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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혐의 희생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부역혐의 희생사건’은 ‘한국전쟁 중 국군이 인민군 점령지를 회복하기 시작한 1950년 8월 20일경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고착된 1951년 3월경까지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그 점령정책에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은 민간인과 그의 가족들이 법적 절차 없이 집단적으로 살해당한 사건’을 이른다. 일부 북한지역에 종군했던 국군 수기 등 자료에 따르면, 같은 시기 북한지역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1․4 후퇴 시기인 1950년 12월에도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를 받았던 주민들과 그 가족들이 예비검속되어 희생당하였으며, 국군이 2차 수복하던 1951년 2월경 또 다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부역자에 대한 정의는 ‘인민군 점령기간 중 북한에 협력한 자’이다. 그러나 당시 경찰당국은 부역자를 ‘공산주의 사상에 동의하고, 대한민국의 정치를 반대하며, 반민족적 비인도적 행위를 강행한 자’로 정의하면서 반정부 활동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사람 전체를 대상으로 일반화시키기도 한다.
‘부역자’는 당시 사법부의 재판을 통해 부역행위를 한 ‘범법자’로 확인된 민간인을 말한다. 반면, ‘부역혐의자’는 부역했을 것이라는 의심 외에 당시 사법부에 의해 아무런 증거도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이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부역혐의자 학살
서양 중세시기 마녀혐의를 받은 사람은 죽임을 당한 후에야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부역혐의자에 비하면 양반이다. 부역혐의자들은 학살 후에도 결백을 증명할 수 없었다. 아니 죽은 후에도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피해를 당해야 했다. 억울함을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또 다시 희생자들이 당한 것과 똑 같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4·19혁명 직후 활동했던 유족들은 5·16 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고 기나긴 군부독재가 끝나고서야 다시 활동할 수 있었다. 반면 가해자들은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을 숨겨왔다. 이들은 “그렇게 억울하면서 왜 이제까지 가만히 있었느냐? 왜 이제 와서야 말하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국가보안법, 불법 학살 행위를 조장하는 합법적 근거가 되다.
단독정부 수립 직후 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이 제정되었다. 국가보안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입증 가능한 행위가 아닌 범죄의도를 추정하여 처벌하는 데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주관적․정치적 판단에 의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형법은 1953년 9월 18일에서야 제정되었다. 형법보다 국가보안법이 먼저 제정되었던 것인데 그 이유는 1949년에만 11만 8,621명이나 되는 정치적 반대자들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로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 법은 시간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1949년 12월 2차로 개정하려고 했는데 그 내용은 단심제, 사형까지 형량을 확대, 미수에 그친 경우도 처벌하는 것이었다. 결국 당시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으나 이 내용은 6․25 전쟁 발발 직후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으로 부활했다.
전쟁의 발발과 죽음의 선택
전쟁 발발 후 이승만 정부에서 보여 준 가장 빠른 조치는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경 내무부 치안국에서 전국 도 경찰국에 보낸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었다. 그리고 26일 아침 8시 신성모 국방장관은 방송을 통해 ‘국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북진 중에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27일 새벽 대통령이 빠진 비상 국무회의는 정부의 수원 이동을 결정했다.
인민군의 전면공격이 개시되자 이를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경찰, 군, 정부의 고위관료 상당수는 피난민들의 발을 묶은 채 본인들만 피난길을 떠났다. 이에 대해 미공군 한국담당 정보장교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는 “남한 국립경찰, 서울시경, 군과 정부관리들은 약삭빠른 고양이처럼 그들의 지위와 책임감, 그리고 가족을 두고 떠났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시민들은 그들의 보호자로부터 버림받고 침략 적군의 무자비한 지배아래 가장 잔인한 고통을 당했다“라고 썼다.
