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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제30강 -2 (2012. 8. 6.)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二
四聖諦品(사성제품) 第八.
六. 東北方 攝取世界(섭취세계)의 四聖諦
3. 滅聖諦의 十種名
4. 道聖諦의 十種名
七. 東南方 饒益世界(요익세계)의 四聖諦
1. 苦聖諦의 十種名
2. 集聖諦의 十種名
3. 滅聖諦의 十種名
4. 道聖諦의 十種名
八. 西南方 鮮少世界(선소세계)의 四聖諦
1. 苦聖諦의 十種名
2. 集聖諦의 十種名
3. 滅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所言苦滅聖諦者는 彼攝取世界中엔
或名不退轉이며 或名離言說이며 或名無相狀이며
或名可欣樂이며 或名堅固며 或名上妙며 或名離癡며
或名滅盡이며 或名遠惡이며 或名出離니라
諸佛子야, 불자야
所言苦滅聖諦者는, 말한바 苦滅聖諦者는
彼攝取世界中엔, 저 섭취세계 가운데는
或名 不退轉(불퇴전)이며, 혹은 이름이 不退轉. 그랬습니다.
不退轉 = non-retreating 물러나지 않는다
그대로 물러나지 않는다.
或名 離言說(이언설)이며,
離言說 = apart from language and speech 언어와 말로부터 멀리 떨어진,
많이 떨어진
이런 경우 들이 “말로부터 떨어진” 이렇게 해석이 되어 있는데요.
한문으로는 언설을 떠난, 離言說하면 우리가 으레 “언설을 떠났다.” 떠났다. 하면 “떨어진” 것 하고는 다르거든요. 떨어진 것은 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떠났다.” 라고 그렇게... 아예 언설하고는 관계없는 보통 그렇게 해석합니다. 참고로...
或名 無相狀(무상상)이며, 無相狀 = no shape 형상이 없는
같이 봤군요. “형상이 없는”
或名 可欣樂(가흔락)이며, 可欣樂 = can be delighted in 즐길 수 있는
滅聖諦가 즐길 수 있는.
或名 堅固(견고)며, 堅固 = solid and firm 견고하고 튼튼한
견고하고 튼튼한 = 堅固. 그대로군요.
或名 上妙(상묘)며, 上妙 = superior and wonderful 우수하고 아름다운
제가 妙자를 늘 아름다운 이라고 그렇게 해석을 하는 데요. 역시 아름다운 妙군요. 狀자도 한문글자 대로만 보면 “높다ㆍ위다.” 이렇게 하는데 제가 보통 “上妙高位(상묘고위)” 그러면 上자를 아주 고급ㆍ아주 훌륭한ㆍ아주 값이 비싼, ←이런 의미로 윗 上자를 제가 늘 해석을 하는데요. 여기에 영문 해석도 그러네요. 우수하다. 妙자는 아름답다. 이렇게 했으니까 이런 것들도 우리가 한문 경전을 번역할 때ㆍ번역할 때, 현대 의에 아주 잘 영합하도록 그렇게 말을 바꾸어 주는 것. 그런 훈련도 필요 할 것 같습니다.
或名 離癡(이치)며, 離癡 = apart from stupidity 우둔함으로부터 떨어진
어리석음을 떠난. 그것이 말하자면 滅이다 그럽니다. 滅聖諦.
或名 滅盡(멸진)이며, 滅盡 = complete extinction 완전한 소멸
완전한 소멸 = 滅盡. 그렇지요. 이렇게 연관시켜서 우리가 공부하면 한문용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或名 遠惡(원악)이며,
遠惡 = far removed from evil 악으로부터 크게 동떨어진, 악과 관련이 없는
악과 관련이 없는ㆍ악을 멀리하다.
或名 出離(출리)니라. 出離 = getting out 벗어남
벗어나다.
3, 滅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所言苦滅聖諦者는 彼攝取世界中엔 或名不退轉이며
或名離言說이며 或名無相狀이며 或名可欣樂이며 或名堅固며
或名上妙며 或名離癡며 或名滅盡이며 或名遠惡이며 或名出離니라
여러 불자들이여, 고멸성제라고 말하는 것은 저 섭취세계 가운데서는
혹은 이름이 불퇴전(不退轉)이며,
혹은 이름이 이언설(離言說)이며,
혹은 이름이 무상장(無相莊)이며,
혹은 이름이 가흔락(可欣樂)이며,
혹은 이름이 견고(堅固)며,
혹은 이름이 상묘(上妙)며,
혹은 이름이 이치(離癡)며,
혹은 이름이 멸진(滅盡)이며,
혹은 이름이 원악(遠惡)이며,
혹은 이름이 출리(出離)니라.
