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내용은, 재일유학생 독립운동가 김창식선생님의 독립유공자심사에서 참고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당시의 조서내용을 번역하여 송부한 내용입니다.
문장이 오래된 내용이다보니 어려워서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부분들이 상당있읍니다.
이해를 바라면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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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在船橋市(후나바시시)조선인고학생을 중심으로 하는"민족주의그룹"사건
1) 그룹결성경위
중심인물 神田恩波는 쇼와10년(1935년)일본에 와서, 교토.토쿄를 전전하면서 고학을 해오다
쇼와17년(1942년)2월경부터 船橋市에 이주하여, 신문배달을 하면서 토쿄도麴町區소재
동부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중이었는데, 고학의 과정에 있어서 민족적반감을 아주크게
가지게 되고, 쇼와16년(1941년)8월경 부터 같은 신문배달등을 하는 고학생또는 치바켄하의
소재 명륜중학교(쇼와17년7월불량학교로 지정되어 폐쇄됨)재학중의 조선인,
또는 동향출신관계의 친구등에 대해서, 조선이 독립을 하지않으면 지금의 조선민족의 고난과
환경이 개선되지않는다는 취지를 알려서, 서로함께 민족적불만, 내지는 반감을 토론해 왔다.
이렇게해 오는동안, 國本政雄(쿠니모토 마사오? / 동업관계), 大原麟瑞(오오하라 린스이? /
명륜중학생), 金澤昌植(카나자와 마사우에? / 명륜중학생), 安田文奎(야스다 분케이? /
명류중학생), 吉許武雄(키찌가리 타케오? / 관동상업생)등과 차차 사상적으로 의기투합하고,
여기에 神田恩派를 중심으로 해서 6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한편 國本政雄.吉許武雄은 동교향관계의 교우를 지도계몽했고, 治川信禹(재동경신전구
滿蒙(만모)중학생), 金山吉龍(재신전구창평중학생), 許文現(중대법학부생), 城山弘忠(명륜중
학생), 玉川文雄(명륜중학생)등을 차차 동지로하여 획득하고 이들을 중심으로하는
동지의 결집을 이루고, 양자서로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의식의 함양, 단결강화등에
암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책동개요
전기와 같이 고학의 과정등에 있어서 상당히 심각한 민족적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은
사상적으로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결집을 하고 더불어 조선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이라고 하여 쇼와17년4월이후 수차 회합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의 선동협의를 해 오다가
주요한 점을 추려서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a)쇼와17년4월부터 같은해 9월까지의 사이 후나바시시 혼마찌 2쵸메1-180번지
길강정길씨의 神田의 하숙,이찌카와시 나카야마492번지 소천종작씨의 大原의 하숙등에 있어서
神田恩派.城山弘忠.大原麟瑞.金澤昌植.國本政雄는 2명내지 4명으로 하여 전후 10수회에 걸쳐
모임을 가지고 조선문제를 검토하고, 특히 대동아전쟁의 장기화에 동반하여 일본은
국력쇠퇴해 무력.경제.사상적으로 핍박동요하여 결국에는 패전할 수 밖에 처지에 놓이므로
이기회에 해외독립운동단체와 연락제휴하여, 일제히 무장봉기하여 조국조선독립을 실현해야할
것이 준비로서 동지 특히 지도적인 인물의 양성획득을 하지않으면 하여 그 수단방법 여기에 구체적
임무에 있어 협의를 하여왔다.
b)쇼와16년12월부터 쇼와17년3월까지의 사이 神田恩派.國本政雄.城山弘忠.大原麟瑞.金澤昌植.
