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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04 구속사 성경맥강해 22 - 전도서 식도성결교회
제목 : 전도서 - 일의 결국과 여호와 경외
본문 : 전1:12-13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이 다윗 왕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는 바로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제3대 왕으로 주전 971~931년까지 재위에 오른 솔로몬(Solomon)왕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님께서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마6:29)이라고 지칭하실 만큼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쓴”(시 8:5)왕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그는 왕으로 즉위 후, 먼저 기브온 신당에 올라가 하나님께 일천(一千) 번제를 드려 응답을 받았습니다. 꿈속에 나타난 하나님께 “백성을 올바로 재판하여 잘 다스릴 지혜”를 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지혜는 물론 거기에 더하여 수(壽)와 부(富)와 영광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솔로몬 왕은 7년에 걸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여 헌당하였고 이어서 13년에 걸쳐 왕궁을 완공했습니다. 그는 3,000잠언을 썼는데, 구약의 잠언, 전도서 및 아가서와 시편 몇 편이 그의 저서로 과히 “지혜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울만 합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단 선지자로 하여금 “여디디야” 곧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라는 호칭을 받게까지 되었습니다. 국토를 12행정 구로 구분하는 등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및 통상과 무역으로 그 부귀가 극에 달하였고 후궁과 처첩은 1,000명이나 되었으며, 사치의 극한 생활은 등극후 죽기까지 40년간 계속되었으나, 결국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라는 말을 토하고 이 세상을 떠나 갔습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3:1)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솔로몬도 결국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전대주권을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 “범사”(凡事)란 인간이 지상에서 취급하고 행하는 모든 산업과 경영을 가리키며, “기한”(期限)은 한정된 시간의 한 부분을 말하고, “때”는 어떤 특정 기간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행1:7; 살전5:1). 세상만사를 우연에 돌리지 않고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 믿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노력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경륜(經綸)과 섭리(攝理) 가운데서 무상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경륜이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영,Dispensation)로 “하나님의 우주지배와 천하 통치에 있어서 그 솜씨, 포부 및 계획”을 의미하고, 섭리란 헬라어로 “프로노이아”(영,Providence)로 “인간 및 자연적 세계가 자립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배와 붙드심에 힘입고 있다는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람1) 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가고, 모든 강물2) 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여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1:6,7)에서 잘 나타납니다. 특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被造物)을 그 구원의 목표에 인도하시려는 영원하신 계획과 인자를 말합니다.
전도자가 터득한 고귀한 진리는 크게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잠시동안 머무르다 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마치 고속도로의 이정표(里程標)와 같이 눈 깜찍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그러나 인생은 짧지만 값집니다. 인생은 영원을 가르치는 교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짧은 날들이 영원을 씨뿌리는 시기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인생에게 현재의 삶은 영원한 미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눅 16:26).
다음으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전3:12)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이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서 선을 행함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곤고와 환난을 많이 겪은 사도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로마(Roma) 감옥에서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 적어도 17회나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이것은 주님 안에서 갖는 성령의 위로로 말미암은 온전한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그 기뻐함은 선을 행함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행은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순수한 기쁨을 안겨다 줍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물론이지만, 장본인에게도 커다란 행복감을 주는 것입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잠3:27).
일본의 내촌감상 선생도 “하루는 인생이다. 선한 인생이 있음같이 선한 하루가 있다. 악한 인생이 있음같이 악한 하루가 있다. 하루를 짧은 인생으로 보아 이것을 소홀히 할 없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한 사람의 인생이 평가되는 건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 보다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로, 그가 무엇을 얻었는가 보다는 무엇을 주었는가로, 그의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로, 그리고 하나님의 맡긴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였는가로······, 인생의 평가는 이런 것이다ꡕ라고 말한 분이 있습니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고 말씀했습니다. 인생이 한 번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영존(永存)하는 것과 사후의 심판에 대한 무지 때문에, 얼마나 한 번 사는 인생 곧 편도 승차표 인생을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두렵고 놀랍게도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形像)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놀랍고 아름다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령을 영원한 형태로 만드셨으므로, 인간은 이 짧은 세상에서만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연약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영생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전도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전도서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가 라는 문제로 많은 논쟁이 되기도 했습니다. 전도서가 세상의 허무와 슬픔, 염세주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사상이 배여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도서 저자는 합리주의자, 불가지론자, 회의주의자, 비관주의자, 운명론주의자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포함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 제기를 염두에 두면서 전도서가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전도서를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적용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전도서의 저자와 내용의 배경
전도서는 1:1에 기록된 대로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는 전도자 혹은 설교자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자가 바로 이 전도서의 저자라고 하는데 그가 바로 솔로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16에서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은 바로 열왕기상 3:12, 4:2 이하 4:32, 10:1에서 솔로몬 왕만이 소유했던 위대한 지혜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전도서 12:9을 통해서 보면 그는 많은 잠언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전도서는 솔로몬이 전도서의 저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도서의 여러 표현들을 볼 것 같으면 솔로몬이 노년에서야 기록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1:12-2:11,11:9-12:7). 자신의 인생 경험과 체험들을 회고적으로 뒤돌아 보면서 훈계와 경계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주전 970-931년에 다스렸다고 한다면 이 시기 후반부에 전도서가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도자인 솔로몬은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고 하면서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2:10)라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부귀영화와 쾌락을 즐기며 살았던 전도자는 인생의 결론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합니다. 전도자가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으며, 이런 자신의 경험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으며 이런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2. 전도서의 내용 구분
전도서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전개됩니다.
