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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그 아이의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릿했다.
마치 소녀 시절 연모하던 사람에게 뒤늦은 사랑을 고백받는 그런 설렘이랄까?
어느 시절 그 아이는 내게 등불이었고 위로였고 생활이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는 겨우 숨만 쉬고 있는 내 가슴에 희망의 등불을 켜 주었다
그 아이가 내 심장에 피를 돌게 하고 내 피를 뜨겁게 달구고 가슴속에 묵혀둔 이야기들을 꺼내 놓으라고 닦달한다
어느 곳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은 유리알처럼 반짝거리는 이야기도,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될만한 사건도 없는, 옆집 누렁이가 새끼를 몇 마리 낳았다거나 누구네 집 아버지가 술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싸움을 하더라는, 그저 그런 이야기가 입방아에 오르내릴 정도의 평안한 마을이었다
6학년이 시작되었지만 1학년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이라 설렘이나 새로운 감흥 같은 것도 없는 새학기었다
그 아이가 전학을 왔다
햇살과 바람과 친구가 되어 뒹굴던 우리와는 다르게 얼굴이 하얗고 단발머리가 나풀거리는, 눈이 예쁜 아이였다
그 아이는 여러 친구 틈에서도 금방 눈에 띌 만큼 예뻤다.
수줍음이 있는 것 같지 않았음에도 별말이 없었고 친구들과도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왜 늘 혼자 앉아 있을까?
나는 예쁜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고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내가 친구가 되기 전, 그 아이와 한동네에 사는 희정이가 이미 그 아이를 가로채 버렸으니 닭 쫓던 개가 되었던 것이다
내 성격상 이미 다른 사람과 관계가 형성되면 끼어들지 않는지라 깨끗이 포기했다
나는 늘 그러했듯이 남녀 구분없는 내 무리의 악동들과 어울리기 바빴고 분잡하고 개구쟁이인 친구들과 소소한 아귀다툼을 벌이느라 그 아이에게 더 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언제쯤인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 아이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아이와 친구가 되었던 희정이의 이간질로 교실 뒤편 응달진 곳에서 혈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아마 나는 뭔가 억울했던 것 같았다
그 아이도 나도 어찌나 사력을 다했던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이 끝난 후, 각자의 손에는 머리카락이 한움큼씩 쥐어져 있었다
그 아이는 중학교 때 싸웠다고 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중학교가 아닌,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로 기억된다
그 후 어찌 된 일인지 그 아이와 단짝이 되었고 나는 개구쟁이 남자아이들로부터 그 아이를 보호하는 경호원을 자처했다
전학생이었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그 아이를 남자아이들은 지분거리며 꽤나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오기와 깡다구가 강해 남자아이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여 깡 비슷했다
오죽하면 덩치나 힘이 나보다 월등했던 친구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아버지와 송화년이다." 라고 우스겟소리를 했을까
키도, 덩치도 작고 볼품없는 내가 거칠고 힘 좋은 친구들에게 버틸 수 있는 것은 오기와 사생결단의 깡다구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와 또 다른 친구 신형이와 우리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늘 함께했다
수업이 끝나면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고 방학이 되면 보고 싶어 엄마 몰래 아랫동네로 줄행랑을 치곤 했다
그 친구들은 내게 친구 이상의 자매였고 형제였다
내 고향, 그곳은 문화생활이라는 것이 없었다
군사지역이라 가끔 위문공연이라는 명목으로 연예인 비슷한 단체가 군부대에서 공연을했는데 이때는 민간인도 공연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는 언니 오빠, 또는 어른들과 함께라면 언제든지 공연을 구경 갈 수 있었지만 그 아이의 엄마는 밤 외출을 허락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더구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구경거리라고는 면회온 아가씨와 군인들의 다정한 데이트 모습이 전부였던 그곳에서 연예인들의 공연은 최고의 볼거리였고 화제였다
공연에 그 아이와 꼭 함께 가고 싶었고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지만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 혼자 구경하러 가는 것이 미안했고 그 아이에게도 멋진 공연을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간청에 드디어 "송화와 함께 간다면 허락하겠다." 라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아이의 부모님은 딸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기도 했지만,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까다로운 분이셨다
엄마는 보통의 시골 아줌마처럼 투박하지 않고 가냘프고 인형처럼 예뻤다.