한편, 시민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일단 피난을 준비하였으나 대부분 멀리가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피난을 한 경우에도 인적이 드문 가까운 산골로 피신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피난하지 못했던 사정은 국회의원들도 같았다. 당시 국회의원 210명 중 148명이 남하하고 나머지 62명은 피난하지 못했는데, 여러 의원들이 서울을 탈출하지 못한 이유는 국회에서 27일 새벽 만장일치로 수도 사수 결의를 한데다가 행정부가 입법부에는 따로 통고도 하지 않은 채 수도를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법률로 본 부역혐의희생사건의 배경
「국가보안법」 외에 전쟁 발발에 대한 이승만 정부 최초의 법률적 대응은 1950년 6월 28일에 공포한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었다. 이어서 1950년 7월 22일 「비상시 향토방위령」을 공포하였고, 1950년 7월 26일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이하 「군사재판특조령」)을 공포했다. 이 법률들은 모두 부역자 처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인 「비상조치령」은 엄벌 위주의 가혹한 법령이었다. 그리고 그 선포일 역시 1950년 6월 28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5일로 발표하여 소급적용하였다. 당시 판사 유병진은 「비상조치령」이 이승만 정부의 거짓 방송을 믿고 남았던 주민들 모두에게 부역혐의를 두었으며, 점령군보다도 그를 도운 부역자가 더 가혹하게 처벌받는 결과를 낳았고, 단독판사가 단심으로서 증거설명도 생략한 채 전쟁전이라면 4~5년 형에 해당될 범죄에 사형을, 2~3년 형에 해당할 범죄에 무기 혹은 10년 형을 판결해야 하는, ‘고약한 법’이라며 한탄하였다. 즉, 단심으로 20일내 기소하여 40일 내 판결하고 증거설명을 생략하는 등의 내용으로 이는 거의 즉결처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인민군 점령기 시민들의 처지
1950년 6월 30일 서울시임시인민위원회는 <고시6호>로써 “과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권에 적대되는 행동을 한 자로서 자기의 과거죄과를 청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책을 적극지지하며, … 과거죄과 내용과 함께 자수청원서를 제출하면 과거의 죄과 여하를 불구하고 관대히 처분 한다”라고 공포하였다. 자수자들은 ‘자수청원서’, ‘자서전’, ‘이력서’, ‘보증서’ 등을 함께 내야 했다.
국민보도연맹원 출신들은 변절의 낙인을 지우기 위해 의용군 동원 등의 압력을 받았으며, 대한청년단 등 우익인사들은 점령 초기 내무서로 끌려가 폭행을 당하며 협력할 것을 강요당했다. 우익인사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은 협력하는 흉내라도 내야했으며, 북한 정권의 특성상 대부분의 주민들이 민청, 여성동맹, 농민동맹 등의 사회대중조직에 가입해야 했다.
9․28 수복과 부역자 처리 문제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입장
9․28 수복은 인민군 점령하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던 시민들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의 혼란이었다. 당시 혼란에 대해 강원용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재빨리 피난을 간 사람들은 애국자가 되고, 대통령의 말을 믿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용공분자나 부역자가 되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분노했다.
반면, 이승만은 군통수권자로서 반성보다는 오히려 국민들이 적극적인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패배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20일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까지의 우리 전략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국민들의 투지를 자극하는 대신 2~3일 안에 지원병과 보급품이 도착하는 즉시 유엔군이 전면적인 반격에 나설 것이라는 말로 국민들을 무지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안심한 국민들은 스스로 국토방위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전에 피난하던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는 국회의원들의 의결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택상은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의결하였다. 이에 해공과 죽산과 내가 도지사 관저로 이박사를 찾아가 그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간곡히 청했으나 ‘어디 내가 당 덕종이야?’ …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사과를 할테면 당신들이나 해요’라고하며 그 자리를 뿌리치고 나가는 것이었다.”라고 했으며 그 뒤로도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했다는 말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9월 22일 이승만은 기자회견 석상에서 “공산당이었다면 부모 형제간이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토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9․28 수복 직전의 부역자 파악
합동수사본부 검사였던 오제도는 1950년 8월 부산에서 인민군 점령지를 수복할 경우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관계자 회의를 가졌다고 증언하였다.
미군 역시 유엔군의 수복을 앞두고 부역자 처리 방안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20일 441 CIC Team이 미8군 G-2에 보고한 「Counter Intelligence Target Information」에는 이승엽(서울시 인민위원장), 조소항, 김규식, 여운홍 등 전 국회의원, 한신, 송호성 등 국군 장군, 김효석 전 내무부장관 등 38명을 체포대상으로 기재하고 있다. 1950년 9월 30일에는 경기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이남 전 지역의 인민위원 379명의 명단을 정리하여 보고하고 있다. 1950년 10월 4일에는 전국농민회,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 24개 좌익계열 정당 및 대중단체의 이름과 설명을 정리하여 보고하고 있다. 목록의 머릿말에는 “다음 좌익 조직의 구성원과 지도자는 사회 안전을 위협하므로 더 조사하기 위해 체포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 목록에는 정당과 농민, 노동단체 외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민주여성동맹, 민주애국청년연맹, 민주학생연맹, 문학가동맹, 인민위원회, 국민보도연맹 등이 기재되어 있다.
