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요 연구가 李東洵 교수가 꼽은 한국가요 베스트 20
「사막의 恨」에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까지…
李 東 洵 시인·영남대 국문과교수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詩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제5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상.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저서 「민족시의 정신사」 등. 편저 「白石시전집」 등.
노랫말의 완성도를 중심으로 뽑아
이따금 친한 사람들과 어울려 대중가요를 부르며 즐기는 시간이 있다.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고, 이민을 떠나는 친구를 위해 부르는 노래가 있다. 졸업 축하연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고, 山行(산행)에서 내려와 부르는 노래가 있다. 실의에 잠겨 있거나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가 있고, 나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노래도 있다. 노인을 위로하는 노래가 있고, 술을 권하는 勸酒歌(권주가) 성격의 노래도 있다. 특정한 명승지에 가서 그 지역의 분위기에 들어맞는 적절한 노래가 떠오르고, 바다에 가면 바다의 신나는 흥취를 노래한 작품이 생각난다.
필자는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부르는 가요곡을 스무 곡 정도 골라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보라는 요청을 편집자로부터 받았다. 일단 선정 기준을 나름대로 마련해야 했는데, 우선 노랫말의 완성도를 맨 첫 번째의 조건으로 꼽았다. 당대 현실의 반영 문제, 인간 본연의 정서를 문학적으로 정리하고 압축시켜 내는 방법의 성공 여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가사를 떠받쳐주는 작곡의 솜씨를 생각하였다. 아무리 가사가 훌륭하다 할지라도 가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내는 작곡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장난 자동차와 무엇이 다를까? 그 다음으로는 가사의 내용과 작곡의 상태를 가수가 얼마나 제대로 소화를 시켜내고 있는가를 보았다. 여기에서 가수의 독특한 개성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설령 작사, 작곡의 솜씨가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수가 이를 멋들어지게 소화시켜 낼 때 그 노래의 효과는 십분 발휘된다 하겠다.
모든 훌륭한 노래가 그렇듯이 작사, 작곡, 노래의 세 가지 조건은 제각기 중요한 것으로 그 어느 하나만이라도 조화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무릇 노래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삼위일체가 되어야만 비로소 절창으로 태어날 가능성을 갖게 되는 법이다. 이러한 조건을 두고 곰곰 생각해 보더라도 좋은 노래는 너무나 많고 많았다.
▲ 가요 베스트 20
여기 꼽은 노래들은 평소 필자가 즐겨 부르던 노래들을 중심으로 선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모든 사람이 흔히 즐겨 부르는 대표곡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스무 곡은 다음과 같다.
「사막의 한」(1929), 「알뜰한 당신」(1935), 「찔레꽃」(1940), 「마상일기」(1938), 「비 나리는 고모령」(1946), 「고향초」(1947), 「전선야곡」(1950), 「꿈에 본 내 고향」(1951),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3), 「아메리카 차이나타운」(1953), 「나 하나의 사랑」(1953) 「봄날은 간다」(1953), 「대전 블루스」(1956), 「비의 탱고」(1956), 「에레나가 된 순희」(1959), 「항구의 사랑」(1959), 「외나무다리」(1962), 「세월이 가면」(1971), 「삼백 리 한려수도」(1973),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1976)
♣사막의 恨(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
고복수 음반 중 최고 판매 기록
고비사막을 지나며 불렀더니…
이 노래는 오케 레코드사가 발매한 高福壽(고복수)의 히트곡이다. 그의 대표곡 「타향살이」와 함께 녹음되었고, 高福壽의 음반 중에서 최고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작사자 金陵人(김능인)은 경북 김천 출생으로 본명은 昇應順(승응순)이다. 동요 창작에 관심이 있었고, 잠시 문단활동도 하였다. 오케레코드 창설과 더불어 문예부장으로 발탁이 되었다.
<자고 나도 사막 길 꿈 속에도 사막 길/사막은 영원한 길 고달픈 나그네 길/낙타 등에 꿈을 싣고 사막을 걸어가면/황혼의 지평선에 석양도 애달파라//저 언덕 넘어갈까 끝없는 사막의 길/노을마저 지면 둘 곳 없는 이 마음/떠나올 때 느끼듯 눈물 뿌린 그대는/오늘밤 어느 곳에 무슨 꿈을 꾸는고//사막에 달이 뜨면 천지는 황막한데/끝없는 지평선도 안개 속에 싸이면/낙타도 고향 그려 긴 한숨만 쉬고/새벽 이슬 촉촉이 옷깃을 적시우네>
달도 없고, 낙타도 없고, 타는 목을 적실 한 모금 물도 없는 사막은 바로 탐욕스런 제국주의가 휩쓸고 간 황폐한 한반도의 분위기와 같았다.
필자는 지난해 여름, 西域(서역)의 고비사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돈황, 투루판, 우루무치 등의 도시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대개 광활한 사막 위에 세워진 삶터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고비사막은 끝없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대륙은 한 여름의 태양 아래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대지는 온통 황톳빛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낙타를 타고, 혹은 걸어서 저 황량한 모래벌판을 건너갔던 것일까? 모래밭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그 모습은 흡사 파도의 무늬처럼 보였다. 필시 바람이 모래밭을 휩쓸고 지나간 자국이리라. 때로는 강이 있었던 자취, 혹은 녹지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아주 드물게 녹지가 보이는데 금방 그곳은 다시 사막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야말로 고복수의 노랫말처럼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의 길」이다. 고달픔 많은 우리 인생이 저 사막과 무엇이 다르리. 필자는 사막을 보며 줄곧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西安(서안) 부근에서는 구름이 자욱하더니 서쪽으로 가면서 하늘은 온통 푸른 비취색이었다. 그 아래 사막 위엔 구름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오직 필자가 타고 가는 비행기가 사막 위에 작은 장난감처럼 자신의 그림자를 외로이 끌고 갈 뿐이었다.
鳴沙山(명사산)을 보러 고비사막을 가로 질러가는 자동차 안에서 필자는 일행의 요청에 의해 이 노래를 불렀다. 고비사막 위에서 부르는 高福壽의 「사막의 한」. 필자의 가슴속은 마치 감전된 듯 화끈한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무한한 감격과 야릇한 회한 속에서 부르는 필자의 노래는 모래 바람 부는 사막 저편으로 아지랑이처럼 실실이 퍼져 나갔다.
高福壽는 1940년 봄에 조직된 반도악극좌의 무대공연을 통해서 黃琴心(황금심)과 사랑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두 사람의 나이는 무려 10년의 차이가 있었고, 이 때문에 黃琴心의 집안에서는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은 모든 반대를 뿌리치고 혼인하게 되었다. 이후 부부는 「고복수와 그 악극단」, 「조향 악극단」, 「백조 가극단」 등의 고정 멤버로 항상 함께 다닐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高福壽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北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에서 高福壽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후 육군 정훈공작대에 지원하여 軍위문 연예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쓸쓸한 말년
1953년 초반, 그러니까 휴전이 조인되기 이전에 黃琴心·高福壽 부부는 강원도 속초지구의 軍부대에 위문 공연차 왔다가 속초에 잠시 눌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5사단 28연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던 분의 회고에 의하면 高福壽의 노래에 몹시 심취한 장교 한 사람이 그들 부부를 붙잡아 두고 속초 시내에 다방을 차려 주며 생계를 이어가도록 하였다. 모두가 살기 힘들었던 시절, 이것은 대단한 배려였다. 계급이 대령이었던 그 장교의 이름은 高福壽와 성씨가 같은 고백규라고 하였다.
왕년의 인기 가수 高福壽는 유달리 커다란 키에 기린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다방 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며 타조처럼 성큼성큼 걸어다니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양곡이 귀하던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밀주를 高福壽 내외가 직접 담아서 내놓기도 했는데, 이것이 장교들에게는 대단한 인기였다. 이는 高福壽가 아마도 자신을 도와 주었던 장교들의 厚意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제주도에는 신병훈련소가 있었는데, 대구에서 활약하던 박시춘과 김화랑, 신카나리아, 박옥초, 작사가 유호 등이 제주도로 건너가 군예대를 조직하였다. 훈련소장은 백인엽 장군. 마침 제주도에 피난 와 있던 구봉서, 주선태, 송재로 등도 여기에 힘을 보태었다.
