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쓴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사도행전 2장 42절 /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행전 2장은 1-41절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지 일곱 주간이 지난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있은 것과 이때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태어나 사용하는 모국어로 사도 베드로가 증거하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가 되게 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을 통해서 있게 하신 구원 얻는 회개의 복음을 들음으로 세례를 받아 그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서 42절이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구절은 “그리고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의 나눔과 기도들을 굳게 계속하고 있었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음에 몰두함으로써 서로 교제하고 떡을 나누어먹으며 기도에 굳게 있어나갔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에서의 ‘가르침을 받아’는 선포된 복음을 – 설교 –을 기반으로 하는 교훈이나 교리를 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선포된 복음이 지닌 진리의 뜻을 알기 위해서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를 배우는 제자로서 그 배운 내용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렇게 ‘배움’과 함께 ‘실천’에 있는 제자를 ‘마데테스’라고 합니다. 해서, ‘가르침을 받아’는 배움 바에 따라 굳은 마음을 가지고서 실천에 있는 내용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신도들에게서 세 가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게 됨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43절)라고 말씀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를 공동번역에서는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라고 번역했으며, 쉬운성경에서는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라고 하였고, 한글킹제임스는 “많은 이적과 표적이 행해지더라”, 현대인의성경은 “ 놀라운 일과 기적이 많이 나타나자”라고 각각 번역하였는데,, ‘기사와 표적’은 이중언어로 하나의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여, 현대어성경은 “많은 기적을 베풀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명기 11장 25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가나안 땅 거주민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만드셨던 것과 같은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지키심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무리들은 이 두려움을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적을 베푸신 권능에서 가졌던 것처럼 큰 두려움에 있었으니, 이렇게 보게 되는 ‘기적’, 또는 ‘이적’은 성령의 임하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에게 있게 된 하나님의 율법을 회복을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표적(표징)으로 하나님께 굴복함에 있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41절에서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과 함께 47절 하반절에서는 “…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옴에 있게 하신 것에 나타내신 기사와 표적은 ‘서로 교제하고’, ‘(서로) 떡을 떼며’, ‘(서로) 기도하기’에 오로지 – 전적으로 - 힘썼다 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에 있은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이 44-47절입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마음을 굳게 하여 ‘서로 교제하고’에 오로지 힘썼다는 44-45절에서, ‘(서로) 떡을 떼며’에 오로지 힘썼다는 46절에서, ‘(서로) 기도하기’에 오로지 힘썼다는 47절에서 각각 언급됩니다. 이에 대하여서 보는데 '기도'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서로 교제하고”에 오로지 힘썼습니다. 이 어구에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에 따르는 것으로 이어지는 ‘그리고’에 해당하는 등위 접속사가 있습니다. 즉,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고 서로 교제하고, 그리고 … 하며, 그리고 … 를 전혀 힘썼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은 것으로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교제’는 새번역성경에서는 ‘사귀는 것’라고도 번역하기도 하였는데 원어의 뜻은 ‘친교’, ‘협력’, ‘제휴’ 등을 의미하는 것이나, 기본적인 개념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70인역(LXX)에서는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뜻하는 ‘담보’(레 6:2)라는 의미로 사용되며, 외경에서는 물질적인 참여를 뜻하기도 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도 물질을 나누거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참여하여 교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에 사용되었습니다(롬 15:26; 고전 1:9; 고후 6:14: 13: 13; 갈 2:9; 빌 1:5; 히 13: 16; 요일 1:3, 6‘ 7). 그에 따라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서로 돕는 나눔에 있었던 것은 구약의 배경에 의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서의 ‘약자 보호법’을 따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땅에서 발생하는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비롯하여 가난한 백성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시며 존속해 나가게 하는 것에서 약자를 돕는 자비법(참조. 출 23:10-13; 레 19:9-10 등)을 주시고 여기에 담긴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함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따름에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름에서 그 준수에 있어왔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사라지고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다만, ‘자기를 위하여’에 있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한데, 교회의 공동체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품에 있음으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나타내신 정신이 다시 실행이 되는 것이었으며,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온 유대인이 보고 크게 놀라며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본 구절에서는 44-45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와의 연계에서 볼 때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 안에서 하나의 믿음으로 형제와 자매된 의식을 가지고서 내 것과 네 것이란 사유의 개념에 있는 것이 아닌 함께 소유하여 누리는 모두의 것이란 공유의 개념에 있으면서 함께 믿는 바인 은혜를 나누며 누리는 영적인 교제를 나누었고 물질적으로 도움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떡을 떼며”에 오로지 힘썼습니다. 