Disciples of the buddha, in the world called gathering in, the holy truth of the extinction of suffering is
perhaps called non-retreating,
perhaps called apart from language and speech,
perhaps called no shape,
perhaps called can be delighted in,
perhaps called solid and firm,
perhaps called superior and wonderful,
perhaps called apart from stupidity,
perhaps called complete extinction,
per-haps called far removed from evil,
perhaps called getting out.
<Translated into English by B. T. T. S.>
non-retreating 물러나지 않는
apart from language and speech 언어와 말로부터 떨어진
no shape 형상이 없는
can be delighted in 즐길 수 있는
solid and firm 견고하고 튼튼한
superior and wonderful 우수하고 아름다운
apart from stupidity 우둔함으로부터 떨어진
complete extinction 완전한 소멸
far removed from evil 악으로부터 크게 동떨어진, 관련이 없는
getting out 벗어남
4. 道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所言苦滅道聖諦者는 彼攝取世界中엔 或名離言이며
或名無諍이며 或名敎導며 或名善廻向이며 或名大善巧며
或名差別方便이며 或名如虛空이며 或名寂靜行이며 或名勝智며
或名能了義니라
諸佛子야 攝取世界에 說四聖諦가 有如是等四百億十千名하니
隨衆生心하야 悉令調伏케하시니라
諸佛子야, 불자야 所言苦滅道聖諦者는
彼攝取世界中엔, 저 섭취세계 가운데는
或名 離言(이언)이며, 혹은 이름이 離言. 그랬습니다.
離言 = apart from words 말로부터 떨어진
이것도 아까 離자 표현하고 똑 같이 “말을 떠난” 우리는 그렇게 표현 하거든요. 그렇게 해석하는데 “말을 떠난” 것 하고 “말로부터 거리가 좀 떨어진” 이것 하고는 뜻이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고로...
或名 無諍(무쟁)이며, 無諍 = no contention 투쟁이 없는
或名 敎導(교도)며, 敎導 = teaching and guiding 가르침과 인도
或名 善廻向(선회향)이며,
善廻向 = wholesome transference 유익한 양도, 전이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 양도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회향이네요. 그런데 유익한 양도 = 善廻向 = 훌륭한 회향. 그렇게 해석을 했군요.
或名 大善巧(대선교)며, 大善巧 = great skillful means 훌륭하고 숙련된 방법 善巧를 제가 전통적으로 해석할 때, 巧자가 교묘한, 이런 표현인데요.
그런데 불교에서 뜻하는 것하고, 우리가 말하는 “교묘한” 하고는 영~ 다르거든요. 교묘하다는 말은 사실 크게 좋지 않은 의미인데, 여기 아주 정확하게 바로 한 것 같습니다. 훌륭하고 숙련된ㆍ익숙한ㆍ능숙한. 善巧를 제가 그렇게 잘 표현합니다. 巧자를 아주 익숙하고 능숙한.
“善巧方便” 그러면 아주 익숙하고 능숙한 방편. 또는 언어로 말하면 “善巧ㆍ言說” 이렇게 말 할 때 말이 그 사람에게 아주 잘 맞는, 교묘한 말이 아니라, 잘 맞는, 善巧라는 것이 그 사람 근기와 수준에 잘 맞는 그리고 익숙한, 또 그것은 숙련이 돼야 가능한, 그런 뜻입니다. 영어로는 그런 것은 아주 정확한 것 같습니다.
或名 差別方便(차별방편)이며,
差別方便 = different expedients 서로 다른 방편
或名 如虛空(여허공)이며, 如虛空 = like empty space 허공과 같은
或名 寂靜行(적정행)이며, 寂靜行 = still and quiet conduct 조용하고 고요한 행동.
조용하고 고요한 행동 = 寂靜行. 한문 번역대로 그대로 똑 같습니다.
或名 勝智(승지)며, 勝智 = victorious wisdom 수승한 지혜(승리의 지혜라고 번역은 되는데 수승한 지혜입니다.)
