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아라!!
1.
중국대륙의 한족(漢族)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만주어 ᡥᠠᡳᡧᡝᠨᠸᡝᡳ(Haišenwai)에서 유래된 해삼위(海蔘威)라 부른다. 우리가 먹는 해삼(海蔘)과 같은 한자로 되어 있어 일설에는 해삼이 많이 나서 그리 부른다는 말들이 있었는데 사실여부를 떠나 실제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해삼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품질 좋은 상급의 해삼은 오늘 고찰하려는 1950년 이전의 블라디보스토크였던 여순만(旅順灣)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 바로 우리 선조들이 반도로 강제이주당하기전 맛보았던 진미(珍味) 가시해삼이다.
이전글에서 구한말의 나가사키(長崎)가 바로 대륙 동부 해안가의 항주만(杭州灣)이었음을 고찰했고, 또한 1904년의 러일전쟁이 현 상해앞바다 당시로는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일어난 해전(海戰)이었음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진실역사 이면의 페이지를 열어 제끼면서 우리에게 던져진 의문은 바로 일본에 패한 러시아 극동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전함(戰艦)을 수리했다는 사서(史書)의 기록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곧바로 원산(元山)과 부산(釜山)을 손쉽게 드나들었던 내역들을 통해 도대체 현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가 러일전쟁 당시의 그 위치와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청산리(靑山里)전투가 있기 전 조선독립군에 탄환 수십만발을 넘기고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떠난 체코군의 여정(旅程)이 과연 어디였는가를 밝히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우리의 이 갈증은 바로 성공회대 교수로 <중국인이야기>(1-10)라는 책을 집필해 숨겨졌던 이면(裏面)의 이야기들을 세상밖으로 꺼내 밝힌 김명호(1950~현재)선생에 의해 시원하게 해갈(解渴)이 이루어졌다.
2.
블라디보스트크와의 건설과 관련하여 건설지역에 대한 조사는 186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당시에는 삼림(森林)지역이었다고 한다.
1863년에 많은 나무들이 베어졌고, 몇몇 오두막집이 들어서면서 차차 큰 참나무와 소나무가 제거되기 시작하였다.
1872년에 60명의 해군병력이 아무르지방의 니콜스코예(Nikolskoye)에서 새로운 정착지로 이동한 일이 결정적인 단초가 되면서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1878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인구는 약 4천여명이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1892년 프랑스 지리학 잡지 『루 투르 뒤 몽드(Le Tour du Monde)』에 조선 방문기인 《조선기행》을 연재했던 샤르 바라(Charles Varat, 1842~1893)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실제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인이 거의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하선(下船)의 대다수가 조선인들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한 실정이다. 중국인들 또한 제법 활발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유럽인들은 러시아인을
제외하곤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거대한 만(灣) 깊숙이 자리잡은 이 도시는 전나무, 낙엽송, 소나무 그리고 은빛 줄기가 빛나는 자작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운 언덕지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비록 일년에 두 달 가까이 얼음으로 폐쇄되기는 하지만 찬란한 미래를 눈앞에 두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신생도시 블라디보스토크, 이곳은 이미 북방의 여왕으로 이름이 높아, 날로 번창할 운명을 타고난것이다.
이 전도 유망한 도시의 유일한 경쟁상대라면 조선이 오로지 러시아에게 문호를 연 한반도 북동쪽 끝의 신흥 항구일뿐이다.
그곳에서는 사계절 얼음이 얼지 않으므로, 조만간 북방 지역 상권의 중심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지역을 얼마간 둘러본 우리는 다시 바다로 나가 원산과 부산을 차례로 들러 그곳에서 친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항만 진입을 지휘할 일련의 구축물 공사들로 강력한 항구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한 만오천에 달하는 코사크 병력의 주둔지도 있고, 군인을 제외한 거주민 숫자도 만 명을 웃돈다.
러시아 당국은 최근 이곳에서 활동하는 거의 모든 외국상인들에게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외국상인들의 입지를 줄이고 그만큼 자국 상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노골적인 의도인 것이다.
지금 공사가 한창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지점에 해당하는 블라디스토크....겨울철은 길고도 추운 데 반해, 여름철은 선선하긴 하지만 안개가 마치 어두침침한 망토처럼 도시 전체를 휘감고 여간해서 걷힐 줄을 모른다.>
조선기행(1888-1889) 샤를 바라
위 기록에서 첫째로 거대한 만 깊숙이 자리잡았다는 부분과 둘째로 두 달 가까이 얼음으로 폐쇄되는 곳이라는 부분과 일치되는 항구(港口)가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유력한 후보지가 될 것이다.
3.
다음으로는 1932년 김동진(金東進,1891-1938,김좌진 장군의 동생,독립운동가)선생이 1932년8월호 삼천리에 기고한 글을 참고해 보자.
