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 종교간 대화의 시대적 요청과 상황적 중요성이 갈수록 증대되어 가는 요즈음, 불교는 이웃종교에 대하여 어떠한 교리와 사상을 갖고 있으며, 어떠한 역사적 선례를 보이고 있나를 돌아봄은 바람직한 종교간의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데 참고가 되며 그로부터 유익한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근래 세계 현실은 기술문명의 발달을 통해 시ㆍ공간적 단축으로 말미암아 "지구촌(地球村 Global Village)"이라는 말로 언표되어져 온지도 30여 년 되었고, 이즈음은 "지구공동체(地球共同體 Global Community)"라는 말이 더 실감나는 정보ㆍ세계화의 과정을 겪고 있지만, 그러한 거시적 변모와 아울러 미시적으로는 다원주의적 문화양상을 보이는 내면세계를 간과할 수 없다. 종교계도 다원주의 상황 아래서 성숙한 이들은 서로 존중하며 자주 만나 더욱 친밀해 질 수 있고 평화속에 공존과 협력의 상생문화를 조성해 갈 수도 있는 반면, 미숙한 이들은 경쟁과 불화속에 오히려 갈등과 배척의 관계로 악화될 수도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본고는 우리사회에 평화와 상생의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종교간 협조를 요청하고 그 전제로 상호 이해를 돕는 열린 대화의 장을 마련하며 그 뜻의 대중적 전개를 시도하는 담론의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한 불교인의 입장에서 주제와 관련한 불교 사상적 배경과 중요한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고 생각거리와 이야기 거리를 들어내어 발제에 부치려는 것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삼보체계로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다. 삼보(三寶)란 세상에 보배스럽게 존귀한 세가지 존재라는 뜻으로서,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Sangha)을 가리키는데, 창교자인 석존 및 그의 가르침과 그를 따라 사는 이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경우에 따라서 불보에 대한 이해도 법신 보신 화신 등 삼신설(三身說)과 사리(舍利 ar ra)나 성상(聖像)을 포함하여 교학적으로 광범위하게 설명될 수 있으며, 법보도 부처님이 증득하신 진리와 깨침에 이르는 다양한 수행법 등을 망라한 방대한 가르침이 있고, 승보도 비구(比丘 Bhik u)와 비구니(比丘尼 Bhik u )를 근본으로 대승권의 남녀 재가불자들을 포함하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을 말할 수 있듯이 그 범위와 차원이 한없이 넓고 높다. 여기서는 포럼의 성격상 일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범위와 차원에 국한하여, 우리의 역사에 나타난 부처님인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 그들의 가르침,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시대에 따라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 불교인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석존과 그의 제자들 및 신자들을 포함한 불교인들과 그들이 더불어 살았던 이웃종교인들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며, 불교인들은 이웃종교인들에게 어떻게 하여왔나를 돌아보려는 것이다. 먼저 불교의 이웃종교에 대한 교리와 사례들을 인도를 중심으로 살펴 본 후, 불교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불교인들이 이웃종교인들과 어떻게 관계해 왔나를 알아보겠다.
인도 불교의 이웃 종교에 대한 사상과 사례
1. 석존 재세시
(1). 석존의 종교적 상황과 전통종교에 대한 견해
초기 불교문헌은 석존의 일생과 아울러, 교단 창립당시의 인도 내부 종교사정에 따른 불교의 대응입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석존은 약 2600여년전 (현재 통용되는 불기로 계산하면 2625년전) 음력 4월 보름날(Ves kha) 인도 북부(현재의 네팔지역)의 가비라(迦毘羅 Kapila)국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의 태자로 태어났고, 그의 성은 고타마(Gotama 瞿曇)이며 이름은 싯달타(Siddh rtha 悉達陀)였고, 석가(釋迦 kya) 족의 인물로서, 그 당시 성직자계급인 바라문(婆羅門 Br hma a) 중심의 카스트(Caste) 신분은 왕족이나 무사계급인 크샤트리아 (K atriya 刹帝利)에 속하였다. 그는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 등 인생의 근본적 고통을 종교적으로 해결하고 해탈하기 위하여 일반인들이 선망하는 부귀와 영화 등 보장된 세속적 안일의 장래를 거부하고 전통적 수행자들의 관행에 따라 출가하여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수행방법으로 종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기성 바라문의 종교생활은 긍정하지 못하고, 먼저 당시 주류수행법의 하나였던 수정주의(修定主義)의 대가 알라라 칼라마( ra K l ma)와 웃다카 라마프타(Uddaka R maputta) 두 선인에게 그들의 선정 수행방법을 배웠고 그들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그 상태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또 다른 수행 경향의 하나였던 고행(苦行)을 극심히 해 보았으나 그것으로도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느꼈다. 누구에게도 더 배울 것이 없음과 기존의 방법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을 인식한 그는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수행을 시도하였다. 결국 독자적인 참선수행을 통해 마침내 대각(大覺)을 이룬 그는 깨달은 이, 즉 부처(Buddha 佛陀)가 되었다. 그로부터 고타마(Gotama, Gautama 瞿曇) 붓다나 석가족의 성인이란 의미의 석가모니(釋迦牟尼 kyamuni) 혹은 석가세존(釋迦世尊, 석존으로 약칭함)으로 불렸다.
깨달은 내용과 교설의 핵심은, 모든 존재의 실상과 생멸의 이법으로서 상의상존(相依相存)함을 강조한 연기설(緣起說 Pa iccasamupp da, Prat tya-samutp da) 및 그 인식과 수행의 도리로서 네 가지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Catv ri-aryasatyana)와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인 팔정도(八正道 A th gam rga)라고 할 수 있다. 연기설은 모든 사물의 존재구조와 인식태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가 있어야 하며, 다른 이가 존재하기 위해서도 자기가 있어야만 하는,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들어내어 각자의 도리와 책임을 다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야 되는 필연성과 당위성을 깨우치는 것이다. 연기과정의 설명가운데 주목할 것은 인간의 고통과 번뇌의 근원은 무명(無明), 즉 진리와 실상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이다. 사성제는 인생의 고통스러운 상황인식과 그 고통 해결의 가능성 및 방법을 보인 것이며, 팔정도는 그 방법의 구체적 제시이다. 팔정도는 인간의 정신생활과 언어생활 및 일상 직업활동을 포괄하는 전인적 생활방식의 명시로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도 감안한 방도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일생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과 자유의 즐거움 즉 열반(涅槃 Nirv a)을 가르친다.
석존은 교화의 기본으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에 치우치는 폐단을 경계하고 중도(中道)를 가르쳤으며, 이는 어떠한 시간과 장소에서도 주어진 상황 아래 최선의 길을 찾아가라는 개방적 가르침이다. 석존은 생활 윤리로 각자의 수행성취를 돕고 공동체의 질서와 화합을 위해 계율을 정하였는데, 그 기조는 개인의 성숙하고 절제된 생활로 수행과정의 문란과 타락을 막고 다른 이들에게 폐해를 방지하여 공동체의 질서와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건전한 언어와 행동을 위해서는 마음을 안정하고 순화 집중하여 지혜를 얻고 모든 생명을 위해 자비심을 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석존은 누구도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수행하면 깨침을 얻고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선포하였다. 그 스스로를 절대화하지 않았고 다만 길의 안내자로 자처하였다. 기존 바라문 중심의 신분계급질서를 긍정하지 않았고 사람은 출신계급에 따라 인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지혜와 능력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으며 모든 개인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제자들 공동체 안에서는 성직자 계급인 바라문 출신이나 서민(Vai ya 毘舍) 및 노예( dra 首陀羅)들이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접되도록 배려하였다. 여러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서는 차별없이 하나가 되듯이 불교 공동체에는 모두가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되고 존중되도록 하였다. 공동의 일은 공론을 통해 합의정신으로 추진하였고 독선과 억지가 없는 민주적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모든 중생을 관용과 자비로서 보살피도록 했고 폭력의 사용을 죄악시하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대로 수행하면 성취할 수 있다고 격려했고 모든 인간의 미래는 각자의 의식과 노력에 달려 있음을 가르쳤다. 석존은 모든 가르침을 대상의 상황에 알맞게 설하였고 제자들에게도 상대방을 배려하여 대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므로 상대가 이해하기 쉽도록 언어의 선택과 표현의 방법을 합당히 하는 것이 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불교 성립당시의 기존 종교로는 힌두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바라문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석존은 저들의 집단이기주의적 행태와 주장을 부정하였다. 바라문들의 주술적이며 신비적인 제사 및 희생은 중생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아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생활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바라문교를 혁파하려고 폭력적인 도전을 하지는 않았으나 평화로운 공존을 하면서도 기성체제로부터 압제와 혹사로 고통받고 있는 민중을 위해 인권의 평등을 주창했고 무지를 깨우치려 최선을 다 했다. 오직 다음 생에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 비현실적이고 지나친 고행을 하는 등의 불건전한 수행의 폐해도 지적하고 그런데 현혹되지 않도록 가르쳤다. 석존은 성도 후 얼마 되지 안아 우르빌라로 가서 우루빈라가섭(優樓頻螺迦葉 Uruvilv -k yapa)과 그를 따르던 500제자, 나제가섭(那提迦葉 Nad -k yapa)과 그의 250제자, 가야가섭(伽倻迦葉 Gay -k yapa)과 그의 제자 250인 도합 1000여명의 제자를 한꺼번에 얻게 되었는데 그들은 본래 불(Agni)을 섬기던 바라문교적 무리로서 사화외도(事火外道)였지만 석존에 감화되어 일시에 불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그 당시 사회의 굉장한 사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갈등과 분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없는 점으로 보아 석존의 교화는 매우 평화스럽고 합리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기성 종교는 이미 진지한 수행자들에게 매력과 지도력을 상실했으며 석존의 가르침은 구도자들에게 신선한 희망과 신뢰를 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신흥종교들에 대한 견해
석존이 성도하기 이전에도 이미 브라만교에 불만을 갖고 그 체제에 승복하지 않는 여러 부류의 신흥 종교집단이 발생되어 있었다. 초기 불교성전 (D gaha-nik ya)에서는 62종의 견해 (六十二見)로 분류하여 보일 정도로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력한 것으로서 이른바, "육사(六師)"로 알려진 여섯 명의 대표적 사상가와 그들을 따르는 각각의 집단이 있었다. 불교인들은 그들을 어떻게 보았고 그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① 푸라나(P ra a Kassapa)의 사상은 도덕부정설(道德否定說): 원래 노예의 아들이었던 푸라나는 주인집에서 탈출하다 옷을 빼앗긴 이래, 항상 벌거벗은 모습으로 생활했으며, 독단적인 윤리적 회의론자로서 선악은 사회적 관습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며 선행을 하든 악행을 하든 거기에 따른 필연적 인과응보는 없다고 주장이다.
