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
히틀러가 유대인을 경멸하고 대량학살 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가 유대인을 대량학살 했는지에 대해선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후에 세계 유럽인들도 유대인을 경멸한 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궁금증은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1차 세계대전때 독일에 충실히 협조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맞서 싸웠고 독일의 산업등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들은 독일에 대하여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인 대립 의식조차 없었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이토록 잔인하게 죽임을 당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유럽인의 반유대주의
신약성서에서는 '유대인'을 '네 아비인 악마'의 자식으로 일컫거나 '사탄의 유대교 회당'이라고 언급한 사례가 많다. 유대인들에게 따라다닌 별칭은 독사, 모사꾼, 웃음병자, '바리새인의 누룩' 등이었으며 이들은 물질적이고 음탕하며 방탕하고 돈만 알고 부패한 성격의 소유자로 규정되었다. 나라마다 또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수세기에 걸쳐 유포되었다.
서구에서 반유대사상의 뿌리는 매우 오래되었다. 듀링의 <<인종, 도덕 및 문화 문제로서의 유대인 문제>>에서 그는 "유대인과 같은 열등한 민족은 아무리 바로잡으려 해도 그 사악한 본능을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유대인이 그리소도교 신자 속에 끼어들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피해만 받을뿐이다. 유대인은 창조 능력이 없으며 그저 다른민족을 좀먹어가는 기생충일뿐이다. 따라서 근대의 민족들이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유대인의 힘을 전멸시켜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유대사상은 특히 독일에서 오래전부터 뿌리 깊게 박혀있었다.
유대인들은 추상적인 지적능력, 상업적 이기주의, 그리고 타락한 정신을 갖기 때문에 게르만족 여성에게는 이들이 특히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슈트라이히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간행물 가운데 가장 선정적인 잡지 에서 '위험한 유대인'이 아마도 지니고 있을 성병리학에 대해 자세히 거론했다.
그는 매번 유대인들이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고 매춘을 부추긴다고 비난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 독일 어린이를 유괴하여 죽인다고 주장함으로써, 중세에 있었던 유대인 혈통에 대한 뜬소문을 끄집어 내기도했다.
더 나아가 그는 유대인들이 성적 접촉을 통해 의되적으로 독일 여성들의 피에독을 퍼뜨리려 한다고도 말했다. 또한 딘터는 독일 여성이 한번이라도 유대인과 성관계를 가졌을 경우에는 독일남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자식에게까지도 유대인의 유전자가 전수될 것이라는 주장을 아주 진지하게 펼쳤다.
유대인은 문학, 철학, 상업, 전문 직종, 그리고 심지어 정부내에서까지 두각을 나타냈다. 유대인과 '개종한 기독교의'의 번영과 다른 경쟁자들의 시기심이 커졌고, 또 이단의 씨앗을 두려워하던 가톨릭 교단의 적대감은 고조되었다.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를 추방하려는 결정은 유럽인들은 유대인이 소유하고 있던 상당한 재산을 빼앗을수 있을것이라는 기대 심리또한 그 지배자에게나 민중들에게는 모두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극제였다.
2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전의 세계적 분위기와 흐름
겉으로는 현란하고 요란했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으로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자, 매우 악랄했던 정책이 완화되었고 매우 노골적이었던 반유대주의 테러도 중단되면서 독일 유대인의 희망과 환상은 약간 더 연장되었다. 심지어 나치들은 국제적 비난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몇 유대인선수들의 올림픽 경기참여를 허용하기까지했다. 독일인들은 해외에서 새 독일 제국이 준법을 준수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로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교육받았다.
일련의 반유대주의 법률, 재산 몰수,그리고 전반적인 정권 탄압등으로, 당연하게도 유대인들이 나치독엘에서 떠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는 민주국가들에게 경고가 되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난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운 국제회의가 1938년 7월 에비앙에서 열렸다.
그렇지만 이 회의 실무자들은 이것이 모든 나라에서 피난 온 정치 난민들을 다루는 회의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는 몇몇 대표단이 이 당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아주 잘 요약해주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상공장관은 자국은 유대인 난민에게 아무것도 해줄수없다고 밝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단지 영국 이민자들만을 원하며, '다른 인종이 대규모로 이민할수 있는 길을 열어둠'으로써 '인종 문제'까지 유입되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대인의 이주가 아주 적었던 나라인 캐나다의 대표는 경제의 불확실성과 실업의 문제를 환기시켰다. 아르헨티나는 주로 '경험이 많은 농업 경영자'를 찾는다고 하여, 대다수 유대인을 배제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벨기에는 "어떤 결과에 이르기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국제적 책무를 지고 싶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과 영국조차 유대인의 난민의 상당수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영국 외무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나치 정부에 대한 비난도 원천적으로 삼갔다.