부역자 처리 과정 개요
형사사건기록 등 자료를 종합해 보면, 학살에 의한 부역혐의자 처리과정의 경우는 “검거 ⇒ 연행 ⇒ 조사 ⇒ A등급 판단 ⇒ 학살(임의처형 또는 즉결처분)”한 것으로 판단되며, 재판에 의한 부역혐의자 처리과정은 “검거 ⇒ 연행 ⇒ 조사 ⇒ B등급 판단 ⇒ 합동수사본부 이송 ⇒ 등급 구분 ⇒ A등급은 군검찰 기소, B등급은 검사 기소 ⇒ 군법회의 또는 일반법원 송치 ⇒ 판결”한 것으로 판단된다.
학살에 의한 부역자 처리는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9․28 수복 후의 부역자 처리는 모두 재판을 통한 합법적인 절차에 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불법적인 학살의 희생자에 대하여 판결문 등 공식 문서에서는 ‘인민위원장으로 부역하다가 아군치안대에 의해 처형’이라고 적고 있다. 이로 보아 국가는 민간치안조직에 의한 학살 행위를 공식적인 국가의 처벌행위로 여겼거나 또는 적어도 불법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내무부 치안국 등에서 작성한 문헌들에 따르면 9․28 수복 후 부역혐의자는 55만 명이었다고 하며, 이 중 재판에 의해 처리된 사람들은 2만 명이었다. 그렇다면 재판에 의해 처리되었다는 사람들을 제외한 53만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복하던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례
최초의 부역혐의 학살사건은 인민군 점령지를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당시 국군 제3사단장 보좌관 겸 민사부장이었던 신동우는 “추격해 올라가는 곳마다 애국청년들이 부역자들을 잡아 놓고 우리에게 즉결을 호소했지만 사단장의 엄명으로 모두 후송, 의법 처단케 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과연 그랬을까?
통영 등 경남지역에서는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8월 20일경부터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상주, 안동, 울진 등 경상북도지역에서는 1950년 9월 20일경부터, 경기도 지역은 9월 30일경부터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희생사건이 확인된다. 이 시기 학살사건은 국군이 수복하는 즉시 발생했으므로 수복하는 국군의 진주 경로에 따라 확인된다.
경북 상주에서는 공성면 산현리 백봉원 외 13명이 1950년 9월 25일 밤과 26일 새벽 북진 중 마을에 주둔하게 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들은 인민군 측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마을 재실에 갇혀 고문을 당한 후 재실 앞 냇가에서 총살당했다. 여성 희생자는 학살 전 모두 윤간당했다.
안동에서는 일직면 명진리 이홍복, 김영학이 1950년 9월 20일경 수복 과정에서 국군의 짐을 지고 가던 중 명진리 마을 앞산에서 국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같은 마을 김임백 등 27명의 주민들은 1950년 9월 29일 일직지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되거나 출두명령에 의해 자수하여 구금된 후 헌병대에 인계되어 트럭에 실려 남후면 광음리 암산골로 끌려가 집단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풍산면 주민들이 1950년 9월 25일경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국군에 의해 개천과 막곡리 막실마을 인근에서 살해되었다.
치안 확보 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례
국군이 북진한 후 뒤 이어 경찰이 복귀하였다. 최초 경찰의 복귀는 북진하던 유엔군에 배속된 경찰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며칠 뒤 경찰 선발대에 이어 경찰서장 등이 복귀함으로서 공식적인 경찰서 복귀가 이루어졌다. 경찰서가 공식적으로 복귀하자 마을 치안대 또는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던 마을 주민들이 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사찰계 소속 경찰관 또는 군 정보기관에 의해 A, B, C 3등급으로 분류되어 처리되었다. 구분된 주민들은 경찰서 인근에서 학살당했던가 아니면 합동수사본부로 인계되었다.
경남 통영에서는 안승관 등 1일 내지 1개월의 인민군 점령기 동안 인민군에게 협력했을 것으로 의심받은 주민들이 수복된 직후인 1950년 8월 20일부터 통영경찰서 또는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통영경찰서 유치장 또는 통영 항남동 헌병대 멸치창고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안승관 등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으며, 70여 명의 주민들은 1950년 9월 19일경 통영 명정동 절골 뒷산에서 총살당했고 150여 명의 주민들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수장당했다.