1958년 7월, 高福壽는 서울의 「시공관」에서 은퇴 공연을 열었다.
高福壽는 은퇴 후 4·19혁명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한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가요 현상 모집과 신인 선발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은퇴 이후 高福壽는 손대는 사업마다 모두 실패하고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처하게 되었다. 말년의 高福壽는 몹시 고달픈 삶을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각종 전집물을 판매하러 온종일 거리를 헤매다니는 서적 외판원까지 했을 정도였다.
高福壽는 1972년 2월에 세상을 떠났고, 아내 黃琴心은 2001년에 타계하였다.
♣알뜰한 당신(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황금심 노래)
황금심의 데뷔곡
『저 황금심이에요…』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은 사정을/당신이 몰라 주면 누가 알아 주나요/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십니까요//만나면 사정하자 먹은 마음을/울어서 당신 앞에 하소연할까요/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무슨 까닭에 모른 체하십니까요>
黃琴心의 본명은 黃錦同(황금동)이었다. 서울 청진동에 거주하던 목소리 좋던無名(무명)의 소녀. 1936년, 그녀의 나이 18세 때 가수로 발탁되어 데뷔하였다. 이 노래는 그녀의 데뷔곡이었다. 오케 레코드와 빅터 레코드에서 黃琴心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며, 이 때문에 법정 문제로 비화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때 다른 음악인들이 중재하여 오케 레코드사에는 이미 많은 가수들이 있으므로 양보해 달라는 청을 간곡하게 넣어서 黃琴心은 빅터社 소속으로 결정되었다.
이 「알뜰한 당신」은 빅터社에 정착한 이후 첫 히트곡이라 할 수 있다. 워낙 타고난 목소리가 좋아서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듯 청아한 목소리」라고 평하였다. 黃琴心의 株價는 높이 솟았고, 朴丹馬(박단마), 金福姬(김복희) 등 다른 여성가수들까지도 덩달아 위상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오케 레코드사로 옮겨가고 말았다.
일본의 레코드 사업이 하나의 본격적인 기업으로 출발하게 된 것은 1927년 일본빅터 축음기 회사의 창립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미국과 합자 형태로 지속되어 오다가 완전한 독립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해에 미국과 영국의 합동 운영회사인 콜롬비아社가 출범했다. 일본의 포리도루 회사는 독일의 텔레푼켄社와 기술제휴로 발족하였다.
일본의 유명한 출판사인 講談社가 킹 레코드社를 만들었다. 1931년에는 일본의 관서 지역에 있던 帝國 축음기 상회가 주식회사 형태로 규모를 확대하면서 도쿄로 본사를 이전하였다. 일제시대인 1927년 조선에는 현재 KBS의 전신인 JODK방송국이 개국되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빅터와 콜롬비아社가 서울에 지점을 열었고, 이어서 일본에 와 있던 여러 축음기 회사들이 지점을 만들어 진출하였다.
필자가 소장한 낡은 LP판 두 장은 黃琴心의 독집으로 꾸며져 있다. 그것은 아마도 黃琴心의 가요계 데뷔 기념 음반으로 꾸며진 것으로 보인다. 「민요계의 여왕 黃琴心. 力唱盤(역창반)」이라는 굵은 글자가 유난히 눈에 띈다. 「알뜰한 당신」이 첫 번째의 곡으로 편집된 이 음반의 서두는 黃琴心이 직접 녹음한 다음과 같은 세리프(대사)로 시작된다. 함경도 억양의 분위기가 슬그머니 느껴지기도 하는 세리프에서는 어떤 비장감마저 풍긴다.
<저 黃琴心이에요. 제가 옛날에 애창하던 가요곡을 몇 개 골라서 여러분 앞에 내어놓게 됨에 있어서 저의 조고마한 가슴은 감개무량한 바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지금으로부터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 제가 열여섯 살 때이니까요. 무슨 철인들 있었으며 세상 물정인들 알았겠어요. 노래로써 울고 노래로써 웃는 인생이 즐겁다고나 할까요. 사랑은 노래를 싣고 기나긴 20여 년. 가지가지의 추억을 모으면서 제 가슴에 이 노래를 불러 봅니다>
♣레꽃(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 노래)
연변 정서 물씬 느껴져
1941년作임에도 광복 이후에 인기 끌어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언덕 우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이별가를 불러 주던 못 잊을 동무야//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삼 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한 자료에 의하면 이 노래는 작곡가와 가수가 만주 공연을 하던 시기에 해당 지역 독립군들과 비밀리에 만난 일이 있었고, 그 후 독립군들의 고향 그리움을 가요곡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아무튼 이 가요곡에는 연변 정서가 물씬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 노래는 1941년 5월 태평 레코드사 발매 음반으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이 노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몇 해 뒤 광복이 되고 나자 뒤늦게 폭발적 인기곡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관객지에서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는 白蘭兒(백난아)의 노래가 무척이나 커다란 공감을 주었던 듯하다.
한때 월북작사가인 趙鳴岩(조명암)의 작품으로 오인되어 원래의 작사자인 金英一(김영일)이 이에 항변하는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다. 분단 이후 가사의 일부가 개작되었는데, 1절의 끝에서 「못 잊을 동무야」라는 대목이 「못 잊을 친구야」로 바뀌었다. 이것은 동무라는 단어의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한다. 2절에서도 「노래하던 세 동무」가 「노래하던 동창생」으로 바뀌었다.
「삼 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도 「작년 봄에 모여 앉아 박은 사진」으로 바뀌었다. 3절에서는 「돌아드는 북간도」가 「날아드는 내 고향」으로 변모되었고, 끝 부분인 「그리운 고향아」가 「즐거운 시절아」로 탈바꿈하였다. 원래의 가사가 더욱 아련한 애수와 정취가 느껴지는 듯하지만 시대의 제약 때문에 작사자는 원작에 기어이 수정과 가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모양이다.
「항구 뒷골목 목로주점의 젓가락 장단」과 어울리는 목소리
이 노래를 부른 가수 백난아는 작사가 강사랑(강해인)의 표현에 의하면 「부잣집 맏며느리같이 복스럽게 생긴」 여성으로, 「어느 항구 뒷골목 목로주점 골방에서 젓가락 장단을 치면서 한 많은 신세를 푸념하는 그 여자의 넋두리같이 청승맞으면서도 정다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를 지녔다. 대표곡 「직녀성」 등을 히트시키면서 후반기 태평 레코드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보배로운 존재였다.
당시 레코드社의 인기 있는 전속가수의 대우는 아주 높은 편이었다. 최고 수입은 月 평균 300원이었다고 한다. 작사료 10원, 작곡료 10원, 중견가수 月 전속료가 80∼90원 정도. 再계약을 할 때마다 전속료와 계약금이 늘어났다. 李蘭影(이난영)이 오케 레코드에 전속으로 들어갈 때 150원을 받았다. 일본에 가서 레코드를 취입할 때는 보통 1회에 일곱 곡이나 여덟 곡을 취입하는데 출장비에 한 곡당 40원씩의 수당이 별도로 지급되었다. 레코드의 인세도 1매당 5전씩이었다.
白年雪(백년설)이 태평 레코드에서 오케 레코드로 옮겨 올 때 입사 축하금의 명목으로 받은 이적료가 3000원, 전속료가 2000원, 여기에다 매달 월급이 250원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단한 거금이었다. 「마코」란 이름의 일본산 담배 한 갑에 5전, 고급 담배인 「해태」가 15전, 구두 한 켤레에는 4~5원에서 아무리 고급이라도 10원 정도, 양복 한 벌에는 40∼50원 정도였다. 명월관, 식도원 같은 일급 요정에서 서너 명이 하루 저녁 흥겹게 노는 데 30원 정도면 충분했다고 한다.