② 파쿠다(Pakudha Kacc yana)는 칠요소설(七要素說): 인간의 각 개체가 절대 부동불변하는 일곱 개의 집합요소인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고(苦), 락(樂), 생명(生命)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로 손상시키는 일이 없으므로 이를테면, 어떤 이가 칼로 다른 이의 목을 잘라도 그 칼날은 일곱 개의 요소 들 사이의 틈을 지나치는 것에 불과하며 죽이는 자와 죽는 자도 없다고 했다. 도덕적 의지와 가치를 부정한 기계론적 불멸론 혹은 상주론자다.
③ 고살라(Makkhali Gos la)는 결정론(決定論): 모든 생물이 영혼(靈魂),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虛空), 득(得), 실(失), 고(苦), 락(樂), 생(生), 사(死)의 12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미 결정된 윤회전생을 수없이 되풀이 하다가 마침내 해탈의 날이 오며 어떤 특별한 인연이 없다는 극단적 숙명론이다. 이를 따르는 집단을 아지비카( jivaka)교라 하고 생활을 위한 수단으로 수행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한역경전에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 했다.
④ 아지타(Ajita Kesakambalin)는 유물론(唯物論): 오직 지(地), 수(水), 화(火), 풍(風) 4원소만을 실재로서 독립상주하며 그 활동공간으로 허공은 인정하나, 인간은 죽으면 허무하게되고 인과응보를 받을 내세도 없으므로 현실적 쾌락을 추구하며 살뿐이다. 이를 따르는 무리들을 순세파(順世派 Lok yata, Lauk yatika)라 불렀다.
⑤ 산자야(Sa jaya Bela iputta)는 회의론(懷疑論): 내세와 선악 및 업의 존재 등 형이상학적문제에 대하여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며, 판단 중지 등 애매한 입장을
피고 있는 이들은 불가지론파(不可知論派) 혹은 기분파(氣分派)로서 임의대로 상황에 따라 말하면 그것이 진리라고 했다.
⑥ 니간타(Niga ha N taputta)는 부정주의(否定主義 Sy dv da): 니간타의 본명은 바르다마나(Vardham na)였고 개교후에는 마하비라(Mah v ra)로 불렸는데, 그 집단을 자이나(Jaina)교라고 했다. 그들의 인식론적 입장은 상대주의(相對主義 Anek ntav da)로서 기존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카스트 제도와 바라문의 제의 등을 부정했으나 보편적인 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불살생(不殺生), 무소유(無所有) 등 출가 수행자의 계율이 엄격하고 고행과 영혼의 정화 등을 통한 해탈을 추구한다.
이상의 각종 주장과 교설들은 베다성전의 권위를 무시하는데 공통점이 있어 바라문 중심의 전통교단은 이들을 이단설로 간주하고 불온시 하였다. 석존과 불교 공동체에서는 그들을 외도(外道)라고 보고, 별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과의 불화와 갈등이 심각하게 들어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석존은 다만 그의 제자들에게 저들의 사상과 행태의 불합리성 및 비윤리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오염되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석존의 제자들은 이웃 종교인들에 비교하여 도덕적으로 존경과 신망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테면, 석존의 양대 제자로 알려진 사리불(舍利弗 S riputta, riputra)과 목건련(目 連 Moggall na, Maudgaly yana)이 본래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최초 5인의 불제자 가운데 한사람인 아설시(我說示 A vajit 馬勝)의 훌륭한 수행에 감동되어 그들 각각의 제자 100명씩 도합 200인과 함께 석존에 귀의하고 제자가 된 사연이다. 그들이 산자야의 회의론에 한계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개종을 하였던 사연들은 그로 인한 어떤 불화도 없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석존은 이웃종교인들에게 어떤 강제와 억지 없이 온화하게 설법하고 교화하여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석존의 체험과 깨달음으로부터 제시된 교설은 당시 양대사조로서 이른바 바라문교적인 전변설(轉變說 이세계는 바라문이 변모하여 이루어졌다는 설)과 신흥 종교가들의 반동적 사상인 적취설(積聚說 이 세계는 여러 요소가 쌓이고 모여 이루어졌다는 설) 모두를 지양 극복하는 연기설이었고 건전한 개인의 인격과 건강한 사회 성취를 위한 중도의 지혜였다. 주목할 사실은 석존을 항상 따라다녔던 이른바 상수제자(常隨弟子) 1250인 가운데, 앞에서 본대로 전통 종교적 수행을 하던 가섭 3형제의 무리 1000여명에 이어 신흥종교에 속하였던 사리불과 목건련의 무리 200여명 도합 1200여명이 짧은 기간에 개종을 하고 불제자가 되었지만, 아무런 사회적 비난이나 분쟁을 일으킴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평화롭게 전개된 진리의 설파는 듣는 이들의 내면세계에 감동과 신뢰를 주고 자발적인 신앙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가져올 수 있다는 선례를 보게된다. 비록 석존 재세시의 불교판도는 그 당시의 지정학적인 한계 상황으로 인도 중북부 일대에 한정되었으며, 이웃 종교라야 제도적인 것으로는 바라문종교를 꼽을 수 있고 기타 잡다한 신흥 수행자 그룹이 산견됨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석존의 사상과 교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과 융통성을 기조로 하고 있으므로, 이후 인도 전역과 인도 밖의 지역에 확산되고 세계종교로 전파되어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석존과 그 제자들이 항상 이웃 종교에 대하여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석존의 가르침에서 기존 종교와 체제에 대해 혁명적인 사상을 보면서도, 석존이 자신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혹은 그의 제자들이, 누구와도 폭력과 투쟁을 일으키거나 폐해를 입히며 개종을 강요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고, 평화롭게 공존공생의 길을 가르치고 실천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웃과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공존상생의 불교 정신과 관행은 석존의 입멸이후 계속하여 세계각지에서 전승되어 오고 있다.
2. 초기불교시대
(1) 아쇼카(A oka 阿育 BCE 268-232 재위) 왕
여기서는 편의상 석존 입멸후 200여년 경의 아쇼카 왕을 거쳐 공통기원(共通紀元 CE) 전 1세기 경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을 초기불교시대로 잡고, 이 기간에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불교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불교인 아쇼카 대왕부터 살펴보려 한다. 불멸후 인도에서는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하였는데, 그 와중에 약소국들은 강대국에 병합되어졌다. 대국 가운데 석존이 활동했던 마가다 왕국이 가장 강력하였었는데, 하량카(Harya ka), 샤이슈나가( ai unaga), 난다(Nanda) 등의 왕조에 이어 마우리야(Maurya) 왕조가 일어나 처음으로 인도 전역을 통일하게 된다. 찬드라굽타(Chandragupta)와 빈두사라(Bindus ra) 왕에 이어 제3대인 아쇼카는 인도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고 불교사상을 통해 세계사에 보기 드문 이상적인 통치를 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찬드라굽타는 BCE 317년 왕조 건설후, BCE 327년 알랙산더(Alexandros) 대왕의 인도 침입으로 진행되던 서북 인도지역의 그리스의 군사적 지배권을 몰아내고 이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럽문화와 교섭하였고, 수도 파탈리프트라 (P aliputra 현재의 Patna)에는 시리아와 에집트 주재대사가 파견되어 왔었다. 아쇼카는 동쪽으로는 벵갈 만, 서쪽으로는 아프카니스탄과 아비아해, 남쪽으로는 반도의 최남단, 북쪽은 히말라야에까지 그 통치영역을 확장하여 인도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루었고, 불교신자가 되어 불교성지를 포함하여 각지를 순행하며 주민들에게 정법을 가르쳤고 윤리도덕을 장려하는 등 주요한 법칙(法勅)을 돌기둥이나 바위벽에 새겨 후대에까지 깨우침을 전승하게 하였다. 그는 불교의 포교사를 제국의 변방 및 스리랑카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이집트 등 외국 여러 나라에 파견하였고, 제3결집을 통해 불교경전을 정비하였다. 각지에 수많은 불탑을 증축하고 승단에 공양하며 수많은 불사를 하였고, 아들 마힌다(Mahinda)와 딸 상가미타를 출가시켜 스리랑카에 보내 그 곳의 불교발전에 획기적 역할을 하게 하였다. 그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냥과 수렵을 폐지하고 가축의 도살도 금지하였고, 도로정비와 관계사업 등을 포함한 사람과 동물들을 위한 각종 사회복지 사업을 광범위하게 시행하였다. 군사력 등 폭력의 지배가 아니라 그의 불교사상에 입각한 법력 즉 진리와 정의에 의한 이상적 통치는 전설적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r jan)이 역사에 출현한 것으로 비유되어왔다. 국민들을 위한 그의 각종 치적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법대관(法大官 Dharmamah m tra)을 설치하여 민중을 교화하고 불교뿐만 아니라 바라문, 니간타(자이나), 아지비카 등 모든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 태도로 평등하게 보호하였다는 사실이다.
