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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제목이 계속 알파벳으로 되어 버렸다. 어떤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아내가 늘 주장하는 대로, 내 성격이 못 되긴 못 된 것 같다. 여행을 다닐 때도 그렇다. 지도를 몇 번이고 봐서 딸딸 외울 정도가 되야 직성이 풀리고, 동네 명물에 대한 설명은 꼭 미리 읽어야 하고, 게다가 시간 내서 술도 마셔야 하고.. 아무튼 동행들은 가이드가 있다고 좋아한다만, 나는 무지 바쁘고 피곤하다. 어서 이런 패턴의 여행을 버리고 가이드 붙여서 하는 여행으로, 버스나 전철 타고 다니는 여행보다 택시로 다니는 패턴으로 바꿔야 할텐데.. 점점 나이도 드는데.
로마를 떠나기 전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로마공항에 (세계의 여러 공항 중 가장 이름이 그럴싸하다. Leonardo da Vinci 공항) 가야 할 계획을 짜야했다. 그냥 버스와 기차를 이용하면 (2.000 + 17.000) x 2 = 38.000 lire면 되는데, 둘리의 모습을 보니 많이 지친 것 같아 좀 더 편안한 교통편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바티칸 미술관 옆에서 셔틀서비스 전단을 받은 게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둘이면 50.000 lire 라고 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이용할 만 하겠다 싶어 예약을 하려고 하니, 비행시간 3시간 전에 타라는 것이었다. 여러 호텔을 돌아다니는 셔틀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아침 7시 20분에 호텔 앞에서 타기로 했는데, 갑자기 금액이 70.000 lire 라는 것이 아닌가? 어? 그 사람 말이 아침 8시까지는 night charge를 받는단다. 우리 식으로 하면 '심야할증요금'인 셈인데 아침 8시까지 심야할증이라고? 아침 8시면 노고지리 우짖는 대낮이지 어떻게 밤이냐? 어이가 없어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금액을 쓸 때 1000 마다 우리는 콤마를 찍는데 이들은 '쩜', dot를 찍는 것이 독특했다. 반대로 소수점은 콤마로 찍는다. 나는 그것을 보고 연구계획서 쓸 때 참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은 못 속이나 보다. 나는 숫자를 쳐 넣을 때, 컴퓨터 키보드의 오른 쪽 숫자판을 주로 쓰는데 그곳에는 콤마가 없다. 그래서 돈을 입력할 때는 늘 콤마 때문에 손이 바쁜 불편이 있었는데 이들같이 '쩜'으로 쓰면 좀 편할까? 아니면 누가 그 옆에 콤마 자판 하나 더 넣은 키보드 좀 만들어서 안 파나? 내가 하나 당장 살텐데..)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해서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가면 얼마냐고 하니까 85.000 lire라고 한다. 훨씬 늦게 출발해도 되고, 아무런 extra charge 도 없다고 한다. 그래.. 이제 체력도 바닥이 났는데..둘리도 그 동안 이 극성스런 아빠 따라 다니느라 지쳤는데..한번 쏘자!
택시를 예약해 버렸다.
학회장소인 Rimini에서 아침에 깨어 밖을 내다보고 황당했던 생각이 난다. 7시가 넘었는데도 사람도, 차도 거의 없다. 이탈리아의 하루는 늦게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밤에는 그리 늦게까지도 왁자하두만. 미국사람들의 부지런함(?, 단순화하여 부지런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수도 있겠다. 내 말뜻은 미국인들이 일찍 일어난다는 뜻이다)을 생각해보면 참 의외였다. 둘리가 아침에 해변에 나가보겠다고 나갔었는데, 호텔 문이 나가긴 해도 맘대로 들어오지는 못하게 되어있어서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7시 반이 되서야 종업원이 호텔문을 열더란다. 이탈리아의 아침은 하여간 늦게 온다.