경북 울진에서는 1950년 10월 20일 저녁 무렵, 국군 제3사단 소속 헌병대와 특무대의 지시하에 죽변지서 경찰로부터 같은 혐의로 인계받은 주민들을 국군 제3사단 소속 보충대 군인들이 후정리 부둘골로 끌고 가 집단총살 및 생매장의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이외에도 1950년 10월 말경부터 11월까지 주민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신림 올시골, 황보리 문둥이골,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학살당했다.
안동에서는 1950년 9월 29일경 서후면 주민들이 자품리 붓새골재, 성곡동 부근과 서후지서 앞산, 금계리 경광마을 골짜기로 끌려가 집단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남선면 김원동 등이 원림국민학교 앞 둑, 이하역 맞은편 골짜기등에서 학살당했다.
전남 완도에서는 1950년 9월 10일 완도경찰서 소속 경찰 10여 명이 정자리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마을 입구로 집합시켜 일부 주민들을 정자리 해안가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그 후 1950년 11월 중순 황간도 주민들이 비자리, 황간국민학교 뒷산 등에서 학살당했다.
해남에서는 1950년 10월 하순 산이면을 수복한 경찰이 부역자 처벌을 위해 지서장, 면장, 대한청년단장 등이 참여한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부역혐의자들의 자수를 권유하는 한편 수시로 각 마을에 가서 부역혐의자를 잡아들였다. 자수하거나 체포된 부역혐의자들은 초송리 지서 옆 창고에 구급되어 조사 후 일부는 풀려났으나 대부분은 진산리 뻔지, 금송리 국도면 대나무 숲, 두목마을 뒷산 등에서 살해되었다.
충남 아산에서는 김갑봉 형제 등 200여 명이 1950년 10월 6일경 성재산 방공호(또는 온양 금광구덩이)에서 살해되었다. 탕정면 동산리 김기성은 1950년 10월 7일 탕정지서로 연행되어 각지에서 끌려온 3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탕정지서와 탕정면 곡물창고에 나누어 감금되었으며 호명되어 나가 지서 뒷산 방공호에서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주민들이 새지기 공동묘지, 방공호, 군덕리 쇠판이골, 오목리 앞산, 염통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했다.
서산․태안에서는 1950년 10월 8일 서산군 근흥면 정죽리로 상륙한 해군에게 근흥면 주민 수십 명이 부역혐의로 안흥항 바위와 인근 해안에서 집단살해되었다. 1950년 10월 중순부터 12월 말경까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는 체포된 부역혐의자들을 각자의 관할지역에서 집단살해했다. 읍ㆍ면마다 집단살해 장소가 2~3곳이 있었고, 각각의 장소마다 수십 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2천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서산 갈산리 교통호, 수석리 소탐산 등에서 총살되었다.
강화에서는 1950년 10월 10일 선원지서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선원지서 뒷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했다. 내가지서, 서도지서 등 각 지서에서도 학살사건이 있었다.
고양에서는 1950년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고양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던 200여 명의 주민들이 금정굴에서 학살당했다. 이 외에 주민들이 한강변, 안골 방공호, 새벽구덩이, 현천리 공동묘지, 화전리 계곡 등에서도 희생당했다.
여주경찰서는 사찰계에서 작성한 부역자 명부에 따라 치안대를 동원하여 주민들을 연행하여 여주국민학교 앞 얼음창고에 감금하였다. 갇혀 있던 주민들은 1950년 10월 11일경부터 여주향교 뒷동산, 여주읍 하리 강변에서 총살당했다. 이 외에도 주민들은 가남면 태평리 공동묘지와 가남지서 뒷산(현 태평근린공원), 박산고개, 금사면 옹기정 뒷산과 흥천면 계신리 강변, 여주읍 하리 강변, 대신면 보통리 강변 송장웅덩이와 장풍리 골짜기, 신남리 버시고개 골짜기, 대왕사 골짜기, 당진리 봉골산, 당진리 가시랏골, 흥천면 쇠고개, 효지리 앞산에서 총살당했다.
