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해 배 재배에 성공한
나주의 풍운아 정형태씨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무공해 배 생산에 성공한 정형태씨(77세)와 마주 앉아 그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도곤 어려인라. 이후랑 배도 말도 말고 밭갈이나 하리라."는 옛 시조가 머리를 스쳤다
그는 우리나라 유일의 국립해양대학 제2기생으로 어려운 시기에 海洋立國의 기치 아래 온갖 고난을 겪어온 사람이다. 1770년대부터 선장경력을 가진 사람 가운데서 기능과 덕망을 겸비한 분이 선임되는 도선사 즉 파일로트가 되어 30여 년간 馬山항을 지켰다.
오랜 세월 풍랑과 싸워온 해양인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만년에 고향 땅에서 조용히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한 오랜 소망이 이루어져 40여 년의 바다생활을 끝내게 된 90년도 초, 고향 땅 羅州에 3만여 평의 배나무 과수원을 마련하게 되었다.
3만평이라는 과수원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뿐 아니라 원예 가운데 배농사 만큼 손이 많이 필요한 농사도 없다.
가지치기, 열매솎기, 종이봉지 싸매기, 까치와의 전쟁 등은 고사하고 한 해 27~30회 농약을 살포해야만 수확이 가능해지니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난 수십 년간 많은 농가에서 해온 관행농법(慣行農法)이라는 것이 통상 썩은 계분(鷄糞) 등 가축분뇨와 화학비료의 시비, 제초제에 의한 잡초 제거, 병충해의 다발(多發)로 인한 20~30회 농약살포를 하지 않으면 수확다운 수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농업이 환경을 정화하는 기능은커녕 무작정 뿌린 농약과 제초제 그리고 화학비료가 토양을 오염시키고 상당부분이 빗물 따라 강으로, 바다로 흘러들어 환경을 망쳐 놓은 꼴이 되었다. 농약살포 자체가 농민에게 고역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 그지없다. 아울러 소비자에게도 불안한 먹거리를 공급하게 된다.
관행농법의 폐해를 헤치며
사실 지난 수십 년간 농약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 중독증세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사람, 농약으로 인한 치유불능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소비자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최근 발표에 의하면 농약과 제초제의 잔류독성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다이옥신 등 환경호르몬이 더욱 심각하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높은 파도를 헤치며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게도 소망해 온 푸른 초원생활도 예기치 못한 위험과 고통이 도사리고 있었다.
60고개를 넘어서 뛰어든 농업초년생으로서 초기에는 남들이 하는 대로 한여름에 비옷 입고 마스크하고, 장화 신고, 고무장갑 끼고 농약, 제초제 뿌리며 악취 나는 퇴비(가축분뇨)와 화학비료도 되도록 많이 장만하여 시비(施肥)하였다. 화학비료와 썩은 퇴비가 병충해를 불러들이고 토양과 환경을 오염시키는 원인임을 미쳐 몰랐다. 그야말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재래식 농업에 매달려 살아왔던 셈이다.
이렇게 하여 한두 해가 지난 후 아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인근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예사롭지 않아 서울의 의과대학 병원을 찾아가 정밀진단을 받았다. 그 결과 간장에 암(癌)으로 추정되는 제법 큰 종양(7×6cm)이 있다는 것이었다. 70평생을 살면서 이처럼 심한 절망감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넓고 적막한 과수원 한가운데 두 늙은 내외가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한쪽이 쓰러진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의 파멸을 뜻한다.
뽀족한 치료법이 없음을 전해듣고 홧김에 S호텔 특실을 빌리고 먹지도 못하는 요리를 시켰다. 또한 값비싼 승용차를 빌려 서울 근교를 돌아다녔다. 그것도 2~3일로 끝났다. 아내에겐 고역일 뿐이었다.
도리 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말 그대로 병은 한 가지인데 약은 백 가지였다. 어느 것 하나 확신을 주는 것이 없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의 절망사태였다.
수소문 끝에 일본 나고야(鳴鼓實) 근교에서 동서의료(東西醫療)와 민간(民間)요법을 총동원하는 이른바 전체의료(全體醫療)를 한다는 병원을 알아내었다.
전체의료와의 만남
기진한 아내를 이끌고 찾아가 입원시켰다. 50~60명이 입원해 있는데 환자에 도움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다.
특징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농약, 무제초제의 유기농산물과 청정해역에서 채취한 해초, 된장국과 현미밥(죽)이 주된 식사 메뉴였다. 병원장의 이야기는 농약, 제초제, 방부제, 인스탄트식품 등 비자연적인 물질이 몸에 축적되어 종국에는 암이나 갖가지 성인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유해물질의 흡수나 취식을 끝내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라는 것이었다.