매월 초순 각 레코드사마다 新譜(신보)가 나오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중요도시의 레코드사 店頭(점두)에 아치를 세우고 포스터를 걸었다. 그리곤 歌詞紙(가사지)를 만들어서 거리에 뿌리고 다녔다. 특별한 경우에는 애드벌룬도 하늘에 높이 띄웠다.
일제시대 레코드 취입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가수들의 소속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빅터 레코드사:이애리수, 黃琴心, 박단마, 이규남, 문일엽
콜롬비아 레코드사:채규엽, 강홍식, 김영춘, 강남수, 남일연, 계수남, 강석연, 김복희. 이인근, 이해연
오케 레코드사:高福壽, 남인수, 김정구, 송달협, 이난영, 이화자, 장세정, 이인권, 최병호, 손석우, 손석봉, 김선영, 권오성
포리돌 및 태평 레코드사:선우일선, 왕수복, 김용환, 백년설, 진방남, 고운봉, 최남용, 박향림, 백난아, 태성호>
♣馬上日記(고려성 작사, 홍갑득 작곡, 이재호 편곡, 진방남 노래)
비 오는 거리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에서 악상 얻어
재래 상인들의 삶과 비애를 다뤄
<밤이 새면 장거리에 풀어야 할 황앗짐/별빛 잡고 길을 물어 가야할 팔십 리란다/나귀 목에 짤랑짤랑 향수 피는 방울 소리/구름 잡고 도는 신세 발길이 설다//경상도다 전라도다 충청도에 강원도/외양간 나귀 몰아 조바심 몇십 년이냐/길 친구에 입을 빌어 더듬어 본 추억 속에/말만 들은 옛 고향에 처녀를 본다//황혼 들면 주섬주섬 다음 장을 손꼽아/선잠 깨인 베갯머리 세월은 주마등이냐/동쪽에서 잔을 들고 서쪽에서 사랑 푸념/울고 가자 당나귀야 방울 울리며>
이 노래의 작사자는 고려성(조경환)이다. 원래 이 노래는 대구 출신의 洪甲得(홍갑득)이란 청년이 만든 곡으로 태평 레코드 문예부 소속의 작곡가 李在鎬(이재호)를 찾아가 이 곡을 내놓았다고 한다. 워낙 곡이 좋아서 여기에다 高麗星(고려성)이 노랫말을 붙여서 내놓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하지만 이 노래의 악보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일본의 오사카에 있던 태평 레코드 본사로 취입을 하러 가는 도중에서 李在鎬는 비 오는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의 소리에서 편곡의 악상을 얻어 이 노래를 완전한 작품으로 가다듬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는 작사자가 秋美林(추미림)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추미림은 작사가 半夜月(반야월)의 예명으로 이 이름은 반야월이 분단 이후 주로 조명암, 朴英鎬(박영호) 등 월북 작사가들의 노래를 유지시키기 위해 부분적으로 고쳐서 改詞(개사)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半夜月의 가수로서의 이름은 秦芳男(진방남). 「꽃마차」, 「불효자는 웁니다」, 「화물선 사랑」, 「고향만리 사랑만리」 등의 히트곡을 갖고 있다. 백년설, 朴響林(박향림) 등이 태평 레코드를 떠난 뒤 백난아와 함께 그곳을 지키며 이후 작사에만 전념하였다. 반야월은 이후 「산장의 여인」, 「산유화」, 「단장의 미아리 고개」 등 많은 히트곡의 가사를 만들었다.
고려성이 만든 이 노래의 가사는 전국의 장터를 떠돌아다니는 재래 상인의 삶과 비애를 다루고 있다. 자못 문학성이 짙게 느껴진다. 우선 白石(백석)의 詩 「城外(성외)」와 李孝石(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 金周榮(김주영)의 대하소설 「客主(객주)」 등의 분위기와도 흡사하다. 모두 떠돌이 장꾼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이다.
♣비 나리는 고모령(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고모령은 대구 남쪽 작은 기차역 부근
悲壯美 넘치는 어머니와의 이별 장면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넘어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맨드라미 피고 지는/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비나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눈물어린 인생고개 몇 고개이더냐/장명등이 깜빡이는 주막집에서/손바닥에 쓰린 하소 적어가면서/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玄仁(현인)은 광복 후에 데뷔한 가수이다. 중국에서 음악 수업을 받다가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가거라 삼팔선」을 히트시킨 고려 레코드社와 럭키 레코드社에서는 현인에게 「신라의 달밤」을 취입시켜 大성공을 거두었다. 격동기의 대중들은 고대적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거 통행금지 제도가 유지되고 있던 시절, 술을 마시고 늦게 돌아가다가 파출소 앞에서 검문에 걸리게 되자 현인은 『나는 신라의 달밤이오!』라고 외쳐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어서 「인도의 향불」, 「고향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베싸메무쵸」 등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였는데, 이 노래는 1946년 앞의 노래들에 뒤이어 발표된 작품이다.
비록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으나 또 다른 목적과 일터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의 쓰라린 장면이 작품 속에 들어 있다. 어머니와 이별하는 장면에서는 悲壯美(비장미)와 애절한 심정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 한 폭의 그림처럼 배어난다. 경상도 억양과 발음이 다소 뒤섞인 玄仁의 독특한 창법이 이런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향을 등지고 월남한 실향민들에게 이 노래는 여전히 눈물의 세레나데로 살아 있다.
이 노래의 중심 배경인 顧母嶺(고모령)은 대구 남쪽의 작은 기차역이 있는 지역 부근에 있다. 현재 대구파크호텔이 들어서 있는 곳에서 고모 역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이 바로 고모령이다. 해발로 치면 30m 정도에 불과하니 이곳을 「嶺(령)」이라는 명칭으로 쓰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어쩌다 고모령을 자동차로 넘어가게 될 때 필자는 반드시 이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며 언덕을 넘어간다. 고모령에서 불러보는 「비 나리는 고모령」은 확실히 독특한 맛이 있다. 부슬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더욱 맛이 살아난다. 그야말로 「현장학습」이다. 사람들이 문학기행이란 것을 다니는 까닭은 바로 이런 분위기를 즐기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파크호텔 정원에는 「비나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세워져 있으니 일부러 그곳을 한 번 다녀옴직도 하다.
♣故鄕草(김다인 작사, 박시춘 작사, 장세정 노래)
애절한 삶의 비애감 물씬 풍겨
홍민이 리바이벌해 성공하기도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었네/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고/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찔레꽃이 한 잎 두 잎 물 위에 내리면/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차네/이 바닥의 정든 사람 어디로 가고/전해 오던 흙 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金茶人(김다인)은 조명암이 아닌가 한다. 「낙화유수」의 작사자도 대개 김다인으로 되어 있지만, 또 다른 자료에는 조명암으로 표시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다른 자료에는 김다인을 박영호의 예명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하게 구분해서 밝혀야 할 대목이다.
광복 직후의 격동기에 만들어진 이 가사를 박시춘은 한동안 그대로 갖고 있다가 한국전쟁 직후 대구에서 張世貞(장세정)에게 주어 히트시켰다. 광복 직후의 여러 가지 사회적 혼란상 속에서 「농민 계층의 이농현상과 농촌의 분해」라는 매우 무겁고 힘든 주제의식을 이 노래는 담아내고 있다. 장세정은 이 노래의 가사가 담고 있는 깊은 뜻을 매우 애절한 음색과 창법으로 소화시켜서 취입하였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음률 감각인 세 박자 구성으로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애절한 삶의 비애감이 물씬 풍겨난다. 노랫말의 작사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농촌 처녀의 무작정 상경」이라는 사회 문제를 이렇게 애틋한 분위기로 담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2절에서도 작사자는 농촌의 주인이 농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농민계층이 모두 도시로 떠나가서 「흙냄새를 잊고」 도시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탄식하고 있다. 가수 洪民(홍민)이 침통하고 장중한 저음으로 리바이벌해서 다시금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전선야곡(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전쟁과 어머니 배경 노래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소리 없이 나리는 이슬도 차가운데/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아 아 그 목소리 그리워//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정안수 떠다 놓고 이 아들의 공 비는/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아 아 쓸어안고 울었소>
「백제의 밤」을 부른 신세영의 데뷔곡이다. 전쟁과 어머니를 배경으로 한 이 노래는 군대 시절을 경험한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보았을 노래다. 6·25전쟁이 터진 후 생지옥 같았던 敵治(적치) 90일은 가요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년의 인기 가수들과 작곡가 등 대중음악인들은 피란민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가랑잎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반도가극단에서 활동하던 가수 李仁根(이인근)·李夢女(이몽녀) 부부는 국군 낙오병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납북되었고, 가수 김홍렬(라미라가극단), 이난영의 남편인 金海松(김해송), 뮤지컬 작곡가 김형래, 江南春(강남춘), 李圭南(이규남) 등도 北으로 끌려갔다. 샹송과 코미디언으로 인기가 높았던 李福本(이복본)도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학살당하였다. 그는 초창기의 재즈를 이 땅에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멋진 양복에 맥고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스틱을 돌리며 입술을 쑥 내밀어 부른 노래의 스타일은 가히 일제시대 조선의 모리스 슈발리에라 할 만했다.