安田文奎.吉許武雄.金山吉龍는 각자의 하숙을 번갈아 가며 회합장소로 하거나 또는 찌바해안등에
있어서 2명내지 4명으로 하여 전후 수십회에 걸쳐 여러차례 회합하여 "전국의 추이"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취직. 취학, 하숙난의 실정" "조선민중의 생활상황" "일본여자와의 결혼문제" "징병제의
실시" "창씨개명" "조선문화의 멸망"등의 문제에 관해 검토하고 민족적입장에 의한 비판논의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서로의 의식을 함양해 왔다.
c)쇼와18년4월 토쿄도麴町區소재 동부신학교에 있어서 神田恩派는 친구및 조선학생 金城英雄.文城容梧
두명에 대해서 학교입착제도문제에 관해 우리 조선인이 차별을 받지않기 위해서는 독립국가민족이
되지않으면 안되는 것이다하여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해 조선독립은 절대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동지를 모으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동했다.
d)쇼와16년11월부터 쇼와17년9월까지의 사이 토쿄도 칸다구 지보쵸12 金海씨의靑海하숙, 또는
토쿄도 나카노구 히가시나카노역 부근등에서 治川信禹는 靑松陸煥과 수차려걸쳐 만나 동인으로 부터
조선독립운동참가의 권유를 받아서 참가하여 대동아전쟁하 독립운동전개의 절호기회가 된다고 하여
동지모집을 하기위하여 수단방법및 구체적인임무등에 있어서 협의를 하여왔다.
e)쇼와8월부터 쇼와18년4월까지의 사이 金山.吉許.許文現등의 하숙에 있어서 治川信禹는 동향출신
관계인 吉許武雄.金山吉龍.國本政雄.許文現외 5명등에 대해서 전후10여회에 걸쳐 2명내지 6명이모여
만날때마다 "전국의 추이"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관헌의 압박상황" "징병제의 실시"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 "해외에 있어서 독립운동의 활동상황" "일본주재조선인학생의 무지각"등에 대해
민족적입장에서 격렬한 비판인 언사로 논의하고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동지를
모아야 한다고 선전선동을 일삼아 왔다.
f)쇼와17년 1월부터 쇼와18년 6월 까지의 사이, 金山吉龍.吉許武雄.許文現.國本政雄.治川信禹등은
각자의 하숙등에 있어서 전후10회에 걸쳐 2명내지 4명이서 수차례만나 "전국의 추이" "취직,취학,
하숙난문제" "조선인에 대한 차별"등에 관하여 민족적편견에서 비판하는 것과 함께 조선독립은 피를
보지않으면 불가능하고, 우리들 조선인은 단결해야만한다고 격앙된 언사로 논의함에 조선독립에
헌신해야만한다는 결의를 피력하고 단결강화를 꾀하였다.
g)쇼와18년 6월 토쿄도 에도카와구 코이와쵸 4-1956풍장옥천의 하숙에서 城山弘忠.玉川文雄의 두명은
전후 3회에 걸쳐 회합하여 조선문제에 관하여 검토하고 특히 대동아전쟁하의 조선독립의 절대기회라고
보고 동지모집을 해야한다고 협의를 수차례걸쳐 해 왔다.
h)쇼와18년 9월상순경 토쿄도 요도바시구 토즈카쵸1-523 白鷺壯에서 大原麟瑞는 친구인 전수대학생
高山充德.와세다대생江本某(에모토 모), 와세다대생 松本鍋禧의 3명에 대해 중국의 장개석군에 조선독립운동자가
참가해서 일본과 전쟁하고 있는 취지를 강조 동지로하여 획득하지 않으면하여 조선독립에 관하여 선전
선동을 했다.
3)조치
치바현에 있어서는 후나바시시거주 조선인고학생및 관하소재 명륜중학교 조선인학생등이 수차례회합하는
등 용의행동을 탐지하여, 금년6월6일이후 관계자 11명을 검거하여 취조한 결과 상기의 범행내용이 판명
되었으므로 좌기(인명리스트)대로 치바지방재판소검사국에 송치한다.
이하 인명리스트.
503번지는 문선명씨가 하숙을 한 집이고, 523번지는 학생독립운동가들이 적발된 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