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10권 전권을 읽었다.
언젠가부터 문득 내 어린 시절의 환타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서유기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이 프로에서 방영되었던 일본 에니메이션에서 보았던 이미지들이 내 속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부처님 손바닥을 향해 날아가던 근두운을 탄 손오공, 사오정의 해골 목걸이와 표주박으로 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 장면, 용마, 삼장법사의 "오공아~~`" 부르던 여자 같은 목소리, 파리가 되어 숨어드는 손오공의 머리, 관세음보살의 아름다움... 등등.
그리고 이탁오 평전 속에서 이탁오가 명나라 최고의 문학으로 오승은의 서유기를 꼽았던 사실에 조금 더 고무되어 언젠가 오승은의 서유기를 책으로 완독하고 싶다는 바램을 지니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너무 기뻤다.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문학과 지성사에서 번역 출판한 10권짜리 책이다. 지난 가을부터 시작해서 이런 저런 일상이 지나가는 동안 겨울 방학동안 칩거하여 올 봄 학교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3월 말에 완독하였다.
재미있었다. 특히 1,2권 손오공이 천궁을 뒤엎다 오행산 밑에 갖히게 되는 과정, 삼장법사 가족사의 일화, 당태종이 저승을 여행하다 돌아오는 에피소드는 동양적 환타지와 상상력의 극치이며 너무도 맛난 옛날 이야기를 읽는 만족감이 있었다. 그러나 천축을 향한 여행에서 반복되는 고난은 8권째 이르면 좀 지긋지긋해진다. 그 무렵 책에서 손오공도 지긋지긋해 한다. 천축에 도착하여 경을 구하는 장면은 경건하긴 커녕 세속적인 맛이 있어서 의외였다.
무엇보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힘은 등장인물들이 주는 재미이다. 이 책은 삼장법사가 아니라 손오공이 주인공이다. 손오공은 너무 멋졌다. 부모도 없이 돌산에서 저절로 생겨난 손오공은 어떤 권위에도 매이지 않는 반항심과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 명분을 내세우는 삼장법사와 달리 지극한 현실논리로 다양한 꾀를 부리는 융통성과 유연함, 현실감각이 있고 일단 생각한 것은 곧장 호랑이 가죽 치마를 올려 부치고 달려 나가는 실천력과 추진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또한 손오공이 동원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무궁무진하다. 위기에 처했을 때 곧장 천궁으로 용궁으로 서역으로 날아가 협력할 인물들을 찾아내고 동원한다. 무엇보다 손오공은 변화, 성장해가는 인물이다. 자유롭지만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일단 세운 뜻을 어떤 역경 속에서도 관철하고 만다. 살생을 즐기는 습성도 여행의 과정에서 잦아들면서 좌충우돌 천방지축이던 성미가 서서히 성숙해져 간다. 그리고 천지간에 유아독존을 고집하던 튀는 성미가 동행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조화와 공존의 미덕을 배워간다.
손오공은 명나라에 새로이 등장한 신진계급의 상징으로 오승은 시대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구축되었다고 한다. 한편 삼장법사는 명분을 앞세우다 언제나 횡액에 걸려들고, 충직한 손오공을 의심하고 홀대하며 어리석은 저팔계의 꼬임에 넘어가 손오공을 핍박하는 불완전한 인물로 묘사된다. 손오공와 삼장법사는 실질과 명분의 대조를 이루면서 서로를 내치지 않고 보완해나가는 조화의 묘를 완성해 간다. 그럼에도 손오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축이다.
저팔계는 평범한 농민들, 민초들의 세속적, 쾌락지향적, 천진한 본성과 욕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언제나 여색과 먹을 것을 탐하고 틈만 나면 처가로 복귀하고 싶어한다. 손오공과 앙숙이 되어 다투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작품의 유머를 더한다. 손오공과 저팔계의 티격 태격 대화는 촌철살인의 만담으로 이 책이 굉장히 현대적이다라는 느낌을 실어준다. 생생한 인물묘사와 그들 간의 갈등과 그 상황에서 빚어내는 대사는 작가가 얼마나 질박한 유머를 간직한 인물인가를 느끼게 해준다.
