이전에, 도대체 데이터 자체가 기본적으로 어떻게 구분이 되며, 만약 꽁트가 무생물과 생물로 나눈다면, 생명 현상은 무엇이며, 무생물 현상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definition)를 먼저 하고, 그 정의에 입각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허사라는 겁니다. (37)
그 당시 생물학이 발달했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입니다. .. 어떠한 생물도 생물에서 나온다는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생물에서 나온 생물은 자기 자신의 모든 기능을 그 어머니인 생물에서 받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유전입니다. 멘델(Gregor Mendel, 1822-1884)이 그 유전을 정량적으로 연구해 놓았습니다. (37)
문제는 물질은 무엇이고 생명은 무엇이냐는 것인데, 우선 무엇인 유전되느냐가 문제예요. .. 유전되는 것은 사실은 형질이 아니라 기능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 그래서 베르그송은 그것을 철학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유전 이란 것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근대 물리학과 같이 기계적인(mechanical) 원인은 항상 결과의 밖에 있으니까 유전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이론(form-matter theory)에서 형상은 밖에서 질료에 주어지니까, 형상-질료 이론도 유전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38) [안에서/드당(dedans)이지 밖에서/바깥에서/드오르(dehors)가 아니다.]
유전되는 것은 형질이 아니라 생물이 살아가는 기능이라면, 그 기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38) [벩송과 들뢰즈는 기능이라기보다 권능(puissance)라고 한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지만, 형상 없는 자기에 의해 자기가 스스로 창조하는 것으로, 스피노자의 자연 즉 신에 가깝다. 이 권능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필연)를, 즉 스피노자의 자연의 필연성을 벩송은 자연의 자발성으로 바꾸어 설명한다.]
[두 가지, 두 방향] 결국 형상이론을 가지고 생물을 설명하는 방식과 또는 운동이론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 운동이 일정하다는 것은 운동이 운동 아닌 것으로 될 수 없다는 얘깁니다[운동의 불변성]. ... 그러니까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운동은 그 운동을 다른 타자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기 운동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중에 라틴에서 온 말로 <spontaniété>, 즉 자발성이라고 번역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발성은 능동성(activity)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물질은 무엇이냐?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을 통털어서, 베르그송은 그것을 그 기능에서보아 엔트로피라고 일차 정의합니다. (39) [물질의 운동은 타성의 운동으로 평준화 운동으로 향하는데, 이를 엔트로피라고 한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이 운동이론으로 우주를 본다면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아까 실증 과학자들 사이에 결정론이냐 비결정론이냐가 문제가 됐는데, 비결정론자는 우연이 있다는 것이고, 결정론자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39)
비결정론은 우연을 들고 나오는데, 요컨대 운동론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라는 것은 모조리 우연의 집합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전부 변칙뿐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변화는 과정만 있다는 것입니다. (40) [변칙뿐, 또는 변화의 과정만, 이런 것은 엔트로피의 반대 방향의 운동이다. 평준화에 반대인 것이다. 벩송도 엔트로피의 역행을 수용하지만, 그 과정이 경향을 지닌 것으로 자연의 필연성인데, 의식(영혼)이 선택의 권한(노력)을 한다(DI 3장)는 것이 다르다. 이 노력이 무엇이냐는 것은 MR 3장에서 인류의 미래와 연관시켜서 신비가라 할 것이다. 이 신비가는 니체의 초인과 마찬가지이며 다음인간인데, 윤구병이 말하는 ‘아제인간’으로 있을 것이 있을 세상을 의미한다. (53LLB)]