중학교 입학 후, 1학년과 2학년이 지나고 3학년이 될 때까지 신형이와 그 아이,그리고 나와의 관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를 공유했고 미래에도 함께하자는 약속으로 껌딱지처럼 붙어 다녀서 누구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금강석보다 단단했다
하지만 금강석보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관계가 3학년에 올라가면서 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애교 많고 사회성이 뛰어난 서민이가 전학을 왔고 그 아이와 옆집에 살게 되면서 미세한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서민이는 특유의 상냥함과 친절로 그 아이에게 접근했고 그 아이도 별로 싫지 않은 듯 어느새 서민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 다른 단짝 신형이는 종희라는 친구와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우리 사이는 머쓱하게 되었다
신형이는 별로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은 친구였지만 학년에서 1,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었다
변명이라고 한다면 나는 키가 작아 내 자리는 앞이었고 신형이와 그 아이의 자리는 중간쯤이라 수업이 끝난 후 그 아이에게 가면 이미 주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틈새에 끼어들기가 거북했다
물론 다른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내게 그 친구들은 특별함, 그 이상이었기에 심술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그 아이를 뺏어 갔다고 생각한 서민이에게는 함께 어울리면서도 무시와 왕따로 보이지 않는 폭력을 사용했다
서민이가 상처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지만 서민이 역시 특유의 친화력으로 만만치 않게 꿋꿋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친구들도 붙임성 좋고 애교 많은 서민이를 싫어했다
뭔가 우리와 다른 민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민이는 우리와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우리는 은근히, 때로는 대놓고 서민이를 밀어내면서도 함께 어울렸다
애증의 관계처럼 묘한?
우리는 그런 어정쩡한 관계로 중학교를 졸업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도 그 아이는 늘 함께였고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던 뱀처럼 길게 이어져 느리게 흐르던 얕은 개울과 그 개울을 가운데 끼고 작은 아이 두명이 나란히 걷기도 힘든 좁은 둑길과 노란 애기똥풀, 코스모스, 엉겅퀴.
사진으로 남겨진 수 많은 이야기.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교실 뒷편의 이름없는 작은 무덤을 친구처럼 옆구리에 끼고 가을 햇살보다 더 투명한 웃음을 터트리며 서로에게 기쁨이고 존재였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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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이와 그 아이는 도시의 같은 고교로 나란히 진학했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으니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1년이 훌쩍 넘은 후였다
1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그리움의 시간이었다
길고 길었던 그리움의 시간들...
그 아이가 손을 흔들며 내게 달려오던 그 모습은 '바람과 함께 사리지다' 의 <비비안 리>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보다 아름다운 형상으로 기억되며 시간을 되돌리지 않아도 지금이라도 화면에서 툭 튀어나올 만큼 강렬한 색채로 가슴 깊이 남아 있다
만남은 공백의 시간만큼의 어색함도 없었고 반갑고 또 반갑고 기쁘고 기쁜 마음에 서로 손을 잡고 흔들며 서로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기에 바빴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에 시간은 지나치게 빨리 흘렀다
그 아이는 내가 어린 시절의 <시>라고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인생 최고의 아름다운 수필이며 수채화라는 것을 알까?
가장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는 그 아이와의 만남, 가난했지만 풍요로웠던 그 시간들.
그 아이에 관해서는 소소한 기억조차도 잊지않고 자동으로 저장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나 그 기억을 꺼내보며 행복한 유년을 보낼수 있었음이 감사하고
내게 그런 추억이 있음을,그 추억을 공유하는 그 아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음이 감사하다.
PS
오랜만에 글을 썼다
가슴에 뒹구는 단어를 꺼내 놓으면 아름다운 수채화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그럴듯한 풍경화 한 점 정도는 그려질 줄 알았는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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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동화같고 봉숭아 꽃물같이 가슴설레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광막한 도시의 끝없이 이어지는 철뚝길에 언제나 시간 맞춰 괴성을 지르며 내달리던 기차소리. 그곳엔 기찻길 옆 오막살이 같은 정서는 전혀 없었다.
사람들의 악다구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외할머니의 한풀이 술주정소리. 그리고 소리없이 숨죽여 울던 내 울음소리가 있을뿐이다.
그런 내가 아릿한 그리움을 가지고 다소나마 서정적인 추억을 떠올리자면, 그 친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친구 없이는 반추 할만한 내 어린시절도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내가 00초교로 전학 간 것은 6학년 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3월이라 아직은 꽤 쌀쌀한 날씨였지만 하늘은 더 할 수 없이 쾌청했고. 그리 크지않은 운동장에는 키큰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가루를 무수히 뿌리고 있었다.
내 마음도 기대와 설레임으로 들떠있었다.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탓에 초등6년 동안 7번을 전학 다녔지만 00초교 만큼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학교도 없었다.
그동안 느꼈던 낯설음과 두려움, 방어본능이 그곳엔 없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까까머리(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에 까무잡잡한 얼굴들이 눈망울만큼은 초롱초롱 빛났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린나이에도 그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중 유난히 눈빛이 강렬하고 끌리는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 친구다.
