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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72년에 찍은 강동초등학교 졸업기념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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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은 물가에 앉아야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내게 있어 고향도 그런 곳이라 하고 싶다. 강동해안이 아니면 어떤 생선회도 별로이고 고향 마을 집집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연이 떠오르고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무룡산 고개만 넘으면 일망무제로 펼쳐진 탁 트인 바다는 계절마다 맛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눈 대중 경치마저 다르니 지구상 어디에 이런 곳이 있으랴!
무룡산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소쿠리를 펼친 형상이라는 강동. 골마다 마을마다 갖가지 사연과 역사를 가진 순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 울산의 가장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진 곳이자 가장 가치 있는 해양관광지로, 가장 유망한 미래 산업을 꽃피울 자원을 가진 보배로운 땅이다. 강동이란 지명은 동천강 내지는 태화강 동편에 있는 땅이란 뜻으로 작명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이나 지역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사농공상이라는 직업에 귀천을 두고 문(文)을 중시하던 유교 신분사회에서는 오로지 양반 숫자나 과거 합격자수를 가지고 지역을 평가하고 등수를 매겼을 것이다. 당연히 울산을 에워싼 바다와 산들 그리고 울산을 지켜왔거나 그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가치는 잊혀져 왔거나 낮게 평가돼 왔다.
울산시 북구 강동동은 그런 면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강동은 무룡산을 경계 삼아 농소와 동서를 나누고 금천 도랑을 경계로 구암 성골 주전과 이웃하고 염포산 너머로 양정. 염포동을 이웃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신명마을 지경(地境)이란 이름 그대로 경북과 경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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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 음지마을 곰솔. 수령 250여년 된 이 곰솔은 마을의 당산나무로, 매년 초 당제가 열린다. |
강동은 울산에서 가장 오랜 ‘땅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반구대 암각화나 천전리 공룡발자국 못지않게 울산의 선사시대를 더 올릴 수 있는 흔적이 강동에 있다. 무룡산 동편 구남에서 들어가는 쟁명골 곳곳에 각종 조개와 삼엽충 화석들이 부지기수였다. 울산의 땅이 중생대 백악기 때부터 형성돼 구남 일원의 신생대 지층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증거다. 울산에 자연사박물관이나 관련 전시관이 들어선다면 전국 대학에 흩어져 있을 무룡산 화석들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고 그 화석에 대한 평가 또한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박제상이 왜국을 향해 배를 출발했던 곳(발선처- 發船處)도 강동해안이었고 주상절리 바위도 강동 해안에만 있다. 대안(大安)이나 달골(月谷) 장등(長嶝) 골짝마다 확인되는 쇠부리터와 유포석보, 우가산 봉수대, 신흥사의 역사를 보면 강동이 결코 단순한 ‘갯가’가 아닌 역사가 풍부한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소, 염포 일대와 강동이 속한 북구는 신라 때 굴아화현·율포현 지역이었다. 그 가운데 강동이 속한 율포현은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서기 757년) 동진현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 때 하곡·우풍과 합쳐 흥려부(일명 흥례부)로 승격됐다고 전해진다. 그 후 조선시대부터 울주에 속했다. 1995년 울산시·군 통합으로 울산군이 울주구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97년 7월 15일 광역시 출범 때 중구의 진장·효문·송정·양정과 농소읍, 강동면을 합쳐 북구를 만들어 오늘에 이른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강동면에는 강동초등학교(정자리 소재)를 비롯해 신명, 동해(당사리)등 3곳과 무룡분교(달곡 장등 가운데)까지 초등학교가 번성하였고 강동중학교에는 이들 초등학교 출신 외에도 대안과 양남 경계선인 어전, 신대에 사는 아이들도 더러 같이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많던 어린이들이 강동개발과 함께 되돌아왔으면 한다.