베르그송은 생물과 무생물을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정의하려고 하니까 플라톤[플로티노스]으로 갑니다. .. 그러니까 베르그송은 플라톤 존재론의 직계 제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리스토테레스보다 더 직계 제잡니다. 플라톤에 운동을 중심으로 해서 우주를 분류해(classfy) 놓은 구절이 나오니까요. 그러나 그 내용을 형이상학적으로 더 자세히 구명해 놓은 것이 베르그송입니다. (40)
물질이라는 것이 엔트로피라고 해도, 어느 기간이 걸려서 변하는 것이지 그냥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그렇게 보면 물질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속합니다. 그러니까 물질과 생명체를 동일한 차원에 놓고 다룰 수 있다는, 연결시킬 수 잇다는 이론이 나옵니다. .. 물질 세계는 모든 것이 유동(flux)이고 모든 것은 변칙뿐이다, 질로 가득 차 있다는 얘깁니다. .. 그러니까 베르그송은 물질에 대해서 대략만 그렇게 정의한다면, 생명체는 반(反)엔트로피이며, 자발성과 자기운동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40-41)
그러면 그 자발성, 그 기능이 어떻게 작용하느냐? 그것은 우선 반엔트로피이고, 또 하나는 그것이 언제든지 변칙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existence)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여러 가지 기능을 자기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 그때 조절하는 능력이 아까 말한 정보이론입니다. (41) [유전자의 정보이론을 말하는 것인데, 자발성을 정보이론으로 설명하면 분석철학이 된다. 스피노자의 권능이 자발성이리고 봐야, 들뢰즈의 차이개념으로 종의 다원화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능동성(activity)의 성격에 관한 문제입니다. 운동이라는 것은 A에서 B로 가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다른 것으로 변하는 데, 변해 버렸으면 그 운동은 운동이 아닐 텐데 어째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의 자기동일성(identity)을 유지[보존]할 수 있느냐는 문제죠. .. 그 보존을 바로 기억이라고 하죠. 불란서 심리학자드은 유전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기억이라고 합니다. ... 생물학 쪽은 유전입니다. (41) [능동성도 스피노자의 능동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변화, 변형은 능동성의 원리이다. 기억은 의식의 현상이며, 유전은 생명의 원리인 셈이다. 자기보존과 자기 생성과 발전(전개)이다.]
그런데 과거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형상 이론에 의하면, 종에서 출발해서 성인이 되어서 다시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서 인간이면 인간, 개면 개를 딱 오려냅니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어른이죠. (52) [일반성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그런 생물학하고 전혀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하나의 모범형(ideal Typus)으로서의 인간이 나오지만, 베르그송에서는 종에서 성인이 되어서 다시 종으로 가는 모든 순환(cycle)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나오지 않고, 그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연속되어 나오는가를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42) [종의 발전은 개방이며, 생명의 미래를 나선형처럼 열려있다. 아직도 인간의 모범형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벩송이다.]
또 더 중요한 것은 철학을 본질(essentia)의 입장에서 실존(existentia)의 입장으로 전부 [되]돌려놓았다는 것이다. (43) - [철학적 사고를 철학적 사유로 되돌려 놓았다(invertir). 벩송은 형상에서 질료로 방향이 아니라 질료에서 형상의 방향이다. 역전이라 하는데 들뢰즈가 전복(suversion)이라 할 것이다.]
실지로 생물학을 본다면 식물만이 자기 영양 섭취를 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다른 모든 동물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전부[동물들] 식물의 기생충입니다. 일종의 불구자죠. (43) [들뢰즈는 인간이란 동물이 사자갈퀴의 이(虱슬)[벼룩(蚤조)]와 같다고 한다.]