(2) 메난드로스 (Menandros, Milindra, Milinda 彌蘭陀 BCE 163-105) 왕
아쇼카 대왕이 죽은 후, 마우리야 왕조는 오래지 않아 붕괴되어 숭가( u ga) 왕조(BCE 187-75) 와 남인도의 안드라( ndhra) 왕국 등으로 분열되었고, 서북인도에는 이민족 그리스인 (Yavana, Yona, Yonaka)의 왕들이 침입하여 박트리아(Bactria, 大夏) 등 몇 개의 왕조를 세웠다. 수십명의 그리스계 왕들 가운데 메난드로스는 나가세나(N gasena 那先) 비구와 불교교의에 관하여 담론을 한 후 불교신자가 되었으며, "정의를 지키는 왕"으로서 민중의 신망을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만년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고 그의 유골이 여러 곳에 분배되어 기념되고 유덕이 기려졌다고도 한다. 나가세나 스님은 본래 바라문 출신이었는데, 베다 등 전통종교와 학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교로 전향 출가하여 여러 스승에게 불교삼장을 배우며 수학한 뒤에 깨달음을 얻고, 분명하고 지혜로운 논리로 민중 교화에 탁월하였다. 메난드로스의 도전적 물음에 명쾌히 대답하여 설복한 그는 당대 지성의 고봉이었다. 그들은 왕과 승려의 신분을 떠나 대등한 입장에서 진리를 논하였고, 그들의 문답내용은 『밀린다왕문경』 (Milindapa ha) 또는『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으로 전해지며, 헬레니즘적인 서양사상과 인도적인 동양사상의 만남으로 특기할만하다. 그리스인 가운데는 힌두화된 비쉬누 숭배자도 있었지만, 불교에 귀의한 이의 수가 많았는데, 그렇게 이끌린 이유로는 불교의 평등사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전통 카스트제도에서 볼 때, 그리스인은 야만인(Mleccha)로 분류되며, 바라문교적 사회에서는 그들의 의식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비록 높은 지식과 교양을 갖추었어도 악마(Dasyu)로 경멸되고 배척되어왔다. 반면에 불교는 계급적 차별을 부정하며 만민평등을 주창하고 이민족이라도 차별하거나 적대시하지 않았다. 메난드로스도 불교의 평등사상을 배우고 실천하여 이웃종교에 대해서도 관용과 선정을 베풀었던 모범인물이었다.
(3) 샤카( aka)와 파흐라바(Pahlava)
스키타이인(Scythians)과 파르티아인(Parthians)이 BCE 100년경부터 인도에 침입하여 인도 서북부에 세력을 폈다. 그들이 인도 침입하기 전 거주하였던 샤카스탄 지방에서는 조로아스터교(Zoroastariasm 拜火敎)를 신봉했었으나, 인도에 들어온 이후에는 대부분 인도종교로 전향한 것으로 전한다. 인도종교 가운데 불교에 귀의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 당시는 부파불교시대라서 부파마다의 성전이 형성되었는데 대부분 그 지방의 언어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서북인도의 유부(有部 Sarv stiv din)에서는 산스크리트, 슈라세나 지방의 정량부(正量部 Sa mat ya)에서는 아파브란샤, 아반티 지방의 상좌부(上座部 Sthavira)에서는 파이샤츠, 마하라스트라 지방의 대중부(大衆部 Mah s ghika)는 마하라스트라 언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불교도가 바라문들의 글인 산스크리트를 쓰지 않았지만, 유부가 산스크리트를 쓰기 시작한 것은 당시에 바라문교가 융성하여 산스크리트 사용이 사회에 통용되고 있으므로 그러한 상황에 적응하려 했다고 본다. 석존은 마가다 지방에서 교화할 때 마가다어로 설법했고, 각지의 제자들에게도 현지인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여 그 사회 민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였다. 그러한 전통에 따라, 야바나에게는 야바나의 사용어, 샤카에는 샤카어가 쓰이게 되었다. 이렇게 불교인들은 원래 각 지역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며, 현지인들이 불교전승의 언어에 적응하기 힘들면 불교인들이 현지인 상황에 적응하여 현지인들의 편의와 복리를 위해 배려하여왔는데, 이러한 융통성은 이웃종교들에게도 독선적이고 공격적이기 보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공존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중기불교시대
(1). 카니시카(Kani ka 迦 色迦) 왕
서북 인도에는 월지국에 이어 쿠줄라카드피세스(Kujulakadphises)가 쿠샨(Ku an 貴霜) 왕조를 일의켰고, 비마카드피세스(Vimakadphises)에 이어 카니시카가 계승한 후, 이란 동북부로부터 아랄해에 이르는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다. 그 당시 여러 곳에서는 각 집단의 교학적 선호에 따라 여러 부파로 교단이 분열되어 있었고 아울러 새로운 모색이 있었지만, 서북지방에는 유부의 교세가 가장 강하였다. 카니시카는 선왕이 힌두교를 신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교단보호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그리스풍의 헬레니즘적 예술을 접목시킨 이른바, 간다라 미술의 흥륭은 그의 치세에 최성기를 맞았고 이후 아시아 미술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게되었다. 그는 당시의 고승 아슈바고샤(A vagho a 馬鳴) 등으로부터 학습과 지도를 받았고 궁중내외와 각지에 많은 사찰과 탑을 세웠으며, 여러 곳에서 보내온 인질들에게 불법을 가르친 후 사면하여 본국으로 귀환시켰다고 한다. 그는 불교정신에 따라 개방적이며 관용적인 태도로 이웃종교에게도 친화하고 종교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며 추구하여야 함을 보여주었다.
(2). 대승불교의 흥기
본래 불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신흥 상공업자들의 지지와 협조로 성립 발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농경문화에 기초를 두었던 바라문교는 열세를 면치 못하였었다. 그 후 수세기를 거치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불교계가 20여 부파로 나뉘어지며 수도원 중심으로 전문적 교학에 치우쳐 사회적 활기를 잃어갔고, 특히 마우리야 왕조의 붕괴 후부터 수백 년 간 침체하는 동안 바라문교는 토착적 요소와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고 정비하여 힌두교로 변화되면서 서서히 사회의 종교 문화적 주도권을 만회하기 시작하였다. 힌두교(Hinduism)의 주요 요소는 비쉬누(Vi u) 신의 숭배로 대표되는 일신교적인 박티(Bhakti) 신앙과 시바( iva) 신 숭배로 결집된 토착신앙이다. 비쉬누 신앙의 특징은 바가바트(Bhagavat 世尊) 신앙과 아바타라(Avat ra 化身 權現) 신앙인데, 힌두교인들은 석존도 그 여러 화신중의 하나로 본다. BCE 1세기 경부터 출가자 중심의 부파불교의 한계를 넘어서 재가불교인들의 비중이 커진 대승(大乘 Mah y na) 불교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대승을 자처하는 이들은 개인적 해탈의 이상인 아라한(阿羅漢 Arhan) 중심의 전통불교인들을 소승(小乘 H nay na)이라 폄칭하고 자기들은 대중을 위한 부처님 중심의 신행을 추구하며, 이웃과 중생을 보살피고 깨우치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이상적 인격으로 삼았다. 스스로 출가 수행하기 어려운 민중들에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부처님의 자비행을 펼치는 보살이 신행의 중심이 되었고 이는 힌두교의 박티 신앙과 유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대승사상을 교리로서 제시하는 많은 경전 가운데 주요한 것으로서는 『반야경』 (般若經 Praj ap ramit -s tra), 『법화경』(法華經 Saddharma pu ar ka-s tra), 『화엄경』(華嚴經 Buddh vata saka-s tra), 『아미타경』 (阿彌陀經 Sukh vat vy ha-s tra) 등을 들 수 있다.
