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도 축구 약체로 분류되던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맡고 난 이후부터, 2018 AFC U-23 컵(준우승)에 이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4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매 대회마다 팀의 역대 최고 성적을 갱신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2018년 동남아 축구협회 대회인 스즈키컵도 10년 만에 우승시켰고, 직후 2019 AFC 아시안컵에서는 8강에 올랐다. 메인 전술은 5-4-1 카운터 어택으로 철저한 실리주의 축구를 추구한다. 한양대 체육학과 77학번 출신이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아버지는 경찰 간부로 재직하다 부상으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고 어머니도 명문 진주여고를 나왔다. 부모는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해서 크게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다. 축구를 굉장히 늦게 시작했는데 중학생때까지만 해도 장래희망이 군인이었고 축구는 논두렁에서 공차는게 전부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모의 높은 교육열에 서울로 상경했으나 처음 목표했던 배재고 진학에는 실패하고 경신고에 진학했다. 교실에선 경신고 축구부원들이 공차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축구에 대한 열망이 강해져 그들 사이에 들어가 함께 땀흘리고 싶었지만 신장 165cm에 비쩍 마른체격, 축구부 경력 조차 없는 범생이를 받아줄 축구부는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축구를 하고 싶었던 그는 이경이 당시 경신고 축구부 감독과 절친한 사이였던 매형 뺵으로 겨우 축구부에 들어갔다. 이런 무경력자에게 기회가 올리 없어 6개월간 후보선수로 지냈고, 운동선수 학사관리가 미흡했던 그 시절 관행을 따라 제때 졸업을 못하고 1년을 꿇었다.
하지만 종일 축구공을 가지고 훈련하며 빠르게 실력을 키웠다. 1976년 고 3때 전국 청룡기 축구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어 경신고에 우승컵을 안겼다. 한양대 2학년이였던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 주장을 맡아 우승을 하였다.[4]
이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실업팀인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며 실업선수로서 데뷔하였으며, 곧바로 육군 축구단에서 군복무를 한 뒤 1984년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현 FC 서울)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며 프로무대에 데뷔하였다. 1985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리그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86년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어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리고 호적상 만 29살, 실제론 만 31살이던 1988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고, 리그 태동기라 실업과 군복무를 거쳤기 때문에 다른 역대 국가대표 감독들에 비해 짧은 4년의 프로선수 시절을 보냈다.[5]
참고로 국가대표로 뛴 A매치는 단 1경기. 1981년 3월 한일정기전에서 전반 17분 교체 투입돼 73분간 뛴 게 전부다. 박항서가 지금도 가장 아쉬워하는 선수 시절 커리어라고.
이미 20대부터 머리가 빠졌기 때문에 대머리 링커[6]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위 사진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현역 선수 시절 사진이다. 절대 코치가 아니다, 참고로 위 사진 당시 나이는 25세이다. 선수 시절 미드필더였으며, 짧으면서도 빠른 패스를 상당히 중요시한 선수였으며, 체력이 좋고 항상 전력을 다하는 근성이 있는 선수라는 의미에서 '악바리'와 밧데리 대머리 링커 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베트남 현지에서 붙인 칭호가 Thầy Park Hang Seo다. Thầy(쯔놈 𪪀)[16]는 선생님, 스승님이란 뜻으로 베트남에서는 굉장한 존칭이다. 베트남에서도 붙기 어려운 칭호를 외국인이 차지했다. 그만큼 박항서가 베트남에서 대접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2019년 초 기준으로 유례가 없는 성공만을 거두며 베트남 축구를 성장시키고 새로운 기록, 역사를 써내리면서 염원하던 대회의 우승컵까지 안기는 등 하나의 국가 대표 감독으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트남에 선사했기 때문. 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며 계속 어느 단계까지 더 베트남 축구를 성장시킬 지 눈여겨 봐야 할 점이다. 대한민국에서 축구감독으로 지냈던 거스 히딩크보다 대단하다는 얘기도 있는데, 한국에서도 거스 히딩크는 존경 받는 외국인 감독에서 끝났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박항서 감독을 호치민과 동격으로 놓을 만큼은 아니라는 점. 일부 기레기가 네티즌이 장난스레 올린 글 가지고 쓰레기 같은 기사를 양산하는데, 외국인 축구 지도자와 국가의 영웅은 기본적인 처우부터 다르다. 우리나라 식으로 얘기하면 히딩크 감독을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과 비교하는 셈이다. 우리식 별명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박항서느님 정도가 되지 않을까. 2017년 9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성인 및 U-23 감독으로 선임되어 10월에 취임했다. 한국인 지도자로는 역대 4번째로 외국 성인 대표팀을 맡는 감독이 되었다.