어쨌든 때아닌 호사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항에 도착하자 택시 운전사가 100.000 lire를 달라고 한다. What?! 호텔 언니가 85.000이라고 했고 No extra charge라고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인상을 팍 썼더니 (이탈리아 여행에서 늘은 건 택시비 따지는 것이고, 잃은 건 내 고운 품성이 사나워졌다는 것이다), 자기가 설명해 준다고 하면서 종이에 볼펜으로 뭘 막 적는다. 다 적고 합계를 내더니 89.000 lire라고 하는 것이다. 뭐야? 이 사람 바보 아냐?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가 100.000이라고 했고, 그걸 항목별로 적어서 설명해 준다고 했으면 억지로라도 100.000을 만들던가? 기껏 이것저것 썼는데 89.000 뿐이 안되니.. 웃음뿐이 안나온다.
나는 90.000 lire를 주고 "Keep the change, Signore" 하고 말았다. 그러자 얼굴 가득 함박 웃음을 지으며 Grazie!!를 외치는 그 운전사를 보면서 또 웃음이 나왔다. 둘리도 우스워서 어쩔 줄 모른다. 이 사람들이 순진해서 그런 건가? 이런 얄궂은 Italiano의 mentality는 10년 이상 살아봐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계속 길가의 차선을 보고 있었다. 로마 시내에는 여간해서는 차선이 없었다. 교차로 근처에야 약간 차선이 그려져 있었고 대부분의 도로는 중앙선만 희미하게 있을 뿐이었다. 물론 고속도로는 차선이 아주 잘 그려져 있었지만. 우리가 묵던 호텔 앞은 로마의 한가운데 베네치아 광장 Piazza Venezia 이었다. 이 광장은 5군데 정도의 입출구가 있는 로터리 식으로 되어있는데, 꼭 완전한 로터리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직진과 좌회전도 막 섞여 있는 광장이다. 그런데 이곳에 신호등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곳에도 관광객이 득시글대고 있다. 아무데로나 건너는 행인들, 오토바이들, 차들.. 나 같은 객은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그렇다고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Chaos 이긴 하지만 틀림없이 어떤 질서가 존재하는 듯이 자연스럽다. 가끔 빵빵대는 차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야 활기찬 이탈리아에서는 애교 정도다. 나는 길가 바에 앉아서 광장을 한참 보았는데 참 재미있고 신기하기만 하였다. 아마 Italiano 들은 차선과 같은 규제가 싫은가보다.
(이 광장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이 우리 나라 울산의 어느 로터리이다. '공업탑 로터리'던가? 난 울산에 가서 그 로터리를 지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었다. 거긴 로터리가 아니다. 그냥 너른 공터에 차들이 각자 자기 방향으로 가는 곳이다. 내가 탄 차가 가는데 옆쪽에서 대형 트럭이 직접 내게로 달려오질 않나? 그것에 신경쓰다 보면 다른 옆구리에서 택시가 빵빵대질 않나? 사고도 잦다고 하는데, 사고가 나면 무조건 '50:50 쌍방과실'이라던가? 그 곳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혹자는 이탈리아가 잘 못사는 (그래도 그들은 G7국가이다. 그리고 삶의 만족도는 매우 높아 보였다. 도대체 걱정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이유가 그들의 지나친 지방색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도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는 Commune라는 자치체 형식의 도시국가로 오랫동안 존재하였다. 그들 도시국가간의 전쟁도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전쟁의 현대판이 축구 경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지방색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상한 일을 경험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어색했던 것은 '물'이었다. 이 나라는 대리석, 석회석이 많은 나라라서 그런지 물이 좋지가 않단다. 강물도 맑지가 않다. 그래서 자고로 마실 물이 귀했던 모양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다 주문하면 꼭 drink를 묻는데, 이 때 물을 시켜야 한다. 절대로 공짜물은 없다. 우리네 같이 우물가에서 나뭇잎 띄운 물 한바가지 얻어 마시고, 백년해로하기도 하는 물인심 좋은 나라 백성은 당황스럽다. 한번은 길가의 바에 물 한 병 시켜놓고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걸 보면 이들에게는 물이 최소한 콜라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나와 둘리는 둘 다 물을 많이 마신다. 하루 밤에 한 병씩은 마시는데, 문제는 호텔에도 공짜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리를 가게에 심부름 보내 물을 사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 들의 물aqua은 두 종류가 있다. naturale와 frizzante 인데, naturale는 보통 물이고 frizzante는 sparkling, 즉 탄산수다. 무지 쓰다. 둘리는 frizzante를 사 가지고 왔다. 둘리가 헤깔린 이유는 물의 상표 때문이었는데 상표에는 'Aqua Naturale'라고 쓰여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천연수'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라벨의 맨 밑줄에 naturale 또는 frizzante를 표기해 놓았다. 둘리는 밑의 표기는 보지 않고 상표만 보고 쓴 물을 사온 것이었다. 'Naturale 맞는데..'하면서.