둘째, 죽이라도 서른 번 이상 씹어서 삼키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오래 씹을수록 침 속의 효소작용으로 소화를 도우며 항산화물질까지 생성되어 건강을 되찾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시를 어기면 바로 퇴원명령이 떨어진다고 했다.
셋째, 병염(病念)을 떨쳐버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려는 각종 원내프로그램이 이채로웠다. 병실마다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넷째, EM-X라는 음료수를 병실마다 두세 병씩 비치해 두고 특별히 양을 제한하지 않고 마시라는 것이었다. 간혹 1백 명 중 1명 정도로 설사나 가벼운 두통이 생기는 수가 있는데 그 때는 양을 약간 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밖에 온수찜질 등 여러 가지 보조요법을 하고 있었다.
한달 가량 입원치료를 받는 동안 다소간 기력을 차린 아내는 집에 돌아가도 이런 치료는 할 수 있다며 집요하게 원하는지라 결국 귀가(歸嫁)하게 되었다.
무농약 유기재배(有機栽培)를 위한 텃밭을 만들고 작물이 거두어질 때까지 산과 들에서 산나물, 들나물을 캐어 날랐다 청정농가에서 현미도 구해왔다. 소리가 좋다는 전축도 사고 아내가 좋아하는 레코드판과 테이프도 한 보따리 사왔다.
퇴윈할 때 구해온 EM-X가 떨어지기 전에 확보해 두려고 생산지 오키나와까지 찾아가 몇 상자를 구해왔다.
지금은 일본 국내에 EM-X를 취급하는 대리점이 수없이 많이 있으나 그 때는 몇몇 병원에만 시험적으로 공급하고 있었으므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능한 한 병원의 지시대로 생활해 나갔으며 시간 나는 대로 아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돌려놓고 억지로 일으켜 함께 춤을 추었다.
남은 일은 농사를 그만두든지 철두철미하게 무농약 무제초제 유기농업을 하는 것이었다.
EM유기농법의 채택
병원지시대로 유기농산물과 해산물을 구해서 오래 씹어 먹고, EM-X 마시고 즐겁게 보낸다 해도 살고 있는 집을 감싸고 있는 배 밭에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고 썩은 퇴비, 화학비료 시비를 계속한다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굳어갔다. EM(Effectiv Micro-organisms)이라는 유용미생물을 쌀겨 등 유기물과 가축분뇨에 뿌려서 악취가나지 않도록 발효시킨 퇴비를 시비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EM활성액. 청초액비, EM5호 등을 자가 제조하여 어렵잖게 익혀 관수도 하고 살포도 해주는 것이 모두이다.
잡초도 제초제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지간히 자라도록 방치해 두었다가 1m 가량 자라면 예초기로 적당히 잘라주고 그 위에 EM활성액을 희석하여 살포하면 썩지 않고 발효하면서 삭아 토양을 비옥하게 하여 준다는 지극히 간단한 농법이다.
EM활성액이나 EM7호는 주 1회 예방적으로 살포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또한 20회 이상 살포해야하는 경우가 있으나 마스크나 손장갑도 필요없으며 도리어 기분이 상쾌해지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므로 소형수제분무기(S.S.기)를 타고 향긋한 과수나무 아래를 왔다 갔다 하면 되는 것이니 농약 뿌리기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EM농업을 철저히 하고 무농약 농산물을 먹고 즐겁게 생활하며 EM-X를 마신 덕분인지 70세 전에 중병을 얻은 아내는 76세가 된 지금도 젊은이 못지 앉은 건강으로 농사일을 돕고 있다.
오랜동안 관행농법을 해온 이에게는 선뜻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고 부담감을 가질지 모르나 자신과 가족의 건강, 소비자와 환경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 루속히 전환하기를 권하고 싶다고 강조한다.
WTO시대를 맞아 가격으로 경쟁하기는 어렵다. 건강을 중시하는 소비자, 한번 맛을 보면 잊지 못하는 농산물이 바로 EM농산물임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3만여 평에서 생산되는 우리 과수원의 배와 몇몇 동료 유기농업회원의 생산물은 서울의 유명 백화점에서 미리 계약하여 전량 가져가고 있으며 가격도 관행 농업보다 1.5배~2배 가량 받고 있다면서 환히 웃었다.
지난 구정에도 부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하였으나 물량이 없어 보내주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40여 년의 해상생활 기간 중 그리던 조용한 초원 생활(초원생활)이 이젠 EM으로 가능해졌으며 이렇게 되면 내 젊은 시절 잉어가 뛰놀던 영산강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푸른 하늘을 밝은 얼굴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