신카나리아(申景女)는 공산군에게 결박되어 끌려가다가 시쳇더미 속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9·28 수복과 더불어 가요인들은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선무공작대로 활동하였다. 국방부 정훈국 소속 문예중대 제2소대가 가장 큰 규모였으므로 「歌協(가협)」이란 별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제1소대는 李海浪(이해랑)을 중심으로 신극운동의 멤버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劇協(극협)」이라 불렀다. 작사자 호동아는 兪湖(유호)의 예명이다.
군대 시절, 군복을 입고 달빛 아래 보초를 서면서 조용히 흥얼거렸던 이 노래의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차디찬 달밤의 얼어붙은 땅을 거닐며, 이 노래를 부르는데 어깨에 멘 장총은 왜 그리도 무겁던지. 고향집도 없거니와 기다려 주실 어머니도 계시지 않는 신세가 말할 수 없이 처량해져서 필자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군화 끝으로 맑은 이슬 방울이 툭 떨어졌다.
♣꿈에 본 내 고향(박두환 작사, 김기태 작곡, 한정무 노래)
악극단 무대에서 히트 시작
해외 동포, 실향민, 수몰민들이 좋아하는 노래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고향을 떠나온 지 몇몇 해던가/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는 이 몸/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꿈에 본 내 고향을 차마 못 잊어>
한국전쟁은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참혹한 사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피란을 내려 왔으며, 고향은 항상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아련한 대상이었다.
이 노래는 원래 韓正茂(한정무)가 불렀으나 金南日(김남일)이란 가수도 함께 취입하였다. 애절성이란 측면에서는 韓正茂의 창법이 훨씬 돋보였다. 하지만 이 노래가 특별히 대중의 인기를 모으게 된 배경에는 宋達協(송달협)이 무대 가수로서 애를 쓴 노력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정무가 불러서 히트하기 직전 송달협이 이미 악극단의 무대에서 이 노래를 매우 절절하게 불러서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 노래는 고향을 잃은 실향민,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고향을 버린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울림을 주었다.
가수 한정무는 원래 북한 출신의 가수로 광복 전 빅터 레코드에서 「대동강 달밤」(김영일 작사, 형석기 작곡)이란 노래를 취입한 경력이 있었다. 그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월남한 뒤 부산으로 피란 내려와서 1951년에 이 노래를 취입하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이 노래는 한정무 자신의 기막힌 넋두리였으므로 더욱 절절하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수 한정무는 이 노래를 취입한 지 9년 뒤인 1960년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노래는 민족분단의 비극과 더불어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도미도 레코드社에서 이 음반을 발매하였다. 작사자 朴斗煥(박두환)은 원래 극작가로서 여러 편의 희곡 작품을 남겼고 악극을 만들어서 많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전쟁 중 피란지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는 「도미도 레코드사」가 문을 열었다. 말이 레코드 제작사이지 韓福男(한복남)이 맨 처음 레코드 바늘 장사로부터 시작하여 약간의 자본을 모아서 설립한 영세한 회사였다. 엿장수가 모아오는 日政 때의 고물 음반에 신문지를 한 겹 바르고 거기에다 파라핀을 얇게 코팅하는 방법으로 전반적인 과정이 너무도 원시적이면서 동시에 수공업적 과정이었다. 온 가족이 달려들어 음반을 찍어내었고, 그렇게 찍어낸 음반을 온 가족이 나누어 들고 직접 팔러 다녔다고 한다.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다.
부산에는 도미도를 비롯하여 孫英俊(손영준), 金洪山(김홍산)이 운영하던 스타레코드, 대구에는 李炳玉(이병옥)이 운영하던 오리엔트 레코드, 유니온 레코드가 그래도 가요 문화의 명맥을 실낱같이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9·28 수복 후에는 대개 활동의 터전을 서울로 옮겼다.
필자는 이 노래를 주로 고향을 떠나 타관 객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처지의 사람들 앞에서 즐겨 불렀다. 외국에서 10여 년 넘도록 살아가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리 동포들,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 심지어는 물 속에 고향을 묻고 다른 곳으로 떠나온 수몰민들까지도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한다. 그들의 가장 여리고 아픈 마음을 이 노래를 통해 슬쩍 건드리면 곧 두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惡童의 취미인지도 모른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피란민의 애환을 노래
還都 후 박시춘이 만든 첫 작품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한 많은 피란살이 설움도 많어/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이별의 부산정거장//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시름없이 내다보는 창 밖에 등불이 존다/쓰라린 피란살이 지나고 보니/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이별의 부산정거장//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유리창에 그려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한 두 자 봄소식을 전해 주소서/몸부림 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이별의 부산정거장>
이 노래는 1953년 가을, 부산의 임시수도로 옮겨와 있던 정부가 서울로 돌아와서 朴是春(박시춘)이 만든 첫 번째의 작품이다. 피란지 부산에서의 3년 세월이 이러한 絶唱(절창)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피란민의 삶이 지니는 애환을 노래하면서 동시에 還都(환도) 시기 이별의 아픔과 서러움을 그대로 진솔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사와 곡조와 노래가 절묘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그야말로 삼위일체의 名作(명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노래의 전주곡은 매우 경쾌하면서 작곡가 박시춘 특유의 개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마치 열차의 쇠 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금속성의 규칙적인 울림과 가슴속의 공명 효과, 게다가 남인수의 애간장을 끊어내는 듯한 창법이 어우러져 훌륭한 절창의 세계를 이루었다.
南仁樹(남인수)가 부른 「무정열차」를 제2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남인수가 부른 명곡들 중에는 철도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노래의 2절에 나오는 「십이열차」는 열차의 번호를 지칭한다. 모든 열차는 서울을 기점으로 하여 상행선 열차는 짝수였고, 하행선 열차는 홀수로 지정되었다. 작사자 兪湖가 바라보았던 서울行 열차의 번호가 12번이었던 듯하다. 「미카」 등으로 표시된 열차의 종류는 대개 디젤이 나오기 이전 증기기관차의 시절에 사용되던 고유명칭이다.
이 노래로 말미암아 박시춘, 남인수의 멋진 콤비는 다시 한번 世人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고, 남인수의 명성은 불멸의 반석 위에 오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들 콤비를 일컬어 일본의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과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의 관계에 비견하기도 했다. 순회 공연 때문에 여관에서 숙박하게 될 때 남인수는 모발이 흩어질 것이 염려되어 일부러 목침을 베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건강하던 시절에는 각종 스포츠에도 능했고, 특히 당구를 잘 쳤다고 한다.