『반야경』은 지혜의 완성을 가르치고 이끄는 것으로 그 진리를 공(空 nya)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연기법에 기초하여 중도의 실상을 가르치며 어떤 것을 절대화하고 집착하는 데서 오는 병통을 고쳐 자유와 해탈의 길로 인도한다. 궁극적으로는 불교 자체에까지도 집착하지 않도록 하며 항상 열린 자세로 일체를 용납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법화경』은 공사상을 기초로 하면서 새로운 불타관을 제시하고 있으니, 부처님의 본성은 법신불(法身佛)에 있고 역사에 출현하심은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보이며, 모든 교설의 차이도 결국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궁극적 목표인 성불에 이끄는 부처님의 자비방편임을 설명한다.『화엄경』 역시 공사상에 기초하여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우주의 진리를 발현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로부터 나타난 진리의 세계(法界)가 법신불인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불의 현현(顯現)이며, 일체 모든 것이 전부 한없는 연기(重重無盡 緣起)로서 비로자나이며 법신은 진리 그 자체임을 깨우친다. 아울러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르면서 하나이고(一卽一切 多中一), 진리와 현상이 둘이 아니며 걸림이 없이(理事不二 一切無碍) 서로 어울어져(相卽相入) 있으므로, 자기와 남이 모두 이로웁고(自利利他) 원만한 수행을 하도록 가르친다. 그 유명한 말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조화(一切唯心造)"라든가, "마음과 부처 및 중생, 이 셋에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라는 등도 각자의 마음가짐을 깨우치는 경구이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가장 중요한 품의 하나인 「입법계품」(入法界品 Ga vy ha)로서 선재동자의 구법행(求法行)을 통해, 그는 불교계 내부의 스승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신분과 직업의 인물들에게도 찾아가 배울 필요가 있음을 가르친다. 즉 이웃종교인도 존경하며 배울 것은 배우는 열린 마음을 가질 것을 실천해 보인다고 하겠다. 『아미타경』은 한량없는 수명과 빛(無量壽 Amit yus 無量光 Amit bha)의 존재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부처님을 보이며, 그러한 존재와 세계도 한 수행자(法藏比丘)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음을 통하여 큰 뜻과 바램을 같고 수행하기를 가르친다. 염불을 통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신앙체계를 통하여 민중들에게 쉽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신앙방법은 힌두교의 박티 신앙이나 조로아스터교와의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하여 성불하기 힘든 이들에게 불보살의 가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서, 신에 의지하여 구원을 기대하는 신중심적 종교와 유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음은 대승불교의 여러 가지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
대승불교의 실천 수행방법으로서 육바라밀(六波羅密 a -p ramit ) 혹은 십바라밀(十波羅密Da a-p ramit )이 널리 알려져 있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 D na), 지계(持戒 la), 인욕(忍辱 K nti), 정진(精進 V rya), 선정(禪定 Dhy na), 지혜(智慧 Praj ) 바라밀로서, 바라밀이란 수행의 완성 혹은 안락의 피안에 이르는 길이란 뜻으로 통한다. 보시는 이웃에게 재물과 가르침(法)을 베풀고 편안하게(無畏) 해주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였다는 생각마저 버리며, 자신의 탐심을 끊고 집착을 떠나 이웃과 나누는 윤리적 실천이다. 지계는 받은 계율을 지켜 악을 막고 선을 행하며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는 윤리적 삶의 방법이다. 인욕은 남으로부터 받는 모든 박해와 고통을 참으며 원한과 노여움을 내지 않고 그 인연을 관찰하여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정진은 신심을 가다듬고 힘써 수행하며 선한 생활을 오로지 하는 것이고. 선정은 마음의 혼란을 안정시키며 정신을 집중하여 고요히 사유하고 진리를 참구하는 수행이며, 지혜는 어리석음을 고쳐 진리를 깨닫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십바라밀은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Up ya), 원(願 Pra idh na), 역(力 Bala), 지(智 J na) 바라밀을 추가한 것이다. 방편은 효과적인 방법으로 중생을 인도하는 것으로서 주어진 상황에 가장 적절하고 훌륭한 교화방법을 가리키고, 원은 목적을 성취하고자 발원하고 추구하는 결의를 뜻하며, 역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고, 지는 일체의 일과 도리를 분명히 판단하고 올바른 결정을 하며 궁극적으로는 번뇌를 끊고 해탈을 성취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보살행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로서 사섭법(四攝法 Catru-sa graha-vastu)이 주목된다. 중생을 섭수하여 깨달음에 이끄는 네가지 방법으로서 보시,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 하는 것인데, 보시는 누구에게나 물심 양면으로 베풀어 주는 것이고, 애어는 상대를 부드러운 말로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며, 이행은 이웃에게 이롭게 하는 모든 행위이고, 동사는 이웃의 상황속에 들어가 고락을 함께하며 더불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동사섭법의 실천이 강조되는데, 이는 이웃에게 소외감이나 차별의식이 없이 공동체 정신으로 친근히 호흡하게 하는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또한 가장 행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십바라밀행이나 사섭법이나 결국 개인을 포함하여 대중들 나아가 일체중생의 구제와 성불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수행이며 생활 방법이므로 불교인은 물론 이웃종교인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을 망라하여 자연에 이르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3). 나가르쥬나(N g rjuna 龍樹)
북인도가 쿠샨왕조 하에 통치될 때, 남인도에는 샤타바하나( tav hana) 왕조의 안드라(Andhra)왕국이 번성하였고 3세기경의 나가르쥬나에 의해 저간의 대승불교가 정비되고 발전되었다. 이 지방에는 힌두교가 새롭게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며, 나가르쥬나도 젊어서는 바라문 교학에 정통했었고 향락에 젖었었지만 후에 불교에 귀의하고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유부계의 부파불교를 공부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대승경전을 구하러 편력하다가 마침내 대승의 교리를 체득하고 스스로 종합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의 주요 저술인 『대지도론』(大智度論)은 『반야경』의 종합적 주석서이고,『중론』(中論 Madhyamakak rik )은 그 경의 공(空)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으로서 공관(空觀)으로 논증법을 확립하였으며 후대 교학에 불멸의 영향을 끼쳤다. 연기(緣起)를 생멸(生滅), 거래(去來), 일이(一異), 단상(斷常)의 대립을 넘어선(八不) 것으로 해석하여 어떤 고정적인 견해에 집착함을 부정하며 이 논리로 공(空)을 표현하고 그 상태가 실상(實相)이라고 했다.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제일의제(第一義諦 Param rtha-satya 眞諦)라 하고 방편의 입장을 세속제(世俗諦 Sa v ti-satya)라고 했으며, 이 두 가지 진리(二諦)를 포괄하여 성립시키는 근거로서의 공을 중도(中道 Madhyam pratipad)라 했다. 이는 이후 대승불교의 진리관이며 수행관의 기본이 되었고, 복잡한 상황 아래 실천의 대안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나가르쥬나의 주된 논법은 프라상가(Prasa ga)라하여 반대론을 깨트리기 위해 상대편 논리의 모순을 찾아 오류를 지적해내는 방법으로서 외도설을 논파하는데 적용하였다고 한다. 나가르쥬나가 가르친 공사상은 이웃종교들을 포괄해 낼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으며, 독선적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논법이라고 할 수 있다.
(4).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4세기초 중인도를 평정하고 일어난 굽타(Gupta) 왕조 시대에, 대승불교 집성자로서 나가르쥬나의 중관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4-5세기 경, 형인 아상가(Asa ga 無着)와 함께 유식(唯識 Vij ptim tra)학을 대성시켜 유가행파(瑜伽行派 Yog c ra)의 전통을 이룬 바수반두가 있다. 원래 북인도의 바라문족 출신이었으나 불교에 출가하였는데 먼저 유부에서 수학하여 『구사론』(俱舍論 Abhidharmako a)을 지었고, 형을 따라 대승에 전향한 뒤로는 대승경전들을 공부하고 나름대로 체계화 한 후, 『유식이십론』 (唯識二十論 Vi atik )과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Tri ik )을 지어 유식학의 기초를 다졌다. 전자는 불교 안팎의 이단적 학설을 논파하고 오직 존재하고 인식하는 것은 주체적인 식(識)뿐이며 대상(外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후자는 아뢰야(阿賴耶 laya) 식에서부터 모든 법이 전변(轉變 Pari ma)하는 순서를 설하고 유식관(唯識觀)에 들어가 전의(轉依)하는 실천의 순서를 읊었다. 바수반두는 그의 저작을 산스크리트로 하였는데, 이는 그 당시에 산스크리트가 사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지식인들의 저술은 모두 산스크리트로 하는 관행을 따른 것이다. 불교인들이 민중을 위하여 속어주의(俗語主義)를 포기한 듯이 보이지만, 바수반두의 판단으로는 산스크리트로 저술함이 그 사회에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힐 수 있고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줄 안다. 당시의 모든 불전 특히 대중을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 경전이 산스크리트로 기록되었음이 주목된다. 바수반두의 종교적 편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누구라도 한 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소양을 갖추고 기존의 관행에 만족할 수 없으면, 진리를 찾아서 구도자의 문제의식과 열린 마음으로 이웃종교도 배우고, 스스로의 수행과 확신 속에 얻은 보람과 결과를 이웃에게 나누며, 그 방법도 억지와 폭력이 아닌 논리와 설득으로 깨우침을 펼쳐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후기 대승경전들
2-5세기경에 새로운 관심을 일으켰던 유력한 대승 경전들을 보면, 『여래장경』(如來藏經), 『승만경』(勝 經), 『열반경』(涅槃經)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여래장설을 고창하고 『해심밀경』(海深密經)은 유식설을 선양하였으며, 『능가경』(楞伽經)은 여래장과 아뢰아 식을 동일시하여 그 융합을 설한 것이다. 여래장설은 부처님의 법신과 지혜는 보편하므로 우주에 두루하고 있음에 근거하여, 모든 중생도 여래의 몸 안에 있으므로 여래의 태아(如來藏 Tath gata-garbha)라는 선언이며, 언제인가 여래로 성숙될 수 있으며 모두가 하나같이 평등하게 존엄한 존재라는 일승(一乘)사상이다. 특히 『열반경』에서는 여래장이 불타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설하며 이를 불성(佛性 Buddhadh tu)라고 부른다. 일승설을 기본으로 하여 여래 법신의 상주불변성(常住不變性)과 불성의 변재성(遍在性)을 강조하여 이른바,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하며 모두에게 성불의 가능성을 일깨우고 있다. 『해심밀경』은 마음의 본질이 아뢰야식에 있다고 설하여 유식설의 전거가 되고 있으며, 『능가경』은 가장 늦게 나와 앞의 제설을 유심설(唯心說)로 종합하고 있다. 이러한 교리사상은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이웃종교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들이 다 진리를 깨닫고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각자가 모두 존귀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서로 존중하고 협조하게 하는 평화와 자유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4. 후기불교시대
(1). 이교도로부터의 피격과 말법사상
5세기 말 서북인도에 흉노(匈奴 H a)와 친연관계가 있는 에프탈리트(Ephtalites)가 침입하였다. 토라마나(Toram na)와 미히라굴라(Mihiragula) 2대에 걸친 공격으로 굽타왕조는 쇠약해졌고, 비록 6세기 초에 야쇼다르만(Ya odharman)이 미히라굴라를 격퇴했지만(528), 결국 제국은 분열되고 왕조는 붕괴하게 되었다. 불교는 캐시미르 지역에서 미히라굴라의 박해를 받아 거의 멸망에 이르렀다. 에프탈리트인들의 불교파괴는 당시 불교사상에도 영향을 끼쳐 말법사상(末法思想)을 일으킨 원인으로 보인다. 인도는 7세기 전반(606-646) 하르샤바르다나(Har avardhana 戒日王)에 의해 일시적으로 통일상태를 유지하였는데 그는 중년이후 불교에 귀의하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작품활동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 하르샤바르다나 사후 인도는 다시 분열과 쇠약으로 무슬림의 침략을 받게되고 마침내 13세기초부터는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며 불교도 소멸하게 된다. 불교인들은 교리적 제약하에 타종교의 공격을 비폭력 무저항으로 받아드렸고 무분별한 파괴를 당하였다. 8세기 중엽부터 11세기 경까지 다소 세력을 유지한 왕조는 데칸고원 지역의 라쉬트라쿠타 (R akuta) 왕조(750-975c), 서인도의 프라티하라(Prat h ra) 왕조(750-1000c), 동인도의 팔라(P la) 왕조(750-1100c)인데, 불교를 보호하고 특히 밀교 발전에 크게 협조한 것은 팔라 왕조였다. 밀교가 발흥한 현상은 불교인들이 외침과 내분 등에 의해 혼란한 세상을 겪으며 조성된 불안과 허무주의적 정서의 발로인 말세관념과 아울러 힌두교의 박티 사상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7세기 후반부터 인도사회는 바라문들이 권위를 되찾고 북인도는 시바파, 남인도는 비쉬누파를 중심으로 하여 힌두교가 발전하였다. 8세기 이후 힌두교의 미맘사(Mim s )학파와 베단타(Ved nta)학파의 활성화와 아울러 불교비판이 심해지며 중관파와 유가파 모두 활력을 잃어갔다. 당시 미맘사파의 거장 쿠마릴라(Kum rila)와 베단타파의 샹카라( a kara)는 모두 불교를 잘 알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즈음 불교는 날란다를 중심으로 중관파와 유가행파가 경쟁하며 다소 교학을 발전시켰고 유부와 경량부 등의 활동도 있었지만, 민중들에게는 밀교(密敎)가 성행하게 되었다.
