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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음악 스크랩 (민중) 조선 파르티잔의 노래 - 글 : 임화, 곡 : 김순남, 피아노 : 신동일, 노래 : 시렌느 파파로티
이상진 추천 0 조회 92 06.10.18 14: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빨치산 투쟁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지리산. 빨치산 무장투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왜 빨치산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싸웠고 또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해방후 빨치산 무장투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계승할 것인가 하는 현재적 관점도 바로 여기서 출발하여야 한다. - 글/김무용.  역사학연구소 문집 [역사기행] - 제1회 역사기행 1993

 

조선 파르티잔의 노래(Korean Partisan Song)

 

작    사 : 임화(林和)

작    곡 : 김순남(金順男)

편    곡 : 하차투리안(Aram Il'ich Khachaturian)

번    역 : 시코르스키(T. Sikorskaia)

피아노 : 신동일

노    래 : 시렌느 파파로티(Cyrene Paparotti)

참    고 : 이 곡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작곡가 신동일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울러 신동일님의 이 곡에 대한 간략한 곡 소개와 연주하게 된 연유를  밑에 함

               올렸습니다.

참    고 : 이 곡의 가사와 관련 자료를 보내주신 이은나 (전남대 강사)님 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마 이 음악과 가사가 동시에 올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1.

그대 나의 조국이여

나는 너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이곳은 관목으로 덮힌 산속

밤이면 숲속에 동물들이 숨어 있도다.

(후렴)

심장은 마치 가슴 속에 불타는 석탄과 같고

빨치산 기는 어둠 속에 빛나고 있다

나는 이곳 지리산에서 홀로 망보고 있다

우리는 악에 찬 적군을 상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싸우고 있다. 

 

2.

나는 나의 고향 북쪽 땅으로 부터

여기 남쪽으로 왔다.

언덕을 넘어 나를 따라 빨치산들은 갔다

주위의 숲은 울고 있었다

(후렴)      //

원수들은 나의 조선에

잔인한 적들은 나의 조국을 파괴했다

나는 복수의 맹세를 한다

지리산에서

 

▲ 젊은 시절의 김순남

 

1948년 월북 직후에 작곡한 <악보 16> '조선 빨치산의 노래' 는 전래음악정보를 가지고 있는 노래이다.

 

이 노래에서는 노래가락의 둘째마디의 세째박 '누'(Bb음)에서 갑자기 떨어진 '라'(Re음)가 완전 4도 위의 음 '사'(Sol음)으로 진행하는 흐름이 전형적인 전래선율진행 방식이며 그 선율의 바탕은 계면조 큰 골격에다 세도막형식(A B B')을 이루고 있는데, 형식의 간결한 통일감, 선율선의 전통감, 선율성격의 선명함과 힘이 위로 치솟다 갑자기 가슴 속 밑으로 떨어지는 음의 호소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이 노래는 현재 가사가 원문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소련어로 번역(시코르스키 번역)된 가사는 전해지고 있는데, 역으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위 가사)

 

<악보 16>의 피아노 반주부는 김순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련 작곡가인 아람 일리치 하차뚜리안(Aram Il'ich Khachaturian, 1903 ~ 1978)이 1951년에 붙여진 것이다. 김순남이 소련 <차이꼬프스키 명칭 모스끄바 음악원>에 1952년 유학하기 이전에 하차뚜리안에 의하여 반주부가 붙여진 것으로 보아 이미 김순남의 많은 작품이 소련 창작계에 알려졌음을 시사한다. 하차뚜리안은 '쁘로꼬피예프' 와 '쇼스따꼬비치' 와 함께 소련의 3대 거인으로 알려진 인물로 알려지고 있었지만, 그 역시 김순남의 작품에 대하여 경도하고 있었다...(이하 생략)

 

- 노동은 지음 '김순남' P.298 ~299

 



▲ 뉴에이지 음반 <푸른자전거>의 작곡자로 이 곡을 연주하신  신동일님

 

월북작곡가 고 김순남의 <조선 파르티잔의 노래>는 바로 아래 올린 <어떤 이야기>와 함께 1994년6월5일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Weill Recital Hall)에서 연주되었습니다. 한국의 민족주의 음악을 주제로 공연한 이날 음악회에서는 김순남, 이건용, 신동일, 김대성 등 우리 나라 민족주의 음악의 오랜된 흐름을 짚어가며 미국 내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창작음악을 중심으로 한 기획 공연을 해 냈던 것입니다.

