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니면 이 주에 한 번은 베낭을 메고 훌쩍
떠나버리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차를 타러 잠시 어둠 속을 거닐며 하늘을 보면 곧 사라져갈 별들이 마지막 빛을 발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나는 늘 이 시간이 되면 무슨 별인지도 모른 채 바라만 보며 좀 더 가까이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생각하는데 저 별은 사라져갈 준비만 한다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은 늘 멀어져만 가는 것인가 별을 보며 소소한 즐거움에 잠기는 내 마음을 별은 알까 가까이 다가가진 못하면서 마음속에 묻어야만 하는 보고픈 이들의 모습을 그리는 나의 마음을 저 별은 알까
창가에 앉아 스쳐가는 풍경을 본다 그 속엔 산이 있고 들이 있고 나무가 있다 모두가 나를 두고 달음질친다 그들과는 어긋난 운명을 살아가야 하나 보다
들판을 뒤덮던 눈들은 이제 없다 하이얀 서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저 서리가 없어질 때면 저 들녘은 봄기운으로 가득 차겠지 어둠이 깊어가는 현실에도 봄은 어김없이 오겠지
내변산 산의 들머리에 이르러 가볍게 몸을 풀고 산행을 시작한다 아직도 쌀쌀한 기운이 남아 선뜻 옷을 벗지 못한다 오르막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땀이 흘러내린다 잠시 멈춰서 옷을 벗는다 시원한 바람의 애무를 목덜미에 느끼며 봄이 오는 산길을 걷는다 이럴 때면 새의 울음소리가 있어야 제맛인데 어찌된 일인지 새의 울음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아직 완연한 봄이 아니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새의 울음소리가 너무도 그립다 없을 때라야 더욱 절실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런가
옥빛 물이 고여 있는 폭포에 이른다 손에 물을 담아 본다 차갑지만 너무도 보드라운 물의 감촉 얼굴을 씻고 목덜미를 씻는다 그 푸르름처럼 내 몸도 마음도 푸르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발길을 돌린다 좁다란 산길 저 편에서 들려오는 나즈막한 물소리 봄이 오는 소리 생명의 소리 겨우내 잠들었던 대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소리 나뭇가지엔 붉은 기운이 돈다 막 부풀기 시작한 처녀의 젖망울처럼 신비롭게 드러나는 생명의 싹 저 수줍음이 사라지면 산은 푸르름으로 물이 들겠지 유난히 눈이 많고 추웠던 겨울이었지만 봄은 온다 더디게라도 온다
계단을 따라 오르니 목책 저 편에 흘러내리는 폭포가 있다 직소폭포 굽이치지 않고 곧장 떨어지기에 붙여진 이름인가 보다 내릴 땐 하얗기만 한 물줄기가 부서져내려 소를 이룬 곳은 눈이 시린 옥빛 물결 비취색 청자기보다도 더욱 푸른 그 옥빛 물결에 눈도 마음도 온통 옥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 푸름을 넘어 시퍼런 서슬에 마치 독기를 품은 원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폭포를 지나 빙 둘러 앉아 점심을 먹는다 도르리하며 먹는 식사에 풋풋한 인심이 곁들여지니 이곳 저곳에 웃음꽃이 핀다 현실은 강퍅해도 자연과 함께하면 모든 걸 잊고 천진한 즐거움에 잠길 수 있어서 좋다 세상일일랑 잊은 채 이 기쁨 이 즐거움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베낭을 정리하고 다시 오르니 조그만 암자가 있다 월명암 이곳에서 보는 달의 모습이 아름다운가 보다 어둠 속에 도착했더라면 암자에 앉아 달맞이라도 했으련만 그리운 이의 가슴에 온달은 아니어도 반달로나마 떠오르면 좋으련만 아쉬움만 놓아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얼마나 걸었을까 푸른 깃을 펼쳐 놓은 듯한 물은 강인가 호수인가 저 곳에 배를 띄워 노를 젓고 싶다 세월을 거스르고 싶다 뱃머리에 앉아 술 한잔 마시며 달을 희롱하면 적벽이 무엇이며 동정호가 무엇이리 술잔에 달을 담아 기울이면 한세상 다 잊은 채 살아갈 수 있으련만 소동파가 부럽지 않고 이백을 잊을 것인데 달은 예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련만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관음봉에 이른다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와 섬들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 푸르기만 한 바다 단조로운 수면에 변화를 주려는 듯 솟아 있는 섬들 얼마나 오랜 세월 함께하며 지내왔을까 기껏 몇십 년에 지나지 않을 인간사도 부침이 많은데 한결같이 함께하는 저들의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관음봉을 지나 바위 위에 앉는다 얇은 돌들이 겹겹이 붙은 바위 채석강의 절벽처럼 층층이 쌓여 이뤄진 바위 망치로 두드리면 한 겹 한 겹 벗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얼마나 오랜 세월 함께하면 저런 모습을 할 수 있을까 내 가슴속 한처럼 켜켜이 쌓인 바위 그 오랜 세월의 깊이를 생각하며 발길을 옮긴다
세봉을 거쳐 내려오는 길은 흙길 그 위에 마른 채 떨어져 있는 솔잎들이 깔려 있다 푹신푹신한 감촉 그대로 누워 잠이 들면 좋겠다 저 구름을 덮은 채로
내소사에 이른다 일주문을 따라 걷는다 지난날 이곳에 왔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예전엔 자연스런 맛이 있었는데 그게 매력이었는데 이제는 어딘지 인공의 맛이 난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서인가 세월의 흐름 탓인가 아니면 변해버린 내 마음 때문인가
전나무숲 길을 따라 대웅전에 이른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흘러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대웅보전 연꽃무늬를 수놓은 창살 꽃창살의 사방연속무늬는 우리나라 장식문양 중 최고란다 격자무늬도 빗살무늬도 아닌 꽃살무늬가 너무도 아름답다 꽃잎 하나하나에 저렇게 입체감이 돋아나도록 섬세하게 조각한 목공의 노고를 생각하니 그 예술혼에 머리가 숙여진다 나뭇결과 나뭇빛깔을 그대로 드러낸 꽃살문 진정한 예술에 무슨 꾸밈이 필요하랴 본존불을 모셔 놓은 대웅보전의 창살이었기에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한뜸한뜸 심혈을 기울였을 목공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상의 일이 아니라 목공의 불심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 일 하나하나가 도를 닦는 마음 곧 수양이 아니었을까 그 순수한 마음이 오래도록 전해지길 빌어 본다
다시 태어나 돌아온다는 이름 내소사 나는 어느 때 새로이 태어나 다시 이곳에 오려나 그날이 있기는 하려나 휑한 마음을 달래며 일주문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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