그 아이와 어떻게 해서 친해졌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이후 우리는 언제나 붙어 다녔다.
학교가 파하고서도 헤어지기 싫어 해가 집으로 꽁무니를 뺄때까지 붙어 있었고, 공휴일엔 그애 없는 시간이 너무도 쓸쓸하고 지루해 그애네 집에 자주 찾아 가곤 했다.
그애네 집은 내가 살던 번화가(?)에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는 골말이라는 마을에 살았는데 산자락을 끼고 아늑하게 자리 잡은 "살구꽃 핀 마을은 언제나 고향같다"던 그런 고향같은 마을이었다.
한번은 그애네 집이 모심는 날이었는데 그 집 부뚜막에 있던 두부조림이 너무 맛있어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의기투합 했고 둘이서 두부조림을 마구 퍼먹고 줄행랑을 놓았다. 지금도 나는 그 두부조림의 구수한 냄새와 모양, 담겨 있던 그릇까지 생생히 기억해낼 수 있는데 그 맛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다.
그친구와의 끈은 중하교까지 이어졌는데 중학교 끝 무렵 어떤 이유에서인지 서로 데면데면 해진채 졸업하고 말았다.
아마도 성격탓이었으리라.
나는 숫기가 없고 한군데만 마음을 쏟는 편집증적인 면이 다분히 있는 반면 그아이는 다정다감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중등에서는 새로운 친구와 새로운 경험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와 중등1학년때 딱 한번 머리끄뎅이를 잡고 싸운적이 있었으니, 이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왜그랬는지 이유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 그 아이 눈에서 불꽃이 튀었는데 나는 아. 사람의 눈에서도 불꽃이 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고 그리고 그아이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후 서먹한채 며칠이 지났지만 그일이 우리를 아주 떼어놓지는 못했다.
그시절을 생각하면 그 친구와 더불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늘 그 끝이 어딘지 궁굼했던 긴긴둑길과 ,다리에서부터 우리집이 세들어 살던 양조장집까지 이어지던 가을 하늘이 낳았을 것이 틀림없는 아기처럼 해맑은코스모스길이다.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 하는 꽃은 코스모스이다.
우리는 그 둑길을 걸으며 , 코스모스 꽃봉우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터뜨리며 무슨 얘기인가를 끝없이 종알거렸다.
어떤 날은 그 아이가 한 밤중에 그 둑길을 걸어 개울을 건너 나를 만나러 왔고 . 나는 또 자다가 일어나 그 아이를 따라 같은 과정을 거쳐 그 아이 집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 적도 있다. 물론 끝없이 종알거리면서.
별이 무지하게 쏟아지는 밤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밤이라는 것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 무모했던 밤을 어찌 잊을까.
그 친구와 나의 놀이는 고무줄 놀이도 아니고 사방치기도 아닌 끝없는 종알거림이었는데 그냥 수다라고 하기엔 나름대로 진지함이 있었다.
서로의 앞날에 대한 소망도 있었고, 서로를 분석하는 탐구도 있었다.
이 끝없는 종알거림은 우리에게는 모두 일급 비밀이었고 또 이수준 높은(?) 대화는 우리 스스로를 다른 아이들과 차별화 시켰다. 세상에 우리만이 공유하는 비밀은 피끓는 우정을 뛰어넘어 형제애 이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또 그 끝없는 종알거림에 간간히 깔깔거리는 명랑함이 있기도했는데 그것은 다 그 아이한테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앞서 말한대로 숫기가 없어서 씩 미소 짓거나 큭큭 소리죽여 웃거나 햇지만 그아이는 언제나 재밌는 얘기를 하고는 유쾌하게 하늘에 깔깔거림을 풍선처럼 날리곤 했다.
그 아이 이름은 000이다.
00아.
너는 내 어린시절의 시야. 너를 잃어버리는 것은 내 어린시절을 잃어버리는 것 다름아니란다.
아무리 삶의 무게에 짓눌려도 우리 끈을 놓지 말고 살자꾸나.
세월이 갈수록 그옛날 너와의 끝없는 종알거림이 그립다. 너의 깔깔거림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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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린시절, 마음이 곱던 시절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가슴이 따듯해지네요.송화님 사진으로 뵌 기억은 있는데 글중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건 아버지와 송화년이다" 이거이 사실인가요? 후덜덜덜..........