첫째, 1:1-11입니다.
1절은 표제격인 말씀입니다. 2절에 “전도자가 가로되”라는 말씀은 전도자 자신이 일인칭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1:12).
2절에서 ‘헛되다’라는 말이 고리형으로 연결되면서 전도서에서는 무려 헛되다는 말이 37회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공허하고 철저하게 무익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헛되다’가 반복되므로 “완전히 헛되다”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참고 롬 8:20:“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다”)
3-11절 말씀은 “해 아래의 수고”가 헛되다고 합니다(참고 고전15:58:“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해 아래서 헛됨을 이야기할 때 자연계를 보라고 합니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자연의 순환은 의미도 목적도 없다고 합니다. 즉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롭게 보이는 것은 과거가 벌써 잊혀졌다는 의미일 뿐이지 결코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합니다. 우주의 순환이 끝이 없고 의미가 없다면 인생의 노력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둘째, 1:12-6:9절입니다.
이 부분 역시 “바람을 잡는다”는 말이 문단을 구분하는 핵심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전도자의 인생탐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인생 탐구 첫 번째로 지혜 추구의 허무성입니다(1:12- 18). 결국 해 아래서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을 뿐입니다(18절) 두 번 째로 쾌락 추구의 허무성입니다(2:1-11). 전도자는 몸의 쾌락과 부가 주는 기쁨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 역시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지혜와 어리석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2:12-17). 네 번 째로 수고의 열매가 헛됨이라고 합니다(2:18-6:9).
셋째, 전도자의 결론입니다(6:10-12:14).
1) 6:10-11:6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며(6:11) 미래에 대한 지나친 희망과 과거를 이상화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인생사의 참된 의미를 결국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7:14). 결국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모른다고 합니다(9:1-11:6)
2) 11:7-12:14, 11:7-12:7까지는
젊음과 늙음에 대한 시가 기록됩니다. 12:8절의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은 1:1의 고리형의 매듭입니다. 12:9절에서 전도자가 3인칭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해 아래서의 현상을 관찰하면서 중간 중간에 “하나님의 경외”를 후렴구 형식으로(3:14,5:7,8:13)언급하면서 전도자를 3인칭으로 언급한 내용에서 전도자의 말씀이 “한 목자”에게서 나온 것임을(12:11) 말씀해 줍니다.
따라서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말씀은 결국 전도서가 잠언과 같은 맥락에서 성경의 통일성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3.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
전도서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엘로힘(하나님)이라는 말이 무려 40번 이상 나옵니다. 여호와로서가 아니라 엘로힘이라는 칭호의 등장은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의 입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엘로힘이라는 입장에서 인간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세계의 한계와 그 연약함과 무가치와 무의미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런 인간의 실존과 인간세계의 헛됨과 허무와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는 하나님의 계획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세대는 타락한 세대요, 새로움이 상실된 세대요, 허무한 세대라는 것이 솔로몬의 생각이었고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1:1-11).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노라”(3:13)고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도 결국은 허무한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이 심각한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실패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3:14,12:1).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5:19) 자신이 누리지 못하고 타인이 취하는 폐단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길은(6:1,2) 오직 지혜 밖에 없습니다(잠언에서 말한 지혜가 무엇을 말씀한 지혜였을까?)(7:4-12)
엘로힘 하나님의 세계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지혜자가 된 자는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8:17).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자신의 한계와 자신이 곧 하나님 없이는 허무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요, 곧 지혜자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잠언에서 지혜라고 했는데 그 지혜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미 잠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지혜자입니다(12:13-14).
말씀에로 초대
솔로몬의 탄식과 절망의 절규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는 본래 창조의 모습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왜곡된 현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상태가 바로 거룩이요, 복이라고 창세기 1장에서 우리들에게 이미 말씀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므로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상태에서 벗어났으며 그 가운데 인간과 이 모든 자연은 로마서의 지적대로 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자로 전략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태, 즉 하나님을 떠난 피조 세계는 더 이상 본래의 창조의 목적과 그 섭리를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래 창조 때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복과 거룩한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우리들을 구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하여 이루셔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의 구원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본래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피조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경외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피조물의 본연의 임무를 감당할 때만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을 통하여 주신 말씀처럼 우리들의 진정한 소망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십시다. 우리들을 평안하게 해 주고 우리들을 복되게 해 주는 것이 있었습니까? 무엇이 우리 인생의 풍요를 책임져 줄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영혼의 만족을 무엇으로 채울 수가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들의 영혼을 소성케 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믿음 안에서 이제 세상은 우리들의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훈련의 장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훈련은 어떠한 모진 풍파라 할지라도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적극적인 자세로 이 훈련을 받은 자 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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