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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관점에서 본 창조와 과학의 주요 이슈들에 대한 신학적 해석학
Theological Hermeneutics for the Major Issues of Creation and Science in Evangelical Perspective
1. 복음주의 과학관의 어원적 뿌리
복음주의의 어원은 종교 개혁 시대로 올라간다. 복음주의는 독일에서 루터 교인들과 개혁주의자들을 포괄적으로 부르던 개념이었다. 처음 반개혁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을 루터파 교도(Lutheraner) 또는 마틴파 교도(Martianer)라 불렀으나 1521년 루터는 복음주의자(Evangelisch)라고 고쳐 불렀다.
루터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복음주의는 오늘날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복음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매우 포괄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미국 복음주의 기관지로 간주되는 『오늘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는 1979년 북미 인구의 20%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고 또 조지 갤럽은 30%라고 말한다. 침례교 계통의 버나드 램(Bernard Ramm)은 이런 복음주의 안의 갈등을 상세히 잘 서술한 학자이다. 그 갈등 가운데는 성경과 과학에 대한 견해차가 포함되어 있다. 블러쉬(D. G. Bloesch)는 먼저 복음주의를 전통과 의식을 중시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구별한다. 둘째는 이단적인 것에 반하여 정통적인 것, 셋째는 현재적 또는 자유주의적인 것에 반하여 전통적 또는 보수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인 탐구보다는 생활과 체험을 강조하는 입장을 가리키고 영어권 나라에서는 침체된 교회 활동에 대해 영적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정신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하였다. 즉 복음주의는 일련의 역사적 물결 또는 동심원을 통하여 발생하여 일정한 색깔과 특징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개혁과 청교도주의, 경건주의, 그리고 근본주의와 그에 대한 대안과 반발로 태어난 신복음주의 등이 그것들을 대표한다.
맥그라스(Alister McGrath)에 따르면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그것을 중세 말기 교회의 형식적 신앙에 반기를 들고 성서적 신앙회복을 주창했던 카톨릭 저술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특히 1520년에 이르러 불어 에방겔리끄(évangélique)와 독일어 에판겔리쉬(evangelisch)는 종교개혁 초기 논쟁적 작품에서 크게 부각되었고 개인적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는 복음적 태도와 그것을 중시하는 영적 운동이 이태리 귀족사회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복음주의의 초기 형태이다.
맥그라스는 복음주의의 주요 원천으로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 그리고 경건주의를 든다. 그래서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의 복음주의는 반카톨릭 교회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종교 개혁 시대의 주요한 과학적 논점을 다룬다. 청교도 시대의 복음주의적 과학관의 흐름도 살펴본다. 종교 개혁 신앙의 표어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는 복음주의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데 이것은 복음주의 과학관을 다루는 데도 표준이 될 수 있다. 즉 종교 개혁은 복음주의의 초점과 표준이 되었다. 복음주의는 종교 개혁의 결과로 생겨난 여러 고백서에서 확대되고 명료케 되며 더욱 분명하게 정의되었으며 그 결과로서 16세기 이후 복음주의자를 특징짓는 잣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17세기 청교도 운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며 현대 복음주의자들 역시 청교도들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종교 개혁 신앙과 닿아있는 것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는 종교 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하고 형식화, 교리화 되기 시작했다. 특히 루터교 정통주의는 “따뜻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하나의 이론 체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경건주의는 17세기 독일 루터교회 안에서 일기 시작한 신앙운동으로 이 운동을 주창한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p Jacob Spener)는 루터 교회가 안고 있는 경직성을 탈피하기 위해 6개조 신앙 개혁안을 담은 ⌜경건한 소원들⌟(Pia Desideria,1675)을 발행하였다. 교회 개혁을 위한 이 6가지 제안에서 볼 수 있듯 슈페너의 개혁은 대단히 성서적이며 실천적임을 알 수 있다. 슈페너는 당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생명력 없는 형식적 신앙생활에 대한 각성 운동으로 성서에 대한 열심 회복과 선행과 거룩한 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경건주의의 근본 목적은 엄격한 형식과 교리에서 벗어나 성서 중심, 실천 중심의 교회 개혁을 통한 생동감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김문기 박사(평택대)는 슈페너가 성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신학자요 목회자로서, 설교에 있어서도 하나님 말씀 중심의 설교에 집중했으며 경건 향상의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에서 실천적인 운동을 요청했다고 논증한다. 성경 중심, 실천 중심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경건주의는 분명 복음주의에 닿아있다. 그것은 분명 생명력 있는 신앙에 대한 욕구를 촉구했다. 프랑케의 할레 경건주의는 개인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혁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독일에서 시작된 이들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교회에 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복음주의가 성경과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복음주의는 1720년대 시작된 제 1차 각성운동과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field, 1714-1770)의 설교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절정에 달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리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를 통해 영국교회 갱신 운동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 에즈베리에 의해 계승되었다. 제 2차 각성운동은 19세기 초 찰스 피니 등의 주도로 미국에서 일어났다. 19세기 초 미국 복음주의의 특징은 부흥운동을 발전시킨 것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신앙의 분리를 촉구하여 훗날 진화론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과학과 종교의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부흥 운동과 국교(國敎) 분리의 결함은 미국 교회에 활력을 가져다 준 반면, 실용성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원리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리의 문제를 실용의 문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대각성 운동은 복음주의를 19세기 미국 교회의 지배 세력으로 부각시켰으나 동시에 개인적 종교 경험과 지성적 엄격성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켰다.
