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8일(화)
영주 부석사 갔다 오면서 소수 서원에 가다
2015년 12월 8일 화요일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에 가다
내가 보건데 소수 서원은 돈 많은 양반들이 자식들을 공부시키러 보내는
요즈음 말로하면
명문 사립학교다
배우는 과목이 수학 과학 같은 과목은 없고
윤리나 도덕 같은 힌문으로 된 과목 뿐이다
그러니
홍길동 전에 나오는 홍길동 같은 사람은 갈 수 가 없는 학교다
취한대 정자
서원으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에 경렴정(景溓亭)이 있습니다.
정자의 이름 '경렴정'은
북송의 성리학자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頣)를 경모하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빌어왔다 하며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죽계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합니다.
경렴정 동쪽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 건너편에는 물가로
튀어나온 경자바위[敬字岩]가 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경'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입니다.
'경'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이곳에 송백과 죽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짓고,
또 '경'자 위에 '백운동'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의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소수서원 자리에 있다가
없어진
숙수사지 발굴 유물을 모은 것 설명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보물 제5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이곳이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숙수사지(宿水寺址)이기 때문입니다.
숙수사의 법통이 언제 끊어졌는지 알려진 내용은 없으나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향(安珦)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수학했다고 하며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여 이것이 조선 건국의 정신적인 이념이 되었습니다.
이로 보아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어오다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에 법통이 끊기고 터만 남아오다
1543년에 이 절터에 서원을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53년 현재의 소수서원 후편으로 소수중학교 운동장을 마련하다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밝혀졌고
서원경내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각종 석조물을 볼 때 사찰의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