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산의 저수지 황등제
벽골제 · 눌제와 더불어 국중삼호라 일컫던 황등제(黃登堤)는 전라북도 익산군 황등면에 있던 것으로, 제방 길이 1,300m의 흙댐이었다. 현재는 이 제방이 황등∼이리간 23번 국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축조연대는 알 길이 없으며, 이조 말엽까지 정확한 폐제로 되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초기에 개축하여 3,343ha에 물을 대다가, 1935년 완주군 운천면에 경천(庚川)저수지를 신설하면서부터 황등제의 내부는 모두 개답되었다.
[참고문헌]
◈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增補文獻備考, 李朝水利史硏究(李光麟, 韓國硏究院, 1961)
◈ 韓國農業技術史(韓國農業技術史發刊委員會, 1983)
허리다리 위로 고향을 오가면서 바라보는 요교호는 그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이 요교호는 황등제라고 불린 기록이 확실히 나타난다. 이 얘기는 전에는 이 곳이 저수지였다는 것 또한 확실하게 해 준다. 지금은 탑천이 흐르고, 그 중간 허리춤에 있는 허리다리에 서서 내다볼라치면, 마치 다리에다가 멋있는 물소 뿔을 대어 놓은 것처럼 양쪽 두개의 천으로 갈린다. 아마도 이 두 갈래의 물길 안쪽이 모두 황등제의 저수지였을 것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 황등제는 북쪽의 황등산 남측단과, 남쪽의 도치산 북측단을 가로질러 막고, 그 보의 동쪽으로는 물이 고여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등제이다. 이 제방은 둑길이 1.3km, 둘레 10km 였다는 기록과 맞아 들어간다. 현재도 황등산의 남측 끝 봉우리 청금산과 도치산 사이의 들판 직선거리가 1.5km 에 달하니, 침식작용을 감안하면 옛날에는 약간 더 좁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기록에서 보의 길이가 90 보 약 110m 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혹시 수문 폭을 잘못 말하지는 않았는지 생각이 든다. 아니면 900 보의 잘못된 기록이 아닐지 모르겠다. 이것도 어쩌면 현재의 탑천 폭과 비교하여 볼 때 황등제의 수문을 강폭만큼 만들었다면 100 여m 라는 것과 수치가 일치하게 된다.
이 황등제의 북쪽으로는 삼기면, 동쪽으로는 삼성동, 서쪽으로는 신용동에까지 이르러 물이 고여 있을 만한 지형이니 대단히 큰 저수지였다고 여겨진다. 이 제의 남쪽을 호남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 황등제가 전라도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그럴법하다. 이렇게 큰 저수지였다면 아침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비가 올 때면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얘기가 심심찮게 등장하였을 것이다. 가운데 깊은 곳에는 사람이 범접하지 못하니 그곳에 바로 용왕이 산다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메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황등제에 대한 모든 기록들이 상세하게 남아있지 못하여 추정만 할 뿐이다. 그 이유는 백제시대에 세워지고 고려시대에 폐지되었다고 하니 당시 기록이 소홀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곡창지대의 저수지가 폐지된 사유는, 인근 상류에 설치된 경천저수지에 물을 저장하면서부터 물이 부족하였지만 거기다가 별도로 물을 받아 둘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후 황등제는 바닥에 많은 퇴적물이 쌓이고 지금은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당시 벽골제, 눌제와 더불어 3대 저수지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참고로 벽골제는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일대에 백제 비류왕 27년 서기 330년에 창설되고 둑길이 3.3km, 또는 1,800보 약 3.24 km 라고 하며, 조선 태종 때 15년 간 보수한 기록도 갖고 있다. 또한 눌제는 정읍시 고부면에 있으며 백제 때 창건되고, 1873년 조선 고종 10년에 폐지된 것으로 전한다. 이 눌제의 둑 길이는 1.5km, 둘레는 16km 였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농경시대의 국내 3대 저수지는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이다. 그런데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13년 서기 552년에 설치되었다는 설과, 고려 고종 38년 서기 1250 년경에 설치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 시대별로 최고 최대의 저수지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제각각 일 수밖에 없다. 이 의림지의 서쪽인 충청도를 호서라고 불렀다는 설도 그럴 듯하다.
반면 밀양의 수산제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927 일대로 삼한시대에 세워졌다는 설이 있으니 오래된 제방에 속한다. 그 크기는 둑길이 728보로 약 917m 이며, 둘레는 8km 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전하는 저수지는 홍성군의 합덕제, 상주시의 공검제, 영천시의 청제, 수원의 서호,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연백군의 남대지가 유명하다. 이것을 보더라도 남서쪽 지방에서 수도작이 더 발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3대 저수지는 벽골제, 합덕제, 남대지였다는 기록이 우세하니 둑을 설치 후 잘 사용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시의 토목기술이 미약했던 탓으로 둑이 잘 무너지고, 다시 보수하며, 때로는 합덕제처럼 위치를 이동하여 둑을 쌓았다는 것을 기록에서 찾을수 있는 경우도 있다.
