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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18강 사무엘상 사무엘, 사울이야기 -
(1) 새 시대를 여는 기도의 사람 사무엘상 1장 1-8절
지난 5월 13일에 40대 남성이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참 바보 같이 사기 당했다. 전 재산에 대출, 어머니 집도 넘어가. 장인어른, 외삼촌 돈까지” “절대 사람 믿지 말라”고 당부한 그는 “일 년 전 이맘 때가 생각난다. 목숨 같은 내 아들, 걸음마 시작할 때였는데…. 잘 해주고 싶었고, 저처럼 키우고 싶지 않았다”고 어린 아들을 언급하기도 했으나 “차라리 비겁하게 도망치겠다. 이제 두 돌 지난 내 아들 못난 아빠 빨리 잊는 것이 나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글에 1,200명이 답을 달아주었다고 합니다. “지금 당신은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있다.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니. 그 용기와 ‘깡’으로 살아볼 생각하시길 바란다”, “죽을 용기로 사기꾼 잡고 돈 벌어서 아들 용돈 주고 하셔야지. 생각 잘 하시라”, “무슨 사기를 당했는지 모르지만 사기 친 놈들은 호화로이 사는데 당한 분이 왜 죽는다고 그러시냐”, “미안하단 말만 하고 사랑한단 말만 하고도 망가지지 말고 다 갚고 더 사랑해주고 그때 가시라. 그거 다 갚으면 약 90살 정도 될 거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 마음을 확인한 이 사람은 며칠 뒤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경찰서에 신고해 주신 분들, 찾느라 고생하셨을 경찰관 분들 모두 다 너무 너무 감사하다”면서 “돌아가서 잠든 아들 얼굴 보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못난 아비가 더 못난 행동을 할 뻔 했다” “가려워 머리를 긁으면서도 ‘목욕하자’ 하면 ‘아빠랑 아빠랑’(이라고 외치는 아들과) 오늘 같이 목욕을 했다”“제 얼굴에 물을 뿌리고는 넘어갈 듯 웃는 아들의 모습과 웃음소리를 들으며 제가 얼마나 못난 선택을 하려 한 건지 또 깨닫게 된다.” “며칠 간 먹을 수도 없고 술 없이는 잠도 잘 수가 없었다”면서 “오늘 지인에게 부탁해 정신과를 방문해 보려 한다. 살아야겠다. 살아 보겠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고 또 일하겠다” “못난 아들 때문에 집도 재산도 다 날린 우리 엄마. 살아서 그 이상 효도 해야겠다” “감사하다. 죽을 각오로 살아보겠다” “저에게 힘내라고 모여 주신 대구 분들. 저와 통화 후 용인에서 달려와 주신 분. 은혜 잊지 않겠다” 고 말이지요.
고마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방관하지 않고, 그의 잘못된 선택을 막아서며, 용기와 위로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말입니다. 그러면서 확인해 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고통 속에 아픔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지요.
해를 거듭할수록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생겨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댈 곳을 찾습니다. 위로받을 곳을 찾아요. 아마 이 40대 가장도 위로와 용기를 얻고 싶어서, 어쩌면 이런 자신을 막아달라고 글을 적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알아줄 곳이 필요합니다. 못난 자신이지만 따듯하게 품어줄 곳을 찾습니다. 잘못하고 있는 나에게 따끔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이를 찾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네 사람의 마음,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곳일 수 있지만, 우리가 정녕 믿고 의탁할 만한 것입니까? 애초에 이 사람 역시 그 따듯하고 포근한 마음을 믿었다가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이 힘겨운 인생살이 속에 위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위로를 붙들고 어느 위로로 내 삶을 다잡아야 우리는 상처를 극복하고 아픔을 이기고 새로운 인생을 꾸릴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우리는 참된 위로를, 진정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118:8-9)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146:3)
사람을 신뢰하지 말고, 인생의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믿으면 안된다는 사람을 믿지 말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믿음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신뢰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끼리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입니다. 세상에 믿음이 없다면 정말 막가는 세상, 소망 없는 세상이 될 겁니다. 누가 문밖에 문을 열고 나가며 누가 믿고 음식을 사다가 먹을 수 있으며 누굴 믿고 병원에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부분이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삶의 영역의 근간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을, 인생을 신뢰하지 말라니 말이지요!