ㅎㅎㅎ~제가 키도, 덩치도 작다보니 그런 이유로 얕보이는 것이 자존심 상했습니다 자기 방어 수단으로 깡다구가 키워졌다고 할까요...누구든 시비를 붙이면 죽기 살기로 덤볐으니까요.어찌보면 과잉방어지만 억울하지 않고 얕보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어요.맞붙다가 맞기도 많이 맞았답니다 남자아이들을 이길수가 있나요?나중에는 남자아이들도 쬐그만 저를 건드리지않고 피하더군요ㅋㅋ 지랄같은 송화년이 지겹다라고 했던, 별명이 <3류 여자 건달>인 그 친구는 합기도 3단입니다.ㅎㅎㅎ
일하다 말고 커피 한잔과 이 글을 읽게 되었는데..옛 시절이 그리워 지네요..
비가와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운치 있는 하루 되세요..
<피할수 없음 즐겨라.>참 좋아하는 글입니다.결혼 후 시부모님과 살면서,그리고 51년을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길때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이 시간을 즐기자.라며 나름대로 위로하며 시간을 즐겼지요 긍정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해답이더라구요..나이가 먹는다는건 더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않고 그냥 잿빛 날씨를 즐기렵니다..오늘 날씨 꽤 괜찮치요?파릇하게 올라오는 나뭇잎의 새순이 너무 이쁘네요.
소나기의 황순원 저도 참 좋아하는 우리나라 교과서 소설이야기 인데요. 오랜만에 송화님 글 뵈니 참 반갑고 즐겁습니다...^L^
가슴에 녹이 슬고 무뎌졌는지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 영 어설픕니다.어설픈 소냐님과의 인연도 4년정도 되었지요? 그때의 참신함과 어린사람이 배려심이 깊구나..생각했었지요 어설픈 소냐님과 어설픈 글쟁이의 인연과 만남도 오랜 후 아름다움으로 기억 될 수 있기를...
아이고, 송화님과의 인연도 어느덧 그러하네요. 안 그란해도 요사이 카페내에 '어설픈' 요 글자가 아주 유행입니다. 아무렴, 모두 지나다 보면 '아! 그때 그랬었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 바래봅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깨닫고 그 세중간 모두 돌아오게 됩니다...^L^
귀여운 여깡님...올만입니다....^^*
ㅋ~ 귀여운 여깡으로 보였다니 그나마 다행? 잘 지내지요? 산행도 열심히 하시구요?오늘같은 날은 강이 보이는 주점에서 막걸리에 파전이 최고인데...몇년전 깜짝 벙개로 수석동 매운탕 집에서 그쪽 회원들과 재밌었던 오후가 생각나네요.참 어여쁜 여인들이었는데 지금은 어케 지내시는지...
다시 복귀 하셨네~반가워요~~
사나이님 반가워요~~ ㅎ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러셨군요...가끔씩 왜 글을 쓰지 않느냐는 쪽지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찌나 미안한지 게시판을 아예 없애버리려 했었지요..이제 마음도 많이 편해졌고 시간여유도 생겼으니 보따리 풀어보려구요.코트라베이스님 고마워요~~
제가 자신있게 글을 쓴 계기가 송화님 글을 읽고 나서부터였어요..
반갑고 무지 좋으네요^^
ㅎㅎㅎ어떤 의미로든 제가 자극제가 되었다니 고맙습니다.상큼발랄함으로 거꾸사 분들의 사랑을 받는 쎄시봉님의 글에 전폭적 지지를 합니다.고마워요~
에고^ 이리 내가 무디 답니다^^ 송화님의 글 코너 재개 하심을 진심으로 드립니다^^ 글을 쓴 다는것 더구나 남에게 내 보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껍질을 깨는 수고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창조에 버금 하는 것이구요^^ 거듭 드리며 애독자로 자주 이리 뵈올께요^^ 아자^^
여백님 다녀가셨군요~~이제 더이상의 게으름은 만용인것 같아 조심스레 글을 시작했습니다. 늘 소리없는 사랑과 응원으로 아껴주신 여백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언제나 만년청년으로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요~~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반갑구요,,,좋은글 좋은 느낌갖고 갑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는데 잊지 않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게으름을 털고 기지개를 켜 볼까 하는 마음에...봄날이라고 하기에는 날씨가 미친게 아닌가 의심될만큼 날씨가 으스름합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또 만나요`~
오호...........
이 분 글빨이 환장하게 짱짱^^
건필하세요^^
고맙습니다~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이제 한바탕 춤판을 벌려볼까요? ㅎㅎㅎ
잘 다듬어진 세필을 보는것같이 표현의 정교함을 느낍니다.. 더 와 닿는것은 정서적 공감이구요,, 성격도 저랑 닮은거 같아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그느낌때문일까? 한번 더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정서적 공감..
비슷한 환경의 절대 공감일수도 있겠지요?
오랜 안에 제글의 답글을 붙여보네요
살인적 더위에 탈 나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저는 여름 감기로 빈사상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