영국대표단은 동아프리카 식민지에 약간의 난민이라도 정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보겠다고 애매하게 약속했지만, 결국 재원 부족을 이유로 내세워 유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나치 지도부가 에비앙회의에서 얻은 것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정책을 점차 더 가혹하게 실행해도 된다는 확신이었다.
3 히틀러 개인적 이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화가의 꿈을 키우고 살았다.
그리고 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원서를 내나 탈락을 하게된다. 허나 그때 히틀러의 원서를 탈락시킨 자가 유대인 교수였고, 이것으로 유대인에 대한 원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유대인이 남의나라에서 이만큼의 권력을 잡고 있다는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등을 몰락시킬려는게 아닌가 라는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또한 히틀러의 젊은 시절에 유대인 창녀와 성관계를 가졌었는데 그때 걸린 성명이 한 원인이였다.
'박해자와의 동일시' 기제가 일어날 때 새로운 성격이 점차 예전 성격을 극복하는 갈등 과정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일시는 의식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므로,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는 통합이나 동화의 과정이 없다. 이전의 성격은 자동적으로 억압되고, 그 특성은 외부의 대상으로 투사되어 새로운 성격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히틀러의 경우 그가 원치 않는 특성은 모든 유대인에게 투사되었다. 히틀러에게 유대인은 악의 화신이고 세계의 모든 곤경의 원인이었다. 이는 마치 히틀러가 가진 이전의 여성성이 한 개인인 그의 모든 곤경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다.
이러한 투사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가 빈에 있을 때 유대인의 섹스, 질병, 도착증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원치 않는 특성들을 또다시 덧붙여 이전의 자신을 증오했던 것과 같은 정도로 유대인들을 증오하고 경멸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혼자일 때는 자신의 투사를 합리화할수 없었고,혼자서 유대인들과 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의도에 걸맞는 대집단을 필요로 했다. 패전 독일 전체가 그것이다. 전쟁이 끝날즈음 독일은 변화되기 전의 자신과 거의 일치하는 상황이었고, 앞으로 퍼부어질 공겨고가 모욕에 노출된 약한 상태였다. 또한 독일은 정복자의 오물을 먹도록 되어있었다.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혼란스럽고 수동적이고 무기력했다. 독일은 이전의 자신을 훌륭히 상징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다시 자신의 개인적 문제를 국가적이고 인종적인 차원으로 옮겨 그것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다루었다. 하느님은 밤사이에 그를 변화시키는 충격을 주었다.
이제 자신의 인애적이고 도착증적인 적응이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이제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많은 저술가들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그 커다란 선전 가치때문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물론 반유대주의는 그의 선전도구들중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히틀러 역시 그걸 잘 알고있었다. 그가 유대인들이 독일을 부유하게 만들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여러번있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우리의 제보자들은 그것은 모두 피상적인 것이고 오히려 그는 밑바탕으로부터 정말로 유대인에 대해, 그리고 유대주의적인 모든 것에 대해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것은 우리가 세운 가설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는 필요할 때 마다 종종 반유대주의를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상적인 동기 밑바탕에는 분명 무의식적인, 훨씬 깊은 뭔가가 있을 것이다. 히틀러가 위대하고 강하다는 느낌을 얻기 위해 이전의 자신을 없애야만 했듯이 독일은 새로운 영광을 성취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전멸시켜야 했다. 둘다 각각의 신체를 천천히 파괴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독약들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창조적이던 민족의 혈통이 더럽혀져 멸종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지난날의 문화가 모두 소멸되었다. 단지 혈액의 순수성 상실로 영원한 내적 행복이 파괴된다. 그것은 사람을 영구적으로 타락시키고, 그결과는 결코 신체와 정신으로부터 제거될 수 없다.>
이 인용문이 상징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그의 말과 글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사고와 정서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대인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개인적 독소인 유약함과 도착 성향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면 개인적 영원성을 성취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는것 같다.
정치적 자서전이기도 한 <<나의 투쟁>>에서 볼 수 있듯이 히틀러는 게오르그 폰 쇠네러, 카를 뤼거, 그리고 바그너에게 유대주의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나의 투쟁>>에는 유대인은 결코 창조적인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음악과 건축에서는 특히 그렇다-고 주장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기생충 같은' 문화적 활동을 특별히 악의적인 어투로 서술한 것인데, 어쩌면 바그너의 저작들에서 표절 된 것을 수도 있다.