(2) 밀교의 흥기
밀교란 비밀불교(秘密佛敎)의 약칭으로서 불교내외의 복잡한 요소가 혼합되어 성립된 것이다. 그 특징으로서는 주술적(呪術的)인 의례(儀禮)를 조직화한 점과 신비주의(神秘主義)적 경향이다. 주술은 원래 신(神)이나 영혼, 운명이나 자연현상 등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일어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신비적 수단을 사용하여 바라는 바를 이루어 보려는 수단이며, 신비주의는 신이나 불보살 등 절대적인 존재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자들이 자력위주로 수행한 초기불교전통과 달리, 대중구원을 주창하고 그를 위한 방편사상이 강하며, 타력의 가피를 인정할뿐만 아니라 이웃종교에 대하여도 관대했던 대승불교는, 종래에 예배해 오던 불보살 들과 더불어 상황적으로 유력한 존재들을 포함하는 의례를 개발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힌두교의 신행방법도 참조하였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밀교는 진언승(眞言乘 Mantray na)과 금강승(金剛乘 Vajray na)로 대별되어 전승된다. 진언승은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데, 핵심 교설은 지혜와 방편이다. 대승불교의 공성(空性)을 인식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 지혜를 구현하여 현실의 상태를 긍정하게 한다. 지혜를 구하는 마음(菩提心 Bodhicitta)과 중생구제의 자비(Karu ) 및 그로부터 나온 방편(Up ya)을 가르친다. 그 수행방법으로는 요가로서 다라니(Dh ra 摠持), 만트라(Mantra 眞言), 무드라(Mudr 結印), 만다라(Ma ra 圖像) 등이 결부되어 시행된다. 이러한 방법은 기존의 불교수행법과 현격히 다른 것으로 많은 부분이 힌두교의 제의와 유사한데 이는 불교인들이 이웃종교와 습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승도 공성에 기초하고 진언승과 같이 지혜와 방편을 표방하나 성적 쾌락과 결부하여 수행되므로 피상적 모방은 문란하고 타락하기 쉬운 위험이 있다. 금강승에서는 요가의 수행에 있어 지혜를 여성으로 방편은 남성으로 비유하여 남녀의 교합에서 오는 쾌락을 해탈로 묘사함으로서, 힌두교의 탄트라(Tantra)에서 시바와 샥티( akti 性力)의 관계와 비유할 수 있다. 금강승의 일파인 시륜승(時輪乘 K lacakray na)은 윤회의 고통을 과거, 현재, 미래의 삼시에 한정된 미망으로 보고 본초불(本初佛 dibuddha)을 신앙하므로서 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시륜승은 인도 밀교의 최후에 성행하다 무슬림 침공으로 인도가 유린될 때 티벳으로 유입되어 그곳에서 전승되어 온다. 후대에 오면서 밀교를 말할 때, 일부 타락한 금강승을 좌도밀교(左道密敎)라 하고 진언승은 우도밀교(右道密敎)라 하게되었다. 좌도밀교는 힌두교와 교섭한 성향이 짙다.
(3) 무슬림 침공과 불교의 잠적
7세기에 아랍 지역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는 동쪽으로 확산되어 8세기초에 이미 이란, 중앙아시아, 아프카니스탄 지역에 까지 뻐쳤다. 10세기 말 투르크(Truk) 계통의 가즈니(Ghazn ) 왕조는 인도정벌을 시작하여 마흐무드(Mahmud)는 11세기 초에 북인도의 절반을 함락시켰다. 약 30여년에 걸친 침략과 약탈 및 학살과 방화는 그 지역의 불교 사원을 황폐화시켰다. 마흐므드가 죽고 가즈니 왕조가 무너진 후 일어난 구르(Gh r) 왕조는 12세기 초 무함마드(Muhammad)가 판잡과 구자라트 지역을 침략하여 북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13세기 초에는 벵갈 만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무함마드가 죽은 후, 그의 부장 아이바크(Aibak)가 델리에 무슬림으로는 처음으로 궁정을 짓고 이른바 노예왕조(奴隸王朝)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203년 그 당시 불교계 최대 사찰인 비크라마시라 사원이 파괴되고 그후 불교는 인도 본토로부터 모습이 사라졌다. 무슬림의 침공으로 불교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가 피살되거나 혹은 국외로 도피하여 불교교단이 해체되었음은 정치사회적 현상이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그 이전부터 불교가 힌두교와 습합하고 밀교화되면서 인도의 주류정신문화 속에 편입된 것으로 본다. 힌두교인들이 석존을 비쉬누신의 화현으로 믿고 신앙하고 있으므로 불교가 그들의 체계속에 상존한다고 함은 주목할 만 하다. 힌두교란 인도인들의 종교라는 인식으로 보면 타당한 언명이다. 아무튼 이즈음 불교인들이 인도 안에서 이웃종교에게 대응한 태도를 말한다면, 불교 본래의 특성에 따라 비폭력 평화주의로 일관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면서도 물리적 자기 방어를 자제하였고, 정신적으로는 집단이기주의를 넘어서 종교간 경쟁의 갈등을 피해 조화와 습합으로 적응하였음을 볼 수 있다. 즉 불교인들은 그들의 교리대로 무상을 체달하고 공으로 돌아갔다고 하겠다.
5. 근대의 불교 부흥
13세기 초 불교가 사라진 이후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대립 각축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시크(S kh)교 같이 힌두교 내부에서 이슬람 영향을 받아 새롭게 조직한 신흥종교도 있고, 무슬림 가운데도 힌두사상에 영향을 받은 듯한 수피(Sufi) 같은 신비주의의 발생을 볼 수 있다. 인도에서 석존이 위대한 선각자로 새롭게 부각되고 불교가 다시 관심을 받게 되기는 19세기 영국의 지배하에서였다. 비베카난다(Vivek nanda 1863-1902) 같은 종교개혁자, 타골(Tagore 1861-1941) 같은 시인, 간디 같은 사상가, 네루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그들 각자의 관심사를 추구하면서 석존으로부터 지혜의 빛을 받았고, 불교문헌을 해독한 영국인들을 비롯한 서양 학자들은 그들 세계 밖의 더 큰 세계를 불교에서 발견하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웃 종교인들과 일반 지성인들에게 불교의 보편성과 평화적 교리가 호감을 갖게 한 것이다.
(1). 다르마팔라(Dharmap la 1864-1933)
불교인의 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사례로는, 스리랑카 출신인 다르마팔라 스님이 신지(神智)운동가인 미국인 올콧트 대령의 도움으로 1891년 콜롬보에서 대각회(Mah bodhi Society)를 창설하고 다음에 캘커타로 옮겨 기관지(The Mah Bodhi Journal) 등을 통해 불교 부흥 운동을 한 일이다. 그러한 노력 끝에 20세기 초에는 캘커타에 불교사원이 건립되고, 1953년에는 붓다가야의 근본대탑이 힌두교인들로부터 불교인들에게 관리권이 이양되었다. 그러한 결과는 이웃종교인들에게 억지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화와 설득을 통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불교정신에 입각한 노력의 효과라고 하겠다.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도 불교를 연구 교육하고 불교자료의 발굴과 출판사업 등 불교의 부활이 진행되어왔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은 특정 종교로서의 불교를 위해서라기 보다 종교를 초월한 훌륭한 인류문화를 모든 종교인과 일반인들에게 공유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2). 암베드카 (Ambedkar 1891-1956)
20세기 후반에 벌어진 획기적인 사례는 암베드카 박사의 업적인데, 그는 하층계급출신이었으나 구미에 유학하여 법률과 경제를 공부한 후, 귀국하여 봄베이 주정부 요직을 거쳐, 영국으로부터 독립후, 민주공화국 헌법기초와 중앙정부의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하면서 불교의 평등과 자비사상에 감동되여 그 뜻을 사회에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마침내 출가하였고, 그를 따르는 수십만명이 동시에 불교로 귀의하였다. 그는 봄베이에 불교협회(Bharat ya Buddha Mah sabh )를 창설하였고봄베이와 오랑가바드에 대학들 (Siddhartha College, Milind Mah Vidy laya)을 설립했으며, 그후 끊임없이 포교를 하여 지금은 그를 따르는 신자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른다. 그러한 그의 불교적 삶과 일련의 활동은 이른바 "신불교도(Neo Buddhist) 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새로운 대승불교 운동이라고 하겠다.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참여한 암베드카와 진보적 민족지도자들은 평등한 민권 신장에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래로 고착된 신분체계는 아직도 관행으로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암베드카가 솔선수범하여 계급타파운동을 벌이고 소외된 하층민들을 깨우치며 그들의 권익을 위하여 불교정신을 실현시키려고 전력투구하였음에 회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이웃 종교인들도 불교적 평등자비 정신에 공감하고 사회정의 실현에 협조해 온 줄 안다.