한편 그 곳에서도 물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병 뚜껑의 색을 다르게 해 놓았고, 라벨도 색을 다르게 해 놓았다. 붉은 색은 naturale, 파란 색은 frizzante. 그 뒤로는 물을 잘못 사 먹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Venezia 까지는.
그러나.. Venzia에서 Firenze로 넘어 온 다음에 낭패를 겪었다. 그 동안의 관행으로 당연히 붉은 딱지의 물만 사먹던 우리는 Firenze에서는 그 색깔 표지가 반대라는 것에 아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들이 킨 물이 쓴 물일 때의 그 기분. 게다가 그 물을 마시고 설사를 할 때의 그 참담함. Katharsis? Never!!
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같은 나라에서 물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그 이유를 지방색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무슨 이유가 있을까? 맞는지 틀리는지.. 업자 맘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아마 지방색 때문일 거야..암! 그렇고 말고.. 이 물 색깔은 로마에 오니 또 달라졌다. 그렇다면 Firenze만 다르다는 말인데..한 때의 수도首都로서 자존심일까? 에이..모르겠다...
지방색이 심한 이 나라 사람들은 다른 고장 이야기를 하면 싫어한다고 한다. 나는 한번도 그렇게 다른 고장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리고 이탈리아는 프랑스 못지 않은 대단한 wine의 강국이다. 역사적으로는 누가 더 오래되었는지 몰라도 이탈리아 사람들도 와인에 관한 한 자존심이 무지 세다. (역사적으로는 로마시대에 프랑스에 포도를 전해주었고, 와인 담그는 것을 권장했다고 한다)
와인에 대한 자존심,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그들은 자기 동네 와인에 대한 긍지가 있다. 그래서 식당에서 메뉴를 들추다가 공연히 아는 와인 이름 있다고 폼잡고 시켜봐야 그들의 냉소만 산다는 말까지 있다. 물론 손님 앞에서야 대놓고 그러겠냐만.. 나는 그래서 이탈리아에 가자마자 얼른 'Vino della Casa'라는 말을 외웠다. Vino는 wine이라는 말이고 della야 of 일 것이고 Casa는 집 아니겠는가? (스페인 노래던가? Casa Blanca라고. '하얀 집'. 그러니 말 비슷한 동네니까 Casa는 집이겠지) 그 뜻은 영어로 house wine인 셈이다. 좋은 식당일수록 house wined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자기네가 담근 술이 없으면 그 동네 술이라도 내어 주면서 좋아하는 법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로는 잘 알더라도, 공연히 wine의 본 고장에 가서 떠들 일이 아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서도 wine에 대하여 어느 해는 가물어서 wine이 달고, 어느 해는 어쩌고 하는 전문가 때문에 술맛을 버린 적이 있다. 그 사람이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와인 맛을 얼마나 구별할 줄 알겠나? 조선 놈이.. 공연히 아는 것을 말하느라 진을 빼면서 술맛을 버리느니.. 그냥 편하게 마시면 되는 것이거늘.. 그리고 와인을 잘 알면 문화인인 듯 한 어설픈 취향도 나는 경멸한다. 내 평생 가장 맛있게 마신 와인은 신부님과 함께 축성된 미사주를 퍼대고는 대취한 때였다. 얼마나 좋은가? 술이지..게다가 축복까지 받았대지.. 마시고 강복 받고..버디하고 돈 따고..)