그러니까 <땅에 충실하라(bleibt der Erde treu)>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니체(Nietzsche, 1844-1900)가 한 말이지만, 사실은 실증주의적인 표어지요. 물질과 연결되어서 물질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자기 섭취를 해서 자기 생존(existence)을 잇는 것은 식물뿐이고, 인간은 제일 못한 것이죠. 인간은 살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고, 학교를 다녀야 하고, 복잡한 도구를 만들어내야 하는 동물이죠. 아주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43) -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땅에 충실하라(bleibt der Erde treu, « À la Terre, restez fidèles. »)>. - 루소의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에서도 비슷하다. 루소는 ‘끝까지 자급자족 체제(autarcie)의 자기 운명(son destin)에 복종했다.’ 참조: 들뢰즈에서, 대지(la terre)]
여기 과거의 <homo sapiens(지성인)>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진다[전복]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과거 희랍의 <homo sapiens>의 입장에서는 성인을, 그것도 이성을 가진 성인을 모범(model)으로 삼았지만, 베르그송에서는 종에서 성인이 되어서 종으로 가는 전과정을 봐야 되는데, 그 밑에 있는 공통치를 빼내면 조절능력, 즉 인식능력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이 중심이며, 대상화된 인식은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44)
공간에서나 시간에서나 우리가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이라는 태평양[대양] 속에 들어있는 조그마한 섬처럼 작다는 것입니다. .. 왜 제한되어 있는가 하는 인식문제를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따집니다. 결국 데이터 문제로 돌아가는데, .. 플라톤은 정치나 하러 다니고 수학이나 알고 기하학이나 아는 사람이지 실제 데이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남이 대화하는 것을 옆에서 그리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44)
우리가 데카르트에서 우선 첬재 봐야 할 것은 그 사람의 인식론의 데이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뿐입니다. (45)
그러나 베르그송의 입장에서는 그것[성립된 만들어진 자기 자신]은 곤란하죠. 왜냐하면 지금 입장에서 만약에 인식론을 논하라면, 동물의 생태학, 식물학, 분자생물학에서 미생물에 대한 학습이론, 식물, 동물, 인간에 대한 데이터를 모조리 다 모집해 가지고, 거기서 공통치가 무엇이냐를 논해야 일반 인식론이 나오죠. 베르그송이 바로 그런 방식이죠. (45), 실제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지만, 지금 나의 말을 조절하는 능력은 배 배후에 숨겨져 있어서 의식화되지 않습니다[무의식, 기억]. 가령 소쉬르Saussure, 1857-1913) 같은 언어학자도 철저한 기능주의자죠. .. 가령 프로이트(Freud, 1856-1939) 같은 사람은 ... 꿈을 해석하든지, 실언을 해석하는지, 자유연상을 한다든지 해서 [무의식을]해석(interpretation)하려고 하죠. (47)
그러면 베르그송의 그런 세계관에 따르면 실증과학은 어떻게 되느냐? .. 베르그송은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재느냐고 문제를 제출합니다. .. 플라톤은 질을 재는 데서부터 시작하죠. .. 질은 공가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이론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도 질을 쟀습니다. 가령 논리학에서 대개념, 중개념, 소개념, 보편자, 특수자 등으로 얘기 합니다. 그것은 곧 재어서 양화시킨 것입니다. (48)
그런데 베르그송은 질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을 어떻게 재느냐하고 말합니다. .. 그러니까 운동자체는 잴 수 없고, 운동이 지나간 그림자, 스쳐간 공간을 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쳐간 공간에서 모든 이론이 생기는 것이 됩니다. .. 그 당시의 심리학에 굉장한 충력을 주었다고 합니다. ,,, 우리의 내면적 세계를 보면 끊임없이 어떤 동기(motivation)가 들어갑니다. 그것을 잴 수 있냐? 잴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생명 현상의 기본은 자발성이고, 자발성은 자기 조절 능력인데, 자기 조절 하는 능력은 외부에서 어떠한 척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기본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48-49) [끊임없는 새로운 생성능력, 작동하는 권능이 있다.]
그러면 존재론인 철학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모든 철학은 무엇인가 자기의 전체적인 어떤 의도(intention)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모순율이, 무가 아니라는 것이, 모든 학문의, 모든 데이테의 기본입니다. 무가 아닌 것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분열되어서 나옵니다. (50)
모든 것을 일정한 것으로 본다면 고유명사가 되고[플라톤], 그것을 양화될 때에는 보통명사가 됩니다[아리스토텔레스]. .. 그런데 법칙이 성립하려면 운동은 항상 양화해야만, 다시 말하면 확정되어(definite) 있는 질을 빼버려야만 합니다. 질은 양화되지 않습니다. (50)
2+3=5rk 성립하는 것은 각 수가 양(量)이기 때문이지, 2, 3, 5가 각각 다른 질이라면 수학적인 조작(operation)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50-51) [계산하는 양은 모두 연산자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순수한 질은 양화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상(idea)의 세계는 다 고유한 것이며 고유명사지, 되풀이되는 것이 없습니다[동일성원리]. 실제 그 영원의 세계에서 어떤 형상(Idée)이 실지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선험적(a priori, 선천적)으로 주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 형상이 성립하려면, 다(多)가 성립하려면, 그 또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공간이 무한정적(indefinit)이라는 것은 어느 공간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질성에서] 어떤 영원한 법칙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건으로서 성립합니다. 법칙도 사건으로서 성립한다. (51) [선생님은 들뢰즈를 읽지 않았았을 것인데... 이 시절(1984년)에 들뢰즈는 알려지지 않았다.]
