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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치타라 정상에서 본 마지막 케이블카역과 주변 산군. |
미지의 나라, 미지의 산으로 가는 원정산행은 우리 산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금수강산 우리나라 산이 세계적으로 아름답고 아기자기하다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보지 못한 다른 나라의 명산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낯선 그곳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감은 우리를 들뜨게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대한민국 산악인 모임의 총부산격인 한국산악회(회장 남정현)의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인 코카서스 돔바이 트레킹을 2005년 9월16일부터 9월23일까지 7박8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코카서스(러시아어로는 카프카즈)는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길게 뻗어 있는 1,200㎞의 산맥으로,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즈(Elbrus?5,642m)를 포함해 4,000~5,000m급 준봉이 26개나 솟아 있다.
돔바이(Dombai)는 흑해쪽에 가까운 러시아령으로 산림이 울창하고 돔바이 울겐(Dombai Ulgen?4,046m) 등 3,000~4,000m급 봉들이 빙하 계곡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절경지대다.
▲ 폭포 가는 계곡길. |
이번 트레킹에는 한국산악회 문희성 명예회장, 남정현 회장, 최선주 부회장, 이양근 이사, 변유근 이사 등 임원진 5명과 마석일, 마운락, 최관영, 홍옥선, 최영환, 정준모, 송헌일 회원 등이 동참했고, 이중 홍옥선 회원이 대표로 있는 한국여행사가 전체 일정을 주관했다. 고난도의 고봉 등반이 아니고 말 그대로 트레킹이므로 고도 1,500m 지점에 숙소를 정해놓고 매일 아침 출발해 일몰 전에 돌아오는 원점회귀산행이다. 참가자들의 평균연령 60세를 감안해 무리 없게 짠 산행이므로 요즘 말로 웰빙 트레킹이라 할 수 있다.
평균연령 60세의 웰빙 트레킹단
우리는 9월16일 오후 12시50분 아에로플롯의 SU600(보잉 767-300 기종)으로 인천공항을 이륙해 9시간 정도 걸려서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 도중 두 번의 기내식은 예상보다 맛도 좋고 서비스도 괜찮았다. 입국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러시아가 그동안 열심히 개혁했는지 꽤 빨리 통과했고, 더구나 외환소지 검사를 까다롭게 한다는 세관심사대는 무신고로 그냥 통과했다. 그런데 화물검사대 근처의 화장실 입구에는 흡연자들이 잔뜩 몰려서 연기를 뿜어대고 있고, 화장실 내부는 지저분하고 물이 넘쳐흘러 여기가 공산당 72년 하의 모스크바임을 점차 실감했다.
▲ 아치타라 정상 직전 너덜지대. |
▲ 블루베리. 눈(目)에 좋다고 모두들 정신없이 따먹고 있다. |
들소 등처럼 굵은 능선 돔바이 울겐
오늘은 9월18일 일요일이자 추석이다. 서울에 있었으면 추석차례나 감사예배를 드리고 성묘했을텐데, 우리는 이역이만리(異域二萬里) 러시아의 코카서스 산자락에 와 있다. 오전 8시30분에야 문을 연 호텔 식당에서는 빵, 치즈, 야채(러시아 토마토), 햄버거, 감자요리 외에 쌀과 우유를 섞어서 만든 뜨끈한 스프가 나왔다. 맛이 좋다. 러시아의 시스템과 관리는 엉망인데 비하면 음식맛은 영국이나 독일보다 좋은 것 같다.
▲ 아치타라 오름길의 마지막 스테이션. |
오전 9시20분쯤 숙소를 출발해 드디어 대망의 첫날 트레킹이 시작됐다. 오전 일정은 1,600m 지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고도 2,200m까지 올라가서 다시 리프트를 갈아타고 3,000m까지 올라 간 후 나머지 표고차 200m를 올리면서 아치타라(Achitara)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다.
숙소에서 가까운 케이블카 터미널에서의 탑승수속 절차가 정말 희한하다. 현지 등산 가이드인 블라디미르가 일행 12명의 여권 전부와 바우처를 잔뜩 들고 케이블카 관리사무소에 제출하면 심사관이 일일이 대조 확인한다. 30여 분 심사하는 동안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특정인을 소환(?)해서 정밀조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담당자의 심사가 다 끝나면 다시 상급자의 결재를 얻어야 케이블카 승차허가가 떨어진다.
탑승허가를 받은 후 티켓을 사는 게 아니라 좁은 문을 통과하면서 문지기에게 현금으로 탑승료를 지불한다. 주말에 몰려든 러시아 관광객들 맨 뒤에 서서 약 1시간 기다린 후 겨우 탑승위치까지 접근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리인이 7~8명을 새치기해서 공짜로 들여보내고 있다. 탑승자는 고객이니까 서비스한다는 정신은 전혀 없고 엄격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버젓이 공짜 새치기가 저질러지고 있음을 보고 공산당이 망한 이유를 알겠다.
