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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처소와 죄악을 맞바꾸기
그리고 쇠사슬
(겔 7:15-22) 이스라엘이 받는 벌 “15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을 것이요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에 망할 것이며 16 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때문에 골짜기의 비둘기들처럼 슬피 울 것이며 17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18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 19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 20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말미암아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만들었은즉 내가 그것을 그들에게 오물이 되게 하여 21 타국인의 손에 넘겨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넘겨 그들이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22 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포악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 23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24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들을 데려와서 그들이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강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들의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 25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26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 27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비로소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 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음
(겔 7:27) 『왕은 통곡하고, 지도자들은 절망에 빠지고, 이 땅의 백성은 무서워서 벌벌 떨 것이다.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이 심판받아야 하는 그대로 그들을 심판하겠다.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새번역]
(겔 7:27) 『왕은 통곡하고 수령은 실망 낙담하고, 지주들은 손이 떨려 어쩔 줄을 모르게 되리라. 내가 그들을 그 행실대로 다루고 버릇대로 심판하리라. 그제야 사람들은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 [공동번역]
(겔 7:27) 『왕이 통곡할 것이며 신하들은 절망의 옷을 입으며, 백성들의 손은 두려움에 떨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대로 내가 그들을 심판하겠으며 그들이 한 행위대로 갚을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은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쉬운성경]
(겔 7:27) 『왕은 애곡하고 통치자는 황폐함으로 옷 입으며 그 땅의 백성의 손들은 괴로움을 당하리라. 내가 그들의 길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그들의 죄과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흠정역]
(겔 7:27) 『왕은 애통하고 대신들은 절망에 빠질 것이며 백성들은 두려워서 떨 것이다. 내가 그들이 행한 대로 그들을 벌하고 그들이 심판하는 기준에 따라 그들을 심판할 것이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다.'』 [현대인성경]
쉽게 말해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교인이든 교인 아니든 다들 의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인데 이게 말이 되거든요.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종교심도 안 통하는 것이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나님 이다는 겁니다. 이 말도 안되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진짜 비로소 내가 여호와인줄 안다는 겁니다. 즉 심판의 주를 아는 자가 여호와가 누구인줄 아는 자 이다는 겁니다.
안다는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모으는 자 이고 곧 우상숭배이고 심판의 주를 안다는 것은 실제로 주님이 그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실제로 죽이셨다가 다시 살려내는 이 공의를 곧 거룩한 의로움을 입혀짐을 당한 자만이 여호와가 누구인줄 안다는 겁니다. 자 그렇기에 심판이라는 저주를 이 사람은 복음이라고 보게 되는 거죠 십자가가 지혜를 구하는 이방인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고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라고 했습니다.
(고전 1:18-24)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오늘 본문에 은밀한 처소 곧 지성소가 나옵니다.
(겔 7:22, 개역) 『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강포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
맞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는 이 은밀한 처소를 더럽혔다는 겁니다. 시온에 온갖 산당을 다 지었으니까 말이죠. 앞앞 장 5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잖아요.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하나님 본인이 성전 중심으로 곧 시온 중심으로 예루살렘 중심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 기준이 되는 성전을 불태워 버리면 소위 예루살렘 거민 이라는 이스라엘의 의미는 다 날라 가버린다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서 다 없어진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겠냐 말이죠. 그래서 예루살렘이 불타 버린 이상 이스라엘도 불태워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성전이 왜 있는지 왜 성전 중심으로 우주를 다스리는 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펼치시는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다를바 없이 그저 성전이 자기를 지켜주는 하나의 축복의 공간, 장소, 건물 물질로 봤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인간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를 보호하기 위해사 성전이 있는 것이다 말이죠.
하늘나라 하나님의 보좌는 법궤가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계시록에 의하면 참 성전 되신 어린양이신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이 법궤의 취지가 완성된 세계가 바로 천국입니다. 결국 은밀한 처소인 지성소에 있는 법궤는 이 세상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통해서 천국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천국이 이미 떴기에 이 세상 곧 이전 것은 지나가는 것으로써 천국의 증상물로 사라질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는 겁니다.
마치 종말을 확 땡겨 버리니까 이 세상은 저주와 심판 속에 놓여진 사라질 것으로 판명난 거죠. 예를 들어 하늘의 별을 보세요. 어떤 별은 수천년 전에 이미 불타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눈에는 반짝 반짝 합니다. 그 잔상이 수천년 동안 우리 눈에 비추어지고 있지만 이미 수천년 전에 타버렸다 말이죠.
자 그래서 만약 몇 초 만에 그 별이 있던 곳에 갔다 칩시다. 아 그런데 없어요. 다시 지구로 몇초 만에 왔다 칩시다. 그 별을 보니 또 있어요. 자 그럼 그 별은 과연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천국 이라는 세상 끝인 종말에서 나를 봅시다. 없어요. 그런데 지금의 나로 다시 돌아와서 나를 보니 내가 있어요.