(3). 달라이라마
근래의 불교상황을 보면,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도에의 접근이 용이해진 관계로 세계 각처의 불교도들이 석존의 성지를 순례하려고 방문하며, 대부분의 불교국들이 성지 주위에 자체 사원을 건립해 온 까닭에 사원의 수도 많아지고 불교인의 수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특히 달라이라마가 1959년 티벳으로부터 인도로 망명한 이후 티벳불교가 확산돼 왔고, 그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되고부터는 그의 활동이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인도 국내의 불교의 부흥을 촉진시키고 있다. 그는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이웃종교인들에게도 큰 존경과 호응을 받고 있는데, 그의 불교적 평화와 자비의 메시지가 모두에게 공감되기 때문이다.
인도 국외 불교인들의 이웃종교 관계
불교가 인도 주변지역으로 전파되면서 현지의 토착종교나 기존의 세계종교와 만나게 되는데, 그 대응이 각 지역의 환경과 문화특성에 따라 달랐음을 보여준다. 먼저 이른바 "남방불교"로 통하는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 그 다음으로 "북방불교"로 통하는 대승불교, 끝으로 "서양불교"로서 구미지역의 불교 전파과정과 발전에 따른 이웃종교인들과의 관계를 보며 불교가 그들에게 어떻게 적응하였나 중요한 사례들을 더듬어 본다.
1. 동남아시아
(1), 스리랑카
스리랑카에는 마힌다 스님이 BCE 3세기에 처음 불교를 펴기 시작하였는데, 데바남피야 티사(Devanampiya Tissa BCE 247-207 재위)왕이 귀의하였고, 아누라다푸라(Anur dhapura)가 마하비하라(Mah -vih ra 大寺)를 건립하여 기초가 이루어졌다. 처음 상좌부(Therav da) 전통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약 200여 년 후, 대승불교도 함께 신앙하는 아바야기리 비하라(Abhayagiri-vih ra 無畏山寺)가 건립되어 각축하다가 결국 마하비하라 전통이 유지되어 오늘에 이른다. 주목할 사실은 5세기 무렵의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가 삼장(三藏)을 정비하고 주석서를 편찬하여 상좌부 교의를 집대성 하였던 일이다. 그는 본래 인도 마가다의 바라문 가정 출신이었으나 불교에 감동하여 출가한 후 불교연구에 힘썼다. 스리랑카에 불교자료가 많음을 듣고 건너와 토착어인 싱할리스로 된 주석서를 수집 편찬하여 마가다어 즉 파리어(P li)로 번역하여 후대 남방불교의 토대를 확보해 놓았다. 불교의 정통성 확립과 아울러 지역적인 불교학을 보편화하는데 공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스리랑카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인도와 밀접하게 교섭해 왔지만 전통불교를 잘 유지해 오고 있다. 이웃종교로서 고대에는 힌두교와의 관계가 전부였지만 후대에 회교와 기독교가 들어와 공존하고 있으나 현재 국민의약 70%가 불교이고, 힌두교도는 20%, 회교와 기독교가 10% 정도로 알려진다. 비록 힌두교인이 다수인 타밀족과 불교인이 다수인 싱할라족의 정치적 불화가 있으나 불교인들은 이웃종교인들에게 평화적 해결을 주창하고 있다고 전한다.
(2). 버마
BCE 3세기경 불교가 소나와 웃타라는 인도승에 의해 전해졌다고 하나 실제로는 CE 4-5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인 불교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8세기경 아리(Ari)라고 하는 좌도밀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부류가 들어와 승단이 문란해졌었으나, 11세기 중엽 파간(Pagan) 왕조의 아나우라타(Anawr tha 재위 1044-1077)의 노력으로 혁신 정비되었다. 19세기 말 이른바 제5결집으로 부르는 삼장교열과 석판조성작업을 하였고 1955년 제6결집을 하여 근대 문서의 형태로 하였다. 불교가 주류를 이루며 정통성 확보에 노력하였지만 이웃종교들과는 평화를 유지하였다. 1948년 공화국으로 불교정신에 입각한 사회주의정책을 주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버마 불교인 우탄트(U Tant) 씨가 UN 사무총장으로 재직시에, 석존의 가르침이 오늘날 세계평화운동에 가장 유효하다는 인식으로, 그 비폭력 자비정신을 현창하려는 사업을 펼치며 석존의 탄생지인 룸비니 개발계획을 발의하는 등 국제적 관심을 일으켰다. 근래에도 정치적 상황은 불안하나 국민들은 상좌부 전통의 신앙을 유지하며, 기독교 등 이웃종교와 평화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특히 비파사나 명상법이 널리 알려져 서구인들을 포함한 외국인들도 그 수행을 학습하고자 모여들어 수많은 명상센터가 설립되고 있는데 대부분 무료로 제공되고 있는 상황이 주목된다. 명상은 지혜를 얻고 평화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인 줄 안다.
(3). 타이랜드,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지방은 오랫동안 여러 종족이 교체되며 주변국들에 지배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13세기 운남지방에서 남하한 수코타이족의 수코다야(Sukhodaya) 왕국이 세워진 후에야 비로서 국가로서 안정되었고 상좌부 불교가 정착되었다. 14세기 후반 아유티야(Ayuthia) 왕조를 거쳐 18세기에 현재의 방콕왕조가 세워졌으며, 역대 왕들이 모두 충실한 불교인이었고 국민들 절대다수가 불교를 신앙하여왔다. 회교인과 기독교인들이 다소 있어도 이웃종교간 평화를 유지하며 불교국의 면모를 지켜 왔다.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불교는 태국불교가 전파된 것으로서 상좌부 전통에 속한다. 모두 불교가 국교적 지위에 서서 사회문화를 주도해 오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끝에 독립을 이룬 후 근래에 공산정권을 통해 엄청난 수난을 겪었지만, 대다수 국민은 불교에 귀의하여 정신적 안정을 구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전신 크메르(Khmer) 왕국이 12세기 초에 세운 세계적 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Angkor Vat)는 힌두교와 불교가 공존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이 주목된다.
(4). 베트남
이 지방의 불교는 중국의 대승불교와 남방의 상좌부 불교가 병존하는 특수한 경우이지만, 베트남 고유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유교와 도교 및 토착종교들과 친화하며 공존해 왔음을 가리킨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로 소수의 가톨릭이 정치적 세력을 갖고 다수의 불교인들을 무시하며 독선적으로 나아갈 때도, 그 시정을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불교적 평화 시위였으며, 분신자살을 한 승려도 있었지만, 결국 정의에 입각한 평화공존의 방법을 견지하였다. 20세기 후반 남북간 통일전쟁에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었고, 결국 공산 사회주의 정부가 집권하고 있지만 종교간 갈등은 없는 줄 안다. 베트남 출신의 틱낱한 스님은 현재 프랑스에 머물고 있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듯이 평화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인데, 이웃종교와 협조하는데도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5). 인도네시아와 말래시아 등 기타지역
동남아 해안 도서지방엔 해로를 통한 상업 및 문물의 유통과 교류를 통해 불교와 이웃종교들이 전파되었다. 수마트라와 자바에는 공원 전후 무렵부터 인도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지만, 7세기 말 수마트라에 스리비자야( r vijaya) 왕국이 일어나서 대승불교를 보급시켰는데 말레이 반도까지 미쳤다고 전한다. 자바에는 8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샤이엔드라( aiendra) 왕조가 통치하며 대승불교를 신앙하였는데, 보로부두르(Borobudur) 대탑과 사원은 그 시기의 불교상황을 짐작케 한다. 14세기에 스리비자야 왕국이 쇠퇴하고 마자파히트(Majapahit) 왕조가 융성하면서 점차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마침내 발리섬을 제외한 인도네시아 전지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발리섬에는 아직도 힌두교와 불교가 유지되고 있으며, 그밖의 지역은 싱가폴 등 화교들이 많은 곳에서 불교가 신앙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의 보도가 전하듯이 이 지역에는 무슬림과 크리스챤들 사이의 분쟁이 심하지만, 불교는 이웃종교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보로부두루의 부조벽화의 일부가 보이듯이 선재동자의 구법활동은 이웃종교인들에게도 배우고 함께 하는 불교정신으로 관용과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2. 동북아시아
(1). 서역
서역은 중국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며, 실크로드(Silk-road)의 동쪽부분을 의미한다. 이 지역에 불교가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BCE 3세기 무렵으로 아쇼카 대왕이 파견한 전도사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중국과의 교역로를 중심으로 불교가 확산되어 갔지만, 이미 그 지역에 세력이 있었던 이란인, 로마인, 터키인과 토착민들의 영향을 받아 인도와는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실크로드에서 타림분지의 중앙 타클라마칸 사막 양쪽의 길 즉 천산남로(天山南路)로 불교가 전파된 것으로 본다. 남쪽으로는 코탄(Khotan 于 )을 중심으로 동 이란 방언이나 카로스티(Kharo i) 문자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대승불교를 신앙했고, 북쪽으로 쿠자(Kuch 龜玆), 카라샤흐르(Karashahr), 투르판(Trufan) 등을 중심으로 인도나 유럽계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유부 등 부파불교를 따른 것으로 전한다. 5세기 경에는 투르크인들과 소고드(Soghd)인들 가운데도 대승불교와 밀교가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지루가참(支婁迦讖), 안세고(安世高, 강승회(姜僧會), 축법호(竺法護), 구마라집(鳩摩羅什) 등 4세기 무렵까지 중국불교 초기의 대표적 역경승들과 불도징(佛圖澄) 등 고승들이 거의 서역출신이었음이 주목된다. 이들은 모두 그들의 불교를 중국에 전하는데 있어서, 먼저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 봉사하였으며, 이웃종교인들과도 평화롭게 공생하였음을 보여준다.