 

<조선 파르티잔의 노래>는 김순남이 모스크바 유학 시절 작품으로 생각되며 무용음악 , <스파르타커스> 등으로 유명한 아람 하차투리안이 직접 피아노 반주를 붙인 것이 인상적입니다. 따라서 이 노래의 화성 진행은 다분히 전형적인 하차투리안의 스타일로 전개되지만, 김순남의 강렬한 선율과 잘 어우러집니다. 김순남의 친딸인 방송인 김세원 씨가 아버지의 행적을 쫓으며 모스크바에서 악보를 찾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노래는 현재 러시아어 가사로만 전해지고 있지만 우리 음악 역사의 소중한 한 부분입니다.

 

이 노래는 러시아어 가사와 내용의 혁명성으로 인해서인지 국내에서는 아직 연주된 바 없습니다. 이 연주는 브라질 출신 소프라노 시렌느 파파로티의 노래와 저, 신동일의 피아노 반주입니다.

 

- 신동일, 김순남의 <조선 파르티잔의 노래>  인용. 파란 블로그 신동일의 작곡노트 <-- 바로가기

 

또한 <빨치산의 노래>로 알려진 곡이 있다. 김순남이 1948년 7월말에 월북한 뒤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해주에서 열렸던 인민대표자회의에서 함세덕이 4·3항쟁을 고발한 작품인 <산(山)사람들>이란 연극이 올려졌을 때 주제가처럼 불려진 노래이다. ‘그대 나의 조국이며/ 나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로 시작되는 이 곡은 김순남이 1952년 모스크바에 유학했을 때 하차투리안(Khachaturin)이 편곡하여 ‘조선 빠르띠잔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작품집에다 수록하고 방송으로 내보내기도 하였다. 이 역시 임화의 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민항쟁가>와 마찬가지로 평양에서 내려온 예술공작대에 의해 남한에 보급되었다.

 

- 이은나 [역사적 기억과 문화적 재현] '반 백년의 4.3과 그를 재현한 노래들' 인용.(컬처뉴스 2004-03-02)

 

조선 파르티잔의 노래(Korean Partisan Song)

작사 : 임화, 작곡 : 김순남, 편곡 : 하차투리안, 피아노 : 신동일, 노래 : 시렌느 파파로티



▲ 1953년 2월 모스크바에서 평소 절친했던 허진(1992년 현 재소 고려인협회 부회장이자 작곡가) 과 함께 한 김순남.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으로 , 보이는 책은 김순남의 악보집이다.(사진 설명은 노동은 교수님이고 허진의 모습은 이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쪽 상단의 검은 부분입니다)

 

김순남 "네 얼굴 꽃이 되어 들에 퍼지네"

 

노동은(중앙대 교수)/문화와 나 2002년 겨울호

 

세계의 음악가들이 격찬한 조선의 천재음악가. 그러나 역 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과 북 양쪽에서 희생된 비운의 음악가. 김순남, 그는 진실로 민족의 해방과 독립, 민족음 악 수립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열정의 화신이었다. 이제 그 는 가고 없지만, 그의 높은 정신과 작품은 지금도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적시고 지친 가슴을 쓸어 준다.”  

 

▲ 김순남의 첫번째 가곡집《산유화》표지 (1947) 

 

현대무용음악 <스파르타쿠스>를 작곡한 하차투리안(1903~1978)과 공동으로 창작 발표하고, 또한 쇼스타코비치(1906~1953)와 프로코피에프(1891~1953) 등 러시아 3대 현대음악가들이‘우리가 배워야 할 조선의 음악가’로 평가한 김순남! 미국의 월터피스톤, 지휘자 크세비츠키, 그리고 일본의 작곡가 하라 타로( 原太郞 ) 등이‘조선의 천재음악가’로 평가하고, 세계적인 음악사전《엠게게(MGG)》에 소개된 음악가가 김순남! 그러나 김순남만큼 비극적인 음악가도 없다. 세계사적 냉전이데올로기에 의해 남과 북 각각에서 희생된 대표적 인물이 김순남이기 때문이다. 

 

동경유학, 하라타로를만나다 

 

1917년 5월 28일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난 김순남(金順男)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지도받았으며, 1931년 서울교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이 학교는“음악은 조선 사람을 위하여, 그 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가르쳐 준 곳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졸업과 함께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와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두 군데에 합격했다. 