처음 취임했을 때 베트남 현지에선 체력이 다소 약하다는 식으로 귀띔을 해줬다지만, 정작 박항서 본인이 선수들의 체력을 테스트해 본 결과 전원이 합격할 만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훗날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은 체력이 약하다'라는 이 말이 베트남에 전해져 내려온 뿌리깊은 선입견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축구선수를 시작할 때부터 언론과 선배들이 '우리는 체력이 약하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 왔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아예 심리적인 한계선이 자리잡아버린 것이다.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 이것을 타파한 것도 박항서호의 선전의 한 요인이기도 하다.[17]
한편으로는 영양 관리가 체계적이지 못했는데, 리그 시즌이나 국가대표 소집 기간에도 아침식사를 쌀국수로 해결하는 등[18] 다소 불균형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협회에 개선 요청을 했고, 그 결과 삼시 세끼 모두 고기, 달걀, 우유 등의 단백질이 대거 포함된 식단으로 바뀌었다. 박항서의 부임 이후 체력면에서 더 좋아진건 덤이며, 선수들 또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게 되어 좋아했다고 한다.[19]
박항서 감독이 진단한 베트남 선수단의 근본적인 약점은 기술과 전술 이해도 부족. 그래서 박항서 본인이 직접 패싱 게임에 참여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20] 그동안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사용하던 포백을 버리고 스리백을 도입했는데 초창기엔 비판을 꽤 많이 받았다고 한다.[21]
여담이지만, 이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취임했을 당시의 대한민국 대표팀과 유사하다. 당시까지 국내 축구인들은 "우리 선수들은 체력과 정신력은 뛰어나지만 개인 기량과 기본기가 부족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히딩크 감독은 반대로 "선수 개개인의 기량은 뛰어나지만 경기체력과 피지컬이 부족하고 멘탈관리가 허술하다"는 진단을 내려서 많은 이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때문에 집중적인 체력 훈련과 피지컬 강화에 몰두하는 히딩크호를 향해서 "축구 연습은 안 하고 몸싸움만 시킨다."라는 언론의 질타가 쏟아지기도 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면서 이런 과정을 모두 지켜봤던게 박항서 코치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묘한 우연이다.괜히 쌀딩크 소리 듣는 게 아닌 듯
부임 당시엔 프로 무대에서 밀려나 실업 리그에서 감독을 하던 축구인을 데려왔다는 일부 팬들의 부정적 평가를 무릅쓰고 U-23 대표팀을 이끌며 10년동안 못 이겼던 태국을 원정에서 격파하는 비범함을 보여주었다. 득점할 때마다 히딩크가 생각나는 화끈한 펀치 세리머니로 인기를 끈 것은 덤. 참고로 전임 응우옌 후이 탕 감독이 사임한 이유가 태국전에서 0:3으로 완패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2차 예선에서도 태국을 상대로 2전 전패를 기록하자 그 여파로 당시 감독이던 미우라 토시야가 경질되기도 했다.[22] 그만큼 베트남한테 태국은 난적이었는데, 박항서는 감독으로 취임하자마자 승리를 거두면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진 것이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