양평에서는 양평경찰서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1950년 10월 14일과 16일 양평면 양근리 떠드렁산, 양수리 강변 등에서 살해당했다. 이 외에도 양평면 창대리 뒷산, 용문면 오촌리 흙고개, 용문사 입구 흙구덩이, 용문역과 용문성당 골짜기, 지제면사무소 철길 건너 뒷산에서 살해당했다.
평택에서는 20여 명의 주민들이 1950년 10월 16일 새벽, 현곡리 청북지서 뒷산 너머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김포에서는 고촌지서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던 80여 명의 주민들이 1950년 10월 12일경 천등고개 방공호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김포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은 1950년 9월 18일경부터 유치장과 경찰서 내 방공호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가 1950년 10월 11일경 함께 갇혀 있던 100여 명과 함께 2대의 트럭에 실려 여우재고개․독잣굴에서 총살당하였다. 김포면 주민들은 여우재고개 외에도 장릉산 독잣굴 부근의 충혼탑․김포국민학교 뒷산․공군부대, 대곶면 소라리고개 골짜기, 마곡리 한강변, 하성면 하성지서 뒷산(태산골짜기), 마곡리 야산(태산 건너편 야산), 석탄리 강변, 하성성당 골짜기, 하성국민학교 뒤에서 총살당하였다.
남양주 진접면에서는 50여 명의 주민들이 진접지서로 연행되어 살해되었다. 진건면에서는 김육지, 김상옥, 김연옥, 이관수 등 150여 명이 국군과 치안대에 의해 연행된 후 일부는 석방되었으나 상당수는 살해당했다.
가평 북면에서는 북면지서에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이 꽃넘이고개, 제령리 챈골 골짜기 등 에서 희생당했다. 가평 설악면에서는 1950년 10월 10일경 주민 100여 명이 설악지서 유치장과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는데, 이들 중 20여 명이 1950년 10월 18일경 가평경찰서장의 명령에 의해 설악면 사룡리 은고개 강변에서 희생당했다. 이외에도 하면 신상리 양추교 밑, 가평경찰서 앞 폭탄구덩이 등에서도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다.
포천에서는 신북면 가채리 구장 이용성 등 30여 명이 1950년 10월 9일경 호병골 비행장 공사장에 소집되었다가 무럭고개 골짜기에서 집단희생당했다.
1․4 후퇴 과정에서의 피해 사례
6․25 전쟁 초기 후퇴하던 국군과 경찰이 국민보도연맹원 등 감시대상 주민들을 소집한 후 학살했던 것처럼 1․4 후퇴 당시에는 부역자의 가족들이 희생당했다.
1950년 12월 15일 경기도 전 지역에서는 경기도경찰국의 후퇴 지시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2월 23일 시민의 피난을 공식 명령하고, 12월 24일 서울시민소개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의 경우 1951년 1월 3일까지 114만 명이 철수하였다. 서산경찰서 연혁사에는 1․4 후퇴 직전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배경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38 이북까지 전진하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거 남침에 따라 재차 후퇴를 하게 되었으니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이왕 후퇴하려면 적색분자를 일제히 살해하고 후환이 없도록 하라는 여론이 중천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후퇴한 지역이었던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에서는 1950년 1월 3일경 위 김산이 일가족 7명과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유씨 집안 2가족 12명(유인태, 유인한 외 10명)이 설운리 진설모루마을 다리밑에서 총격을 받아 김순배를 제외한 18명은 모두 사망하였다.
강화에서는 430여 명 이상의 주민들이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특공대 본거지인 강화경찰서와 면 지서로 연행․구금되어 고문을 당한 뒤 갑곶나루, 옥림리 갯벌, 월곶포구, 돌모루포구, 철산포구, 온수리사슬재, 선원 대문고개,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 등으로 끌려가 집단희생 당하였다.
여주에서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이포리 정오목, 최병주 등 주민들이 1950년 12월 말 하리 고려병원 뒤 양섬 강변에서 총살당하였다. 능서면에서는 황씨 집안 주민들을 포함한 부역혐의자들이 치안대 등에 의해 여주경찰서 매류출장소 옆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1951년 1월 초순 유치창고에서 끌려 나가 고령토 구덩이에서 총살당했다.