우리를 600m 올려준 첫 케이블카는 녹이 슬고, 중간에 세운 철탑도 녹이 슬었다. 밑은 새까만 낭떠러지다. 두번째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다시 리프트를 바꿔 타는데, 배낭은 낙하산 부대원처럼 가슴에 안고 스틱은 한 손으로 모아 잡고 준비하고 있다가 회전해서 다가오는 2인용 리프트의 좁은 공간에 재빨리 궁둥이를 밀어 넣었다.
해발 3,000m 지점에서 정상까지 걷기 시작하는데, 위를 바라보니 나무 한 그루 없는 돌무더기였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약간의 고소증세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가이드는 천천히 움직이라고 주의를 환기한다. 나는 블라디미르(Vladimir) 바로 뒤를 따르면서 이 순박하고 붙임성 좋은 가이드와 친해졌다. 나이는 59살이고 26살짜리 시집간 딸이 300㎞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자기 이름이 레닌과 푸틴과 같다고 자랑한다. 돔바이 지역 등산가이드 경력만 20년이란다.
▲ 알리벡빙하 오름길. 이 지역에만 빙하가 89개 형성돼 있다. |
그는 내 앞에서 사뿐사뿐 힘들이지 않고 오르다가 뒤처지면 서서 기다린다. 다시 열심히 뒤쫓다 보면 또 저만치 앞서간다. 드디어 선두가 3,200m 정상에 오르니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면서 협곡이 빙하로 덮인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빙하 밑으로는 얼음이 녹은 물이 폭포수를 이루고 있다.
돔바이 울겐(Dombai Ulgen?4,046m) 정상은 구름에 살짝 가려 있다. 돔바이는 러시아 말로 들소라는데, 정상에서 양쪽으로 흐르는 능선이 정말 들소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 남 회장의 평가에 의하면 알프스의 샤모니, 융프라우, 마터호른 보다 여기 주변 봉우리들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우리는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부는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올라올 때와 역순으로 하산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일행은 다음 목적지인 돔바이계곡 왕복 3시간 코스에 들어섰다. 약 30분쯤 오르막 산림도로를 가다가 좁은 등산로로 들어섰는데 약 20m 전방에 AK 소총으로 무장한 국경수비대원이 버티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블라디미르가 다가가 공손한 태도로 일행 명단과 관련서류를 꺼내 놓고 입산 이유를 설명한다. 그동안에 그 군인은 연방 입으로 무얼 깨물어 먹고 있다가 갑자기 까먹고 있던 열매를 한 웅큼 집어서 먹어보라고 하기에 내가 얼떨결에 받았다.
이 때 블라디미르가 담배 가진 사람 없느냐고 묻는다. 누군가 미제 켄트 갑을 내밀었더니 그 젊은 군인은 딱 세 가치만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이 러시아 군인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60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1945년 초 겨울 어른의 등에 업혀서 38선을 넘어 월남할 때 초소를 지키던 소련군 초병의 모습이 2005년 지금의 상황과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다.
그 곳을 통과해 평지를 30분쯤 가노라니까 들풀과 이름 모를 야생화로 뒤덮인 초원지대가 나오고, 주변은 온통 옆으로 자빠진 자작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군데군데 맑은 샘물이 실개천을 이룬다. 사방을 둘러보면 돔바이 거봉들이 겹겹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3,200m 아치타라 정상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수목이 울창한 오르막을 조금 더 오르니 목표지점인 폭포가 있고, 주변에는 붉게 익은 마가목(馬牙木, Mountain Ash) 열매가 우리를 유혹한다.
부지런히 하산해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7시가 넘었다.
7시간 가파른 숲 헤치고 오른 크리스탈 패스
▲ 크리스탈 패스에서 본 `코카서스의 마터혼른`. |
▲ 돔바이 산악인 묘지. |
오후 4시가 가까워지니 하산길을 염려한 남 회장이 가이드에게 그만 돌아가자고 윽박지르자 그는 5분만 더 가면 된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 5분이 다시 2분이 되고, 그 후에는 못보고 가면 한국 돌아가서 할 얘기가 없을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계속 전진했다.
드디어 날카로운 바위더미의 너덜을 지나니 시야가 트이면서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전방 끝에 3,600m 봉우리로 오르는 크리스탈 패스가 보인다. 시간에 쫓긴 선두 4명(가이드, 남정현 회장, 최선주 부회장, 필자)은 목적지점을 눈에 담고 바로 하산길에 들어섰다.
오늘 일정이 평균연령 60세의 우리 일행에게는 처음부터 좀 무리였다고 하겠다. 일본 북알프스의 가미고지(1,500m)에서 야리가다케 대피소(3,060m)까지 가 약 1,500m 올리면서 그곳에서 자고, 키나발루(말레이지아) 산행도 출발지점 폰툰게이트(1,920m)에서 라반라타 산장(3,300m)까지 1,400m 올리면서 그 날 끝나는 것과 달리 우리는 1,500m 올리면서 당일로 원점회귀해야 하니 그 강도가 심함을 알 수 있다.