오늘 성경이 말하는 사람과 인생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한하고 썩어질 존재라는 겁니다.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조금만 비맞고 시간이 지나면. 금새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라질 것을 믿고 의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과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사람을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사람을 믿으며 귀인의 돈과 권력을 의지하는 모습, 도울 힘이 없는 사라질 존재를 의지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리며 시작할까요? 네, 사무엘상이 바로, 이제부터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신뢰하고 의지하겠노라 선언하며 시작되는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교재에 제목이 뭐라고 되어 있는지 읽어볼까요? “사무엘, 사울이야기 : 사무엘상, 사람이 다스리는 왕국건립”
계속해서 18강의 개관을 읽어봅니다. 133쪽 제목아랫단락, “사사시대에는~” 시작!
“사사시대에는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냈지요? 왕이 없는 백성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지요? 그래도 이름 뿐인 왕이었어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마저도 빼앗아가려는 시도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계속해서 읽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시작!
“그런데 백성들은 다른 나라들의 왕정체제를 보고, 자기들도 왕정체제를 건설하자고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다스리는 국가의 힘이 강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에 왕정이 세워지는 과정을 그리게 됩니다. 본 과에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왕정(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또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는지 배우게 됩니다. 아울러 하나님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왕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해야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8과에서는 이스라엘에 왕정이 세워지는데 중요한 세 사람,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준비되는 다윗에 대하여 살펴보게 됩니다. 오늘은 그 시작이 되는 사건, 시대를 여는 기도의 사람, 한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가 받는 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문제를 경험할 때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만 의뢰하면, 하나님만 의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텐데, 보이지 않던 길이 열려질텐데, 그것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경험한 유다가, 뼈속 깊이 저 DNA가 기억하고 있을 것임에도, 끝내 하나님께 나오지 않고 엉뚱하게 인간적인 방법만 찾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방법을 하다하다 하다하다 안되면 마지막 방법으로 했던 것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지요. 이제는 그것마저 하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죽어도 그냥 우리 방식대로 하다가 하나님 도움 없이 살다가 죽겠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만 그런가요?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잖아요. 가장 좋은 친구 가장 믿을만한 조언자! 그러한 존귀한 존재가 부모인데 자녀들은 부모에게는 고민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은 무식한 잔소리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네들이 가장 똑똑하고 잘난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고 세상 친구들에게서 방법을 찾다 불행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여러분, 이렇게 종종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은 하나의 표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 괴롭고 아픈 순간,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정말 죽는게 낫겠다 싶은 순간, 제발 하나님을 한번만이라도 찾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속상하고 아픈 저희들에게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다른 것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생각을 모두 접어 놓고 이제는 대면하자고 초청하시는 그 거룩하신 존전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찾아왔던 해결할 수없이 끊임없지 지속될 수 밖에 없는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의 위로하심으로 이겨냈던 여인, 한나를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늘 한나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 그녀가 지닌 아픔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이것을 정확하게 기록하구요, 한나도 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입니다. 5절 하반절부터 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그리고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7절보니까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저희들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가지는 이것입니다. 첫 번째, 저희들에게 생겨난, 브닌나라고 명명할 수 있는 모든 대적과 상황들로부터 받는 어려움과 아픔은 그 근본은 기가막히게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한복음의 유다, 가룟유다로 석사 논문을 썼는데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지게 피력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면요.