“용어는 승리의 지혠가요?” “예”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수승한 지혜라야 맞지요? 승리의 지혜는 좀 문제가 있는 번역이지요.
或名 能了義(능료의)니라.
能了義 = able to understand meaning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그것은 글자대로 해석을 한 것 같은데요. 이런 데는 의미를 한문대로 能了義를 해석을 하자면, 이런 경우는 了義라고 하면 훌륭한 뜻ㆍ최상 가는 뜻.
우리가 了義ㆍ不了義 이렇게 두 가지로 이야기하잖아요.
소승 경전을 不了義 경. 완전하지 못한 가르침.
대승은 了義 경. 해서 완전한 가르침. 그렇게 본다면 여기서는 완전할 수 있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諸佛子야, 불자야 攝取世界에
說四聖諦가, 四聖諦를 설명 하는 것이
有如是等四百億十千名하니, 400억 10천명이 있으니
隨衆生心하야,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悉令調伏케하시니라. 다 하여금 조복하도록 한다.
4, 道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所言苦滅道聖諦者는 彼攝取世界中엔
或名離言이며 或名無諍이며 或名敎導며 或名善廻向이며
或名大善巧며 或名差別方便이며 或名如虛空이며 或名寂靜行이며
或名勝智며 ㅌ或名能了義니라
諸佛子야 攝取世界에 說四聖諦가 有如是等四百億十千名하니
隨衆生心하야 悉令調伏케하시니라
"여러 불자들이여, 고멸도성제라고 말하는 것은 저 섭취세계 가운데서는
혹은 이름이 이언(離言)이며,
혹은 이름이 무쟁(無爭)이며,
혹은 이름이 교도(敎導)며,
혹은 이름이 선회향(善廻向)이며,
혹은 이름이 대선교(大善巧)며,
혹은 이름이 차별방편이며,
혹은 이름이 여허공(如虛空)이며,
혹은 이름이 적정행(寂淨行)이며,
혹은 이름이 승지(勝智)며, 혹은 이름이 능요의(能了義)니라.
여러 불자들이여, 섭취세계에서 사성제를 말하는데 이러한 4백억 십천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다 조복케 하시니라.
Disciples of the buddha, in the world called gathering in, the holy truth of the way leading to the extinction of suffering is
perhaps called apart from words,
perhaps called no contention,
perhaps called teaching and guiding,
perhaps called whole-some transference, perhaps called great skillful means,
perhaps called different expedients, perhaps called like empty space,
perhaps called still and quiet conduct,
perhaps called victorious wisdom,
perhaps called able to understand meaning.
Disciples of the buddha, in the world called gathering in, the four holy truths are desribed in forty trillion names such as these, which, by according with living beings' thoughts, can cause them to all be tamed and subdued.
<Translated into English by B. T. T. S.>
apart from words 말로부터 떨어진
no contention 투쟁이 없는
teaching and guiding 가르침과 인도
wholesome transference 유익한 양도, 전이
great skillful means 훌륭하고 숙련된 방법
different expedients 서로 다른 방편,
like empty space 허공과 같은
still and quiet conduct 조용하고 고요한 행동
victorious wisdom 수승한 지혜
able to understand meaning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덕택에 화엄경 영문 맛을 좀 봤습니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부르겠습니다.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한문에서 밝히지 못한 것을 드러낸 그런 내용도 있습니다.
상당히 확실한 어떤 뜻을 나타내는 데는 영문이, 그것이 틀리든 맞든 간에 아주 확실하게 표현 합니다. 그것은 한문하고 아주 다른 점입니다.
한문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영문은 확실하게 표현이 되는 것이지요. 그 점이 다른 점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흔히 이야기합니다.
七. 東南方 饒益世界(요익세계)의 四聖諦
1. 苦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此娑婆世界의 所言苦聖諦者는 彼饒益世界中엔
或名重擔이며 或名不堅이며 或名如賊이며 或名老死며
或名愛所成이며 或名流轉이며 或名疲勞며 或名惡相狀이며
或名生長이며 或名利刃이니라
諸佛子야, 불자야
此娑婆世界의 所言苦聖諦者는,
이 사바세계에서 말하는바 고성제라고 하는 것은
彼饒益世界中(피요익세계중)엔, 저 요익세계 중에는
或名 重擔(중담)이며, 무거운 짐. 그랬습니다. 그렇지요.