땀을 많이 흘리고 물을 충분히 마시지 못해서 탈수증세에 고소증까지 오는지 균형을 잡기 힘들다. 너절지대 바위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니 믿을 건 두 손에 움켜진 스톡뿐이다. 30분쯤 전진하니 너덜도 끝나고 족적이 희미한 등산로가 나타나 여유가 생겼다. 해발 3,000m 고도에서 전방에 180도로 코카서스 준봉들이 사열하듯 늘어서있다. 창끝같이 정상이 뾰족한 코카서스의 마테호른이 바로 눈앞에 버티고 있다. 몇 시간 전에 헤어진 후미그룹이 이동하는 모습이 개미처럼 멀리 보인다.
▲ 알리벡 빙하의 폭포. |
소피아 로렌 뺨치는 가이드와 빙하 트레킹
오늘은 마지막 일정으로 비교적 가벼운 알리벡(Alibek) 빙하 트레킹이다. 오전 9시20분 숙소에서 미니 버스를 타고 약 5㎞ 떨어진 출발지점에 도착했다. 오늘 트레킹에는 안나(Anna)라는 러시아 금발 미인이 동행한다. 블라디미르의 소개로는 가이드 예비생이라는데, 나이는 40세 전후로 50~60년대의 글래머 여배우 소피아 로렌 뺨치게 체격이 늘씬하다.
▲ 미네랄보디 공항. |
약 30분 후 갈림길에서 잠시 쉬고 폭포수 근처에서 물을 건너 빙하로 향해 오르막을 쳐오르니 폭포에서 떨어져 피어오르는 물보라가 얼굴을 때린다. 바로 앞서가던 안나가 잠시 서서 물보라를 맞으며 천사와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하라쇼!(좋다)"라고 나지막하게 탄성을 지른다.
드디어 빙하지역으로 올라서니 두꺼운 얼음(200m 이상) 위에 살짝 덮여 있는 자갈모래가 꽤 미끄럽다. 돔바이 지역에만 89개의 빙하가 있는데 우리가 가고 있는 알리벡 빙하는 길이 7㎞, 폭 3㎞, 두께가 200여m나 된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매년 빙하의 크기가 줄어든다고 한다.
빙하 위에서는 땅에서와 달리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마치 냉장고 속 같다. 얇은 스웨터 차림의 안나가 방풍재킷을 껴입는다. 조심조심 2,200m 지점까지 오른 후 옆으로 이동 빙하를 빠져나와 알리벡 계곡의 캠프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햇반과 라면, 그리고 가지고 간 미군용 식량으로 푸짐하게 점심식사를 했다.
하산길은 꼭 지리산 백무동계곡 같은데, 도중에 올라오는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러시아 여대생들을 만났다. 미인 눈요기 하면서 각자 한 마디씩 하고 내려오는데 어제의 극기훈련에 비하면 오늘은 정말 웰빙 산행이다.
평지로 내려선 하산길에서 우리는 돔바이 지역에서 산악사고로 숨진 40인의 유해가 묻힌 산악인 묘소를 찾았다. 돌로 된 묘비에는 고인의 이름, 출생년도, 사망년도가 표기되어 있고, 어느 묘석에는 고인의 사진과 쓰던 피켈이 걸려 있기도 하다. 26~30세 사이의 젊은 여성 산악인이 많다. 50~60대 묘비는 없다. 하기야 젊은 나이니까 산에 도전하다가 또는 스키를 타다가 유명을 달리 했을 테지. 블라디미르의 친구도 3명이나 여기에 묻혀 있다고 한다.
오후 4시30분경 조금 일찍 숙소에 도착한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오후 6시30분 3일간의 산행을 마무리하는 양고기 파티를 열었다. 침엽수가 빽빽히 들어선 숲을 뒤에 두고 정면에는 돔바위 울겐과 아치타라 정상이 버티고 있는 곳에 식탁을 마련했다. 50㎏ 양 한 마리를 잡아 몇 시간 전부터 동네 요리사가 장작불에 꼬치구이를 굽고 감자를 넣은 양고기 스프를 끓이고 있다. 양고기는 냄새도 전혀 없고 닭고기 보다 연하고 맛이 좋다. 러시아산 발티카(Baltika) 맥주와 보드카로 목을 축이며 산행 뒤풀이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술기운이 거나해지자 해학이 넘치는 최선주 부회장은 양고기 나르기에 바쁜 블라디미르에게 안나를 빨리 이 파티에 불러오라고 윽박지른다. 순진한 블라디미르는 휴대전화를 계속 누르더니 응답이 없다고 미안해한다. 최연장자인 문희성 명예회장이 건배하면서 지난 3일간 하늘이 도와서 날씨가 쾌청했고, 모두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산행을 마무리 하게 됐다는 취지의 인사말을 했는데 그것이 모두의 생각과 꼭 같다.
양고기 굽는 냄새와 보드카 향과 함께 코카서스의 밤은 점점 깊어간다.
글 송헌일 한국산악회 회원·㈜ 솔본 고문 / 사진 변유근 한국산악회 이사
출처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05/11/15/20051115780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