海參威의 海水浴場(해삼위의 해수욕장)
<楊貴妃양귀비 꽃이 질 때쯤 하면 北國북국인 海參威블라디보스톡에도 여름이 찾아옵니다. 두자 석자씩이나 얼어붙었든 바다가 어느 새에 풀리긴 하고---- 大陸的 氣候대륙적기후의 影響영향을 받는 그곳에는 여름의 더워라니 沙漠과도 마찬가지입
니다. 萬一만일 海參威해삼위에 바다가 없었던들 焦熱地獄초열지옥의 苦痛고통이 없었을 수 없지요 바다가 주머니같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사나운 波濤파도도 일지 않는데에 人工인공을 그리 加가하지 않고도 適當적당한 水泳場수영장이 생기는 것입니다. 新韓村신한촌 앞바다에도 天然的천연적 水泳場수영장이 있습니다>
위 글에서 참고될 사항은 바로 해삼위(海蔘威)가 위치한 앞바다의 모양이 주머니같이 생겼다는 부분이다. 주머니는 위쪽에 줄로 댕겨 묶을수 있는 목부분이 있어야 하니 그런 형상의 바다 깊숙한 안쪽에서 해삼위는 찾아져야 할 일이다.
4.
마지막으로 김명호선생의 <중국인이야기>에 나오는 주은래(周恩來,1898-1976)의 결정적인 기록을 살펴보자
<1950년, 5월 김일성은 베이징에 도착했다. 김일성의 한국전쟁 지원요청에 대해 토의 중 주은래(周恩來)의 말이 이어졌다.
소련 적군(赤軍)은 이미 조선반도에서 철수했다. 스탈린은 다시 조선에 돌아올 의향이 없다고 봐도 된다.---한때 우리는 동북에 주둔한 소련군의 철수를 끈질기게 요구하며 소련군이 동북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국민당군과의 전쟁을 중지하고 소련군과 싸우겠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한 적이 있다.----소련은 우리의 요구로 여순과 대련(大連)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부동항(不凍港)을 상실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통일전쟁을 지원하겠다는 이유는 부동항을 확보하겠다는 목적 외에는 없다. 스탈린은 극동에서 미군과 마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김명호의 중국인이야기 중에서 발췌>
위 주은래(周恩來)의 글에서 소련의 부동항 상실이 이른바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에서의 철수로 인한 것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5.
결국 위의 기록들을 하나씩 고찰해 씨줄과 날줄을 엮는다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현 발해만(渤海灣)의 제일 깊숙하고도 일년에 2개월정도 결빙되는 항구 바로 그곳이 1950년 이전까지의 해삼위(海蔘威) 즉 블라디보스토크인데 현 요녕성 중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잉커우(Yingkou, 营口)다.
따라서 현 잉커우 좌측으로 이어지는 부동항(不凍港)들은 모조리 조선의 함경도의 해안가이며, 조선역사속의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를 불러 일으킨 프랑스 신부들에 대한 참수형과 카톨릭교도 탄압은 바로 이 잉커우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만들면서 조선조정(朝鮮朝廷)에 끈질지게 무역협정을 요구한 러시아에 대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이 중재(仲裁)를 요청했던 프랑스의 베르뇌 주교 (Simeon-François Berneux, 장경일)의 거절로 인해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이전글에서 정밀히 살펴보았다.
구한말 조선의 원산(元山)이 현 천진(天津)시 서쪽 100km정도에 위치했었고, 부산(釜山)이 현 장강하류의 남경(南京)위쪽에 위치한 포구구(浦口區)였으니, 부산-원산-해삼위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고, 또한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 극동함대가 약1,400km 떨어잔 현 발해만의 깊숙한 주머니모양의 바다 안쪽 잉커우로 이동해 고단한 닻을 내리고 휴식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 잉커우 지역이자 구한말 당시 조선의 동북방 구석에 위치했던 해삼위 블라디보스토크는 결국 중국 공산당의 압력하에 1950년 이전 어느 시점에 현재의 반도 두만강 건너 외진 곳에 다시 둥지를 틀게 되었다.
6.
이를 지도로 보면 다음과 같다.
2026.09.16. 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거대한 만(灣) 깊숙이 자리잡은"이나 바다가 "주머니같이" 생겼다는 말을 볼 때, 지적하신대로 海蔘威라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관련하여 떠오른 생각 하나는 거문도[巨磨島, 哈米敦((Port) Hamilton)]의 실제 위치입니다. 1885년4월12일 리홍장(李鴻章)과 伊藤博文 대화내용(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卷八, (三六九)附件四 李鴻章與日使伊藤問答節略 二月二十七日申刻日使伊藤問答紀略)을 보면, 伊藤 발언중에 朝鮮有巨磨島在濟州東北四十英里라고 합니다. 李鴻章은 英暫據此備俄與朝鮮中國皆無損('영국이 잠시 거문도를 빌려 俄羅斯(로씨야)에 대비하고 있으나, 이는 朝鮮과 淸에 손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安易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음)(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 卷七, (三六六)北洋大臣來電)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거문도에 관해 쓰셨던 예전 두 편의 글에서 長江 하류의 섬이라 보셨는데, 朝鮮有巨磨島在濟州東北四十英里('巨磨島는 濟州에서 東北으로 약 64km 위치에 있음') 및 英暫據此備俄와 어떻게 부합될지 의문입니다. (濟州는 (조작이 아니라면)竊觀國於東海之中者非一而日本最久且大其地始於黑龍江之北至于我濟州之南... [海東諸國記序]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거문도가 제주도 동북 64km라는 기록은 명백히 현 반도에 맞게 교열된것으로 봐야 합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해 조선의 수도로 가는 길을 막아 러시아의 통교를 차단했다는 것은 거문도가 장강하구에 위치하고 있어야 가능한 상황이 됩니다. 이건 전략의 상식부분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한자 사서는 사마천 사기를 비롯해 모조리 현 강역에 맞게 교열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대륙의 거문도는 모택동의 간척사업에서 없어져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