나는 식당에 가기만 하면 'Vino della Casa'를 외쳐댔다. 천박한 놈. 아는 게 그 것뿐이니..
그리고 곧 'Bianco'를 추가했다. '백白' 포도주란 말이다. 어쨌든 식당 사람들은 좋아했다. Rimini의 호텔에서는 자기네 라벨이 붙은 와인을 내주며 즐거워했고, Assisi 호텔 식당의 '멜 깁슨' 닮은 지배인은 멋있게 병따개를 돌리며 정말 기분 좋게 서브하였다. 그런데 이 'Vino della Casa'가 안 먹히는 곳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음식 간은 내 입맛에 딱 좋았다. 음식이 맛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간은 맞더라는 뜻이다. 그래도 역시 남의 나라 음식은 어쩔 수 없는지, 열흘이 지나자 뭔가 돌파구가 있으면 하는 맘이 생겼다. 그러던 참에 눈에 띈 것이 바로 짱꿰! 중국집이었다. 그 집에서 볶음밥과 hot and sour soup을 (우리 나라 중국집에 가서 '쌀라탕'을 달라고 하면 이 hot and sour가 나온다. '쌀라'가 hot and sour란 뜻이라는데..술 마시고 속 푸는데 제격이다. 제기동에 '쌀라탕' 잘하는 집이 있는데.. 생각 있는 사람은 참가비 지참하고 오시길..) 시켜 먹었는데, 완전히 한국 중국집의 볶음밥이었다. 아니? 이런 일이..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에서 한국식 볶음밥을 먹을 수 있다니.. 나는 웨이터/지배인/주인을 불렀다.
음식이 입맛에 잘 맞는데 어디서 왔느냐? 고 물었더니 '쓰촨'에서 왔다고 한다. 사천지방의 음식 맛이 우리네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예상외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돌아오기 전날. 일행들이 마지막 날인데 좀 제대로 먹자고 분위기를 잡길래 다시 그 중국집엘 갔다. 역시 음식이 맛있었다. 그런데 이미 와인 몇 잔에 얼큰해진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난 하여간 이 호기심 때문에..) 중국집에도 'Vino della Casa'가 있을까?
나는 다시 그 웨이터/지배인/주인을 불렀다. Vino della Casa가 있냐니까, 있단다. 어떠냐니까, 좋단다. 평소 같았으면 짱꿰의 말이니까 한번쯤은 의심을 해 보았을텐데, 이미 음식맛을 확인했고, 또 몇 잔의 와인에 나의 사려깊음이 무너졌던 모양이다. 덜컥 시켰다. 그것도 piccolo도 아니고 medio로.
웨이터가 가져온 와인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길다란 유리 주전자에 와인을 담아 왔는데.. 이 집은 와인을 독에 담아놓고 이런 식으로 퍼서 파나? 한 모금 맛을 보니.. 아! 이건 아니다. 내 아무리 와인 맛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건 아니다. 술맛이 연속적이질 못했다. 전혀 homogeneous하지 않은 술맛. 무언가 걸리는 이 맛은 이 술이 multi-component라는 것을 의미했다. 으.. 이 짱꿰.. 하나 다행이라면 그래도 물에 술을 탄 것 같지는 않고, 술에 물을 탄 것 같다는 것 정도랄까? 나는 그 선수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메뉴에서 고른 다른 와인을 하나 더 시켰다. 그의 Vino della Casa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나를 보고 둘리가 한다는 말.
"아빠도 참.. 어떻게 중국집에서 'Vino della Casa'를 시켜요? 그것도 로마 한복판의 중국집에서.. 저 사람이 와인을 담그겠어요? 중국사람이?"
그래.. 네 말이 맞다. 중학생 자식놈만도 못한 이런 짧은 생각, 그리고 경박함! 에이..생각할수록 괘씸하고, 그러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말도 안 되는 '밀주'를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에이.. 나쁜 ㄴ.
Vino della Casa. 마시는 이도 파는 이도 다 즐거운 술이다. 그러나 중국집에서는 절대로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집은 역시 고량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