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하나님과 예수님의 제어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네 할 일을 속히 하라며 유다를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내보내시는 분도 예수님이셨노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예요? 이 세상의 모든 고난,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겪게 되실 모든 고난도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님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우신 뜻 안에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때요? 조금은 이해되지 않고 속상하고 괴롭고 힘든 순간들이 찾아오더라도 조금 더 인내하면, 하나님의 오케이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의뢰하면,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그 모든 문제와 어려움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과 은총 소에서 은혜의 다발로, 보배로운 찬양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고백했던 내용과도 같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브닌나가 특별히 격동하여 한나로 눈물짓게 하는 때는, 보세요. 다른 때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근데 언제 그래요? 매년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감사와 찬송, 영광을 올려드리려고 할 때 브닌나가 격동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발걸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한나로 눈물 짓게 하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인간을 의지하게 만들어야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세요. 그때입니다. 바로 그때, 오늘 한나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기억하고 모든 격동케 함에 물러서지 않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오늘 1장 15절에 기록한 것처럼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성경 누가복음 2장에는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사람을 기록하는데, 의로운 자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하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 두 사람이 소개가 되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이 어떤 은혜를 입어요? 정결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마음껏 노래하고 축복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것입니다. 오래토록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린 하나님께로 올려갈 시간마저도 유보하며 조금 더 조금 더 그렇게 기다리며 견뎌온 오늘 두 명의 노인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놀라운 위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미칠 놀라운 위로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전에 올라가서 심정을 통한 기도를 올린, 매년 해마다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격동케 하여 눈물짓게 하는 브닌나를 참으며 성전에 올라간 한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위로를 주세요? 정말 행복함에 여한이 없는, 이 세상 어느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태의 문을 열어주시어 아들을 허락해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아들이 보통 아들인가요?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입니다. 더 이상 브닌나로 격동케 할 수 없게 만드는 이제는, 아파 속상해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 위로를,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진짜 위로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죽을만큼 힘이 들 때, 그것을 들쑤시는 브닌나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을 때, 여러분, 더욱 하나님께로 나오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셔서 여러분의 심정을 통하여 드리시길 원합니다.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의 근본을,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실 때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주의 옷자락 아래 나오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위로와 평강, 응답과 기쁨 주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한나를 조금 더 주목해볼 수 있게 해주는 성경의 증언은 이것입니다. 한나에게는 바로 곁에,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저 남편 엘가나의 위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 오늘 한나를 자세히 보십시오. 한나에게 조금도 기쁨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조금은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그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두 배로 사랑해주었던 것입니다. 한나의 인생에는 아이를 낳치 못하는 여인이었음에도, 어떻게 보면 분에 넘치는 감당하지 못할만큼 풍성하게 부여되는 남편의 사랑이라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1장 4-5절에서 확인해 보시자구요.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삼상1:4-5)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삼상1:8)
그런 위로와 기쁨이 있는 한나의 삶에는 또한 고통도, 욕도 있었습니다. 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던 반면 가나에게는 브닌나라는 아이를 쑥쑥 잘낳는 또 다른 아내가 있었거든요. 절 보세요. 바로 그 브닌나가 심히 격동케하며 날마다 번민케 합니다. 예배드릴 때는 미쳐 날뛰구요.