이것은 떡의 나눔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 ‘나눔에’ 있은 ‘떡’은 ‘빵’(bread), “빵(떡)덩이”(loaf)로 여러 다양한 종류의 분말 가루로 구운 빵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이 빵은 고기와 함께 가장 중요한 형태의 양식이었습니다. 이 떡의 나눔에 있은 것은 유대인의 유월절 잔치에서 보게 되는 만찬이 주의 만찬에 의해서 가져나가게 된 것에 따른 것으로, 초대교회가 떡의 나눔에 있은 것은 단순히 식사 관습만이 아니라 주의 만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보게 되는 초대교회는 주님의 제자들이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통해서 애찬의 성격을 갖는 기본적인 식사를 가져나갔습니다. 이러한 ‘떡의 나눔에’ 있었던 것은 앞서의 ‘서로 교제하고’와도 긴밀한 연관에 있습니다. 이는 ‘서로 교제하고’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백성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시며 존속해 나가게 하는 것에서 ‘약자를 돕는 자비법’(참조. 출 23:10-13; 레 19:9-10 등)을 따름에서 교회의 공동체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품에 있음으로 가난하여 음식을 준비할 수 없는 자들을 도와 섬김에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애찬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대하며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기념함에 있는 믿음의 친밀한 교제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은 단순히 애찬의 식사를 가져나가는 것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찬의 의미를 지니고서 행해졌습니다(고전 11:23-29). 그런데 이 ‘떡의 나눔에’ 있은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이면 애찬 형식의 기본 식사를 하는 주의 만찬을 가져나간 뒤에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 의식을 가져나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간에 주의 만찬은 성찬과 관련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기도하기를’ 오로지 힘썼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오로지 힘쓰는 ‘서로 교제하고’가 있었고, 또한 오로지 힘쓰는 ‘떡의 나눔에’ 있었으며, 그리고 또한 오로지 힘쓰는 ‘기도하기를’에 있었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은 기도는 ‘기도하다’를 뜻하는 단어는 원문에서는 ‘기도’, 또는 ‘기도처’를 뜻하면서 복수형이 쓰였습니다. 이는 기도에 있은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라 복수, 곧 초대교회 모임에 있는 온 성도들이 함께 기도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에서는 유대인의 시각으로 제3시(오전 9시), 제 6시(정오), 제9시(오후 3시) 하루에 세 차례 성전에 모여서는 기도하는 전통을 가졌던 것에 따라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라고 하여, 단순히 혼자서 하는 개인기도의 성격에서 행해진 것이 아닌 신도들이 성전에 모여서 공동체 기도를 드리는 것에 참여한 것을 가리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임재로 형성된 초대 교회는 아직 당시에 존재하였던 성전에 모일 때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의 물질을 나누어 교제하며 주의 만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기념하고 공동체기도 드리기를 지속해 왔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보는 것에서 ‘기도’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막 11:17) 라고 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사 56:7)이 이루어지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시온산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와서 이스라엘과 함께 기도하며 잔치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단에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칠 수 있게 하셨으며, 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물을 받고 기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시온산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세계 만민이 다 와서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곳이 되게 하실 것을 뜻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말씀은 유대인에게서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로서가 아니고 건물로서만 남아 있을 뿐인 성전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전혀 기도에 힘씀에서 ‘내 집은 만민의 집’으로 정의를 내려주신 회복에 있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의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도함에 있어서 알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오로지… 힘썼다”에서 ‘오로지 … 힘썼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기본 의미로는 ‘끊기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노력이나 부지런함을 강조’하는데,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모습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오순절에 성령이 임재한 후 모이게 된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1)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2)서로 교제 하고 (3)(서로) 떡을 떼는 것과 함께 (4) (서로) 기도하기를 굳게 계속해 왔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서 성전이 그러한 것으로 존재하게 해 주셨으므로, 성도들이 성전의 실체인 교회로의 모임에 있으면 이 모습에 있어야하겠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기도하기에 전혀 힘씀에 있어야 할 것이니, 이는 (1)이것이 지속될 수 있어나가고자 하는 주님의 은혜를 구함에서 주님을 깊이 의존하는 것에 있어야 할 것이며 (2)그러함으로써 만민이 하나님의 한 자녀요 한 백성을 이룸에 있어야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라고 권하였습니다. 과연 그리해야 할 것이니, 힘써 모인다고 하면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서 보여주는 바인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가르침을 받아 주님의 선한 뜻의 분별에 있으므로 이를 받들어 나감에 있고자 항상 기도함에 굳게 있어나가야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심에 있었습니다(2:47). 장수민목사는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초대교회를 설명하는 것에서 “초대교회는 유형교회의 개념을 이해함에 있어서, 교회란 조직체(組織體)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有機體)라는 이해를 분명히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이 이 시대에 재현될 수는 없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 이를 가능케 하신 성령님은 오늘도 역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참다운 모임을 가져나감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 사람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러하며, 그 교회로 있어나감에 있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