남인수는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까지도 창백한 얼굴로 각혈을 하면서 무대에 섰다고 한다. 관객들은 남인수가 각혈을 닦은 하얀 손수건을 서로 자기에게 던져 달라고 외쳐댔다. 가수로선 대단한 직업의식의 실천이었고, 이 광경이 관객들을 오히려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1962년 6월30일 남인수가 불과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날 밤, 동료 음악인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박시춘은 남인수를 회고하며 『이제 내 평생 남인수와 같은 가수는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것 같다』고 깊은 탄식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남인수가 부른 노래가 모두 몇 곡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광복 전에 이미 800여 곡을 취입하였고, 광복 이후에 200여 곡을 불렀다 하니 도합 1000곡은 넘는 셈이다. 최근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 「남인수 팬클럽」이 조직되었고, 아직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남인수 전집」까지 발간하였다. 이는 놀랍고 반가운 일이다. 남인수의 노래는 흘러간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현실과 시대감각에 적절히 부합되는 노래를 곡진하게 불러서 더욱 인기를 모았던 남인수는 이제 時空을 초월한 민족의 가수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韓流 열풍의 원조
시카고 차이나타운을 거닐며 느낀 일들
<아메리카 타국 땅에 차이나 거리/란탄 등불 밤은 깊어 바람에 깜빡 깜빡/라이 라이 호궁이 운다/라이 라이 호궁이 운다/검푸른 실눈썹에 고향 꿈이 그리워/태평양 바라보면 꽃구름도 바람에 /깜빡 깜빡 깜빡 깜빡/깜빡 깜빡 깜빡 깜빡/아 아 애달픈 차이나 거리//아메리카 타국 땅에 차이나 거리/귀걸이에 정은 깊어 노래에 깜빡 깜빡/라이 라이 호궁이 운다/라이 라이 호궁이 운다/목단꽃 옷소매에 고향 꿈이 그리워/저 하늘 빌딩 위에 초생달도 노래해/깜빡 깜빡 깜빡 깜빡/깜빡 깜빡 깜빡 깜빡/아 아 애달픈 차이나 거리>
1950년대 초반, 박시춘이 白雪姬(백설희)에게 이 곡을 주어 크게 히트시켰다. 백설희는 이 노래로 무대가수에서 단번에 레코드 취입가수로 위상이 오르게 되었다. 이국 정취가 느껴지는 분위기의 이 노래는 1963년 영화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동남아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 「노란 샤쓰의 사나이」, 「대전 블루스」 등과 함께 동남아로 수출되는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이른바 근간에 중국, 베트남 등과 관련하여 화제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韓流(한류)」 열풍의 원조라고나 할까?
백설희는 조선악극단에서 처음으로 무대를 밟은 가수였다. 부산 미도파 레코드 시대에 白映湖(백영호) 작곡의 「호숫가의 처녀」와 「꽃 파는 백설희」 등을 취입하였고, 이후 박시춘에게 개인 지도를 받으면서 「봄날은 간다」, 「딸 칠 형제」 등을 발표했다. 작사가 손로원은 이 노래를 비롯하여 「샌프란시스코」와 「페르샤 왕자」 등 여러 편의 이국풍 노랫말을 만들었으나, 그는 실제로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처럼 향토색이 물씬 느껴지는 서정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2000년 한 해 동안 필자는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 연구교수로 가 있었다. 미국의 어느 도시를 가도 중국인 거리가 없는 곳이 없었다.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뉴욕이었는데, 이곳에 들어가 있으면 완전히 중국에 와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의 차이나타운도 규모가 꽤 대단하였다. 여름날 저녁, 시카고의 차이나타운을 거닐며 아련한 정취를 느껴볼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시카고란 이름도 자기네 언어로 음역하여 「芝加哥(지가가)」라 불렀다. 중국식으로 읽으면 거의 「시카고」에 근접하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 땅에 와서 평생을 보낸 중국 노인들은 거리에 의자를 내어놓고 나와 앉아서 쓸쓸한 얼굴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주체성, 그들의 민족성은 어딜 가나 떳떳하고 당당하였다. 호궁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랜턴 등불도 볼 수 없었지만 필자는 고독한 나그네의 심사가 되어 이 노래를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역시 노래는 노랫말 속에 등장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불러야 제 맛이 나는 법인가? 미국 땅의 중국인 거리를 혼자 거닐며, 그 침침한 불빛 속에서 나직이 중얼거리던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을 어이 잊을 수 있으리.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누님이 부르다가 울어버린 노래
「열아홉 순결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열아홉 순결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앙가슴 두다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SP음반에 수록된 원래의 2절)//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던 역마차 길에/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백설희가 대구 유니버설 레코드 시절에 「아메리카 차이나타운」과 더불어 내놓은 작품이다. 역시 작곡의 천재 박시춘이 작곡하였다. 6·25 전쟁 직후 대구에서 발표되었다. 필자가 소장한 SP음반은 원래 이 음반을 갖고 있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이 듣고 또 들었던지 음반의 홈이 거의 닳아 있다. 축음기에 걸어 놓으면 아주 심한 혼탁음 속에서 백설희의 노랫소리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음반의 그 잡음이 심상치 않게 들린다. 뿌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나는 한국전쟁의 귀청을 찢는 포화 소리, 가족을 잃은 통곡 소리, 피란민의 아우성과 증기기관차의 바퀴소리까지 발견해내고는 슬픈 민족사에 대한 수심에 잠긴다.
가사의 2절은 SP음반에서 채록한 원래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 노래가 언제부터인가 세 번째 형태의 모습으로 改作(개작)되어 불려지고 있다. 노래의 맛은 원래의 형태가 훨씬 낫다.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서는 한국적 향취가 물씬 풍겨나지만, 개작된 노랫말에서는 「청노새 짤랑대던 역마차 길에」로 바뀌어 제 맛이 나질 않는다. 청노새와 역마차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역마차는 미국의 서부영화에서나 보던 것이 아닌가? 전혀 부적절한 대조인 것이다. 원래 노래를 다시 되찾아 부르는 운동이라도 펼쳤으면 좋겠다.
1950년대 후반의 어느 꽃 피는 봄날, 백설희의 노래를 유달리 좋아하던 필자의 누님은 이 노래를 부르다 기어이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다. 필자도 공연히 서러운 마음이 가득해져서 누님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울어버렸다. 필자는 그때 누님이 왜 울음을 터뜨렸는지 아직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열아홉 순결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는 노랫말 속에 흠뻑 빠져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사연이 혹시 있었던 것일까?
♣나 하나의 사랑(손석우 작사, 손석우 작곡, 송민도 노래)
신랑·신부가 즐겨 부르는 노래
노래로 시작해 소설, 영화로까지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나 혼자만이 그대여 생각해 주/나 혼자만이 그대여 사랑해 주/나 혼자만을 그대는 믿어 주고/영원히 영원히 변함 없이 사랑해 주>
가수 宋旻道(송민도)는 저음을 구사하는 특유의 창법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송민도의 애절한 창법 속에 매혹적 사랑의 냄새가 스며 있다고들 하였다. 사실 말 그대로 송민도는 당시 일본 고베의 백두 레코드에서 활동하던 가수 金容大(김용대)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많은 작곡가들이 송민도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려는 뜻을 가졌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직 羅花郞(나화랑)이 이 곡을 주어서 크게 히트시키게 되었다.
