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微明)
대극 간의 상호관계를 이용하여 일종의 권모술수나 전략으로 삼은 듯한 장이 있다.
제36장이다.
김충열은 이것은 전혀 노자답지 않은 내용으로 초간 ‘노자에는 없는 말이니 아마 전국시대 중엽에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추정한다.
그것이 노자의 글이라면 권모 술수하는 자들의 속셈을 폭로해서 경계심을 주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빌헬름도 제36장에 대해서 마키아벨리 식의 대담함이 엿보인다고 했다.
우선 왕필의 노자주에 따라 제36장을 옮겨본다.
장차 축소시키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퍼주어야 하고,
약하게 하고자 하면 먼저 강하게 해주어야 하고,
쓰러뜨리려고 하면 먼저 일으켜주어야하며,
장차 빼앗으려고 하면 먼저 주어야만 하니,
이것을 일러 은미한 밝음(혹은 밝음을 감춤)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나니,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나라의 이기(利기(器))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해석이 이러한 행위를
사람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래서 권모술수를 권고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행위의 주체를 사람에 두지 않고 도에 둔 해석도 있어 그런 경우에는 술수라기보다는
도의 매우 오묘한 작용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된다.
가령 아베 등은 이 장의 첫 구절을
‘도는 만물을 축소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전에 잠시 이를 팽창 시킨다’라고 해석한다.
다른 세 가지 경우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이들은 하상공의 주석에 따라
‘이와 같은 네 가지 방식은 실로 미묘하고도 효과가 현저하므로
이를 미명 (微명(明))이라 한다’ 고 말했다.
이렇게 미묘한 도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겉보기에 질 것 같은 유약한 것이
겉보기에 이길 것 같은 강한 것에 이기는 것이라고도 했다.
웨일리는
미명을 자신의 빛을 가려서 어둡게 하'는 것 (dimming one’s light)이라고 번역하고
행위의 주체를 성인에 두었다.
또한 마지막 구절의 물고기는 비늘이 있으므로 무기를 말한다고 주장하여
이기(이(利)器)一가장 예리한 무기一와 상응한 것으로 보았다.
왕필도 ‘강압 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을 제거하려고 하면 마땅히 이 네 가지로써 해야 한다.
이는 사물의 본성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해치게 하는 것이니
형벌을 빌리는 것을 능사로 삼아 사물을 해치지 않으므로 미명이라 한다’고 말한다.
미명을 위에서 말한 하상공의 주석에 따라
도의 미묘하고도 현저한 효과라고 볼 것인지,
임헌규의 의견대로
도에 대한 체득을 미(微)로 표현한 사실에 입각하여
‘극에 도달하면 되돌아오는 잘 보이지 않는 도의 움직임을 터득, 실천하여
뚜렷한 효과틀 거두는 것’이라고 볼 것인 지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이 비슷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미(微)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동기나 목적이 아직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무도 알 수 없는 끙끙이 수작 같은 것으로 보고
명(明)을 그 꿍꿍이를 미리 꿰뚫어 알아내어서 그것을 역이용하고 파괴하는 지혜라고 보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장을 권모술수로 본다는 전제에서 나온 규정이기 때문이다.
간노는 미명 (微明)은 그 빛〔明〕을 어둡게 하여
남이 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서 제27장의 습명 (襲明)과 같은 뜻이라고 하였다.
나는 미명을 단순히 ‘어스름한 빛’ ‘희미한 빛’(subtle light)132)의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이 점에서 미명이 밝음과 어둠의 중간지대를 상징한다는 김형효의 착안을 환영한다.
이러한 생각은 위의 여러 훈고학적인 설명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미묘한 지혜’ ‘드러내지 않는 명찰 (며祭)’ 같은 내용이 이미지와 상징으로 표현된다고 볼 때
‘희미한 빛’ 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스름한 빛’은『도덕경』제4장과 제56장의 ‘그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과도 함께 있나니’(和其光 同其塵)의 정신과 상통한다.
노자는 자신의 총명함을 뽐내고 사회적 명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극도로 싫어하였다.
그는 지혜의 빛을 안으로 간직한 채 드러나지 않게 할 것을 권하였다.
그것이 곧 ‘어스름한 밫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융이 자주 하는 말이다.
의식이 한 방 향으로 강하게 작용하면 할수록 그 일방성으로 인해
의식의 흐름에서 배제된 내용이 무의식에 억압되어 의식의
인격과는 상반된 열등한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을 융은 ‘그림자라고 불렀다.
빛과 그림자는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 즉 ‘그림자의 관계와 같다.
우리는 우리 안의 그림자를 마음대로 떼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중요한 일부로서
의식화를 통하여 분화시키고 의식에 동화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억지로 떼어버리려고 하면 의식과 무의 식,양 대극 간의 긴장이 고조되어 여러 장해가 생긴다.
나는 이 관계를 『장자』(莊子)「어보」(漁父)에 나오는 이야기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여 기에 간단히 되풀이하고자 한다.
고기잡이 늙은이가 공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자취를 싫어하는 나머지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뛰고 또 뛰어 가다가 죽어버린 어리석은 자의 비유를 들어
그늘에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고요히 있으면 발자취가 안 생긴다는 지혜를 말하면서
공자 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당신은
인의를 따지고,사물의 같고 다름을 살피며 , 세상의 변화에 신경을 쓰고 주고받는 일을 조절하며 ,
호오(好惡)의 정을 다 스리고, 희노(喜怒)의 감정을 조화시키려 애쓰고 있으니
이래 가지고는 화를 모면치 못할 것이다.
삼가 당신의 몸을 닦고 신중히 타고난 진실을 지켜 갈 것이며
공명 같은 것은 남에게 양보하도록 하면 번거로움에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자기 몸을 닦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남에게만 어려운 요구를 하고 있으니,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유교사상의 규범주의,체면문화에 대한 비판이므로 다소 편향된 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먼저 닦고 남을 다스리는 일〔修己治人]은 공자의 기본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의 대립관계가 그늘에서 해소된다는 생각은
‘어스름한 빛의 상징적 의미를 뒷받침해 주는 말이다.
밤과 낮, 백과 흑의 중앙인 ‘어스름한 밫은 대극이 합일된 경지를 나타낸다.
무의식의 의식화가 진행되면
자아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전체 정신의 중심으로 접근한다.
‘중앙’(die Mitte)은
분석심리학에서는 전체 정신의 자리이며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의 목표이다.
중앙에서 대극은 하나가 된다.
장자는 그 이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36장의 말이 정략적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악의적인 책략이라고만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