무거운 짐은 정신적으로 진 짐이든, 실질적으로 무게가 나가는 짐을 졌든 간에, 이것은 어느 세계에서나 사실은 苦입니다.
或名 不堅(불견)이며, 그랬습니다. 견고치 아니함. 그렇지요.
뭐든지, 인간관계라든지ㆍ원력이라든지ㆍ약속이라든지 이런 것이 아주 확실하고 견고해야 되는데, 잘 무너져버리고, 잘 흩으러 지면 그것도 또한 고통일 수 있지요.
或名 如賊(여적)이며, 그랬습니다.
도적과 같은 것. 도적은 분명히 苦입니다.
或名 老死(노사)며, 그랬습니다. 늙고 죽는 것. 늙고 병들어 죽는 것.
분명히 苦입니다. 우리가 四苦 = 생 노 병 사 중에서도, 노 병 사, 여기는 老 死가 있네요. 이것도 당연한 것이지요. 사바세계에서도 역시 老死이고, 어디 饒益世界에서든지ㆍ어느 세계에서든지 다 苦일 것입니다.
或名 愛所成(애소성)이며, 애착으로 이룬 바. 그렇지요. 이것은 어떤 이치로써, 또는 인연으로써 이뤄진 것 같으면 괜찮은데, 단순한 인연을 넘어서 개인의 어떤 애착심이 발동해가지고 이뤄진 어떤 사실은, 그것은 당연히 아니 으레 그것이 고통이라고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愛所成. 이것 참, 우리가 염두에 둬야할 문제지요.
或名 流轉(류전)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저 앞에서도 流轉이 있었지요? 流轉 = 흘러가는 것ㆍ변하는 것ㆍ상황이 바뀌는 것. 이런 것도 바뀌여서 좋은 점도 많지요. 그러나 苦의 입장에서 보면 流轉이 苦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或名 疲勞(피로)며, 그랬습니다.
혹은 이름이 피로다. 疲勞는 당연히 苦지요. 당연히 苦입니다.
或名 惡相狀(악상상)이며, 악한 모양. 악한 형태도 역시 苦지요.
或名 生長(생장)이며, 자꾸 자라나는 것.
자라나서 고통이 되는 것도 많을 겁니다. 生長. 그것이 어떤 경우가 生長하는 것이 고통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상황 따라서ㆍ경우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或名 利刃(리인)이니라. 날카로운 칼날. 날카로운 칼. 당연히...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사물로서의 칼날이든, 그것은 苦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苦는 하나의 결과라면 원인이 集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해석하지요?
2. 集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所言苦集聖諦者는 彼饒益世界中엔 或名敗壞며
或名渾濁이며 或名退이며 或名無力이며 或名喪失이며
或名乖違며 或名不和合이며 或名所作이며 或名取며
或名意欲이니라
諸佛子야 所言苦集聖諦者는, 불자야 말한바 苦集聖諦.
고통의 원인으로써의 集聖諦라고 하는 것은
彼饒益世界中엔, 저 요익세계 가운데서는
或名 敗壞(패괴)며, 혹은 이름이 패괴다. 패하고 무너지는 것. 패배하는 것. 요즘 한참 올림픽이 벌어지고 있는데, 4년간 죽을 고생해가지고 국가 대표로 선발 됐는데 그만 뭐가 잘못됐다. 그것이 敗壞지요. 잘못되면 敗壞입니다. 지든지, 아니면 다치든지, 무슨 문제가 생기든지 그것이 敗壞거든요. 그것으로 인해서 지는 것은, 지는 것 자체에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큰 고통을 불러 온다. 이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것이 集은 고통의 원인이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或名 渾濁(혼탁)이며, 그랬습니다. 흐린 것.
우리가 五濁惡世(오탁악세)할 때, 뭐든지 다 맑지를 못하고ㆍ깨끗하지를 못하고ㆍ텅 비지 못하고ㆍ전부 흐려있다면 그것 또한 고통의 원인입니다.
或名 退失(퇴실)이며, 물러가는 것. 뭐든지 자꾸 성장하면 좋은데, 退失합니다. 저 앞에서는 生長이 苦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退失이 苦의 원인이다. 그랬습니다.