이 노래를 계기로 송민도는 나화랑과 콤비가 되었고 연이어 여러 곡들이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노래를 테마로 하여 작가 朴啓周(박계주)가 가사에 어울리는 새로운 대중소설을 만들었고, 그것을 대본으로 하여 곧바로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영화의 주연은 당시 인기배우 金振奎(김진규)와 趙美鈴(조미령)이 맡았다. 영화 주제가는 權惠卿(권혜경)이 불렀다. 실로 노래 한 곡이 발단이 되어 소설로 쓰여지고 영화화된 사례는 이 경우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 노래는 가사의 성격상 혼례 끝의 피로연에서 신랑·신부가 가장 즐겨 부르는 주제가가 되었다. 필자 누님의 결혼식은 전통 혼례의 방식으로 우리 집 마당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탁자 위에는 비단보자기로 둘러싼 닭이 있었고, 떡으로 만든 예쁜 꽃들이 있었다. 청솔가지와 대나무 가지도 병에 꽂아 놓았고, 아름답게 채색된 한 쌍의 나무기러기가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새로 장가오신 姉兄(자형)은 사모관대를 차려 입고, 아주 점잖은 얼굴 표정으로 의젓하게 서 있었다. 누님은 연지 곤지를 찍고 족두리 장식에다 비녀를 꽂은 새악시 차림으로 분단장을 하여 어린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어여쁜 모습이었다. 누님은 줄곧 눈길을 고무신 코 끝을 향한 채로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옆에서 시키는 대로 절을 하고 일어서곤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피로연을 하는 자리에서 누가 노래를 시키자 누님은 몇 번 주저하더니 뜻밖에도 용기를 내어 일어나 그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한 곡 뽑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어떤 노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듯이 보였는데, 그게 바로 「나 하나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누님이 노래를 마칠 때까지 자형은 누님 옆에 서서 상기된 표정으로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孫夕友(손석우)는 원래 남인수의 「내 고향 진주」라는 곡으로 작사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노란 샤쓰의 사나이」 등을 비롯한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게 됨으로써 韓明淑(한명숙), 崔喜準(최희준), 孫詩鄕(손시향), 金相姬(김상희) 등 1960년대의 대표 가수들을 배출시킨 산파역을 맡았다. 한편 「비너스」란 이름의 레코드 가게를 직접 운영하면서 음악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환도 후에 가요 방송이 점차 제 자리를 잡아가게 되면서 손석우는 OK악단의 기타 연주자로 촉망을 받았다.
♣대전 블루스(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 안정애 노래)
조용필이 리바이벌해 부른 노래가 더 독특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아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래트홈/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영원히 변치 말자 맹세했건만/눈물로 헤어지던 쓰라린 심정/아 아 부슬비에 떠나가는 목포행 완행열차>
이 노래도 발표되자마자 크게 히트를 하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나 하나의 사랑」처럼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영화의 제목이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노래의 제목까지도 원래의 「대전 블루스」보다도 영화 제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이 노래가 생겨난 배경에는 작은 일화가 있다. 작사자인 崔致守(최치수)는 당시 남도 지역으로 출장을 떠나게 되었는데, 마침 열차를 환승하기 위해 대전 역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차 시간에 맞춰 정신 없이 달려가는 사람들, 그리고 시시각각 울려오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를 혼곤히 취해 듣다가 문득 한 편의 노래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얻은 감흥이 노래 「대전 블루스」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평범 속에서 발견한 비범이라고나 할까? 어디서나 대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광경 속에서 작가는 아름다운 보석을 캐낼 수 있었던 것이다.
金富海(김부해)의 곡도 아름답고, 安貞愛(안정애)의 창법도 애처로운 호소력이 두드러진다. 안정애는 1950년대 후반 高福壽가 운영하던 東和(동화)예술학원을 다니며 院長 高福壽로부터 직접 창법을 배웠다. 이미자도 이 무렵 이 학원을 다니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SP음반에 담겨진 안정애의 목소리는 애절하다. 하지만 그녀의 40代 이후에 부른 노래는 영 제 맛이 나질 않는다. 이 노래 특유의 애절함을 전혀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조용필과 장사익 등에 의해 리바이벌된 노래에 별도의 독특한 맛이 서려 있다.
♣비의 탱고(임동천 작사, 나화랑 작곡, 도미 노래)
빗방울 보다가 감흥 얻어 만든 곡
가수 출신 작곡가 나화랑의 감흥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울음과 같이/슬픔에 잠겨 있는 슬픔에 가슴 안고서/가만히 불러보는 사랑의 탱고//지나간 날에 비 오던 밤에/그대와 마주 서서 속삭인 창살 곁에는/달콤한 꿈 냄새가 아련히 떠오르는데/빗소리 조용하게 사랑의 탱고>
이 노래를 부른 가수 都美(도미)는 대구 출신이다. 「사도세자」, 「청포도 사랑」, 「추억에 우는 여인」 등을 나화랑의 곡으로 발표하였고, 「오부자의 노래」, 「청춘 부라보」, 「신라의 북소리」 등을 박시춘의 곡으로 발표하였다.
「비의 탱고」는 나화랑이 한국전쟁중 군예대로 종군하던 시절, 軍부대의 막사에서 장마철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가 문득 감흥을 얻어 곡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선배가수 현인이 먼저 취입하였으나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고, 오히려 후배가수인 都美에 의해 폭발적인 반향을 얻었다. 남미 탱고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듯 경쾌하면서도 부드럽고, 발랄하면서도 아련하게 옛 추억의 여운을 자아내는 듯한 분위기가 남다른 매력을 주고 있다.
빗소리를 제대로 들으려면 아무래도 양철지붕이나, 양철로 물받이를 뽑아낸 한옥 집이 좋을 것이다. 그 함석 철판 위에 투닥투닥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먼 원시의 태고적 감수성으로 되돌아간다. 사르릉거리는 가랑비 소리도 좋고, 마구 투닥거리는 굵은 소낙비 소리도 좋다. 죽은 듯이 가라앉아 있던 삶의 의욕이 한 순간 싱싱하게 펄떡이며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한때 이 노래의 가사에서 착안하여 「비의 온도가 몇 도이지?」라는 넌센스 퀴즈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정답은 물론 「5도」였다. 마지막 소절인 「사랑의 탱고」를 부를 때 「사랑의 탱」까지만 발음하고, 맨 마지막 음절인 「고」를 소리내지 않고 默音(묵음)으로 처리함으로써 이 노래의 맛을 한결 멋스럽게 살려낼 수 있다.
작곡가 나화랑은 원래 가수로 데뷔한 경력이 있다. 1943년 태평 레코드社에서 주최한 제21회 레코드 예술상 최종 결선이 서울 종로5가의 제일극장에서 열렸다. 전국 예선에서 선발된 신인가수들이 모여 결선을 겨루는 자리인지라 긴장감은 극도로 팽팽하였다. 이때 趙光煥(조광환)이란 신인가수가 무대에 나왔는데, 그는 노래를 부르기 직전 피아노의 키를 잠시 두드려 정확한 음정을 잡고 나서 노래를 불렀다. 이 광경이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는 마침내 입상을 하게 되었다. 그 신인가수 조광환이 바로 후일의 나화랑이었다.
나화랑은 태평 레코드社 문예부장으로 있던 고려성(조경환)의 막내 아우였다. 가수보다 작곡 쪽에 더욱 뛰어난 재질이 있어서 포리도루 레코드社의 전속 작곡가로 발탁되었다. 그의 작곡으로 발표된 「삼각산 손님」은 백년설에 의해 크게 히트하였다. 자료를 뒤적거리다 보면 「고려성(조경환) 작사, 나화랑(조광환) 작곡」이란 노래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는 모두 그들 형제의 각별한 우애 속에서 나온 것이다. 나화랑은 1983년에 세상을 떠났다.
♣에레나가 된 순희(손로원 작사, 한복남 작곡, 안다성 노래)
시골처녀가 에레나로
안다성의 슬프고도 부드러운 聲音
<그날 밤 극장 앞에 그 역전 카바레에서/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던 순희/석유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실패 감던 순희가 다홍치마 순희가/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희 순희/오늘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더라//그 빛깔 드레스에 그 보석 귀고리에다/목이 메어 항구에서 운다는 순희/시집 간 열아홉 살 꿈을 꾸면서/노래하던 순희가 피란 왔던 순희가/말소리도 이상하게 달라진 순희 순희/오늘밤도 양담배를 피고 있겠지>
노랫말을 통해서 사회사, 민중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 노래야말로 바로 그런 경우에 적절한 경우가 아닌가 한다. 석유불 등잔 밑에서 밤 깊도록 실꾸리에 실을 감던 농촌 처녀 순희가 어떤 연유로 해서 도시로 흘러와 카바레의 여급이 되고 말았던가. 이름마저도 「순희」에서 「에레나」로 바뀌어 버렸다. 순희가 도시로 떠나오게 된 것은 모두 도시의 유혹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순희」라는 이름으로 상징된 농촌과 농민의 분해과정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슬픈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노래이다. 농촌 처녀가 윤락여성으로 전락되어 가는 과정을 은근히 부각시키고 있다. 그녀는 이제 야릇한 빛깔의 드레스를 입고 가짜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를 몸에 착용한 채 밤에 술집에서 서양 춤을 추고 있다. 그 타락한 생활을 오래 계속하다 보니 말소리도 술집 여성 특유의 앙칼진 어투로 달라졌을 뿐 아니라, 심지어 양담배까지 피우게 되었다.