가만히 보십시오. 한쪽은 위로가 있고 한쪽은 모욕이 있습니다. 순간 순간 그렇게 느끼지 않으십니까? 나를 위로해주는 곳이 있고 나에게 핍박을 모욕을 주는 데가 있습니다. 한쪽만 있으면 좋겠는데 양쪽이 다 있습니다. 그럴 때 인간은 어느 쪽을 향해 가느냐? 본능적으로 위로가 있는 쪽을 향해 갑니다. 자꾸 위로가 있는 쪽에 자꾸 매달리려고 합니다. 그게 사람이든, 물질이든, 때로는 이것이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위로가 되면 그렇게 매달리려 하고 위로받으려 하더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브니나로부터 그런 모욕과 핍박이 있을 때 더 남편에게 매달리게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수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브닌나에게 모욕을 당하며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엘가나가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나요? 더 이상 위로를 받을 곳이 없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한 순간에 아이없고 남편없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채 쫓겨나기 쉬운 처지가 되버리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한나에 위대함이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첫 시간에 생각해보고자 하는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나는 엘가나의 위로가 보통의 위로와 격려가 아님을 알았음에도 그 위로와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나는, 그의 인생을 엘가나의 위로에 걸고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합니까?? 한나는 엘가나의 위로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로를 얻기 위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내 마음을, 내 심정을, 내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하기 위해 성전으로 일어나 움직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많으십니까? 참으로 행복하신 분들이요, 사랑의 씨앗을 많이 뿌려오신, 그 인격과 성품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신 참으로 덕이 많으신 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가 기록한 것처럼,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가 오직 하늘로 주시는 위로를 기다렸던 것처럼, 오늘 한나가.. 엘가나를 뒤로하고 성전에 올라갔던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의 위로에 더욱 집중하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 위로받는 인생을 마치고, 노래에 둘러싸인 인생이 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보다 다른 위로를 찾습니다. 눈 앞에 금방 찾을 수 있는 위로를 말이지요. 그리곤 저 이스라엘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져야, 자기에게 아무 것도 위로가 되는 것이 없어져야, 저 탕자처럼 자기에게 돼지 먹는 쥐엄열매도 주는 이가 없어져야,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나를 보세요. 이 여인의 대단한 점이 이겁니다. 한나는 분명 가까운 곳에 작지 않은 큰 위로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실제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그래서 대적 브닌나가 더 격동하는 저 남편 엘가나의 두 배나 되는 위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요? 그 위로를 붙들지 않고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계십니까? 죽게 될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에 계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성경을 읽다보니까요. ‘위로’라는 단어가 10번이 연속으로 기록된 곳이 있더라구요.
고린도후서 1장 3~7절까지가 그러한데, 9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3-9)
무슨 고백이지요?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그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사도바울과 그 일행들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위로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 한나를 기억하십시오. 분명 사람이 주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위로를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그 걸음이, 역사를 바꿉니다. 이스라엘의 한 시대를 바꿉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에 세워져 쓰임받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도 오늘 한나와 같은 결단이 있는 위대한 발걸음이 시작되고 더해지시길 바랍니다. 직면하게 하신 문제에 기도로 무릎꿇는 신실한 종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니라 큰 위로, 세상이 주는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위로를 받는 저와 여러분, 이 시대를 책임지고 하나님 뜻을 이뤄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위로 걸어오라’는 ‘시와 그림’의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의 가사를 읽어드리며 말씀 마무리합니다.
무엇이 널 죽게 만들었느냐 무엇이 다 끝났다고 하느냐
너도 다른 사람처럼 날 원망하며 모두 포기하려 하느냐
무엇이 널 무릎꿇게 하느냐 무엇이 널 울게 만들었느냐
모두가 길이 없는 바다라고 포기해도 너만은 날 신뢰하느냐
걸어오라 걸어오라 어찌하여 나에게 죽는다 하느냐
걸어오라 걸어오라 두려말고 바다를 걸어 내게 오라
기도하겠습니다..
오늘도 저희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친구들로, 물질로, 다른 품목들로 우리들의 문제를, 아픔을, 고됢을 위로받으려 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 작은 위로인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도 내게 기도할 제목을 부여해주시는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그 순간 나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 순간 이 시대를 고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쥐엄열매에 위로받고 있는 저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제는 과감히 손에 쥔 쥐엄열매를 내던지고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이킬 수 있는 용기있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오늘 한나가 받았던 놀라운 응답이 저희에게도 이루어지는 경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내 38년된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는 저희의 신앙여정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 크고 안전한 날개로 받아주심을 믿고 최선을 다해 날개짓을 합니다. 더욱더 용기와 위로를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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