或名 無力(무력)이며, 금년 여름이, 지금부터 딱 18년 전에 1994년도에 화엄경을 번역을 해서, 한참 더운 여름에 제가 그 원고를 교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를 못 잊어요. 1994년도 아주 더웠습니다. 금년이 그 때 더위하고 같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더위 때문에 어떤 무력증에 빠져버리거나 탈진해버리는, 無力이란 탈진과 같은 의미지요. 큰 고통입니다. 아주 문제예요. 어떻게 할 바를 모릅니다. 겨울에 추울 때는 하는 방법이 많은데, 더워 놓으면 어떻게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아마 ‘여름에 탈진의 문제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或名 喪失(상실)이며, 상실은 당연히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런 것도 바로 고통이 아니라, 무력이 바로 고통이 아니고, 상실이 바로 고통이 아니라 喪失을 통해서 고통을 야기하고, 無力을 통해서 고통을 야기하고, 退失을 통해서 고통을 야기하고, 渾濁을 통해서 고통을 야기하고, 이런 것이지요.
或名 乖違(괴위)며, 어기고 어기는 것. 전부 어기는 것이지요.
그것도 고통의 원인이다.
或名 不和合(불화합)이며, 그렇지요. 不和合 그 자체는 고통이 아니지요. 不和合을 통해서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지요.
或名 所作(소작)이며, 지금 짓는 바, 짓는 것.
或名 取(취)며, 취하는 것.
或名 意欲(의욕)이니라. 이것이 얼마든지 좋은 입장으로ㆍ필요한 입장으로 해석 할 수 있는 낱말들입니다. 취한다ㆍ의욕이다. 하는 것이요. 그러나 苦의 입장으로 그 시각을 그런 방향으로 보면 이것도 충분히 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지요.
3. 滅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所言苦滅聖諦者는 彼饒益世界中엔 或名出獄이며
或名眞實이며 或名離難이며 或名覆護며 或名離惡이며
或名隨順이며 或名根本이며 或名捨因이며 或名無爲며
或名無相續이니라
諸佛子야 所言苦滅聖諦者는,
모든 불자들이여, 말한바 苦滅聖諦라고 하는 것은
彼饒益世界中엔, 저 요익세계 가운데는
或名 出獄(출옥)이며, 이것은 뭡니까? 滅이지요? 열반입니다.
결과입니다. 수행의 결과. 出獄 = 옥에서 벗어났다.
或名 眞實(진실)이며
或名 離難(이난)이며, 어려움에서 떠났다.
이 滅聖諦는 다 좋은 낱말들입니다. 그 다음에
或名 覆護(부호)며, 덮어서 보호해 주는 것. 그것 편안하지요.
어린사람들은 누가, 부모가 보호해 주면 그것은 아주 그럴 수 없는 편안함ㆍ그럴 수 없는 아주 열반, 최고의 열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或名 離惡(이악)이며, 떠날 離자, 악할 惡자. 악을 떠난 경지.
그것도 열반입니다. 악을 떠난, 악이 없으면 인생 좋지요.
或名 隨順(수순)이며, 모든 것이 다 隨順.
수순하는 입장이 돼버리면 그것 또한 열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或名 根本(근본)이며, 근본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것은 根本이라고 하는 데는 사실은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열반이지요. 그것을 근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或名 捨因(사인)이며, 원인을 버리는 것. 그것이 또한 滅이 되고요.
或名 無爲(무위)며, 함이 없는 것. 無爲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잘 쓰지요. 하되 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손발 묶고 아무 일도 아니해서 無爲가 아니라, 불교에서는 언제나 그렇지요. 언제나 함이 없다. 라고 해도 열심히 하되 함이 없는 것. 선가에서는 종일토록 밥을 먹되 그 낱알을, 말하자면 곡식의 알이 없는 밥을 먹고, 그런 표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다 어떤 작위를 하되 마음에 어떤 조작이 없고, 해도 함이 없는 그런...
或名 無相續(무상속)이니라. 상속하지 않는 것. 그것이 滅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滅을, 열반. 그 滅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또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도성제” 그러지요.