한편 이 노래의 가사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미국식 저급한 대중문화의 침투에 대한 명백한 거부감이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카바레, 파티, 드레스, 양담배 등이 바로 그런 지시어들이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순희는 현재 자신이 험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고, 가끔씩 항구를 혼자 떠돌며 자책감에 빠져서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다. 그것은 본연의 자기 모습에 대한 회복의 염원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뜻한다. 아무쪼록 우리는 순희가 그처럼 험난한 지옥 굴에서 빠져나와 하루 빨리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이 노래도 탱고 풍의 곡조로 작곡되었다. 가사의 분위기와 제대로 어울린다. 가수 安多星(안다성)의 슬프고도 부드러운 聲音(성음)이 노랫말의 느낌을 살려내는 일에 한껏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안다성은 한국의 빙 크로스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음색의 소유자이다.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 등을 통해서 자신의 특색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항구의 사랑(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 윤일로 노래)
피란 시절의 온갖 애환이 서려 있어
추억의 박물관 「부산」
<둘이서 걸어가는 남포동의 밤거리/지금은 떠나야 할 슬픔의 이 한 밤/울어봐도 소용없고 붙잡아도 살지 못할 항구의 사랑/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네온 불 깜빡이는 부산극장 간판에/옛 꿈이 아롱대는 흘러간 로맨스/그리워도 소용없고 정들어도 맺지 못할 항구의 사랑/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부산은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50代 이후 세대들에게 港都(항도) 부산은 피란 시절의 우울한 경험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추억의 박물관이다. 그 박물관에는 낡은 흑백필름으로 찍은 1950년대의 햇살과 눈물과 골목길의 빛바랜 기억이 남아 있다. 대륙에서 달려오던 육지가 푸른 태평양 앞에서 몸을 움츠리는 곳.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피란민이란 이름으로 절박한 심정에 맞닥뜨려야 했던 것이다. 공산군이 이 부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다면 과연 어쩐다지? 시인 未堂(미당) 徐廷柱(서정주)의 광기는 날이면 날마다 푸른 바다에 풍덩 빠져 죽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피란 시절의 온갖 애환이 서려 있는 곳 부산, 그리고 남포동! 이 노래의 매력은 구체적인 地名과 건물의 위치 및 광경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노랫말의 서정적 분위기에 흠뻑 빠져서 나는 1970년대 중반, 일부러 부산으로 내려가서 남포동의 밤거리를 하릴없이 몇 차례나 쏘다녔다. 그리고 부산극장이 있던 자리도 일부러 찾아가 네온 불이 지금도 깜빡이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1950년대의 정서는 이미 안개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자갈치 시장이 있는 주변과 산 언덕배기 주민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통해서 흘러간 옛 정취를 힘들게 더듬어 유추해낼 뿐이었다.
이 노래는 과거 마을 단위의 노래자랑에서 출연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해 부르던 곡목이었다. 「비 나리는 호남선」, 「추억의 소야곡」, 「해운대 엘레지」 등이 바로 그런 노래였는데, 사실 이 노래는 부르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은 곡이었다. 「슬픔의 이·한·밤」을 부를 때 한 박자씩 끊어서 불러야 하는데, 대개 이 대목에서 박자를 놓치고 「땡!」하는 불합격의 소리가 들렸다. 노래자랑이 열리기를 기다려 큰 뜻을 가지고 무대에 올랐다가 참담한 얼굴로 내려오던 옛 출연자들은 이제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외나무 다리(반야월 작사, 이인권 작곡, 최무룡 노래)
영화 주제가를 최무룡이 직접 불러
복숭아꽃이 필자를 바라볼 때 부르는 노래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만나면 즐거웁던 외나무다리/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새파란 가슴속에 간직한 꿈을/흐르는 세월 속에 날려보내리//어여쁜 눈썹 달이 뜨는 내 고향/둘이서 속삭이던 외나무다리/헤어진 그 날 밤아 추억은 어디/싸늘한 별빛 속에 숨은 그 님을/괴로운 세월 속에 어이 잊으리>
1962년도에 나온 영화 「외나무 다리」의 주제가이다. 崔戊龍(최무룡)과 金芝美(김지미)가 주연으로 등장하였고, 감독은 강대진이 맡았다.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반야월이 만든 이 영화의 주제가를 주연인 최무룡이 직접 불렀다. 작사자 반야월은 이 노래를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개성이 강한 멜로디라고 평한다. 무엇보다도 최무룡의 신선한 목소리가 가사를 한껏 살려 주었을 것이다. 미도파 레코드社에서 출반되었다.
이 노래의 작곡가 李寅權(이인권)의 고향은 정어리의 산지로 유명한 함북 청진이다. 흘러간 옛날 오케 레코드社 연주단이 청진 지역을 순회 공연하는 중에 노래를 썩 잘 부른다는 그곳 청년 하나가 박시춘을 찾아왔다. 곧바로 테스트해 본 결과 재질이 인정되어 곧바로 순회공연단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온 후 빅터 레코드에서 「얄궂은 운명」 등을 취입하였으나, 오케 레코드로 옮겨와서 발표한 「눈물의 춘정」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게 되어 본격적 가수로 데뷔하였다. 「꿈꾸는 백마강」이 그의 대표곡이다.
이 노래가 발매되어 대중들의 인기가 높아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서둘러 발매금지를 시켰다. 가사 중에서 백마강에 집단 투신한 삼천 궁녀의 순국이 조선독립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고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半夜月과는 아주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는데, 이인권이 세상을 떠나던 날 半夜月은 이인권의 작품인 「카츄샤」의 한 대목인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버린…」이란 부분을 미친 듯이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그는 대구 피란 시절에 「미사의 노래」나 「단골손님」 등의 노래를 작사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임영일이란 藝名(예명)을 사용하였다.
필자가 살고 있는 경북 경산 용성면 일대는 복숭아, 사과 등의 과일 농사가 지역 농민들의 주요 생활 기반이다. 화사한 햇살이 내려 쬐는 봄이 되면 연분홍 복숭아꽃의 작은 봉오리가 햇살의 희롱을 못 이겨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면 산등성이가 복숭아꽃의 연분홍 빛깔로 온통 불그레하게 채색이 되기 시작한다. 힘들게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의 삶에서 일 년에 단 한 번이나마 가장 아름다운 빛깔의 향연 속에 잠길 수 있는 시간. 기막히도록 어여쁜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노라면 왜 그렇게도 눈물겨운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자꾸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던 어느 날, 하늘에 무거운 구름이 끼고 온종일 내린 봄비가 大地를 촉촉이 적시고 나면, 복숭아꽃은 꽃송이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어 달고 처연한 표정으로 필자를 바라본다. 이런 어느 날 밤, 필자는 과수원을 거닐며 젖은 복숭아꽃을 향해 「외나무 다리」를 불러 주었다. 아, 정말 「노래는 이럴 때 부르는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세월이 가면(박인환 작시, 이진섭 작곡, 현인 노래)
술집 「銀星」에서 외상값 때문에 작사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잊지 못하지/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인 朴寅煥(박인환·1926∼1956)은 1950년대의 대표시인 중 하나이다.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詩작품은 「목마와 숙녀」일 것이다.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 출생으로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 한때 서점 「말리서사」를 경영하면서 金洙暎(김수영), 金景麟(김경린) 등 후반기 동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모더니즘적 경향으로 詩작품을 써서 「朴寅煥시선집」(1955)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도시적 감각과 서정으로 사랑의 슬픈 추억을 노래한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쓸쓸한 정서가 감돈다.
