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오늘 5시에도 검사를 하고 의사가 괜찮다고 했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이게 뭐예요. 정말 미워 죽겠어요! 나는 어떻게 살라고!......”
처남댁이 요양병원 1인 병실에 안치된 처남의 굳어진 얼굴을 어루만지며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
다. 청주에 사는 셋째 처제와 동서, 그리고 대전에서 달려온 우리 집사람, 두처제와 동서들의 울음이 병
실을 무겁게 덮었습니다. 오십년을 넘도록 함께한 남펀, 오빠를 77세에 떠나보내는 일이니 얼마나 슬픔
이 크겠습니까?
자녀들이 도착해서 아버지 얼굴을 보게 하려고 기다리는 병실은 절규로 가득찼습니다.
조금 있자 한 부인이 들어오더니 처남의 댁을 붙들고 울음을 떠뜨렸습니다. 같은 병실에 있었던 암투병
중인 처남의 절친한 친구의 부인이라고 신권사가 알려주었습니다. 서울에서 큰 딸과 사위, 손녀들이 오
고, 이어서 큰아들, 작은 아들식구가 도착하여 한바탕 눈물바다를 뛰운 후에 장례식장으로 운구하였습니
다.
지난 5월7일 화요일 오전 6시에 별세했다는 소식을 집사람으로부터 핸드폰으로 들었습니다. 이날은 탁
구선교회 훈련이 있는 날이라 집에서 8시 버스로 출발하여 가는 도중이라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우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 차로 11시에 청주 요양병원으로 출발.12시반에 도착하자 일어난 일들입니
다.
한 주일 전에 우리 집사람을 앞세워 처제들이 처남을 문병하고 꼭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겠다고 했었습니
다. 4 영리를 요약하여 오빠에게 마지막으로 영접기도를 하게 하고 아멘으로 화답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복수도 차 있지만 5월16일에 서울 병원으로 치료 예약이 되었다고 했으며, 죽도 먹고 해서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처남은 초등학생 때에 집 담 옆에 있는 교회에 나갔는데, 친구가 새신
발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을 때에 아무런 대책도 해주지 않았던 것과, 아이들 간에 싸움질 하는 것에 상처
를 받아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4명의 여동생들은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시집가서
시댁 식구들을 다 구원시킨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완고하던 장인,장모를 구원받도록 했지만 오빠만
은 복음을 받아드리지 못하자 오빠와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늘 했던 터였습니다.
성모병원 장례식장으로 운구를 하고 처남의 댁과 자녀들이 고모들과 상의를 하더니 고모들에게 모든 절
차를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처녀 때부터 카톨릭을 다녔던 처남의 댁이 자기 주장대로 하지 않아서 쉽게
교회장으로 할 것을 합의하고 당일 오후 4시에 셋째 처제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을 모시고 가족위로 예
배를 드렸습니다. 장례지도사가 유교식으로 하려고 지방을 써서 제단위에 가져다 놓은 것을 보고 집사람
이 ‘십자가 표시와 고 00성도’라고 다시 써서 올려놓게하자 장례지도사는 기독교 식으로 제단을 새로 꾸
미었습니다.
이날 밤에 서울 큰 딸과 사위 다니는 교회에서 버스로 성도들이와서 위로예배를 드렸고 8일에는 막내딸
과 사위가 싱가폴에서 귀국하자 11시에 입관예배를 드렸습니다.
5.9일 오전 6시 20분 발인예배.드리고 , 08시 목련공원 화장장으로 신록이 꽃처럼 피어나고, 가로수로
길 양편에 심은 이팝 꽃이 하얗게 내린 백설처럼 소복하게 만개하여 마치 천국길을 가는듯 했습니다. 9
시 반에 목련공원 추모관에 안치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남은 지방의 알만한 인사요 자식들도 잘되어서
은혜롭게 장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영원한 물줄기는 항상 두 세계를 뚫고 나이와는 상관없이 모두 다 휩쓸어 가며 두 세계에서 이
들이 소리를 압도한다. “
-<두이노의 비가(悲歌)>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있는 글입니다.
생의 긍정과 죽음의 긍정이 일치되어 나타납니다. 결국 생과 사의 두 영역에서 한 없이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의식의 비가가 전체를 뚫고 흐른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히 9:27)“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
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아오니(시 90:3)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요13:
1) 주님을 믿고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
다. (계 14:13) 그러므로 죽음은 마지막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늦게라도 복음을 받
아드린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진작에 영접하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통로이자, 먼저 천국에 가 있는 사랑하는 사
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과 화해하고 삶을 아름답게 마치라는 것이 떠나보내는 이들
이 반드시 해야 할 일 일것입니다. 그리고 처남을 보내며 교회생활에서 전도도 중요한 일이지만 성도를
실족하게 하는 언행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다짐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되도록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삶
의 과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통로이자, 먼저 천국에 가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오히려 기대할
만한 것이 된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문 처남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해봅니다..(2019.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