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부면(秋富面) 요광리(要光里)
추부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신평리와 서대리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비례리, 자부리와,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대전광역시 동구 상소동, 삼계동과 경계를 나누고, 서북쪽으로는 완전한 산악지대이며 서쪽으로 길에 들이 조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일본 제국주의시대 초창기까지도 금산방면에서 대전을 통해 북쪽 한양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어서 그 길의 고개로 마달령(馬達嶺)재, 즉 일명 머들령이란 고개로 널리 알려졌던 지역이 요광리다. 향토 시인 소정(素汀) 정훈(丁薰)의 그 유명한 시 [머들령]도 사실은 요광리의 마달령재를 노래한 서정시다.
인류의 정착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그리 빠르지 않아 줄잡아 고려시대 전후인것 같다. 백제 때는 진동현의 지역이었다. 신라 때는 황산군에 딸린 영현에 속했다가 뒤에 진례군의 영현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도 진례군의 영현 고을을 지속해 오다가 고려말기 공양왕 2년(1390)에는 잠시 전라도 고산현감이 겸해서 다스리는 고을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태조 이성계의 태를 만인산에 안봉하고 고을이 승격된 지진주사(智珍州事)의 고을인 옥계부(玉溪府)에 속했다가 진주현에 속하고 태종 12년(1412)부터는 진산군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정변과 사화에 세진을 씻는 듯 조용히 정착하여 그 명문을 키워 온 사람들로 인해서 차츰 빛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중기부터는 진산고을에서도 단단한 명문으로 터전을 굳히는 씨족으로 널리 알려지는 지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진산군 동이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제원역에 딸린 원집 요광원이 있으므로 요광원(要光院), 요광원촌(要光院村), 원촌(院村)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행정리(杏亭里), 검한리(儉閑里), 장산리(長山里)를 병합하여 요광리라 해서 금산군 추부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5.83㎢이며 해주오씨(海州吳氏), 옥천전씨(沃川全氏)의 집성부락이 있었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도 옛날부터 정착하여 세거하는 지역이다.
자연부락(自然部落)
<박오재, 요광원, 검한리, 은행정이, 장산리>
검한리
장산리 서쪽에 있는 마을을 검한리 또는 검한이라고 부른다. 장산저수지에서 흐르는 냇물 서쪽으로 마전에서 옥천으로 통하는 도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 오른쪽에 있는 긴 선돌형의 비석에 옥천전씨세장지(沃川全氏世葬地)라고 음각해 놓은 글씨가 보인다. 장산 저수지에서 흐르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검한리와 장산리가 마주보고 있는 마을인 셈인데 그 사이의 들을 가산말랑 또는 개삿들이라고 부르는데 이 들은 진주통영간고속도로와 대전금산간의 도로의 신설로 들이 없어졌다. 마을 지형이 칼고리 같이 생겼다 하여 검한이라고 하였고, 이를 한자화하면서 칼검(劍)자를 쓰지 않고 변하여 검한리(儉閑里)로 되었다 한다. 그런데 칼고리가 있다는 것은 칼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런 경우 칼이 칼집에서 나오는 보도출갑형(寶刀出匣形)의 형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리 보검이라 해도 갑(匣)속에 넣어두고 사용하지않으면 무용지물일 뿐, 그렇기에 검한리는 칼이 칼집에서 나오는 형세가 아닌가 한다. 그럴 경우 마을 주변에 있는 대백산이 이런 형국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옥천전씨가 20대째 살고 있는 마을로서 그 집성촌이 있었던 마을이다.
장산리
박오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을 장산리(長山里) 또는 장산미, 장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을 앞 남쪽에 있는 들은 만마루라고 부른다. 마을 북쪽으로는 장산저수지도 있다. 마달령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로 긴 산의 꼬리부분에 마을이 있으므로 장산미(長山尾)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장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또한 일설로는 마을 뒷산이 장고처럼 생겨서 장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해주오씨(海州吳氏)들이 많이 세거한다.
요광원
검한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요광원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길을 안내하는 제원역에 딸린 요광원(要光院)이라고 부르던 원집이 있었던 마을이라 요광원, 요광원촌, 원촌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 아래 들은 영미들이라고 부른다. 요광원에서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마달령 또는 머들령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금산에서 대전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는 고개로 그 길을 넘는 여러 사람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이 마을에 원집이 있었다. 지금은 진주통영간고속도로와 대전금산간국도와 옥천방향의 도로의 교차점으로 마을이 없어졌으며 머들령에는 두 도로의 터널이 뚫려져 있다.
은행정이
박오재 서남쪽으로 추부천가에 자리한 마을을 은행정이(銀杏亭) 또는 행정(杏亭)이라고 부른다.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를 장지목골이라고 부르고 마을 앞 들은 한사레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무오사화 때 오씨 한 분이 정착하여 살면서 뒤에는 해주오씨(海州吳氏)들의 집성부락을 생성시킨 마을이다. 마을의 수호신같은 은행나무 아래에 1970년대에 세운 행정헌(杏亭軒)이란 정자도 있어서 옛날부터 행인들이 쉬어가던 마을이기도 하다. 행정헌이 낡고 기울어져 2006년 다시 건립하였다.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은행정 또는 행정이라고 부른다.
박오재
은행정이 동북쪽에 박오재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원래는 소오재(所五在)인데 후에 변하여 박오재(博五在)라 하였다 한다. 마을 뒤로는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해서 복호산이라 부른다는 산이 있고, 마을 뒤의 골짜기를 방아골이라고도 부른다.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일찍부터 정착하였고 지금도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박오재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박오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첫댓글 사진 너무 이쁘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