그가 유대인들을 다루는 것을 보면 '박해자와의 동일시' 기제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환상 속에서 승리자가 자신에게 가할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던 것을 실제로 유대인들에게 실행했다. 이를 통해 그는 다양한 만족을 얻는다.
첫째, 그가 되고 싶어 하는 무정한 짐승으로 세계 앞에 나타날 수 있다.
둘째, 그가 원하는대로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
셋째, 유대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독일의 모든 고난의 원인인 독소를 제거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넷째, 진정한 피학 성애자로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는다.
다섯째,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사용하여 세계에 대한 그의 쓰디쓴 증오와 경멸을 발산할수있다. 여섯째, 묵직한 물질적,선진적 배당금을 받을 수 있다.
4 히틀러 정치적 이유
나치당이 급부상 하기위해서는 제물도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히틀러는 군대에 정보원으로 남는다. 1차 세계 대전후 독일의 불황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후 독일 노동당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히틀러 자체도 이 당을 깔보았지만 후에 입당을 하여 세력을 키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치당이다.
처음에는 나치당은 거의 배운 것도 모자르고 단지 술집에 모여서 대화만 나누는 일종의 사교클럽정도였지만 1차 대전 조종사 에이스이자 귀족출신이자 후일 나치독일에서 공군상을 지내고 2인지가 된 헤르만 괴링이 입당하게 된다.
이 당시 괴링은 귀족출신이자 에이스조종사이므로 나치당에 큰 힘을 실어주었고 많은 자금도 얻을 수 있었다. 또 에른스트룀등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입당하자 나치당도 크게 바뀌게된다. 이후 나치당은 권력을 잡기위해서 게르만 우월주의를 앞세우고 독일에 희망을~이라는 모습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이때 당연히 히틀러는 제물로 삼고자 한것이 유대인이었다.
그 후 나치당이 1당이 되면서 괴링은 국회의장이 되고 히틀러는 국가의 수상이된다. 이후 대톨령이던 힌덴부르크가 죽으면서 후일 선전장이 되는 괴벨스가 아사리권력을 나누지말고 몰아넣는게 어떤가하는 모호한 제안을 하여 결국 히틀러가 총통이 되는것으로 가닥이 잡혀 히틀러의 집권이 시작된다. 히틀러로 대표되는 나치 독일에서 소련인, 슬라브족, 유대인들을 학살한 이유는 이미 나치 독일의 출발심에서부터 갖고 있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모두가 살기 어렵던 시절에, 히틀러는 독일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내용은 독일에 거주하는 다른 민족들이 독일의 경제의 사회를 좀먹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독일 국민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다른 민족과 인종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세이후 유대인들은 고리대금과 귀금속 산업에 종사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일면 타당한 점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어려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했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에 대한 공격을 불황의 해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치 독일내내 아리안족의 우수성과 게르만족의 위대함을 선전했고, 이러한 민족적 인종적 허상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인종과 민족을 공격했던 것이다.독일사회 내부로는 유대인들에 대한 공격을 하면서, 밖으로는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민족 분규는 게르만 족과 슬라브족 사이에서 일어났다. 1차 대전 역시 보스니아 지역에서 민족국가 건설을 두고 위 두 민족간의 분쟁이 원인이 되어 전쟁이 터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지역은 게르만 족과 슬라브 족이 함께 거주하던 지역이여서, 독일에 민족국가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곳이였다.
히틀러는 이 지역의 게르만 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 체코등을 병합했고 폴란드마저 침공하면서 2차대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정리해서보면 나치 독일의 만행중에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인종적 편견을 퍼뜨린 것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타인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행했다는 것이다.고작 민족이라는 확실하지도 않은 개념을 내세우면서 끊임없이 타인을 공격한 것이 나치독일의 근본 문제였다. 그런데 문제는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공격한 까닭은 이들의 영향력때문이 아니라 이미 설명한대로 대공황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으로 선택했다는것이다.