가령 2+3=5가 성립하는 공간을 수학적 공간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우선 수학적 공간이 성립하느냐가 문제이고, 그 다음에 그 공간에서 2가 성립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추상적 공간에 대해서 우연입니다. 왜냐? 우리에게 모순율이 최고입니다. 모순율이 최고라는 것은 그것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2가 성립하느냐 않느냐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연입니다. (51) [1 다음 2의 성립과 1+1=2라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전자는 1 그리고 1을 2라고 부르는 다의 성립이며, 여기서는 두 단위가 달라도 성립할 수 있기에 사건이다. 말하자면 0와1(무와 존재)가 둘(2)라는 경우는 둘이 같은 단위(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2는 점(단위)과 점(단위)을 잇는(보탠다, 운동한다) 단위의 결합으로서 우연이라는 것이다. 2가 아닐 수도 있는데, 1이라는 단위의 동등성을 선전제로서 추상화의 작업이 먼저(선험적으로) 있고, 그 작업에는 선천적 공간(생명체가 공간을 지니고 있으니까)이 무매개적으로 주어져 있다. 벩송의 무매개적으로 주어진 자료는 공간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것은 추상화 이전에 실재성이라느는 것이다. (53LLC)]
그러면 추상적인 법칙이란 추상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어떤 영원한 법칙이 선험적(a priori, 선천적)으로 있다는 것은 얘기할 수 없습니다. (52) [사유이전에 생명체는 선천적으로 흐름이기 때문에, 추상화에서(또는 공간화에서) 나오는(추론하는) 법칙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영원한 법칙을 얘기할 수 없다. 천체의 원운동으로부터 영원과 불명성을 추론할 수 있어도, 실재성으로 설명되지 않기에 벩송이 상징(기호)라고 한 것이다. (53LLC)]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플라톤은 전부 구체적인 고유명사로 썼습니다. 베르그송은 플라톤의 하나의 특수한 계승자입니다. 구체적[실재적]인 데이터는 어떠한 추상적 사고도 안 들어간 바로 그러한 데이터이지만, 그러나 또한 존재론적으로 보면 바로 그것이 실재(reality, [la réalité])입니다. (52)
그러면 플라톤의 철학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우리의 일반적 기능인 서술의 능력의 발현이냐? 만약 그렇다면 플라톤의 저술은 단순한 데이터의 서술[표현]이죠. 그러나 또한 서술이 아니라 그 서술 문장 앞에 어떤 가정(hypothesis)이 빠진 결론(apodisis), 그 결론 문장만 주워 모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52) [벩송 식으로 보면 결론을 사물과사태에 넣어서 설명하는 전도된 학문이다. 사유는 기원과 과정, 그리고 귀결을 서술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플라톤에서 왜 고유명사가 나오느냐, 왜 누구누구의 아들이 나오느냐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플라톤의 데이터의 성격을 좀 알고서 얘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반해 스콜라철학과 같은 학원철학은 데이터의 성격은 생각지 않고, 믿도 끝도 없는 어떠한 이론을 내세워서는 그것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희랍철학에서는 곤란합니다. 또 불란서 철학에서도 곤란합니다. 또 서양철학의 주류도 아닙니다. (53) [주지주의 방식도 신학적(토미즘) 방식도 서양철학의 주류가 아닌데, 왜 우리나라에서 주류처럼 지배하느냐 하면, 일제가 독일철학을 심고, 미제가 영미분석을 심어서, 100여년의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게다가 1632년 이래로 없는 나라인 명나라를 숭배하는 소중화주의의 잔재라고 할 수도 있다. (53LLC)]
*
[§4. 마치면서(결론)]
내가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양 철학의 주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한번 방성해 보자는 것 입니다. 플라톤과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정량적인 학이 어디서 나왔는냐 하면 이탈리아에서 나왔습디다. .. 하나는 비잔틴 문화.. 다른 하나는 로만 카톨릭 .. 데이터로 눈을 돌린 갈릴레이도 이탈리아 사람입니다. (53) [선생님은 라틴계 철학을 주류로 보고 있다.]