 

경성사범학교(이후 경사)에 진학한 그는 피아노 연주, 테너독창, 작곡, 경사취주악대악장,음악부장을 하며 영혼을 울리는 첫 창작품 <자장가>를 남겼다. 또 교내 작곡공모에서 그의 <경사요가>(경사기숙사가)가 1등으로 뽑혔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시절 평생 잊지 못할 박두봉 선생을 만나 민족과 사회현실에 눈뜨게 된다. 절친했던 친구로는 바이올린의 박민종. 정희석이 있었다. 

 

21세되던 1937년 3월 경사를 졸업한 그는 수원보통학교 교원생활을 거쳐 같은 해 9월 일본 동경으로 가서 1938년 4월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김순남은 삶에 큰 전기가 된 세가지 사건을 겪는다. 작곡지도 교수 하라타로와의 만남, 그의 작품을 일본 창작계가 선정한 것, 2년뒤 학교를 옮긴 일이 그것이다. 

 

하라타로는 1937년부터 일본 현대 작곡가 연맹 소속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중진평론가인 야마네 긴지(山根銀二)와 함께《음악평론》지를 펴내다가 이 학교 출강 직후 김순남을 만났다. 그는 저서에서 김순남을“재능이 풍부하고 혁명적인 음악가”로 평가했으며, 하라타로를 만나면서 김순남은 자유분방한 감상적 음악가에서 탈피한다. 

 

또한 김순남은 자작품 <피아노소나타 제1번>이 일본 현대작곡가 연맹에 의하여 선정되어 일본 음악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지도선생이 그만둔데다 그가 동맹파업을 주도한 사건이 겹쳐 1940년 4월 동경제국음악학원 3학년으로 전학한다. 전학직후인5월24일, 동경의 명치생명홀에서 신진 피아니스트 와타나베(渡邊正己)의 연주로 그의 <피아노소나타 제1번>이 초연된다. 

 

1942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5년째의 동경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때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후라서 조선까지 정국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1942년 이후 이건우· 정종길 ·한평숙. 이인형. 박용구 등 많은 동경유학생들이 귀국러시를 이루었다. 

 

김순남은 귀국직후 조선총독부 관제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하고 삼선국민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한다. 동시에 전 서울음악가들을 규합한 지하음악서클인 성연회(聲硏會)에서 신막· 강장일· 이범준 등과 함께 해방을 준비한다. 

 

그가 28세 되던 1944년은 한국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창작발표회를 한해다. 4월부터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음악강사가 되었고, 10월 17일 숙명고녀 출신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문세랑(文世娘)과 결혼한다. 

 

드디어 12월 17일 제 1회 김순남 작곡발표회를 연다. 이때 선보인 작품들은 <상 열>(오장환시)· <철공소>(김북원시) 등과 기악작품 <피아노소나타>· <피아노3중주> 등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울분을 삭이며 창작한 가곡이었으며, 동경유학생이자 당대 1급 음악가로 부각된 신재덕· 박현숙·이영세·윤기선· 이강렬 ·박민종· 정희석 등이 출연했다. 이 작품들은 기능화성법에 의한 조성음악에서 벗어나 현대음악기법에 의한 작품들로 한국 양악사에 있어 첫 현대작곡발표회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강장일(테너) ·박용구(평론) ·이범준(평론)과 교유한다. 

 

1945년 경성합창단을 지휘하며 창작에 전념하던 중 그의 유일한 딸이자 후에 방송인이 되는 김세원(金世媛)이 태어난다. 8월 10일에는 <자유의 노래>를 작곡하고 해방을 준비한다. 이후 모든 사람에게 전설적인 노래가 되고 해방과 민족의 노래로 불린 <해방가요>가 바로 이 노래에서 나온다. 

 

▲ 1944년 12월17일 서울에 있는 부민회관(지금의 서울시 의회 자리)에서 김순남이 첫 작곡발표회를 가진 후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부터 김순남, 첼리스트 이강렬, 김순남의 모친, 피아니스트 윤기선, 바이올리니스트 정희석, 이영세, 박민종, 피아니스트 박현숙, 신재덕. 