(2). 티베트
티베트는 지정학적으로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로서, 고대의 역사는 알 수 없다. 알려진 바로는 7세기 전반에 재위한 송첸감포(Sro -btsan-sgam-po ?-649)가 전 티베트를 통일하고 중국의 사천지방까지 진격하였는데, 그때 당(唐)은 화친을 위하여 문성(文成)공주를 티베트에 시집 보냈고, 그녀와 시종들이 불교신자이므로 그곳에 가서 불교신행을 하여 불교를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송첸감포는 네팔에도 세력을 뻗쳤고, 불교에 관심을 갖은 후, 톤미삼포타(Thon-mi- sam-bho- a)를 인도에 파견하여 인도문화를 배우게 한후, 불교를 받아드리며 불경 번역을 위해 티베트 문자를 만들고 문법책을 짓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티베트가 중국보다 서역과 인도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전래가 700여년이나 늦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후반 치송데첸(Khri-sro -lde-brtsan 754-797)왕으로부터 초청받은 샨타락시타( antarak ita 寂護),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 蓮花生)에 의해 인도불교가 성행했고, 카말라실라(Kamala ila)는 중국의 마하연(摩訶衍) 선사(禪師)와의 토론에서 인도불교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티베트에는 본래 무교(巫敎)적인 본(Bon)교가 행해져 왔었는데, 파드마삼바바가 밀교를 들여와 라마(Lama)교를 창시한 후, 금강승과 시륜승 및 본교와 습합하여 독특한 티베트 불교로 전승되어 온다. 13세기 중엽, 사캬파(Sa-skya-pa)는 몽고가 중국에 세운 원(元)과 관계를 갖
고 티베트 내의 종교는 물론 정권까지 장악하였는데, 14세기 후반에 총카파(Btso -kha-pa)가 교단을 개혁하고 개창한 게룩파(Dge-lugs-pa)가 등장하였는데, 그 후로부터 달라이라마 체제가 유지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의 달라이라마는 텐진 갸츠오로 제14대이다. 그는 1959년 중국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망명한 후, 더불어 탈출한 라마들과 함께 티베트 불교를 세계에 펼치고 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불교에 따라 비폭력적 방법으로 일관함으로서 그에게 1989년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다. 그는 외국의 이교도들에게 설법하면서, 각자가 이미 갖고 있는 종교를 더욱 잘 신앙하도록 장려하며 불교에로의 개종을 삼가하도록 권하고, 평화와 자비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이웃종교인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도움을 받고 있다.
(3) 중국
불교가 서역을 거쳐 중국에 전래된 시기는 1세기 후반이다. 중국 불교의 흐름은 전한(前漢)으로부터 동진(東晋)에 이르는 동안 불경(佛經)의 한역(漢譯)과 사원의 건립 등 전역(傳譯) 확산시대와, 남북조(南北朝)에 이르는 연구시대, 수(隋)로부터 당(唐)에 걸친 건설시대, 오대(五代)로부터 명(明)에 이르는 계승시대, 청(淸)이후의 쇠퇴시대로 대별할 수 있다. 전역기는 불교가 중국에 소개되는 시기로서 일반에게는 아직 생소한 경우이며, 연구기는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익숙해지도록 준비한 때이고, 건설기는 불교가 중국 환경과 토양에 알맞게 성숙하여 인도와 다른 독자적 발전과 여러 종파로 전문화를 이룬 때이며, 계승기는 창조적 진보보다 기성의 불교를 유지한 때이고, 쇠퇴기는 전반적으로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감소된 시기를 의미한다. 각 시기 가운데 불교가 이웃종교와 관련하여 두드러지게 보이는 사례를 들어본다.
중국에서의 불교와 이웃종교 사이의 관계는 토착 전통 종교인 유교(儒敎) 및 도교(道敎) 와의 관계로 압축할 수 있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유교 및 도교와 어떻게 조화하였으며 혹은 경쟁하였는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종교로서의 유교는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등을 제외하면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이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가르친 윤리도덕의 차원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유교는 인간의 실존적 구원과 사후의 세계 등 이상과 초월의 세계보다 가정과 국가 등 다분히 정치사회적 측면에 관심이 큰 현실적 종교이다. 도교는 노자(老子)의 가르침에 기초한다고 하지만, 후대의 장도릉(張道陵), 장노(張魯) 장각(張角) 등에 의해 새롭게 조직된 것으로 중국 전래의 잡다한 민속신앙과 결부시켜 신선(神仙) 사상과 음양(陰陽) 사상, 양재(禳災)와 치병(治病) 등 공리적 현세중심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전역기에 불교는 기존의 도교적 표현을 빌어 불교를 설명하는 이른바, 격의불교(格義佛敎)를 하였고, 도교도 불교 형식을 모방하여 도교의 경전을 작성하기도 하여 상호 긍정적 영향을 주고 받았다. 반면, 이때에는 유교가 침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는 불교와 경쟁 각축하였다. 불교와 도교의 다툼은 처음 불교인 백원(帛遠)과
도교인 왕부(王浮)의 논쟁이었는데, 토론에 패배한 왕부가 나중에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지어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불교인을 교화했다거나 석존으로 화현했다는 식으로 도교의 우월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이 시기 불교인의 저술로는 모자(牟子)의 『이혹론』(理惑論)이 있는데, 이는 이웃종교들이 불교를 공격함에 그를 변론하고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의 조화를 지향하는 내용이다.
연구기에는 동진의 혜원(慧遠)이 "호계삼소(虎溪三笑)"의 전설처럼 유학자 및 도사와 어울리며 이웃종교인들과 친교한 선례를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도 도교인들은 『노자화호경』과 비슷한 『노자서승화호경』(老子西昇化胡經) 등을 지어 불교를 폄하하므로 불교인들도 『법행경』(法行經) 등 위경(僞經)을 만들어 대응하였는데, 석존이 세제자를 보내어 중국을 교화하였던 바, 유동보살(儒童菩薩)은 공자였고, 광정보살(光淨菩薩)은 안연(顔淵)이었으며 마하가섭은 노자였다라고 하는 삼성화현설(三聖化現說)이 그 한 예이다. 이 기간에도 불교인과 도교인 사이에 많은 논난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다만 남조의 양무제(梁武帝)가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는데 이를 시기한 도교인들이 북조의 위무제(魏武帝)와 주무종(周武宗)으로 하여금 훼불하도록 유도하여 큰 법난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교가 외형적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근본에는 일치한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주장은 주로 불교인들에 많았고 평화적 공존을 지향하고자 하였다.
건설기에는 수조와 당조(무종은 예외)가 불교를 숭신하였고 불교를 포함하여 중국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도교는 당의 고조(高祖) 이연(李淵)과 동성(同姓)이라는 점을 들어 노자가 당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여 역대 황제들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현종시에는 국교처럼 존숭되었다. 그러므로 당의 종교정책은 평등주의, 세계주의, 포용주의적이었지만, 대부분의 황제들은 도교를 삼교 가운데 우선하였다. 도교계의 불교 공격을 보면, 무종(武宗)의 폐불사건도 도사 조귀진(趙歸眞)이 유도한 것이며, 부혁(傅奕) 등도 배불론(排佛論)을 지어 불교 규제를 황제에게 청원하였다. 이에 대해 불교계는 법림(法琳)이 『파사론』(破邪論)을 지어 도교의 요망을 지적 논파하였고, 그의 제자였던 유학자 이사정(李師政)은 『내덕론』(內德論)을 지어 부혁의 논을 반박하였다. 그러한 논난 가운데서도 중조 중기부터 황제의 생일에는 삼교의 담론이 이루어졌고, 유학자인 백거이(白居易), 유종원(柳宗元) 등과 불교계의 징관(澄觀), 종밀(宗密) 등은 유교와 불교의 이교동설(二敎同說)과 양교귀일설(兩敎歸一說) 등을 통해 일치점을 찾고 나아가 삼교의 일치를 지향하였다. 아무튼 불교는 유교와 도교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었고, 그 대응으로는 그들의 비판에 오해를 풀려고 해명하며 일치를 시도하고 평화적 공존을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하였다.
계승기와 쇠퇴기에는 유교가 득세하고 불교와 도교는 소강상태였는데, 삼교간의 관계가 갈등보다는 공조의 분위기로 전향된 듯하다. 비록 유학자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 배불론을 일으켜, 게숭(契崇)과 장상영(張商英)이 각각 『보교편』(輔敎編)과 『호법론』 (護法論)을 지어 논박한 경우도 있지만, 유밀(劉謐)은 『삼교평심론』(三敎平心論)을 지었고, 도교의 왕중양(王重陽 1112-1170)은 삼교의 조화와 일치에 힘썼다. 그는 전진교(全眞敎)를 열고 유교의 『효경』(孝經), 도교의 『도덕경』(道德經), 불교의 『반야심경』(般若心經) 등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불교계의 지원(智圓) 법사는 『한거편』(閑居編)에서 "유불이교내외표리설(儒佛二敎內外表裏說)"과 "삼교정분설(三敎鼎分說)"을 지어 유교와 불교가 겉과 속의 관계이며 삼교가 균형있게 역할을 분담하여야 한다고 서술하였고, 종고(宗 ) 선사(禪師)는 "삼교 성인(聖人)이 그 입교(立敎)는 상이하나 그 도(道)는 하나로 돌아가고 일치하며, 이것은 만고에 바뀌지 않는 의(義)이다"라고 가르쳤다. 즉 불교인들은 이웃종교인들에게 평등히 서로 존중하고 상생을 하자고 일깨워 왔다고 할 수 있다.