무엇이 진짜 또렷한 것일까요? 반대로 사라질 의문의 반복은 누구입니까? 끝에서 보면 나는 없어요. 그런 나를 기준으로 해서 보니까 성전은 마치 나를 구원해 주고 축복주기 위해서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전은 정반대로 모든 것을 다 불태워 버리는 하나님의 영광인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자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세상과 우주는 이 하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법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까 말이죠. 제사장의 기능이 뭡니까? 바로 속된 것을 거룩으로 바꾸는 기능입니다.
그럼 저주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는 저주의 자리에 놓여져야 거룩함으로 이동 할 꺼 아니겠냐 말이죠. 아니 누가 하나님의 저주하심 심판하심과 동행 할려고 하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계시록에서는 이것을 일곱이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하나님의 영광을 봤으니 이제 타 죽어야 한다고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로소 안다는 것은 비로소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이 기쁜소식 곧 하나님의 저주하심으로 인해서 내가 나음을 입게 되었도다 라고 나오는데 반대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십일조 했으니 축복 받았다 하나님께 이레에 두 번 금식했더니 축복 받았다.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았더니 축복 받았다 라고 하나님의 이름에 자기의 행적들을 나열하는 겁니다.
마치 이것은 용광로 속에 곧 하나님의 이름 속에 자신이 발굴하고 캐낸 금들을 보석들을 주렁 주렁 달아서 용광로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이것이 과연 영광이 될까요? 정작 저주 받아 마땅한 자기자신은 안 집어넣는 겁니다.
그 대신 보석을 넣고 좋은 행적들을 넣고 넣고 해서 야바위꾼들처럼 돈 놓고 돈 먹기 하듯이 축복 달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매국노 세리는 비로소 은밀한 자기자신의 죄악을 이 용광로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아마 불타 없어질 정도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텐데 왜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을 할까요? 그 용광로 속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을 봤거든요.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다 이루었다 라는 천국이다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없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부자청년처럼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는 사고방식은 그야말로 죽은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우상숭배와 똑같아요. 성전이 왜 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 서라도 성전 중심으로 왜 세상을 움직이시는지를 그 취지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떤 특정한 장소로써의 예루살렘 성전을 공중분해로 없어져 버리고 하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이 있기에 움직이지 않는 성전은 가짜이고 움직이는 성전으로써 우리는 성전 삼으시는 겁니다. 이 성전은 이제 하나님의 저주를 담고서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새 노래 꾼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외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죠. 아니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외치는 것이 무슨 놈의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까? 말이 안되잖아요. 축복을 외쳐야 기쁜 소식이고 복음인데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외치는 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까? 자 그럼 그런 불만 그대로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가 아니라 축복을 받아서 복음을 외쳐 봅시다. 과연 외쳐질까요?
축복도 자기 기준이지 하나님 기준도 아니잖아요. 그 예가 일만달란트 비유에서 나옵니다. 대박 로또 맞아서 빚을 다 청산한 것은 분명 축복이다 말이죠. 아 그런데 내 돈 띠 먹고 도망친 친구가 나타나니까? 졸지에 그 축복이 한 순간에 다 날라가 버리고 졸지에 분노와 원망과 억울함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일만달란트가 10만년 일해야 얻을수 있는 노동값이라면 백데나리온은 3개월만 바짝 막노동을 하면 받을수 있는 돈이다 말이죠. 아니 어느 바보가 일만달란트를 백데나리온과 바꾸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 말이죠 뭐 일만달란트를 10만년 일한 값 이라고 또 백데나리온을 3개월치 값이라고 했지만 실은 예수님의 목숨 값으로써 최고의 값이다는 겁니다. 부자 중에 최고의 부자 넘버 원 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백데나리온은 하루살이 이다는 겁니다. 최고의 부자 중에 최고의 부자의 자리와 하루살이의 자리를 맞바꾸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 그런데 그렇게 자칭 똑똑하다고 모든 인간이 저 마다의 지식을 뽐내면서 살고 있지만 이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 모든 인간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지난주에 누룩 비유에서 그냥 밀가루반죽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의 피 용서로 인해서 속된 죄인에서 거룩한 피용서로 인해 일만달란트 누룩을 받았다 말이죠. 비로소 가치가 있는 빵이 되었다 말이죠. 주님 쪽에서 바리새인을 타 넘고 와서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30배 60배 100배 일만달란트 용서를 받았다 말이죠.