지금 허리다리에서 바라보면 황등제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없다. 그러나 마음속의 들판에는 넓은 물결이 출렁인다. 한때는 황등 서수 임피 대야 등 주요 평야 지대를 모두 축여 주던 물이 아니었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마운 물이다.
세계 년 평균 강수량은 750mm 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강수량은 1,298mm 로 많은 편이다. 하지만 국토가 좁고 대부분이 산지이며 집중호우가 내려 가뭄과 홍수가 되풀이되던 시절에, 보를 쌓고 그 물을 가두어 보관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문헌에 남아있는 저수지의 역사는 이집트 나일강에서 기원 전 2900년에 설치된 석괴구조의 댐이라고 하니 우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중인 시설만 해도 12,685 개나 되며, 국내 총 보유 시설 수는 68,018 개로 현재의 논농사에는 거의 부족함이 없다.
이제 이 황등제가 복원되고 다시 허리다리까지 물이 차서 넘실대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요즈음은 크고 작은 농수로를 통하여 강제로 용수를 보내며, 자연 상태의 수압으로 흘러가는 물로는 농업용수 공급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황등제는 이렇게 내 고장이 옛부터 이렇게 과학적으로 다듬어져 내려 온 마을임을 아는 중요한 역사이다.
펌>http://blog.daum.net/chang-am/2901905
[우리나라 저수지]
◈ 三國史記, 朝鮮王朝實錄, 增補文獻備考, 李朝水利史硏究(李光麟, 韓國硏究院, 1961)
◈ 韓國農業技術史(韓國農業技術史發刊委員會, 1983)
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물의 과다 또는 과소를 조절하는 인공적 수리시설의 한 종류이다. 우리나라의 수리시설은 벼농사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되어왔다. 벼농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 6년(A.D. 33)에 “정월에 영을 내려 남주군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春正月下令 國南州郡 始作稻田).”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본기 일성왕 11년(A.D. 144)에 “제방을 보수하고 널리 농지를 개간하였다(修完堤防 廣闢田野).”는 기록으로 보아 수도작이 널리 보급되면서 2세기에 들어와 수리시설의 인공적 축조가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저수지의 본격적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A.D. 330)에 “비로소 벽골지를 축조하였으니 제방의 길이 1,800보였다(始開碧骨池 岸長千八百步).”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벽골제의 위치는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군 월촌면과 부량면의 면계에 위치하고 있어 축조 당시는 백제의 영역이었고, 연대는 330년(비류왕 27)이었을 것이나 《삼국사기》가 신라의 기년을 기준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신라본기에 삽입된 것으로 믿어진다. 벽골제의 규모는 제방길이 3,245m, 제방기부(基部)의 너비 21m, 제방상부의 너비 10m, 제방 높이 5.7m, 저수면적 37㎢로 알려진 큰 규모의 저수지로, 국가적 공사가 아니고는 축조할 수 없는 저수지이다. 벽골제는 통일신라 때인 790년(원성왕 6)에 전주 등 7개 고을의 백성을 징발하여 보수한 것을 비롯하여 고려 현종 · 인종, 조선 태종 때에 보수를 거듭하였으나 세종 때에 결괴된 뒤 보수하지 않은 채 개답(開畓)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1980년에 정화한 장생거(長生渠)와 수문석주, 경장거(經藏渠), 반석(盤石)과 선돌〔立石〕, 벽골제비 (碧骨堤碑) 등이 있으며, 1967년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세운 벽골제사적비(碧骨堤事蹟碑) 등이 있다.
국가적 규모의 큰 저수지는 벽골제 이후 여러 곳에 축조되었을 것이나, 문헌상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861년(경문왕 1)에 축조된 충청북도 제천읍의 의림지(義林池)이다. 의림지는 고을을 다스리던 박순(朴淳)이 축조하고 그의 아호 의림(義林)을 따서 의림지라 이름한 것이나, 일설에는 540년(진흥왕 1)에 악사 우륵(于勒)이 유지(柳池)라 불리던 소규모 저수지를 개축한 것이 의림지의 시원이라는 설도 있다. 의림지의 규모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방의 길이 530척으로 400결(結)의 논에 물을 댈 수 있다 하였고, 《대동지지 大東地志》에는 둘레가 5리라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도 물의 깊이가 12m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1194년(명종 24) 개축할 때에 발견된 축조 당시의 기초공사를 보면, 제방 내부의 기초가 흙을 옹기 굽듯이 3층으로 다져 쌓아 누수를 막고, 배수구의 수문은 수톤의 거석을 쌓아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거석에는 ‘朴義林’이라는 음각글자가 있었다 한다. 1279년(충렬왕 5) 김방경(金方慶)이, 세종조에는 정인지(鄭麟趾)가 개축하였고, 1919년에는 지방인사 이종진(李鍾震)의 발기로 대개축이 거듭되어 현재도 훌륭한 용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전라북도 정주시 고부에 있던 눌제(訥堤)는 약 1,000년전 견훤(甄萱)의 축조라 하나 분명하지 않다. 