남양주에서도 같은 시기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경기도경찰국은 1950년 12월 15일 양주경찰서로 “관공서 직원, 우익 단체원, 경찰관 가족을 한강 이남으로 피난시키며 특히 중요물자 및 청장년을 계획적으로 수송하라”고 통첩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양주경찰서는 머지않아 이 지역이 다시 점령당할 경우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으로 의심되는 주민들을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12월 19일 진건지서 순경 강윤수는 지서주임 이종설의 지휘에 따라 지서에 비치되어 있던 부역자명부를 검토한 후 살해할 주민들의 명부를 만들어 오후 4시 20분경 진건면 향토방위대 감찰부장 장수남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향토방위대장 황한규 등은 이 명부에 따라 주민 229명을 연행하여 12월 19일 오후 7시경부터 다음 날인 20일 오전 4시경까지 진건국민학교 뒷산에서 집단총살했다.
충북 음성 대소면 오산리에 1951년 1월 5일 제6사단 제19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 제19연대 헌병파견대는 대소면 국민방위군에게 지시하여 9․28 수복 후의 부역자수자들을 대소국민학교로 소집시켰다. 소집된 주민들은 헌병파견대와 국민방위군에 의해 분류되었으며, 1월 6일 오후 갑으로 분류된 주민들과 을로 분류된 주민들 일부인 59명 이상이 제19연대 제1대대 병력에 의해 대소국민학교 및 대소중학교 인근에서 총살당했다.
충남 서산에서는 1․4 후퇴 전에 경찰이 부역혐의자들을 트럭으로 소탐산으로 이송한 후 총살하였다. 후퇴를 앞두고 끌고 갈 수 없어 살해한 것이었다. 경찰은 사람을 앉혀 놓고 그 뒤에서 총살했다. 소탐산 골짜기에는 수십 구의 시신이 쌓여 있었다.
아산 신창면에서는 신창지서 주임 유해진 경사의 지휘로 경찰관들이 1951년 1월 15일 구금되어 있던 부역혐의자 중 임중빈 등 6명을 의용경찰 오씨와 정씨를 시켜 총살시켰고, 1951년 1월 9일 오후 4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 11명을 창고에 감금하였다가 총살하였다. 배방지서순경 한정우는 향토방위대장 한상익과 공모하여 1951년 1월 6일 오후 8시 부역혐의를 받던 배방면 주민 183명을 창고에 감금하였다가 인근 금광굴에서 총살하였다.
2차 수복 후 피해사례
충북 음성 대소면에서는 1951년 2월 10일 복귀한 대소면 국민방위군 대장의 지시에 의하여, 삐라배포를 빌미로 주민 20여 명을 대소지서 유치장에 감금당했다. 이 중 8명이 대소면 국민방위군에 의하여 2월 23일과 2월 24일 두 차례에 걸쳐서 오산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여주에서는 1․4 후퇴 후 재수복되자 1951년 2월 18일 마래리 변사복 등이 치안대로 활동하면서 양평에서 피난 온 조문환 등 일가족 6명을 매류리 공동묘지(고령토 구덩이 옆)에서 총살하였다.
해남에서는 1951년 2월말 최기명이 산이지서장으로 부임하면서 1950년 10월 부역혐의가 없어 풀려났던 주민들이 다시 연행되기 시작했으며, 1951년 3월 14일 이중 20여 명이 산이면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살해되었다.
재판을 받은 부역혐의자들은 누구이고 어떻게 되었나
인민위원회 등 인민군 점령기 북한 점령기구에서 종사한 주민들은 경찰의 지휘 아래 치안대 등 민간치안조직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들은 경찰서에서 사찰계 소속 경찰관에 의해 조사를 받았으며 조사결과 A, B, C 등급으로 나뉘었다. 각 경찰서에서 근무했던 사찰계 소속 경찰들의 증언에 따르면, A등급은 임의처형(즉결처분), B등급은 재판 송치, C등급은 보류 상태로 두었다고 한다. 즉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연행당한 주민들은 경찰서의 조사 후 임의처형되었거나 재판소로 이송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임의처형 당한 희생자들이 곧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희생자들이었으며, 법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은 주민들이 “부역자”들이 되었던 것이었다.
부역자 처리는 합동수사본부의 일관된 지휘 아래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역자 처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역시 이들의 지휘 아래 저질러 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선 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합동수사본부에 파견되어 자기 소속 경찰서 관할구역의 부역혐의자 처리를 담당한 사례도 확인된다.