그 생명의 자리를 발로 뻥 차 버리고 의문의 반복의 자리에 왜 가냐 말이죠. 이런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냐 말이죠. 모든 인간이 다 이렇다는 겁니다. 제사장 본인들조차도 거룩의 기능을 못해요. 그저 모세처럼 완악한 수건을 안 벗을려고 하는 죽을까 싶어서 벗으면 언제 돌삐 던져 맞아서 죽을지 모르거든요. 마치 성전을 통해서 축복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다 이렇게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그래서 백데나리온 갚지 않는 친구를 개패듯이 패는 것은 자기가 이 백데라니온 없어서 너 떄문에 죽을뻔 했다 라는 죽음 때문에 졸지에 살아있는 주님의 용서를 발로 뻥 차버렸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를 모르듯 유대인들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알려주마 라고 심판의 주로써 이 심판과 함께 머물기를 펼치시는 겁니다. 은밀한 처소는 마치 약속의 땅의 기능처럼 하나님의 희생으로써 유지되는 장소인데 그런 기능으로써 저들의 허물을 대신 감당해서 거룩으로 전이 이동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기능인데 자꾸 자꾸 성전에 뭔가를 자꾸 바쳐요. 십일조 했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이것이 바로 시온에 산당을 짖는 버릇처럼 자기 것이 없는 약속의 세계에 자기 것을 자꾸 키우기 위해서 산당을 더 높게 더 넓게 짖듯이 자기 것을 더더욱 크게 많게 해 달라고 축복 빌 듯이 성전을 갓바위처럼 비는 곳으로 삼아버리더라 말이죠. 완전 차원이 다르잖아요.
한쪽은 하늘의 거룩을 퍼부어서 이 땅에 있는 속되고 더러운 것을 심판해서 거룩하게 만들고 있는데 인간 쪽은 자기 것을 더 확장시켜 달라고 성전에서 축복을 비니까 그 더러운 것을 하늘에까지 쌓을려고 높이 높이 산당 곧 바벨탑을 높이 높이 짖듯이 교회를 성전을 그렇게 보더라 말이죠. 완전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한 쪽은 허물려고 하고 감사하게도 우리의 죄악을 우상을 허물려고 하고 다른 한 쪽은 도리어 하늘에 까지 우상을 세울려고 교만한 바벨론 왕이 자기 별을 하늘의 별 보다 더 높이 세울려고 하더라 라는 겁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담긴 법궤 곧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감사하게 여겨질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저주가 내 속의 죄를 심판하면 얼마나 속이 다 시원하냐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이 사망을 없애주니 속이 다 후련할꺼 아니냐 말이죠. 물론 나도 함께 사망과 함께 죽겠지요. 그러나 다시 살리시는 일곱 곧 심판이자 거룩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의가 담겨진 법궤의 기능 아닙니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고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주시는 주님의 의로움 아니냐 말이죠.
이 기능을 펼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외치는 성전인데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가 옳았다 라고 기쁜소식이다 라고 외치는 성전인데 자꾸 이 성전을 자기를 위한 축복으로 만들려고 하니 이 성전을 불태워 없애 버리고 이스라엘 자체를 성전으로 삼아서 움직이는 성전으로 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외치는 이 이스라엘 자체가 바로 움직이는 성전으로써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베드로를 삼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모조리 탈탈탈 털려야 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탈탈탈 털려서 자기 쪽애서 내 세울 것 하나 없도록 믿음도 탈탈탈, 행함도 탈탈탈,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라는 것도 탈탈탈, 장 지지겠다도 탈탈탈, 아무리 베드로가 절망 속에서 더 이상 내세울 것 하나 없더라도 주님께서 붙잡아 버린 이상 마귀도 송사하지 못하는 그 사랑에 의해서 주님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심 때문에 이 십자가에 달리심 때문에 음부의 권세를 너끈히 이기셨다 라는 그 현실이 또렷한 피 흘리심에 이 남겨둔 한 씨가 아니였다면 벌써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라 라는 이 밝히 보이는 십자가 덕분에 우리가 나음을 입은 이 사랑만이 확실한 증거이다는 겁니다.
내가 사랑한 게 아니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아끼지 않고 화목제물로 주셨다 라는 이 확실한 증거가 바로 우리의 찬양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는 인간 쪽에서의 출발은 되도않는 인간들끼리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 누가 잘낫냐 라는 육의 자랑인 의문의 반복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많이 끌어 모으는 지식이 아니라 인물 곧 누구 나 밖에서 인간 밖에서 어떤 인물이 오셨는가? 율법에 갇힌 인간이 아닌 율법 외에 율법 밖에서의 한 의가 나타났기에 그 인물을 쳐다봄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마귀에게 잡혀서 지옥가는 게 아니라 불 뱀에게 물려서 죽게 되는 것을 겁내는 게 아니라 정작 두려워 떨면서 봐야할 심판의 주이신 예수님을 안쳐다 봐서 장대 높이 달린 하나님의 저주인 하나님의 심판인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안쳐다봐서 지옥에 간다는 것을 사랑만이 알려 주시는 겁니다.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 죽음을 시기하는 사랑만이 말이죠.