제방의 길이 1,200m, 둘레 40리의 꽤 큰 저수지로, 1418년(세종 1) 유희열(柳希烈)과 전라감사가 약 1만500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개축하였으나 다음해 대홍수로 결괴되어 폐지되었다가, 1916년 고부수리조합(古阜水利組合)이 창설되면서 제방의 중간에 갑문(閘門)을 설치하여 겨울철에만 물을 가두는 최초의 저수답(貯水畓)으로 쓰여져왔다. 벽골제 · 눌제와 더불어 국중삼호라 일컫던 황등제(黃登堤)는 전라북도 익산군 황등면에 있던 것으로, 제방 길이 1,300m의 흙댐이었다. 현재는 이 제방이 황등∼이리간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축조연대는 알 길이 없으며, 이조 말엽까지 정확한 폐제로 되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초기에 개축하여 3,343ha에 물을 대다가, 1935년 완주군 운천면에 경천(庚川)저수지를 신설하면서부터 황등제의 내부는 모두 개답되었다.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면에 있던 합덕제(合德堤)는 《성종실록》에 ‘합덕제전조시축(合德堤前朝始築)’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이전에 축조된 오래된 저수지로 믿어진다. 규모는 《성종실록》에 "길이 2,700여척으로 7읍에 물을 댔다."는 것으로 보아 큰 저수지였으며, 성종초에 개축하였으나 1481년(성종 12) 왕의 부실 장숙용(張淑容)에게 활급되면서 폐제되고 내부는 개답되었다. 그러나 1778년(정조 2) 인근의 주민 8,053명을 동원하여 결괴된 제방 2개처를 수축하고, 1792년 6,500명을 다시 동원하여 재수축하여 용수원으로 이용되어오다가, 현재의 예당농지개량조합에 흡수되었다.
황해도 연안의 남대지(南大池)도 고려 문종 때 비로소 기록 《문헌비고》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저수지이기는 하나 언제 축조된 것인지 상고할 길이 없다. 둘레가 20리였다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상당한 저수지였으나, 《성종실록》에 세조의 동생 영응대군(永膺大君)과 권람(權擥)이 모경(冒耕)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일시 폐제되었던 것 같다. 그뒤 다시 복구되어 저수지로 활용되었으나, 연산군 때 에 장녹수(張綠水)가 또다시 모경한 뒤 완전 폐제되는 곡절을 겪었다. 《증보문헌비고》에 1759년(영조 35) 육상궁(毓詳宮)에서 제방 내부를 개답하고자 하다가 중지한 기록이 있음을 보면 장녹수가 사약을 받으면서 다시 저수지로 활용된 듯하다.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면에 있는 공검지(恭儉池)는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 때 최빈(崔빈)이 개축하였다고 한 사실에 비추어 고려조 때 축조된 것으로 믿어진다. 제방의 길이 860보, 둘레 1만6647척이었다 하니 이 저수지도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수산제(守山堤)는 삼한시대의 저수지라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동국여지승람》에 세조 때 둔전(屯田)으로 개답되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500여년 전에 이미 없어진 저수지이다. 다만, 그 둘레가 20리였다 하니, 그 규모는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시내에 있었던 경양지(景陽池)는 《광산읍지》에 세종 때 김방(金倣)이라는 부자가 자기 농지에 물을 대고자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양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저수지라 볼 수 있다. 제방의 길이는 300m 정도이고 저수지의 면적은 약 40 정도였다 하니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저수지로 수원시 서둔동에 있는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1799년(정조 23) 정조가 도성을 수원으로 옮길 계획으로 수원성(水原城)을 쌓으면서 내탕금 3만냥을 들여서 축조한 저수지이다. 1905년 현재 농촌진흥청을 이곳에 설치하면서 현재까지 시험답과 인근논의 관개용으로 쓰이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저수지를 살펴보았으나 공검지 · 의림지 · 수산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반도의 서해안 쪽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서부가 동부보다 수도작이 발달해왔음을 알 수 있다. 중소규모의 저수지들은 예로부터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하였을 것이나, 근대적인 토목기술과 기계를 도입하여 근대적 수리시설이 시작된 것은 1906년 4월에 탁지부령(度支部令) 제3호로 시행된 〈수리조합조례 水利組合條例〉가 발표되면서 제도적인 윤곽이 비로소 잡히기 시작하였다. 1910년 당시의 수리조합수는 6개 조합이었고, 1909년 전국의 대소저수지는 모두 2,781개였다. 이에서 수리혜택을 본 몽리면적은 7,980ha로서 1저수지당 평균몽리면적은 겨우 2.9ha에 불과하였다. 일제는 식민지수탈정책의 하나로 미곡증산을 기하고자 수리시설을 계속 확장하여 1935년에는 8,456개로 증가되고, 몽리면적도 모두 23만4000ha에 이르러 1저수지당 평균 27.7의 몽리면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저수지에 의한 몽리면적은 보에 의한 몽리면적 51만2000ha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광복 후 정부는 쌀증산을 기하고자 농업용수 개발에 집중적인 투자를 계속하면서 아산호 · 남양호 · 삽교호 · 대호 · 담양호 · 장성호 · 영산호 등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