 

해방된 조국, 민족음악에 열정을 쏟다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자 그는 민족음악 수립과제의 선두에 서서 자신을 불태운다.그는 먼저 조선음악건설본부의 작곡부위원,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작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노래와 기악작품을 창작한다. 1946년 말까지 피아노 반주를 붙여 작곡한 50여 곡의 노래들은 국내외에서 널리 불렸을 뿐 아니라, 작품수와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해방의노래>(임화) · <독립의아침>(이주홍)· <건국행진곡>(김태오)· <남조선 형제여 잊지 말어라>(임화) ·<인민항쟁가>(임화) 등이 그 작품들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피아노 반주가 따르고 새로운 내용으로 민족전통의 색채가 강했으며, 대부분 해방 공간의 문사로 통한 문학인들,특히 임화의 시에 창작한 작품들이다.

 

김순남은 노래뿐만 아니라 가곡과 기악작품, 그리고 연극음악도 열정적으로 창작발표하고, 음악 비평활동까지 전방위적으로 전개한다. 1946년 8월 직전에는 20일만에 <제1교향곡>(C장조)을 완성 한다. 그리고 민족음악반열에 우뚝솟은 가곡 <산유화>와 <초혼> 등을 묶어 가곡집《산유화》를 발행(1947)한다. 또한 1946년과 1947년 8월 사이에 교향시적인 작품 <태양없는땅>을 설정식 시에 작곡하고, 소관현악과 바리톤을 위한 연가곡 <망명>(임화시)과 <피아노협주곡> 제1번(D장조)을 작곡한다. 1948년에 는 자작시 <자장가1>과 <자장가2> · <자장가3>(박찬모시)· <탱자>(박노춘시)· <상열>(오장환시) ·<철공소>(김북원시) · <양>(오장환시) ·<진달래꽃>(김소월시) 등을 묶어 두번째 가곡집인《자장가》시를 출간한다. 

 

평론가 박용구는 가곡 <산유화>를‘국제적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했다. 또 줄리어드 음악학교 출신으로 미군정청 문교부 문화담당 참사관이었던 헤이모위츠는 그를‘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 가’이자 `진정한‘창조적 천재’로 평가했으며, 그의 작품을 작곡가 월터피스톤, 지휘자 크세비츠키 등 미국음악계에 소개하여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김순남은 창작활동만 한 것이 아니다. 음악비평활동과 민족음악과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노동자 편에서 기도하고, 미군정과 수도경찰청을 방문하여 항의하기도 한다. <음악>·<조선작곡계의 신발족>· <악단회고기>·<음악의 진실성> 등 비평문을 발표했으며, 경사 동창생인 최석두의 시집《새벽길》(조선사, 1948)에 발문을 쓰기도 한다. 

 

<악단회고기>(월간백제, 1947년 2월호)에서 그는“민족적 양심에 바탕을 둔 자기반성과 진실한 비판, 과학적인 판단을 통하여 창작과 연주활동을 전개하여야 참다운 민족음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하고, 음악의 정치성을 주장하는 좌파의 계급이론에 대해서도 음악의 독자성과 전문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이를 역선전하는 정치적 우익음악인들 역시 깊이 반성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열정적인 창작활동과 문화예술운동은 민족음악을 건설하고자 한 실천적 활동의 결과지만, 정치에 치우친다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향한 반비판이기도 했다. 그는 조국의 현실 속에서 파토스를 불태우며 열정적으로 창작했다. 

 

그러나 김순남은 해방공간에서 순탄할 수 없었다. 일제하 그리고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현실을 외면한채 음악지상주의를 내세우며 뒤로는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던 당시의 친일 음악인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친일 음악인들은 김순남을 심사위원명단에서 제명하거나 제도권 진입을 방해하고 빨갱이로 몰아갔다. 결국 좌익으로 몰린 김순남은 1947년 여름이후 수도경찰청장의 체포령과 함께 활동이 전면 중지되고 지하생활이 시작되었다. 1년동안 도피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한반도에서 선택적인 삶의 요구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월북과 모스크바유학, 하차투리안을 만나다 

 

1948년 7월말 김순남은 월북하고 만다. 북한은 '남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선생이 왔다면서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해주음악전문학교 작곡교수, 해주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최고인민회의대의원 을 거쳐 같은 해 8월말 평양에 진출한 뒤로는 조선 최고인민회의대의원, 평양국립음악학교(현 평양음악무용대학) 작곡학부 학부장, 조선음악동맹부위원장이자 중앙상임위원 등 음악가로서 북한 최 고의 서열에 올랐다. 