당시 부역혐의자의 처벌에 적용되었던 법으로는 「국방경비법(國防警備法)」,「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과 「비상조치령」이 있었다. 이외에 12월 1일에야 공포되었던 「부역행위특별처리법(附逆行爲特別處理法)」, 「사형금지법(私刑禁止法)」이 있었으나 이 법들은 부역자의 형량을 낮추거나 적용시기를 제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거의 적용된 사례가 없었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1950년 10월 4일 계엄사령관의 지휘 하에 계엄고등군법회의와 함께 설치되어 부역자의 체포와 기소 임무를 전담했다.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관의 지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수사협조를 위해 군의 지휘 아래 검찰과 경찰로부터 인력을 파견 받았다.
유병진 판사의 회고에 따르면, 떡장사를 인민위원회 서기로, 여맹위원장의 추대를 거부한 보도연맹원을 여맹위원장으로, 남편이 국회 프락치 사건의 해당 국회의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처를 부역자로 기소하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 처리 첫 번째 과정은 각 경찰서에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였는데, 가장 큰 문제는 수사기관의 과잉대응과 진짜 부역자들의 치안활동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오제도(합동수사본부 지휘부 검사)는 “10월초에 서울에 와서 보니까 부역자 처리가 엉망이에요. 완장을 두른 자치대원들이 경찰과 협동해 부역자들을 잡아들이는데, 알고 보니 이 자치대원들 중에 일부는 진짜 부역자들이 꽤 있어요. 이 자들은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 자기 죄를 아는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아 체포한 사례가 꽤 있었어요.”라고 하였다.
합동수사본부 부장 김창룡은 1950년 10월 29일 담화를 통해 국군 수복 초기 부역자의 가족들을 무조건 구속한 것과 부역자였던 치안대원 혹은 자위대원이 자기 죄상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여 우익인사를 체포 구속한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 이를 구별하려는 노력 때문에 석방율이 높아졌다고 자화자찬(自畵自讚)하였다.
그렇다면 그 동안 희생된 부역혐의자들은 부역자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내무부 치안국 『경찰10년사』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연행한 부역자 총수는 검거인원 153,825명, 자수인원 397,080명으로 모두 550,905명에 달했으며, 일부 극소수 의식분자인 인민군 1,448명, 중공군 28명, 유격대 9,979명, 노동당원 7,661명, 도합 19,116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적의 강압으로 부득이 부역한 자로 봤다. 이 자료는 경찰의 것으로 이들의 주장에 따라 부역자 처리가 재판에 의해 합법적으로 처리되었다고 본다면, 극소수 의식분자인 19,116명은 재판에 의해 판결을 받았을 것이고, 나머지 가벼운 부역자에 해당하는 531,789명은 석방되었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확인되는 희생자 수로만 보아도 재판에 의해 처리된 부역자보다도 학살당한 부역혐의자 수가 월등히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이 531,789명 중 상당수는 학살당한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증언 자료에 따르면, 1․4 후퇴 시기 재판은 즉결처분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1950년 10월 12일 연행된 김복연은 사직공원 총살형장에서 총살을 면하고 종로경찰서로 이송된 후 검사의 신문을 받은 후 1950년 12월 2일 1회 공판만으로 형이 확정되어 1974년 4월 6일 출소했다고 한다. 김복연은 1950년 12월 30일경 대구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죄수들을 세워놓은 채 산더미 같은 서류를 쌓아 놓고 누구 사형, 누구 무기징역형이라고 선고하는 모습을 목격했으며 본인도 이런 절차에 의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고 했다.
희생자
국군 수복 시 이미 인민위원회 간부 등 부역자 대부분은 월북 피신하였거나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하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로 대개 각 리의 주민대표자들이었으며 해방정국에서의 좌익 활동은 물론 정치․사회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주민들도 많았다.
특히 당시 주민들은 인민위원회 참가 혹은 협력행위를 좌익 활동으로 보기보다는 일반 행정에 대한 지원활동으로 보았으며, 그에 가담한 사람조차도 대부분 명시적․묵시적 압력에 의해 할 수 없이 일을 하게 된 것이므로 국군 수복 후 극형을 받게 될 행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의 소극적 협력을 한 사람조차 일부에 해당할 뿐이었으며, 대부분은 그의 가족 또는 친척이었다. 한편 부역혐의와 무관하게 개인 감정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도 있으며, 그 중 상당수는 가족이나 증인을 찾을 수 없어서 아직도 개인별 희생의 원인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이 경우도 대부분 부역행위와 무관하게 ‘부역을 했을 것이라는 혐의’만으로 희생당한 것은 분명하다.