이 詩가 노래로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9·28 수복 이후에 피란갔던 문인들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朴寅煥 등을 비롯한 한 떼의 친구들은 명동에 둥지를 틀었다. 폐허가 된 명동에도 하나 둘 술집이 들어서고, 식당이 들어서서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나게 되었다.
당시 탤런트 崔佛岩(최불암)의 모친은 「銀星(은성)」이란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박인환 등이 밀린 외상값을 갚지도 않은 채 연거푸 술을 요구하자 술값부터 먼저 갚으라고 요구했다. 이때 박인환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펜을 들고 종이에다 황급히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은성」 주인의 슬픈 과거에 관한 시적 표현이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朴寅煥은 즉시 옆에 있던 작곡가 李眞燮(이진섭)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다 노래를 부르게 했다. 모든 것이 바로 그 술집 안에서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이 노래를 듣던 「은성」 주인은 기어이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밀린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달라고 도리어 애원하기까지 하였다. 이 일화는 이른바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의 단편 「명동」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간적 향취가 물씬 풍기던 시절의 멋스런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이 노래는 맨 처음 현인이 불렀으나, 이후 1970년대 초반 애처로운 목소리의 소유자인 가수 朴仁姬(박인희)에 의해 다시 리바이벌되어서 대중들의 크나큰 사랑을 받았다. 가수 桂壽男(계수남)이 그 특유의 저음으로 취입한 노래도 썩 들을 만하다. 지금도 분위기 있는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곡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삼백 리 한려수도(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노래)
여객선에서 울려퍼지다
한려수도 오가는 작은 여객선서 받은 감동
<노을진 한산섬에 갈매기 날으니/삼백 리 한려수도 그림 같구나/굽이굽이 바닷길에 배가 오는데/임 마중 섬 색시의 풋가슴 속은/빨갛게 빨갛게 동백처럼 타오르네/바닷가에 타오른다네//달 밝은 한산섬에 기러기 날으니/삼백 리 한려수도 거울 같구나/굽이굽이 바닷길에 밤은 깊은데/섬 색시 풋가슴에 피는 사랑은/빨갛게 빨갛게 동백꽃처럼 타오르네/바위 틈에 타오른다네>
李美子(이미자)는 언제 들어도 그 느낌이 편하게 다가오는 가수이다. 내가 소장한 그녀의 음반은 모두 10여 장 정도는 될 듯하다. 그 음반의 재킷에 올려져 있는 사진을 시대 순으로 방바닥에 펼쳐 놓고 보면 참 흥미롭다. 가수로 데뷔한 초반의 李美子는 아주 순박한 시골 처녀의 용모를 갖고 있었다. 이 무렵이 아마도 高福壽의 동화예술학원에서 노래를 배우던 시기였을 것이다.
차츰 세월이 지날수록 이미자는 원숙한 여성의 외모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노래의 창법 또한 마찬가지다. 초반기의 李美子가 아주 청순하고 애처로운 성음으로 들린다면, 뒤로 갈수록 그녀의 성음은 기교적으로도 한층 발전되고 원숙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이미자도 무려 1000곡이 넘는 노래를 취입했다고 하는데, 그 중 많은 대표곡들이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를 표현한 것들이다. 금지곡으로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동백아가씨」를 비롯하여 「섬마을 선생님」, 「황포 돛대」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 노래는 필자가 대학 졸업반 때 세상에 나온 노래이다. 당시는 3공화국 시기로서 많은 대학생들은 현실에 대한 과도한 중압감을 느끼며 학교를 다녔다. 교련 반대, 삼선개헌 반대 등으로 대학가는 최루탄 연기가 가라앉을 날이 없었다. 졸업을 앞둔 가을 어느 날, 마산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를 거쳐서 여수까지 이른바 한려수도 삼백 리 뱃길을 학우들과 여행하게 되었다. 바닷물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시월 훈풍에 햇살은 장글장글한 느낌으로 두 볼에 와 닿았다. 무수한 섬과 섬 사이를 지나서 배는 작은 포구마다 모두 찾아 들어갔었고, 그때마다 섬 주민들이 분주히 오르고 내렸다.
우리가 탄 선박의 주인은 노래를 몹시 즐기는 사람으로 보였다.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미자의 신곡 「삼백 리 한려수도」가 담긴 테이프를 수없이 반복해서 틀고 또 틀었다. 실로 구성지고 애처로운 느낌으로 들리는 李美子의 노래 소리는 삼백 리 한려수도의 바다 물길 위로 바닷바람을 타고 너울너울 하염없이 퍼져 나갔다. 나는 뱃전에 기대어 서서 李美子 노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듣는 李美子의 낭랑하고 애틋한 음색은 나로 하여금 노래를 과연 어떤 환경에서 즐겨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하였다.
즉 모든 노래는 노래 속에 등장하는 바로 그 배경에서 직접 부르거나 들어야만 절실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한려수도를 오가는 작은 여객선에서 들었던 李美子의 노래는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던지라 이후에 들었던 李美子의 어떤 노래들도 한려수도에서의 그날 그 노래를 능가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돌아가신 필자의 숙모님은 가수 李美子의 열렬한 팬이었다. 하루 온종일 李美子의 노래를 테이프로 듣고 또 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엌에서 나물을 다듬다가도 가끔씩 한숨이 뒤섞인 잔잔한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李美子의 노래를 무슨 주문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李美子는 숙모님의 고단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지줏대였다. 가수 李美子의 성대가 특별한 연구 대상이라는 이야기가 세간의 화제로 나돈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조운파 작사, 임종수 작곡, 하수영 노래)
여성단체들이 문제 제기하기도
첫 눈 내리던 시간에 들은 그 男低音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미운 투정 고운 투정 말없이 웃어 넘기고/거울처럼 마주 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가는 세월에 고운 얼굴은 잔주름이 하나 둘 늘어도/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나 하나만 믿어온 당신을/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군대 시절, 필자는 경북 영천의 탄약창에서 한때 CP 당번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겨울 오후, 연대장도 선임하사도 모두 퇴근하고 조용한 CP의 근무실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졸기도 하다가 문득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들판의 겨울 빛깔을 보고 있는데, 무언가 희끗희끗한 것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첫눈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눈은 나풀나풀 가벼운 몸짓으로 내려와 흰나비처럼 키 작은 나무와 풀잎들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눈 위에 다른 눈이 다시 덮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잠시 동안에 온통 하얀 백색으로 바뀌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정경을 연출해 보여 주고 있었다. 실내는 한결 호젓하고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그때 라디오에서 어떤 노래가 들려왔다. 굵고 낮은 男低音(남저음)으로 부드럽고도 느릿느릿하게 부르던 그 노래는 첫눈 내리는 시간의 호젓함 속에서 마치 솜에 물이 젖어들 듯 가슴에 그대로 빨려 들어왔다. 삶의 어떤 달관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거기에는 감출 수 없는 쓸쓸함이나 슬픔 따위가 무르녹아 있었다. 작사, 작곡, 노래도 거의 완전하게 조화를 이룬 것으로 느껴졌다.
필자는 처음 듣는 그 노래를 배우고 싶은 충동이 들어서 얼른 종이와 볼펜을 준비하여 라디오 앞에 앉았지만, 곧 지나가 버려 제대로 적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노래는 이후 세찬 인기를 타고 하루에도 10여 차례 이상 라디오 전파를 타고 들려왔다. 워낙 자주 들어서 나중에는 가사를 보지 않고도 저절로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내의 손을 잡고 이 노래를 부르는 광경을 여러 차례 보았다. 대다수의 남편들에게 그것은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노래는 전국의 모든 남편들이 힘든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아내의 노고를 위로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일부 여성단체들에서는 이 노래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가요의 기회주의적 도구화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가수 하수영은 몹시 불운하였다. 이 노래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지만 이후에 발표한 몇 곡의 노래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전혀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다가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지금도 공중파 방송에서 가끔씩 이 노래가 들려오면, 나의 20代 후반 늦은 나이에 군복을 입고 병영에서 고생하던 그 시절의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첫댓글 사막의 한.마상 일기는 첨 들어보네예...
우리 가요사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