프랑스는.. 로마 문화의 맏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으로부터 서양철학, 서양학문의 정수는 어디로 가냐 하면 불란서로 갑니다. 분류, 분할은 오귀스트 꽁트가 해 놓은 것이 기본이고 베르그송은 무엇을 재느냐를 묻고, 거기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54)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냐 공간이냐 둘 뿐이에요. 플라톤은 둘 다를 놓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이론(form theory)을 놓았고, 베르그송은 시간에서 정리했습니다. 그 이외는 없어요. (54) [선생님의 결론]
요컨대 서양 철학의 주류는 데이터에서 출발합니다. 예전부터 서양의 학문은 대상화된 것을 취급합니다. 가령 헤겔(Hegel, 1770-1831)을 봅시다.헤겔은 대상화된 세계에서의 모순율을 부정하고, 그의 논리학을 보면 비합리주의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situation)에서 그렇게 대상화된 세계를 조절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성립하는 자기 동일성(identity)의 조절 능력이 헤겔로 하여금 철학 하게끔 한 필수조건이 아니겠느냐 하는 문제를 제출합니다. (54)
우리는 서양철학을 데이터로서 취급하고, 어떤 것이 좋으냐 나쁘나 하는 것은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어떤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도 취급하지 않습니다. 모든 증거[자료 데이터]에 의해서 증명해보니까 다만 이러이러한 것이 나오더라, 그것뿐입니다. 모든 존재자는 그것이 있다면 있을 만한ㄴ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에요. 다만 대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면 수학 같은 것들이 나오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서양 철학에 접근(approach)하는 것은 우선 데이터로서의 서양철학에 접근해 보려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독일 철학은 그 나름대로 일단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고, 독일 철학을 어디 영미철학이나 불란서 철학에다 옮겨놓고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희랍철학도 마찬가지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추상적인 어떤 문제를 놓고 얘기를 해보자는 겁니다. 또 철학은 데이터 그 자체가 어떻게 성립하느냐는 것도 문제입니다. 모든 측면에서 봐야 합니다. 그것은 간단하지 않아요. 내 얘기 그만 하죠. (1984년 6월 15일)
# 「고별강연(1984)」 검토가 제자들과 네 차례 이루어진다. 1988년 5월 1일, 5월 29일, 8월 22일, 1989년 2월 3일.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민음사, 2007, 초1995)에 실려 있다.
(19:09, 53LLC)
# 인명록*****
469-399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469-399; 70살) 아리스토파네스(Ἀριστοφάνης, 450-386)가 소씨를 아테네의 “등에”라고 불렀다.
427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본명 아리스토클레스 Aristoclès 427-347; 80살) 플라톤이란 ‘어깨가 넓음’을 의미한다. 이데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나이 42살이었고) [그리고 18세 이후에 배울 수 있을 있었다면, 소크라테스 나이 60살이었으며 10여년을 따라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3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50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300경 알렉산드리아 유클리드(Euclide Εὐκλείδης) 기하학 집성.
287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기원전 287-212, 시실리섬의 과학자) 원리 발견 - 유레가(Eureka!, j'ai trouvé!, 알았다! 찾았다!)
O
204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lat.. Plotinus 204-270)탄생. 이집트 리코폴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Ἐννεάδες, 254-270). 그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서 세 가지 기저(trois « hypostases »)를 깨닫게 되었다. 일자(L'Un, ἐν), 지성(L'Intelligence, l'Intellect, νουϛ), 영혼 (L'Âme, ψυχη) [이말로 보면 중간에 점으로서 일자, 상층의 지성, 심층의 영혼이다. / 학설상 일자에서 누스로 그리고 영혼으로 연결되면 누스는 자연자체가 된다.]