 

김순남의 월북과 최정상의 반열에 올랐다는 소식을 확인한 남한에선 김순남 비판을 서둘렀다. 1949년 12월 3일 민족정신앙양종합예술제(서울 시민관)에서 북조선음악동맹과 김순남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고문 낭독이 있었다. 마침내 미소간 냉전체제 속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김순남의 어머니는 동족상잔의 비극 아래 총살당한다. 그는 이미“잘자거라나의아기야/ 눈보라몰아쳐도우리아긴빵끗웃지”라는 자작시에 붙인<자장가4>와“아들이 올날을 기다리신 어머니”라는<고향의어머니>(정서촌 시)를 발표했다. <자장가 3>에서“네 얼굴 꽃이 되어 들에 퍼지네”를 노래 하며 떠올렸던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에 김순남은 피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그에게 영혼이자 조국이었으며 모국어이자 민족이었다. 

 

이 밖에 1952년까지 그는 <인민유격대의 노래>·<조선 빨치산의 노래>·<추도가> ·<맹세>·<복구대의 노래>·<씨뿌리는 노래> 등과 오라토리오 <승리의 오라토리오>, 가극 <인민유격대>(전 4막, 1949. 8. 평양국립예술극장초연), 교향악 <영웅 김창걸의 서곡-진격> 등을 창작 발표한다. 

 

1952년 여름, 김순남이 꿈에 그리던 모스크바 유학이 이루어졌다. 1949년 9월에 이은 두번째 방문에서 그는 소련연방 작곡가 동맹의 추천으로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이론작곡학부 연구생으로 입학한다. 이미 김순남의 작품을 검토한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 등 작곡가연맹은‘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갖고 있는 음악가’로 평가하고 유학결정서를 북한 당국에 보낸바 있다. 서울에서 헤이모위츠의 미국유학주선도 뿌리친 그였지만,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 등 소련창작계의 거목을 만나는 것은 그의 오랜 바람이었다. 

 

하차투리안이 그의 작곡담당교수였고, 둘은 동지적 관계로 발전한다. 김순남의 작품 <빨치산의 노래>를 유학 직전인 1951년 말에 하차투리안이 새롭게 화성화시켜 <조선파르티잔의 노래>란 이름으로 발표했고, 하차투리안자신의 작곡집에도 게재한 직후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오보에 독주곡 제1번>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노래곡과 기악곡을 창작하여 국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 조선의 천재음악가 

 

그러나 1953년 북한당국의 소환장으로 인해 한국음악가로서 모든 국제적 가능성이 좌절되고 만다.평양에 귀환한 김순남은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다. 북한은 한국전쟁 실패 원인이 남로당계의 반북로당 감정과 애향주의에 기인한다면서 김순남의 당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남로당계를 기소하고 박헌영과 이승엽 등을 처형했다. 김순남 역시“조선음악의 당성·노동계급성·인민성을 고수하고 적대적 문예사상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대신에 자연주의와 형식주의 등 부르주아 문학예술의 낡은 사상의 음악가”로 비판받았다. 자연히 김순남의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으며,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창작의 권리가 박탈되었다. 창작할 수 없는 김순남은 음악가로서 식물인간이었다. 

 

1953년 소환 이후 반당적·반인민적음악가이자 부르주아음악가로 계속 비판받은 김순남은 1960년대 초반 함경남도 신포시로 쫓겨나 주물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 김순남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 창작활동이 재개된 것이다. 노래 <돌아라 사랑하는 기대야>와 <현실 속에서 배운 것>이라는 자기 비판글을 1964년《조선음악》에 발표한 직후였다. 그는 또한 민요 발굴사업에 나서서 <김매는 소리>·<나무베는 소리>·<베틀소리> 등 11곡을 채보하여《조선민요곡집》제3집에 발표한다. 관현악과합창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1965년 작)바이올린독주곡 <이른봄>(1966년 발표) 등이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자, 그는 불사조의 음악가로 복귀한다. 

 

그러나 돌이킬수 없는 폐병을 얻은 그는 함경남도 신포, 이원과 단천을 전전하는 십수년의 투병세월 끝에 결국 1983년께 이승의 삶을 마감한다. 향년 예순일곱이었다. 김순남이 삶을 마감한 지 5년이 지난 1988년 10월 6일 음악학연구회(현 한국음악학회)는 월례 발표회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미적·역사적 평가를 하고 가곡들을 복원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 27일엔 정부가 규제된 그의 작품들을 해제했으며, 이후 많은 연구서와 논문, 그리고《MGG》(Die Musik in Geschite und Gegenwart)를 통하여 김순남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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