사오정은 신중하고 중립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깊은 뜻을 품은 굳은 심지의 인물로 다른 세명의 동행들의 든든한 배경으로 조용히 존재한다.
요괴들의 캐랙터는 다소 실망스럽고 반복스럽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요괴들은 모두 결함을 가진 존재들로 다소 순박한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모두 천상, 용궁, 서역의 고관들의 부하거나 수행인들로 그려지는데 당시 봉건적 질서 속에서 사회적 악의 원인은 모두 계급 질서의 최상위의 지배계급들의 실수나 불찰로 인해 파생된 것이라는 것을 풍자하는 것이라 해석된다.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도 그 악을 창출한 고관들이다. 그들이 요괴들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손오공 일행은 서역으로 가는 길을 정화해 나간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캐랙터가 흥미롭다. 해설에서는 훌륭한 멘토로써의 관세음보살의 역할을 이야기 한다. 성숙하고 현명하고 너그러우며 세상에 대한 비젼을 지니고 있는 선배로서 손오공을 길들이고 충고하고 격려하면서 이들의 여행길을 후원한다.
천축에서 경을 구하는 과정도 우습다. 아난과 가섭이 뇌물을 요구하는데 미수에 그치자, 글자가 없는 무자 경전을 내주어서 도중에 다시 돌아가 '유자진경'을 요구하게 된다. 삼장법사가 아난존자에게 할 수 없이 자금발우를 내어주자 아난은 만족해 한다. "염치없네. 아난 존자,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경을 가지러 온 사람을 털어 먹다니."아난 존자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우거지상을 지으며 얼굴이 벌게졌으나, 놋쇠 바리때만큼은 두 손으로 잔뜩 움켜쥔 채 놓으려 들지 않았다 라고 한다.
서방정토 역시 세속적 욕망이 득실대는 곳으로 그리고 있을 뿐, 완전한 이상향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특히 서유기가 현실 도피적 우화라기 보다는 현실 풍자적, 현실 비판적 이야기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오승은은 재능은 있었으나 관직 생활에 염증을 내고 퇴직한 후 이 책을 집필했으며 불우한 생을 살았던 문사로 기록된다. 그러나 정확이 오승은 본이라 알려져 있는 이 책도 오승은이 저자인지는 불명확하다고 한다.
여전히 공자왈, 주자왈... 지배 이데올로기에 갖힌 답답한 지적 풍토에서 손오공 같은 인물이 창조되었다는 점, 손오공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형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놀랍다. 현실에서 절망한 사람이 가상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념을 펼쳐낸다. 그 가상의 세계에서는 답답한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와 무기력, 패배나 절망은 없다. 진취적이고 낙관적이고 낙천적이고 외롭지 않고 유머가 넘친다.
구전되어 오다 각색되어 정착된 이야기... 이러한 문학의 가치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도 서유기를 읽는 동안, 내 속에 일어났던 부러움은...
나도 이런 소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
이런 역경을 이기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목표가 있다면.
그리고 이런 역경을 아무런 회의 없이 믿음으로 함께 이겨나갈 길동무, 도반들이 있다면...
더구나 그 도반들은 자신들의 작은 실수로 턱없이 억울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불완전한 자신에서 변태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소망에 모든 것을 걸고 우직하게 몸으로 자기 변혁의 고난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런 우직한 신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이들은 가지 각색의 태생이지만 또 하나의 가족이 된다.
이런 신심으로 맺어진 가족들이 있다면...
삶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어둠도 그늘도 없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서유기를 읽는 동안은 행복했다.
그들의 모험과 꿈에 동참하면서 나도 아주 먼길을 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 길을 함께 하면서 나도 변화해 가고 있었다.
그 여정이 끝난지 두어달, 또 현실의 작은 장벽 하나, 내 마음의 작은 장벽 하나 앞에서도 쩔쩔매는 현실로 추락하긴 했지만...
첫댓글 전 10권 완독? 헉!! 대단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