가해자
사건의 초기부터 공권력이 개입하고 있었다. 각 마을의 치안대는 경찰이 공식 복귀하기 전부터 잔류 경찰, 대한청년단 등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조직되었다. 대개 경찰이 공식 복귀하기 전까지는 주로 인민위원회 등 단체의 간부들을 연행하여 감금하는 활동을 주로 했으며, 함부로 주민들 헤치는 등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부역혐의자 학살은 일부 군 정보조직이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경찰조직과 그의 지휘를 받는 민간치안조직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리고 이들은 경기도 경찰국,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지구계엄사령부의 지휘․명령을 받고 있었다. 특히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 부역자 처리를 전담하는 기구로서 이 사안에 관한 한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간치안조직은 각 경찰서에 이해 명부가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각 경찰서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외에 부역자처리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각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민간차원의 시국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고양, 거제, 해남 등에서 이들의 활동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후원금 명목으로 스스로 걷은 돈을 경찰서에 전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희생된 부역혐의자의 재산을 수탈하여 넘겨 준 것이었다. 그리고 형식상 자발적인 민간인 조직이었으나 실제로는 각 경찰서 또는 군수 등 공식 행정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음이 확인된다.
합동수사본부는 이승만의 권력유지를 위해 마치 개인을 위한 조직처럼 활동하였으며, 활동의 대부분은 공포정치에 이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은 자신의 사조직처럼 활동하면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해 온 합동수사본부를 옹호하였다. 이승만은 합동수사본부를 해체하라는 주장에 대해 오히려 “합동수사본부에서 관민간 대소 불법행동과 제5열 공작 등을 수사하는데 많은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 내용에 병통이 있거나 폐단이 있을 때까지는 이를 유지해야 되겠으니 총참모장에게 지휘해서 누가 무슨 언론으로든지 이를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인지 알아서 보고하며 경비계엄령이 있을 동안에는 경찰이나 검찰에서 파견한 인원을 소환하는 것을 못하도록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승만은 국군 제11사단에 의해 1951년 2월 저질러진 거창, 산청, 함양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하여 1951년 4월 30일 “거창사건으로 인해서 많은 논쟁이 생겼고 따라서 외국인까지라도 중대하게 알 만치 되었으니 일의 곡직(曲直)은 더 조사해서 완전히 판단할 것이나 한 가지 드러난 조건은 군인이 여러 생명을 희생한 것이 비록 법적으로 했다할지라도 문제가 이만치 되기에 이른 이상 군인들이 그 책임을 거부하기 어려우므로 정부의 체통으로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 없는 터인 바, 제11사단장 최덕신의 발령(發令)으로 대대장이 집행한 것이라 하매 이 두 사람은 다소 처벌을 주어서 많은 시비가 생기게 한 것을 징계해야 될 것인 바, 정일권 총참모장과 의논해서 적당한 벌칙을 만들어 징계함이 적당하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민간인 학살 사건이 크게 여론화되지 않는 이상 큰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초기 패전의 책임이 시민들에게 있다는 인식, 부역혐의자에 대한 「비상조치령」의 가혹한 처벌규정, 이를 완화하려는 노력에 대한 공격, 외신기자들의 비인도적 처형사실 폭로에 의해 계기가 되었던 1950년 12월 23일 사면령 등으로 보아 이승만 정부는 민간인에 대한 불법처형사태를 막을 의지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판단된다.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역사적․사회적 성격
부역혐의 희생사건은 지난 시절 비극적인 현대사의 한 단면에 그치지 않고 있다. 부역자라는 낙인을 받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연좌제 속에서 고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실제 장기수로 10년 이상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는 40년이나 지난 20세기가 끝날 즈음에서야 석방되기도 했다.
이 극단적인 야만의 잔재가 지금은 사라졌는가? 아니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초헌법 악법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이를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헌법적 기관인 검찰과 형법에 의해 국가 안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역혐의 희생사건은 전국에 걸쳐 저질러졌다. 전국에 조직되어 있는 경찰이라는 국가폭력기구가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저질렀으니 당연히 전국 어느 곳에서도 확인되는 유형의 사건이다. 그러나 유족들은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운이 없어, 험한 세상을 만나 당한 우연한 사건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진실화해위원회 신청사건 9천여 건 중에 300여 건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학살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은 유족들이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지금도 말 못하는 유족들에게 더 많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야 시민에 대한 시민사회의 책임,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가 한발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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