그 당시 독일은 매우 힘들었고 왕정을 대신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전승국 비위맞추기에 바쁘고 정부가 파산까지 났을 때였다.(배상금지불로 매우 힘들었다. 1320억중 일부를 연합군에게 지불했으나 바로 파산을 맞고, 그 돈마저 무리하게 찍어낸 돈이라 인플레이션 후폭풍까지 닥치게 된다.) 유대인들은 사회적으로 소수였고, 중세 이후로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만만한 먹이감'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소수를 공격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히틀러의 선택은 20세기 초부터 활동하던'시오니즘(유대인 민족국가건설운동)에 근거를 마련하게 되어, 1947년 현재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나라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물론 건국과정에서 2차 대전 승전국들과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이후의 역사는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인 미국과 영국의 지원에서 알 수 있듯이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에게 소위 '지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 같은 나치의 핵심 간부는 당시에 유대인들을 상당히 안심시키는 발언도 했다. 1935년 12월, 그는 "독일에서 유대인들은 생존의 가능성까지 박탈당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독일 언론사 사장은 "독일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민족성을 강화시키도록 돕고 있으며, 양 민족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도록 이바지하고 있다."라고까지 말했다. 비록 독일 유대인들은 이등시민으로 전락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제 3제국 내에서 여전히 살아갈 틈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몇몇 공식 논평에 나온대로 인종 분리정책이 자신들의 '법적 보호'망이 되어 정말로 자신들의 처지를 안정화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독일 유대인들은 다른 독일 주민들에게서 격리되었지만, 자신들의 생계수단이 모두 다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37년 말에 완성고용이 달성되자, 유대인들을 독일 경제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확실히 가속화되었다. 1938년 3월, 히틀러는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거의 20만명에 달하는 번창한 유대인 공동체를 자랑하던 빈은 독일제국에서 유대인을 신속히 강제 추방하라는 모범 도시로 탈바꿈했다.
오스트리아의 반유대주의 전통은 이곳을 점령한 독일인들조차 놀라게 할 정도로 다시 크게 발호했다.<선거벽보에는 노동자와 농부들이 기존의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유대인이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고 나치스에 투표하는 것은 그들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제부분에서 히틀러는 나치정권 초기에 몇년동안 경제장관을 지냈던 히얄마르 샤흐트의 전문적인 자문을 받아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서서히 펼쳐나갔다.
그는 독일의 재정적 취약성과 대량실업의 극복이란 문제의 절대적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부법안의 제정에서도 유대인 소유의 은행과 백화점, 기업체등 독일 경제에 중요한것은 그냥 놔두고 유대인 소상인들과 전문직업인들을 주된 희생자로 삼았다. 나치 통치 초기에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정책은 국내외의 상황을 고려하여 비교적 조심스럽게 수행되었다.
독일이 항복한 지 20년이 지난 1938년 11월 9일에 발생한 유대인 박해는 독일인들에게 새로운 유럽전쟁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하는 수단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히틀러식 방법으로, 그는 이를 통해 두달전에 체결된 뮌휀평화협정으로 국제정치의 위기가 종결되었다는 생각에서 독일인들을 각성시키고자 햇다. 1939년 1월30일, 히틀러가 수상 취임 6주년을 기념하여 제국의회에서 행한 악명높은 연설은 스스로 성취되는 예언과 두얼굴을 지닌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한다. 그러나 이것은 몇가지 다른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되어야 한다.
가장 직접적인 목표는 전 세계 유대인이었고, 히틀러는 흔히 그렇듯이 수정의 밤 이후에 자기 정권에 대한 비판이 증대된 것은 바로 유대인들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이 이미 확신하고 있던 것 -곧 유대인들을 멸종시키겠다는 의지-을 자아와 사명감의 핵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국제적'해결책을 찾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공조할 자세가 되어 있다고 누차 밝히지 않았던가? 그가 이에 대한 응답으로 들은 것이라고는 독설한 척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위선이라고 하는 비난뿐이였다.
히틀러가 연설 중에 예수를 한사코 '유대인에 대한 응징'으로 규정하려하거나, 혹은 '위대한 나사렛 사람'의 말씀은 정치에서건 혹은 일상에서건 항상 중용을 거부했다고 칭찬하곤 했는데, 이러한 것들도 다 분명 기독교 전통을 의식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나치가 기독교 초기부터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기독교적 반유대주의 전통을 선거 목적에 이용하고 당 강령이 '긍정적인' 기독교와 양립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열을 올렸던 사실을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결국 자료를 찾아보며 느낀 것은,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대재앙은 반유대주의자인 히틀러 개인이 행한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날부터 유럽대륙에 퍼져있던 반유대주의 사상과 유대인들이 이룩해 놓은 많은 것들, 그 누구에게도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우지 않는 관료제의 폐해등이 이러낸 다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히틀러 자신만의 의지로 유대인대학살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유태인의 배금주의와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정치집회 포스터>
첫댓글 생활고에 카페운영이 어렵습니다...
후원.참여가 없습니다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회원님께 주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 겨울 난방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쌀과 김치라도 마련하도록 오늘은 후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공과금으로
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현재 자동이체 회원이 세분밖에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카페후원계좌-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