성화론자나 개혁주의자 등등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을 못 쳐다보도록 하고자 인간 쪽에서 내세울 것이 있어야 한다고 사기를 치는데 여전히 왜 움직이지 않는 성전을 깨뜨리고 움직이는 성전을 3일 만에 세워서 일하시는지를 못 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를 못 넘어서는 겁니다. 그래서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제사장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못 만지는 손 마른 자를 못 고치는 주제에 안식일 안 지킨다 라고 안식의 주인을 생명을 정죄하는 껍데기 의복이 도리어 목숨이신 생명을 죽일려고 목조르는 식입니다.
우리가 이런 짖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이제 주님은 에스겔에게 쇠사슬을 만들라 하시면서 내가 누구인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합니다. 나를 살리고자 성전에 축복을 바라는 것은 쇠사슬과 안맞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 거룩한 성전이 나를 쇠사슬로 죽이는 기능을 하는 성전이 움직이는 성전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더럽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건전하고 경건의 모습을 갖추어서 선함으로 정결함으로 법궤에 다가가도 더럽기 짝이 없어서 선한 의도로 웃사가 떨어질려는 법궤를 잡아도 바로 즉사 하도록 되어 있고 또 누굽니까 벧세메스 사람들 괜히 들여다 보고 오만 칠십명이나 죽었다 말이죠.
(삼상 6:19, 개역)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삼하 6:6-8)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다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왕하 21:18) “18 므낫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궁궐 동산 곧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삼상 2: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삼상 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삼상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법궤를 마치 축복의 수단, 전쟁 승리의 수단으로 삼고자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용하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겁니다. 아무튼 이 블레셋에게 빼앗긴 법궤가 스스로 알아서 블레셋 신상의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짜르니까 블레셋도 감당이 안되고 이스라엘도 감당이 안 되고 이 세상 어떤 누구도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누가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더럽기 짝이 없는데 누가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하냐 말이죠? 죽음을 이기는 사랑만이 감당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저주가 바로 축복인 것을요.
베드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자신을 의롭게 할려고 했지만 도리어 더러움만 도로 들통나 버렸습니다. 바로 이 은밀한 죄악을 들키고야 말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 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망도 못 이기는 주제에 무슨 수로 예수님을 곧 십자가에 달리시는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당하시는 예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 라고 하냐 말이죠. 더러운 주제에 주님이 씻겨주고자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는데 말이죠. 인간 쪽에서는 뭘 해도 다 더럽다 라는 겁니다.
거룩은 율법 외에 한 의는 율법에서 자유한 자만이 부어주실 수 있다 말이죠. 이제 베드로는 음부의 권세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도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는 사람의 생각으로 부터도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노라 끝까지 따라가겠다 라는 자기 의로움으로 부터도 그 어떤 것으로 부터도 자유케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자유케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로 부터도 조차 자유롭다 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가 우리의 찬양이 되는 겁니다. 이 새노래를 글쎄 개같은 이방인 섬의 민족들이 외치는데 왜 이스라엘은 못 외칠까요? 완악한 수건 곧 율법을 지키는 나를 손 못 놓을 정도로 자유롭지 막살지 못하는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 해서 말이죠 사망에 종 노릇하는 겁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십자가 곧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이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는게 이 은혜인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했는데 얼마나 창조주가 누구인줄 몰랐으면 단 한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가 누구인줄 모르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죽음 보다 더 두렵다면 육체를 죽이는 자 보다 영혼까지 소멸하시는 창조주를 두려워 벌벌 떤다면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이루신 것처럼 이 십자가의 사랑만으로 천국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에 말도 안 되는 놀라운 구원에 놀래 자빠져 죽어도 여한이 없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이 십자가로 인해 내가 나를 속이는 그 속임수에서 또 어떤 누구도 꾀고자 하는 그 속임수에서도 자유케 하셨다는 사실에 감사를 즐기시면 됩니다.
▲cnfcj : 나 아니요, 예수님만 옳았습니다.

첫댓글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거듭 부탁드립니다..
카페에 후원이 필요합니다 카페지기는 아주 어렵게
지냅니다 투병중에 생활고로 어렵습니다
도와주신 분들께 박경옥 전도사가 하루 두번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 다
먹을것도 없습니다 한 분이라도 도와주셔서...
용기릏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후원이 없다 보니 공과금도 못내고 먹을것도 못삽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먹을것도 못사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없습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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