현대 복음주의는 이들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의 산물로 그 근본 토대와 기반을 형성했다.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은 과학적 사고와 경험적 접근 및 상식주의와 같은 현대의 도구를 사용하면서 조금씩 분화 되고 보다 세련화 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복음주의 진영의 다양성을 가져다주고 과학적 해석에도 혼돈을 야기한 경향이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공동체 속에 공통 유업과 관심사를 결합하는 자들의 초교파 그룹 및 모임이기도 하다. 1846년에 영국에서 창립된 ‘복음주의 동맹’(Evangelical Alliance; EA)과 1942년 미국에서 창립된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 등이 그것이다. 마크 놀은 복음주의를 초자연적 중생의 필요를 강조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고백하며 선교와 전도를 통해 복음전파를 촉진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지적했다. 앤더슨(R. S. Anderson)은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세 가지 관심, 즉 정통주의 교리, 성서의 권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체험에 대한 관심에 의해 표현했다.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맥그라스는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복음주의에 통일성을 가져다주는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음주의 다양한 해석들 사이에는 분명 명백한 ‘가족적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충분하다. 여기서 신학적 방법론에 관한한 어느 정도 일반화가 가능해진다. 복음주의는 청교도 작가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가 남긴 "본질적인 것은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freedom; in all things, love/ in necessariis unitas, in non-necessariis livertas, in utrisque caritas)이라는 명언처럼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는 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복음주의는 우리 시대의 주도적 세계관과 대면하면서 복음주의적 지성을 담아내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의 말처럼 복음주의자는 이성과 학문의 위험성을 아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버리는 일에 익숙한 포스트모던의 상황에 복음의 진리를 담아 적극적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과학은 기독교가 없었다면 출현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최근 복음주의 연구에 뛰어든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로는 역사신학의 조지 마르스덴(G. Marsden), 창조 과학에 매우 비판적인 마크 놀(M Noll), 데이빗 웰즈(D. Wells), 네이던 해치(Nathon O. Hatch), 데이튼(Donald W. Daton), 도널드 블러쉬(D. Bloesh), 카펜터(Joel A. Carpenter), 성경과 과학에 관심을 보인 신복음주의 성향의 침례교 신학자 버나드 램(B. Ramm), 근본주의적 관점의 데이빗 비일(D. Beale), 최근의 신진 신학자 맥그라스(A. McGrath)와 스탠리 그랜츠(S. Grantz) 등이 있다. 본 논고는 이들 다양한 복음주의자들의 관점의 차이를 깊숙이 비판하거나 시비를 거는데 있지 않다. 그 접촉점을 찾아가며 복음주의 과학관을 통한 최근의 포스트모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과학관은 어떤 것일까. 복음주의 과학관은 이들 복음주의 학자들의 견해로부터 출발한다. 옥스퍼드대의 맥그라스는 성경의 권위와 신앙적 전통,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령의 주권, 인격적 회심의 필요성 그리고 복음 전도의 강조가 일반화된 복음주의의 여섯 가지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복음주의 과학관은 복음주의자들처럼 성경의 권위와 전통에 의존한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앞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복음주의의 근간이 되는 성경이 증거하고 정통 교회가 고백해 온 모든 교리와 전통의 범위의 신학 방법론을 벗어나지 않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루터와 더불어 복음주의자의 뿌리와 같은 칼빈의 신학 방법론 가운데 적응의 방법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 없이도 인격적 창조주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은 부정하나 피조된 자연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자연 계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즉 복음주의 과학관은 자연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넘어 자연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이 발현됨을 믿는다(시 19편 ,롬 1:20, 사 40:26). 여기에는 하나님의 공유적, 비공유적 특성 가운데서 나타나는 완전성, 영원성과 같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삼위일체적 사역의 흔적까지 포함한다. 그러므로 일신론적 계시가 아닌 자연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적극적으로 찾으려 했던 어거스틴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가 현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 그의 방법에 당연히 주목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해석한다. 적응의 방법은 피동적 해석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요 청지기로서 미래의 자연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적응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원과 윤리에 대한 반성경적 주장에 대한 적극적 반응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복음주의 과학관의 실천적 모색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2. 복음주의 과학관의 세 가지 요소
1) 성경: 복음과 초대 교회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초대 기독교의 믿음은 확고하다. 창조주는 우주와 역사의 통치자요 주관자이다. 이것은 플라톤(Platon)이 말하는 ‘선의 이데아’나 플로티누스(Plotinus)가 말하는 선을 뛰어넘는 ‘초 본질적 존재’와도 다르다. 인격을 지닌 주권자이다. 물론 이것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교리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 없이 창조주와 자연으로 나아가려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성경이 계시하는 증언을 기초로 이 창조주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했음을 인정하여 왔다. 이 우주의 시간과 공간과 빛과 어두움을 포함한 모든 물질은 무(無)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 모두도 창조의 영역에 속해 있다(골 1:16). 또한 그 창조주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처럼 이 세상에 무관심한 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인정하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은 부정하는 일종의 초월신론(超越神論)인 이신론(理神論, Deism)도 성경의 영역이 아니다.
