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나는 원고지 몇 권만 챙겨 남해 미조리란 곳으로 갔다. 거기 돌담 사이에 애처럽고 작은 제비꽃이 피어있었다. 민박집은 젊은 새댁이 금순이와 살고있었다. 초등생인 금순이는 작은 제비꽃 같았다. 아빠가 원양어선 선원이라 학교 다녀오면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새댁은 내외한다고 금순이 시켜 밥상 들이밀곤 했다. 등대 옆 둑 넘어 가면 파도가 잔잔한 바다가 있다. 금순이와 나는 거기서 조개 잡고 헤엄쳤다. 세월이 흐른 후 찾아가 금순이를 수소문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책갈피에 끼운 애처러운 제비꽃 추억만 남았다.
불교신문 기자 시절 난초를 배웠다. 쌍계사 백운(白雲)스님은 지리산 춘난을 내게 선물하였고, 중앙포교사 김어수(金魚水) 노시인은 돌에 붙인 풍란의 멋을 가르켜주었다. 원고 청탁차 대가들 집을 들낙거렸다. 파초는 사당동 예술인촌 미당(未堂) 선생댁에서 처음 알았고, 오동꽃은 동승동 이희승 선생 댁 골목에서 처음 보았다. 보라빛 오동꽃 신비한 향기는 어떤 화장품도 미치지 못한다.
장미는 아내 때문에 키웠다. 이화 출신 아내는 교정의 장미를 사랑하며 자랐다. 나는 종로5가, 상일동, 파주, 양재동 등 서울 이름난 장미원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가서 꽃을 골라왔다. 꽃이 핀 걸 본 후 장미를 사오기 때문에 우리집 백장미, 노랑장미, 피스장미는 그 품종이 주변 것과 확연히 달랐다.
우리는 꽃 키울려고 아파트 1층에 살았고, 꽃 가꾸기 명수 미국 타샤튜더 할머니 책을 애지중지 했다. 3월이 면 양재동 꽃시장에 들려 수선화 바이올렡 향기를 즐겼는데, 거기 내 40년 단골 분재집이 있다. 해외여행 가도 캬툴레아 심비디움 같은 양난 구경다녔다.

그러나 그 모든 꽃은 타향의 꽃이다. 언제부턴가 고향꽃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맨 먼저 생각나는 꽃이 봉선화다. 우리 집엔 닭 키우던 닭장이 있고, 말린 닭똥 거름한 봉선화는 키가 어린애 가슴팍에 닿을만치 크고 싱싱했다. 물 뜨러 온 동네 아낙들은 봉선화를 입을 모아 칭송하고, 손톱에 꽃물 들였다. 한번은 여동생이 탐스럽다고 봉선화를 두 팔로 안고 '울밑에 선 봉선화야' 노래 부르다가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무수한 꽃이 꺽어지자, 평소 모광화(母光華)란 불명(佛名)답게 온화하기만 하던 어머님이 동생을 매타작 한 적 있다. 그 상황이 하도 우서워서 우리는 노인 되어도 '울밑에 선 봉선화야' 동생 보면 놀리곤 했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신안동 야산엔 찔레꽃이 고왔다. 찔레는 작은 하얀 꽃과 노란 꽃술이 향기롭다. 척박한 황토 야산에 핀 찔레꽃은 소복한 여인처럼 서럽다. 뻐꾹새 울 때 쯤 허기진 우리는 찔레 새순 꺽어먹고 논바닥 미꾸라지와 고동을 잡곤했다. 눈이 큰 사촌 여동생이 삶은 감자를 소쿠리에 담아 가져오곤 했다. 그 여동생은 지금 진주의 병원장 부인이 되어있다.
내가 좋아한 소녀는 탱자나무 울타리에 쌓인 집에 살았다. 칠암동은 집집마다 울타리에 별처럼 청초한 탱자꽃이 핀다. 은어가 올라오고, 대밭에 칡꽃이 피고, 산에 복숭아꽃 살구꽃 피면, 누군들 가슴 설레지 않으랴. 나는 밤마다 탱자꽃 보다 청순한 소녀 집 주변을 맴돌며 세레나데를 불렀다. 첫사랑은 잠시 떴다 사라지는 무지개인가. 지금도 칠암동에 하얀 탱자꽃 피겠지만, 그의 소식은 알 수 없다.
T.S. 엘리오트의 '황무지'란 시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로 시작된다. 4월은 잔인한 달인지 모른다. 시나브로 낙화로 분분히 떨어지는 꽃잎 보면 나 역시 추억과 욕망이 사정없이 뒤섞인다. 그때 나는 유년 시절 봉숭아꽃 찔레꽃 탱자꽃이 핀 추억의 꽃길로 들어선다. 그 오솔길에는 세월 속에 흘러간 사람, 그리운 사람이 꽃이 되어 나타난다. 꽃은 말이 없지만, 멀리서 들리는 음악처럼 어머님의 목소리 희미하게 들린다. 달빛 속 실루엩처럼 소녀의 모습 희미하게 보인다. 이 얼마나 슬프고 감사한 일인가. 사람은 만날 수 없지만, 해마다 마음 속에 비단처럼 고운 꽃길은 다시 열린다는 사실이.
(문학시대 2010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