4. 道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所言苦滅道聖諦者는 彼饒益世界中엔 或名達無所有며
或名一切印이며 或名三昧藏이며 或名得光明이며
或名不退法이며 或名能盡有며 或名廣大路며 或名能調伏이며
或名有安穩이며 或名不流轉根이니라
諸佛子야 饒益世界에 說四聖諦가 有如是等四百億十千名하니
隨衆生心하야 悉令調伏케하시니라
諸佛子야 所言苦滅道聖諦者는, 불자야, 道聖諦라고 하는 것은
彼饒益世界中엔, 저 요익세계 가운데는
或名 達無所有(달무소유)며, 혹은 이름이 達無所有다.
무소유에 도달하는 것. 無所有를 가지고 평생 노래하고 사신 스님이 계셨지요? 無所有. 무소유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반드시 열반을 얻을 수 있는ㆍ滅을 얻을 수 있는 원인이 됩니다. 좋지요. 또
或名 一切印(일체인)이며, 그랬습니다. 모든 것의 도장.
印자는 이럴 때는 틀림없는 것. 확실한 것ㆍ확실 성. 모든 것의 확실 성. 이런 의미가 있지요.
或名 三昧藏(삼매장)이며, 三昧藏. 삼매가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열반을 얻는 원인이 될 수가 있지요.
或名 得光明(득광명)이며, 광명을 얻는 것.
或名 不退法(불퇴법)이며, 물러서지 아니한 법.
或名 能盡有(능진유)며, 능히 있음을 다 하는 것. 이것도 열반을 얻는, 말하자면 한 원인ㆍ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或名 廣大路(광대로)며, 그랬습니다. 광대한 길.
이것이 대승법이라고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광대한 길이 뭔가?’ 툭~ 터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대승적인 그런 삶. 이것을 廣大路.
或名 能調伏(능조복)이며, 혹은 이름이 能調伏. 그랬습니다.
능히 조복하는 것. 그렇습니다. 금강경에도 云何調伏(운하조복).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조복하겠습니까? 그런 표현이 있었지요? 조복 잘하면 곧 바로 열반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조복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或名 有安穩(유안온)이며, 安穩하게 있다. 편안하게 있다.
심적으로 아주 편안하게 있는 것을 有安穩. 그랬습니다.
或名 不流轉根(불유전근)이니라. 流轉하지 않는 根.
유전은 자꾸 변화하고ㆍ흘러가고, 저 앞에서 고를 유전이라고 표현 했는데요. 이것은 流轉하지 아니하는 근본. 이렇게 하면 열반을 증득하는 하나의 수단방법이 됩니다.
諸佛子야 饒益世界에 說四聖諦가 有如是等四百億十千名하니,
모든 불자들이여, 요익세계 가운데 사성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와 같은 등, 4백억 10천 名이 있다.
隨衆生心하야 悉令調伏케하시니라.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다 모두 하여금 조복케 하니라.
八. 西南方 鮮少世界(선소세계)의 四聖諦
1. 苦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此娑婆世界의 所言苦聖諦者는 彼鮮少世界中엔
或名險樂欲이며 或名繫縛處며 或名邪行이며 或名隨受며
或名無慚恥며 或名貪欲根이며 或名恒河流며 或名常破壞며
或名炬火性이며 或名多憂惱니라
諸佛子야 此娑婆世界의 所言苦聖諦者는,
모든 불자들이여, 이 사바세계의 所言苦聖諦라고 하는 것은
彼鮮少世界中엔, 저 선소세계 가운데는
或名 險樂欲(험락욕)이며, 혹은 이름이 險樂欲. 험한 락욕이다.
즐거움도 정말 편안한 즐거움이 있겠는데, 여기는 險즐거움입니다.
險樂欲이다. 樂欲도 아주 험한 락욕이다. 그것은 바로 고라는 것입니다.
或名 繫縛處(계박처)며, 형무소에 갇혔다든지, 무슨 동물이 울이에 갇혔다든지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이 속박 되어 있는 상황. 매이고 속박 된 것.
당연히 고통입니다.
或名 邪行(사행)이며, 삿된 행. 삿된 행은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삿된 행을 통해서 고통을 야기한다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제일 금기시 하는 것이 邪行입니다.
或名 隨受(수수)며, 隨受 =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 뭐든지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물리칠 것은 물리쳐야 되는데,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或名 無慚恥(무참치)며, 부끄러움이 없는 것. 그렇지요. 사람에게 정말 사람이라고 할 아주 중요한 요건중의 하나가 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그것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慚恥함이 없는 것.
