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퐁 커피
이현원
서울 어느 성당에서 구역장을 맡을 때 일이다. 구역 신자 중에서 믿음이 독실한 P형제의 사무실을 구역 교우들과 함께 방문한 일이 있다. 그 형제는 3년 동안 붓펜 316자루를 소비하며 성경을 전부 필사했고, 신부님으로부터 칭찬과 축복을 받았다. 성경 필사본을 그의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으므로 격려를 해줄 겸, 구역 교우들이 모범 사례를본받기 위해서 갔던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가 성경 필사본을 바라본 일행은 우선 많은 양에 놀랐다. 성경 전량의 필사본 7권의 부피가, 모조 전지의 절반 정도 크기에 높이는 자그마치1미터 가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루도 쉬지 않고 몇 시간씩 필사하여 3년 만에 마치었다니, 그 형제의 신앙심과 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파에 둘러앉아 일행 8명이 주인공에 대한 칭송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P형제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한다고 물을 끓이고 부산을 떨었다. 조금 지나 각 교우 앞에 커피잔이 하나씩 놓이고 커피를 채웠다. 설탕을 넣지 않은 블랙커피였다. 먼저 커피를 맛본 형제가 설탕을 주문했다. 주인은 얼른 설탕시럽 병을 가져왔다. 일행이 돌려가며 서너 차례 펌프질해서 찻잔에 설탕물을넣었다. 한두 모금씩 커피를 마신 형제들이 있었고, 내가 시럽 설탕을 넣고 커피를 한 모금 삼키는 순간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목을 톡 쏘면서 맛이 이상했다. 다시 한 모금 마셨으나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설탕 병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외국제의 요란한 상표가 붙어있어서 얼핏 보아무슨 병인지 쉽게 알 수가 없었다. P형제가 외국을 자주 다니니 외국 설탕시럽은 이런 것도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이번에는 구역질이 났다. 할 수 없이 난 주인을 불렀다.
“형제님, 이것 설탕 시럽맞아요?” 그가 잽싸게 달려와서 문제의 설탕 병을 확인한다. 그러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다.
“이건 설탕이 아닌데, 이걸 어쩌나......”라고 목소리가 기어가며 쩔쩔매는 게 아닌가.
다른 교우들도 눈이 휘둥그레지며 서로 얼굴을 쳐다본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구역질을 참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교우는 블랙으로 먹으려 했는데 왜 설탕을 넣어줬느냐며 옆자리 동료에게 핀잔을 주기도 한다.
P형제는 그 시럽이 무슨 병이라고 차마 말하지 안 했지만, 알고 보니 주방 세제였다. 주인은 무안해하며 커피잔을 도로 가져갔다. 그런 후, 커피를 다시 끓이고 이번엔 제대로 된 설탕시럽을 가져왔다. 우리 일행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커피를 맛있게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세상에 별 경험도 다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외모만 중요시하고 겉만 가꾸니 속까지 잘 씻으라는 계시 같았다. 설탕 시럽의 실수로 인한 우발적 사건이 오히려 구역 교우들에게 특별한 체험을 시켜준 셈이다.
주방 세제의 쓴맛을 길게 남기고 P형제에게 축복을 빌며 사무실을 나왔다. 늦은 오후 땡볕에 그림자가 건물 벽에 부딪혀꼬부라져 보인다. 속까지 씻어 단정한 모양인데도 그림자가 구부러진 건 순전히 건물 탓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거울에 비춰보든지그림자가 굽혀지지 않도록 바로 잡아보겠다며 속으로 되뇌었다.
‘하느님, 저희들 속까지 잘 씻었습니다’
첫댓글 속까지 잘 세척 하셨군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망가겠어요 ㅎ ㅎ
드문 경험을 하셨습니다. 거품도 났을텐데 몰랐나보네요
다들 무던하십니다. 먼저 마셔본 사람이 빨리 얘기해야 다른 사람이 고생을 안할걸
모두 교양이 높아서 하하
설사는 안하셨나요?
에피소드 치곤 오히려 교훈 얻었으니
성실한 교인들 이십니다
안개비 말씀하신 거품이 조금 났는데, 외국 시럽은 설탕 + 우유(프림)가 포한된줄 알았죠.
전연 세제라고는 생각못했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