1224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명한 신학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
1528 에스띠엔(Henri Estienne, 1528-1598)은 리용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은 프랑스 문헌학자. 에스띠엔은 그리스어로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 Stephanos), 라틴어로 스테파누스(Stephanus)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스테파노스 판본 126 c 등으로 표현한다.]
1564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피사 태생,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과학 혁명의 주도자로 요하네스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와 대립했다.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의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당시 카톨릭의 비판을 피하여 네델란드에서 지냈다.
1623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프랑스 수학자, 철학자. 쟝세니스트, 빵세(Pensées)(1669, posthume), 기하학적 정신에 대하여(De l’Esprit géométrique)
1643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만류인력의 법칙. 중력장의 발견으로 유명하다.
1711 데이비드 흄(David Hume)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며 역사가이다. 서양 철학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관련된 인물 중 손꼽히는 인물이다.
1717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 1717-1783) 프랑스의 수학자 · 철학자 · 물리학자 · 저술가이다.
172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계몽기 프러시아 철학자. 비판론 창시자.
1770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 관념철학자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
1798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프랑스 대혁명과 그리고 18세기 혁명의 과정에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체험하고,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며 역동적인 조직의 변화를 설명하는 사회학을 창설하였다. 그런데 한 여인에 사랑에 빠져 이 사회학을 종교화하려 했다.
[1801 꾸르노(Antoine Augustin Cournot, 1801-1877) 프랑스 수학자. 특히 경제이론에 정식화에 관심이 있어서 수요와 공급을 정식화한 초기 인물들 중의 한사람이다. 유물론, 생기론, 합리론: 과학 자료들의 철학으로 사용에 관한 연구(Matérialisme, vitalisme, rationalisme. Étude sur l’emploi des données de la science en philosophie, 1875) ]
[1813 펠릭스 라베송(Jean Gaspard Félix Ravaisson-Mollien, 1813–1900) 프랑스 철학자, 프랑스 고고학자. 셸리의 제자이며 벩송의 스승. 습관에 대하여(De l'habitude 1838),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관한 시론(Essai sur la métaphysique d'Aristote(2 vol., 1837-1846), 19세기 프랑스 철학(La Philosophie en France au xixe siècle, 1867) Testament philosophique (écrit presque entièrement en 1899-1900), in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1901))
1822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 1822-1884)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식물실험자, 아우구스티노회의 수사이자 사제. 이른바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의 수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유전학의 첫 장을 연 생물학자이다.
1825 샤르꼬(Jean Martin Charcot 1825-1893) 프랑스 신경학자 살페트리에르(Salpêtrière)에서 병리 해부학 교수였다.
[1832 쥘 라슐리에(Jules Lachelier 1832-1918) 1854년(22살) 문학으로, 1863년(31살)에 철학으로 교수 자격을 통과하였고, 1871년(39살)에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864에서 1875년(43살)까지 파리고등사범학교(ENS)에서 교수로 지냈다. 귀납법의 기초(Du fondement de l'induction, 1871). 벩송은 DI에서 그에게 헌정사를 썼다.]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 문헌학자, 철학자, ‘망치를 든 철학자’.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1845 에밀 부트루(Étienne Émile Marie Boutroux, 1845-1921)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학위논문 자연 법칙들의 우발성(De la contingence des lois de la nature, 1874), 철학사 연구(Études d'histoire de la philosophie, 1897)
1854 뿌앙까레(Henri Poincaré, 1854-1912)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기술자. 프랑스 수학회 회장 두 번 역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 과학과 가설(La Science et l'Hypothèse, 1902), 과학과 방법(Science et Méthode, 1908) <Oe 없음, Me, 1037외 네 번)>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의사, 정신분석학 창안. / 1885(29살) le 18 juillet 1885 장학금을 얻어서, 파리에서 정신과 의사 샤르꼬(Jean-Martin Charcot 1825-1893)에게 배웠다(le 28 février 1886까지).