或名 貪欲根(탐욕근)이며, 탐욕의 뿌리. 그랬습니다.
或名 恒河流(항하류)며, 항하강이 흘러가는 모습처럼 우리의 어떤 마음의 변화. 그것을 이렇게 恒河流라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그것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或名 常破壞(상파괴)며, 항상 파괴만 있는 것. 늘 뭐든지 그대로 있어주질 않고, 파괴만 되는 것. 파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파괴되는 입장으로써만 보면 전부 사실 그것은 고지요.
或名 炬火性(거화성)이며, 횃불과 같은 성품.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성품. 그것이 炬火性입니다.
或名 多憂惱(다우뇌)니라. 憂惱가 많은, 근심과 괴로움 번뇌가 많은 것. 이것을 鮮少世界의 苦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계를 이렇게 여러 가지를 등장을 시켜서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 세계에서만 이것이 苦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여기에서 그대로 苦지요. 그 다음에
2. 集聖諦의 十種名
諸佛子야 所言苦集聖諦者는 彼鮮少世界中엔 或名廣地며
或名能趣며 或名遠慧며 或名留難이며 或名恐怖며
或名放逸이며 或名攝取며 或名着處며 或名宅主며
或名連縛이니라
諸佛子야, 모든 불자들이여 所言苦集聖諦者는
彼鮮少世界中엔, 저 선소세계 가운데서는
或名 廣地(광지)며, 그랬습니다. 넓을 廣자, 땅 地자. “大苦樹가 나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큰 고통의 나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廣地라고 한다.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런 말이지요.
或名 能趣(능취)며, 능히 나아가는 것.
或名 遠慧(원혜)며, 지혜를 멀리하는 것ㆍ지혜를 떠나는 것. 그것은 바로 정말 고통의 큰 원인이지요. 불교에서는 지혜를 제일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혜를 멀리해버리면 이것은 바로 고통입니다.
或名 留難(유난)이며, 어려움에 머물다 그랬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머무는 것. 그것이 곧 고통을 불러오고요.
或名 恐怖(공포)며 或名 放逸(방일)이며, 아~ 이것 좋은 말이네요.
恐怖, 그리고 放逸. 게으른 것.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하고 싶은 말씀이 오죽 많겠습니까만, 그 중에서 제일 중점적으로 하신 말씀이 방일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방일하지 말라 = 게으르지 말라.
或名 攝取(섭취)며, 取하는 것이지요. 거둬들여서 取하는 것.
或名 着處(착처)며, 집착하는 곳.
或名 宅主(택주)며, 宅主 = “집의주인” 하는 것은 12인연 중에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이렇게 나가지요. 無明이 宅主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을, 내 개인의 집 주인은 바로 無明이 우리 집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참~ 아주 해석이 정확한 해석이긴 한데, 듣기는 그렇게 편치 않은 내용입니다. 우리 宅主가 누구냐? 무명번뇌다. 우리 무명번뇌가 宅主다. 집 주인이다.
或名 連縛(연박)이니라. 끊임없이 속박되는 것. 이것이 모두가 고통의 원인인 集聖諦에 해당 되는 것입니다.
영문은 석원 거사님께서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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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무명번뇌가 우리들의 宅主..._()()()_
根本이라고 하는 데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자리이다.
放逸하지 말라...無明煩惱가 우리 宅主...釋대원성 님! 수고 하셨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無明煩惱가 宅主...釋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
찬찬히 읽어보면서 한자 한자 집어가느데 한문보다 더 어러운 영어~~~~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우리의 宅主는 무명번뇌!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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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하지 말라...고맙습니다. _()()()_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지혜를 멀리해 버리면 이것은 바로 고통입니다._()()()_
지혜를 멀리해버리면 이것은 바로 고통....
방일하지 말라 = 게으르지 말라...... 감사합니다._()()()_
무명번뇌가 우리들의 宅主 ... 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집멸도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감사합니다
狀(上?)자도 한문글자 대로만 보면 “높다ㆍ위다.” 이렇게 하는데 제가 보통 “上妙高位(상묘고위)” 그러면 上자를 아주 고급ㆍ아주 훌륭한ㆍ아주 값이 비싼,~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내 개인의 집 주인은 바로 無明이 우리 집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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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멀리해버리면 이것은 바로 고통....
방일하지 말라 = 게으르지 말라......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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