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어떤 이유보다도, 집중하고 명상하고 안정을 얻기 위해 지금도 첼로를 연주한다.
첼로는 아직까지도 내게 복잡성을 가늠하는 척도, 한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터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로 남아 있다. 첼로 연주는 아직까지도 내가 최선을 다하는 일,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첼로는 나와 가장 가까워서 내가 아무와도 공유하지 않는 사물이자, 나를 처음 음악의 세계로 이끈 힘과 감정들로 다시금 다가가기 위해 의지하는 매개체이다.- <첼로> 중에서 p31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몇 달 동안 나도 모르게 자꾸 엄마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천천히 혀를 내밀어 헐거워진 치아를 꾹 눌러보며 아직 아픔이 느껴지는지를 확인하던 어머니의 모습, 왜 슈퍼히어로들이 과거의 슬픔에 그토록 연연하는지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슬픔은 어쩌면 새로운 힘의 원천일지도 모르겠다.
삶의 어느 순간부터인가, 성인으로서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배우기 위해 만화책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죽음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만화책을 펼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별의 상처와 상처의 회복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만화책이 늘 같을 수는 없다.
같은 책을 아무리 여러 번 읽었어도 오늘 당신이 읽은 책의 이야기는 이미 당신 기억 속의 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고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다.
나 역시 불사조 슈퍼히어로를 보며 어머니를 보낼 수 있었고, 동시에 어머니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었다.
- <불사조 슈퍼 히어로> 중에서 p88
예술이라 불리는 특별한 대상에서 의미를 찾고자 할 때 감상자는 기꺼이 대상의 객체가 되고, 예술작품과 더불어 생각하면서 일관된 주체성을 형성해간다.
작가와 감상자는 동등한 관계에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지만 절대 그런 동등한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다.
예술의 목적은 ‘의미 있는 사물들evocative object’이 되는 것이다.
그림은 일시적일지언정 상대에게 자신의 주체가 되어줄 것을, 작품의 의미를 창조하는 주체가 되어줄 것을 간구한다.
-<다락방의 그림> 중에서 p133
당당히 새겨진 ‘그로브 트로터’ 라는 상표는 가방의 주인이 얼마나 여행을 좋아했는지를 보여준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해방된 뒤 새로운 자유를 찾은 할머니는… 새로운 모험의 세계를 발견하셨다.
하지만 이 여행 가방은 아직 새것이다. 마지막 여행을 위해 할머니는 이 가방을 아껴두셨다.
-<여행가방> 중에서 p135
혈당측정기 덕분에 나는 늘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물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으로 규정된다. 혈당측정기는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을 증명하고,
나는 남들과 달리 어딘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이렇게 혈당측정기와 상호작용을 하고 그에 의존하다 보니, 인간과 의료장비 사이의 관계가 진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새로운 관계는 인간이 생존하는 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내 혈당측정기와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될지 모른다.
-<혈당측정기> 중에서 p158
그 작은 동네를 떠난 지도 어느새 오십 년이 넘었다.
고향을 떠난 지 십 년 뒤에 멜버른 대학고에 다닐 기회가 생기면서 나는 영원히 시골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내 삶의 무대는 세계 곳곳의 대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나가는 급행열차를 보면 저 반대편의 세상이 떠오른다.
열차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린다. 길게 늘어선 향기로운 유향나무, 공을 주우러 기어 올라갔다가 너무 뜨거워 손도 대지 못했던 녹슨 철제 지붕, 불현 듯 코끝에 다가오는 흙먼지 속의 빗방울 냄새, 그리고 작고 호기심 많은 한 아이가 있다.
태양이 작열하는 고요한 시골길을, 놀랍도록 젊고 아름다웠던 부모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한 아이가.
-<멜버른 기차> 중에서 p212
월드북의 사진들은 내 마음에 들어와 비로소 생명을 얻었고, 명사로 나눠진 뒤 도아의 음악에 따라 문법에 맞춰 춤을 추었다.
네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월드북을 통해 읽기를 깨우쳤다.
가족이 아니라 월드북을 통해 언어는 나의 일부가 되었고, 세상이라는 책이 내 앞에 열렸으며, 나 역시 세상에 나를 열어 보였다.
월드북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다.
--<월드북 백과사전> 중에서 p251
내 수석은 돌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른 수석이 그렇듯 세상에서 가장 흙에 가까운 진부한 존재면서 동시에 돌의 근본을 초월함으로써 스스로를 부정하는 신비로운 대상이다
-<중국 수석> 중에서 p400
첫댓글 설악산 삼각돌...에 "죽어야 산다" 새겨놓은 것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