1857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 1857-1939)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도덕과 품성들의 과학(Morale et Science des moeurs, 1903) 열등 사회에서 심성적 기능들(Les fonctions mentales dans les sociétés inférieures (1910), 원시 심성(La Mentalité primitive, 1922).
1857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린다.
1858 에밀 뒤르껭(David Émile Durkheim, 1858-1917) 8대에 걸친 랍비집안 출신이다. 1882년 철학으로 교수자격. 근대 사회학의 기초자. 사회학적 방법론의 규칙들(Les Règles de la méthode sociologique, 1895), 자살론(Le Suicide 1897)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1861 삐에르 뒤앙(Pierre Maurice Marie Duhem, 1861-1916) 프랑스 물리학자, 화학자, 역사가, 인식론자. 1882년 ENS 일등 입학, 베르뜰로(Marcellin Berthelot, 1827-1907)의 반대 견해로 박사학위를 거절당하다. 역학의 진화(L'évolution de la mécanique, 1905)(Oe 700, 1564) Le Système du Monde. Histoire des Doctrines cosmologiques de Platon à Copernic, 10 vol., (1913—1959) .
1863 버넷(John Burnet, 1863–1928) 스코틀랜드 출신 플라톤 전공자. 초기 희랍 철학(Early Greek Philosophy)(1892. 4th edition, 1930)(fr,. L'aurore de la philosophie grecque, tr. Reymond, 1919) 그는 옥스퍼드에서 1900-1907년에 플라톤 판본을 낸다.
1870 르화(Édouard Le Roy, 1870-1954) 프랑스 철학자. 늦게사 1892년 ENS 입학, 1895년 수학으로 교수자격 얻음.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승계, 도덕정치 아카데미에서는 선출, 또 프랑스학술원에서 벩송을 승계했다. 실증 철학과 자유의 철학들(La science positive et les philosophies de la liberté, 1899)[르화는 철학들이라고 표현 하였다 다른 종류의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벩송은 이 책을 알았다(48SKB)], 새로운 철학: 앙리 벩송(Une philosophie nouvelle: Henri Bergson, 1912), 직관적 사유: 신의 문제(La Pensée intuitive. Le problème de Dieu, 1929) - [벩송이 두 수학자 르화와 보렐 사이에서 르화쪽에 가깝다. 그런데 르화를 일찍이(1900) 파리 세계철학자대회에서 알았다. 1901년 “프랑스 철학회”에서도 만난다.(48SKB)]
1871 보렐(Émile Borel, 1871-1956) 프랑스 수학자, 정치가. 에콜폴리테크니끄와 에꼴노르말에 동시에 1등으로 합격했는데 에꼴노르말을 선택했고, 수학으로 교수자격도 1등했다. 측정이론(la théorie de la mesure)의 개척자이며, 측정이론을 개연성 이론(la théorie des probabilités)에 응용하는데 전문가이다.
1877 로스(William David Ross 1877–1971), 스코틀랜드 철학자. 도덕론자. 아리스토텔레스 전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Aristotle's Metaphysics, 1924),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이론(Plato's Theory of Ideas, 1951
1919 박홍규(1919-1994) 우리나라 철학자, 플라톤과 벩송 전문가.
1922 오웬(Gwilym Ellis Lane Owen, 1922-1982) 영국 철학자, 고대철학사가. 예거(Werner Jaeger)와 로스(David Ross)를 본 따서, 그는 철학사를 발생적 방법으로 고찰하였다.
1943 윤구병(尹九炳, 1943-) 전남 함평, 있음과 없음: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보리, 2003, P. 244),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윤구병 글, 보리, 2013, P. 416.)
1944 양문흠(梁文欽, 1944), [前]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ㅡ'과 "他者"를 중심으로 한 파르메니데스 편 연구, 서울대, 1984, 박홍규.>
1944 이태수(李泰秀, 1944-) 인천, 괴팅겐 게오르크아우구스트대학교 대학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47 김남두(金南斗, 1947-) 서울대 인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 석사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 철학 박사.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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