울산에서 동구 남목 고개를 넘으면 바로 보이는 주전바다, 사실 강동 해안이 시작되는 곳이다. 거북 돌, 몽돌 동해안은 강동만의 자랑이고 노을과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감포까지 가는 가을날 해안 드라이브 길은 얼마나 좋은가?
농소와 경계 짓는 무룡산은 동해와 함께 강동의 또 다른 상징이다. 하지만 ‘7선녀와 용의 전설’ 하는 것은 작위적이고 허구이다. 그런 이야기는 정말 식상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상상력 부족에서 비롯된 70년대 새마을 운동식의 ‘이바구’일 뿐이다. 차라리 기록에 의한 ‘무리룡산’에서 음이 변한 것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화암 해변의 몽돌은 우리가 오래 보존해야 할 울산의 천연자원이다. 파도에 쓸려 나가 변형되는 해안선을 보호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고 맨발 걷기나 인공 수영장 정도는 만들어져야 할텐데 앞으로 산하개발에 기대를 걸어야겠다.
구남 못 위 산록에 있었던 일명 옷물이라는 샘물은 신비한 물이었다. 벌에 쏘일 일이 많았던 어린 시절 주전자에 퍼 담아서 벌 쏘인 자리에 바르기만 해도 저절로 나았고 등에 난 땀띠도 즉효, 옻이 올라도 즉효였는데 85년 도로포장이 되면서 사라져 아쉽다.
2002년부터 시작된 정자 대게 잡이는 또 다른 명물이지만 아직은 더 많은 요리와 맛있는 조리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게 어장 역시 더 보호하고 잘 길러야 명성이 오래갈 것인데 현실적으로 안타까운 부분이다.
정자나 당사 우가포 산하까지 해안마을마다 고루 생산되는 돌미역은 판지의 미역바위가 아니라도 전국 최고의 자연산 미역인데 포장술이나 크기를 조절해 가격을 다양화 해야 대중적인 소비가 가능할 것인데 초보적인 포장에다 크기는 옛날식 그대로라 개선이 시급하다.
강동 해안 일대 전체가 멸치젓갈로 유명하지만 외솔선생은 한 수필에서 강동 해안의 유포 유지렁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유포의 유지렁은 전라 순창의 고초장으로 짝할만하여, 조선간장 (지렁)의 최상급 대표적인 것이요, 그 진득진득하고 구수한 울산 전복곰, 그 시원하고 향긋한 합도(蛤島)의 깜박조개국, 조선천하 어데서 이같은 맛을 얻어 볼 수 있으랴.’-외솔선생의 유고 <내 고향 자랑>중에서
최근 국도 31호선이 확장 개통 되면서 자동차 전용도로 논란이 있었다. 무룡산 터널과 함께 강동을 지나칠 수도 있고 감포까지 바로 달릴 수도 있는 도로이다. 속도는 사람을 머물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일제시대 만든 신작로를 걷어내고 새로운 국도로 확포장한게 1985년. 21세기에 걸맞는 효율의 도로 속도감 있는 길로 대체되었다.
길과 관련해 생각하자면 강동은 이제 변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달리는 속도와 반비례해 경치를 보는데 빨리 달리며 앞만 보고 달릴 사람은 새 도로를 선택하고 불과 몇 리 고개를 99고개라며 꾸불꾸불 넘었던 옛 사람처럼 사방 다 둘러보고 싶다면 옛 길을 그냥 가면 된다. 강동의 산과 들, 바다를 천천히 마음껏 감상하도록 하고 갯내음 나는 강동 바람도 들이키게 해줘야 한다.
해안마을에는 ‘박문수어사 밥상’이나 미역 전복 등으로 구성한 강동 해산물만의 ‘수라상‘을 팔면 어떨까?
이제 강동은 산하개발을 계기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좀 더 나은 해양관광지로, 자연이 살아 있는 에코관광지로 그러면서 신선한 자연 식재료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맛의 관광지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오래 지속가능한 아름다운 해안 명소 강동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울산의 미래는 강동의 미래에 달려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