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창간 전후
시인 김형영 형과 내가 김동리 선생님의 부름을 받아 문인협회 사무국에 나가기 시작한 건 1968학년도 1학기 중의 일어었다.
대학 입학이 서너 해씩 늦었던 우리는 그나마 마지막 학년으로 진입한 해였는데, 이미 두어 해 전에 둘 다 등단 관문을 통과한 터라 남은 걱정은 오로지 졸업 후의 일자리였다.
글쟁이들의 구직난은 예나 지금이나 변변함이 없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한국문인협회가 편집하고 삼성출판사가 발행키로 한 전집 《한국단편문학대계》의 원고 수집 및 교열의 일이었다. 시한부 임시직어었지만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위의 일은 서너 달 만에 끝이 났다. 정작 행운은 그때부터였다. 종합 문예지 《월간문학》의 창간 작업이 시작된 덕분이었다. 우리는 문협 사무국 임시직에서 원한문학 편집사원으로 신분이 바뀌었고, 여기에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 형이 보강되었다. 발행 및 편집인 김동리, 편장장 김상일 선생, 제호 글씨는 손재형 선생, 표지화는 남관 화백으로 마침내 창간호가 1968년 11월호로 발행되었다. 이후, 내가 1970년 사직할 때까지 우리 세 사람은 이 일에 매달렸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며 광명인쇄소를 드나들던 일, 배본·발송·수금 일까지 도맡아 하던 이문구 형의 열성 등,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매회 필자 선정은 김동리 선생이 직접 하셨다. 그만큼 관심이 컸다는 증거다. 동리 선생이 박 대통령과의 면단 끝에 성사된 거라는 《월간문학》탄생 설화를 생각하면 선새의 열정이 이해된다. 특집 기획는 김상일 선생이 일조하셨다. 그러나 김현, 염무웅 등 젊은 비평객들을 끌어들이는 일에는 이문구 형이 능력 발휘를 했다. 편집 실무에는 김형영 형이 이때부터 타고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보면, 딱 부러지게 자기 몫을 해내지 못한 사람은 내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발이 빠른 문구 형과 손이 매운 형영 사이에서 나는 그저 교정쇄애나 코를 박고 살았던 것 같다.
월간문학 편집실을 제일 먼저 떠난 사람은 나였고, 한 해쯤 뒤에 김형영 형이 자리를 옮겼다. 둘 다 생활고가 이직 사유였다. 가정을 가지면서도 월 7 천 원의 박봉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혹 서운해하실까 봐 머리를 떨구고 서 있던 나에게 동리 선생이 한숨을 섞어 내뱉던 말씀이 지금이 잊혀지지 않는다. "월 만 원이나마 채워줄 형편만 돼도 붙잡겠다만..."
은사님에게 끝까지 등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은 문구 형 뿐이었다. 1973년도의 문협 선거 결과 월간문학을 내놓게 되자 문구 형은 새문예지 《한국문학》을 창간했다. 발행 및 편집인은 김동리 선생이셨다.
문예지가 귀하던 시절, 문단 공기로서의 《월간문학》의 위상 및 역할은 대단했다. 특히 1970년 이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직을 놓과 과열 현상을 빚은 이른 바 문단 선거 후유증 속에서 말하자면 조연현의 《현대문학》 김동리의 《월간문학》구도로 비쳤던 점도 이에 일조했다고 생각된다. 미구에 한국 문단은 이 두 문예지를 중심하여 양분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월간문학》은 세월이 가면서 점차 문협 기관지로서의 태생적 한계를 드러냈다. 어느 해던가. 아마도 편집실 캐비닛에 쌓이 원고를 청소(?)하느라고 그랬던지 면수가 파격적으로 늘어나서 책이 흡사 목침처럼 투박해져버린 것을 보고 기분이 몹씨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어쨋거나, 《월간문학》은 문단 초년병 시절에 내가 처음으로 창간 작업에 참여했던 문예지이니만치 지금도 애착이 깊다. 그래서 지령 500호를 맞이하여 감히 소망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 회원들에게 가급적 골고루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아울러, 작품성이 높은 작품들을 더 많이 발굴 게재하는 문예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책을 만드는 이나 기고하는 이나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되지 않나 생각되는데, 이는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