(4) 한국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4세기 중엽 중국으로부터였다. 유교는 그 이전에 들어와 있었지만 도교의 존재는 알 수 없다. 다만 무교(巫敎)라고 할 토착신앙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의 불교와 이웃종교와의 관계는 근래 기독교와의 관계를 제외하면 불교와 유교 및 무속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유교 모두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종교라고 할 수 있지만 긴 세월을 거쳐 토착화 된지 오래이다. 관행에 따라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와 현대의 순서로 불교인들의 이웃종교인들에 대한 대표적 사례들을 살펴본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왕과 귀족들로부터 환영되고 존숭되었다. 초기의 신라에서는 기존 토착전통인들의 저항도 없지 않았지만 결국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전국에 걸쳐 불교가 신앙되었다. 유교는 주로 관리들의 행정분야에 역할을 하였고, 무교는 불교권에 포괄 습합되어 종교간 갈등은 별로 들어 나지 않았다. 불교인들이 이웃종교인들에게 보인 태도는 친화적이었고 건전한 사회생활을 위하여 상호 보완적이었다고 하겠다. 불교를 신앙한 왕들은 종교적으로는 불교를, 행정수단으로는 유교를 통해 국가를 통치하였다. 원광 법사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면서 충효 등 유교적 덕목을 포함시켰고, 원효 대사는 설총을 유학의 대가로 만들었지만 불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국민 모두가 종교생활은 불교로, 일상생활은 유교식으로 하며 두 종교를 함께 따르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고 하겠다.
고려시대에도 말기의 성리학자들의 비판을 제외한다면, 전시대와 큰 차이가 없이, 불교는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국가 전역에서 신앙되었다. 대부분의 불교인들도 유교서적을 읽었던 것 같고, 유학자들도 불경에 소양이 있었을 줄 안다. 태조 왕건 이후 후대의 왕들은 모두 불교신자였다고 볼 수 있는데, 유교와 토착신앙을 박해하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본다. 특히 팔관회를 통해 불보살뿐만 아니라 천지의 신령과 산악 및 하천의 신들까지 제사의 대상으로 삼아 토착 전통들을 포용하고 국민정서를 편안하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불교는 종교적으로 경쟁할 만한 대상이 없이 국가와 민중의 존경과 보호를 받고 안일과 타성에 빠져 점점 창조적 활력을 잃어간 듯 싶다. 뜻있는 유학자들의 비판도 겸허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무시하거나 변명과 호도에 급급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조선조에서는 불교가 억압되고 유교로부터 핍박과 소외를 당하면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반성과 쇄신을 통해 본분을 찾아가는 시기였다고 본다. 유학자들과 유교정권으로부터 비판과 배척을 받은 것이 종교적 이유보다 정치 경제적 사유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불교 수행자들은 불교를 지키고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함허(含虛) 선사는 현정론(顯正論)으로, 보우(普雨) 대사는 일정론(一正論)으로 불교를 변호하며, 유교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휴정(休靜) 선사는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지어 유교, 불교, 도교가 깨닫고 보면 근본이 다르지 않음을 밝히고 유학자들과도 교유했다. 초의(艸衣) 선사는 유학자인 김정희와 천주교인이었던 정약용 등 이웃종교인들과 교유하며 불이법문(不二法門)을 통해 일체가 하나임을 깨우쳤다. 불의로 당하는 이웃종교인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종교를 넘어 인간으로서 동체대비를 실현해 보였다.
일제하에서 용성(龍城) 선사와 만해(萬海) 스님은 천도교인 및 기독교인 등 이웃종교인들과 더불어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광복후 1960년대 중엽부터 능가 스님은 강원룡 목사 등과 종교간의 대화운동 시작에 참여했고, 근래의 진보적 불교인들은 이웃종교인들과 더불어 통일과 사회문제 등 공동과제 해결에 협력하고 있다.
(5). 일본
불교는 일본에 6세기 중반 한반도의 백제로부터 처음 전래되었다. 유교도 비슷하게 전해졌으며, 모두 일본의 문화 발전에 획기적으로 공헌하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 일본에서의 불교와 이웃종교간 관계는 불교와 신도(神道)와의 관계로 볼 수 있다. 불교와 유교사이의 관계는 경쟁과 대결의 관계이기 보다 사회와 민중생활의 역할 분담으로 상호 보완관계였다고 하겠다. 불교인이 불교전래이전부터 존재한 신도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배려한 노력은 공존을 위한 습합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불교와 신도의 관계는 이른바 "본지수적(本地垂迹)으로 표현된다. 본지는 부처님이고 수적은 신이나 다른 형태를 가리키며, 부처님이 중생교화를 위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곧 불본신적(佛本神跡)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는 곧 일본의 신은 부처님의 화현으로 간주하고 신앙하므로서, 불교인이 신을 대하거나 신도인이 불보살을 대하거나 상호 꺼리길 것이 없이 편한한 마음으로 접할 수 있게된다. 물론 나중에 국수주의적 신도인들은 신본불적(神本佛跡)으로 그 위상을 도치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인과 기독교와의 관계는 대립관계로 지속된다. 불교인들에게 기독교는 서양세력의 전위로 여겨져 위험시하고 경계의 태도를 보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불교에 접근하려고 하여왔으며, 적지 안은 이들이 불교 공부, 특히 선 수행을 하여왔다. 비록 신자수는 많지 안아도 기독교인들은 부단히 활동하여 그 세력을 넓히려 하고 있다. 불교인들은 그들과 공존하며 사회의 평화를 지향해 나가고 있다.
3. 서양
(1). 유럽
유럽에 최초로 불교가 알려진 때는 2000여년이 넘지만, 본격적으로 불교가 들어난 것은 19세기 후반 인도와 동남아시아로부터 가져온 불교문헌들이 해독되면서부터라고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교와 아시아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접근했으나 학문과 교리로서는 관심과 흥미를 가졌지만 신자가 되는 이는 드물었다. 불교사원의 창건과 승려의 출현은 미미했으나 불교관련 책자는 상당히 출판 보급되어 있는 실정이다. 근래에 유럽각지에 확산되어 간 불교 승려들은 현지 사정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 문화를 이해하면서 사회적 이슈들에 공동대처하기 위해 대화와 협조를 모색한다. 틱낱한(Thich Nhat Hanh) 스님은 기독교와의 동질성 추구와 공감대 형성에 진력하고 있다. 달라이라마의 순방법회는 현지인들의 영적 갈증을 푸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는 누가 무슨 종교를 믿든지 관계없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보편적 인간애와 평화를 강조하고 상황이 요구하는 의미있는 일에 자발적으로 대처하기를 가르쳐 왔다.
(2) 미국
미국에는 19세기 후반에 중국인들의 이주로부터 불교가 유입되었고,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World Parliament of Religions)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홍보되었다. 담마팔라에 의해 상좌부전통이, 소옌 샤쿠와 스즈키 다이세츠에 의해 대승불교 전통의 선(禪)이 소개되었다. 그 후 스즈키의 선불교에 대한 일련의 저술과 강연으로 미국 및 유럽의 종교인들과 일반지성인들이 선에 관심을 보이고 수행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선은 정신집중과 안정을 통해 각자의 심성을 계발하여 인식주체와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하는 수행으로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여 가능함으로 종교의 유무와 다양성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소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유대교, 회교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인들도 부담없이 참선이 가능하며 그들의 영성개발을 도울 수 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불교사상에 접하고 소양이 있는 이들은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체험해 보자고 주체적으로 수행하였고, 참선에 관한 저술과 수행의 장을 제공하는 선수행 센터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불교인들은 환경친화의 검약한 경제생활과 비폭력 자비정신으로 물량위주의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후유증 치유에 대안으로 떠오르며,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생명존중 등 사회의 보편적 과제해결에 동참하며 선도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근래에 불교-기독교 학회를 중심으로 동서양종교를 대표하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협조를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학문적 작업과 실천적 노력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점이다.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석존과 그 후예들의 이웃종교에 대한 인식과 견해 및 대응방식을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와 그 주변 전파지역들의 순서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알아보았다. 종합적으로 그 요점을 말한다면, 불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무한한 자유와 평등한 성불의 가능성을 가르치고 그 실천 수행법을 보여왔으며, 각지의 성숙한 불교인들은 그들이 처한 문화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적응해 오며 기존의 이웃종교들과 평화적으로 공존상생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차이를 넘어 온 인류를 포함한 뭇 생명들과 나아가 자연환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연기설에 근거하여, 독선적 극단에 치우침을 지양하며 모든 집착과 이기심을 비우는 중도와 동체 대비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정치 사회적 상황 때문에 갈등이 생겨도 진정한 불교인들은 비폭력 관용정신으로 중생의 근기와 형편에 따라 지혜와 방편으로서 당면한 과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왔음을 보았다. 비록 이교도로부터 부당한 비판과 공격을 당해도 대화로 해명하고 설득하는 합리적 방법과 인욕 정진의 보살도를 행해 온 것이다. 한편 이웃종교와 능동적으로 친교하고 서로의 발전에 협조하며 사회적 공동과제들을 연합하여 해결하려는 선지식들의 모범도 많았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훌륭한 선례들로부터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종교인들이 각자 이웃종교인들과 건전하고 평화롭게 상생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