유대교 출신인 사도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속과 부활의 주가 되며 창조주임을 확신하면서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확장된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복음주의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복음주의라는 언어는 없었으나 초대교회 사도들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은 오늘날 복음주의의 뿌리가 됨은 물론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에 성경이 기록되었으며 비록 그리스도가 과학의 시대를 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과 그리스도라는 이 두 기둥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이 두 기둥과 이 두 기둥에 뿌리를 둔 종교개혁주의자들과 그들을 따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룩한 정통 교리를 중심으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2) 자연 계시: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를 중심으로
(1) 어거스틴
칼빈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종교의 씨앗(the seed of religion)은 사람에게 심겨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자연 계시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칼빈은 자연과 우주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보고자 하였다. 그가 사용한 “책”, “거울”, “궁전”, “휘황찬란한 극장”, “무언(無言)의 교사” 등의 용어들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칼빈이 보기에 이와 같은 자연적 계시와 인간의 이성이란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데까지 연결되지는 못하는 것들이다.
성경의 창조주와 구속의 주에 대한 확신에 관한 한 어거스틴(Augustine, 354-430)과 칼빈은 동일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고백에는 그런 경험이 깔려 있다. 이 때 성경이 말하는 창조와 구원은 연결된다. 이러한 상태의 원인은 피조물이요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었을 때 나타나는 불만족과 공허감’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자신의 위대한 형상 안에서 인간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는 자신의 위대성을 한 조각의 흔적을 가지고도 알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로 꽃동산과 산들바람을 가지고도 기뻐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달콤한 은혜를 항상 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거만함과 의심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면 결코 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자로 길이를 재듯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바로 자신을 우리에게 보다 가깝고, 친숙하게 만드시고, 동시에 대화할 수 있게 허락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여기서 어거스틴은 자연 계시에 대해 칼빈과 조금 달랐다. 어거스틴은 좀더 깊이 나아간 듯하다. 어거스틴이 주목한 것은 하나님은 이성을 만드시고 이성을 사용하시는 분이다. 창조주 그 분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다. 그리고 자연은 정교하다. 자연을 대충 만드셨을 리가 없고 자연 계시라고 불충분하게 하실 리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 계시 안에는 삼위일체의 흔적조차 정밀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있다. 사람의 지성과 추론 능력은 서로 크게 다르다. 논리적 추론으로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지성에 뛰어난 사람이 유리하다. 스티븐 에반스(C. Stephen Evans)는 이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복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은 복음의 방해물은 아니다. 이성은 복음의 조력자이다. 이성을 완전히 무시한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이성은 다만 충분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고 버려서는 안된다. 이성이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상식이 무시된 곳에 복음의 장애물이 나타난다. 상식을 무시한 곳에 나타나는 성경 이외의 새로운 직통 계시의 출현이 그것이다.
어거스틴은 복음을 결코 무시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성도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하나님이 내리신 선하신 도구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천착(穿鑿)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분명 세상에는 신적 흔적이 계시되고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도구로서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로 나아간다. 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세 개의 위격이 존재한다는 삼위일체 신비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고대부터 많은 신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가 있어왔다. ‘베스티기움’(Vestigium)은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신학이나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나 문제를 설명할 때, 그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물이나 현상을 통해 설명하는 형식과 자료를 의미한다. 즉 자연의 예증이나 사변적 유추에서 그 흔적들을 찾게 된다. 일반적으로 ‘베스티기움’은 ‘흔적’이라고 번역한다.
어떻게 감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흔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본성을 찾으려는 우매한 도전을 하느냐는 비판 앞에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한 연구나 설명은 늘 위축되거나 주춤거리는 경우가 많았다. 칼 바르트는 늘 그 선봉에 있다. 바르트는 자연과 은총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종류의 자연신학도 단호히 거부한다. 이렇듯 자연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성경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논증에 비해 완전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analogy)와 흔적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부분의 대가인 어거스틴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유비와 흔적을 찾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 아래에서 인간에게 여전히 많은 유익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유비적인 논법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음을 향해 가는 피조물에게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신론에 있어 어거스틴에게 많은 영향을 준 터툴리안(Tertullianus, 163-225)은 삼위일체의 삼위를 ‘뿌리․ 나무줄기․ 열매’의 관계로 묘사하거나 ‘샘․ 시내․ 강’으로 묘사하거나 ‘태양․광선․광선의 종착점’의 관계로 묘사하면서 이것이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받은 계시라 하였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1033-1109)은 나일강에 있는 ‘샘, 시내, 호수’의 존재와 상호 관계 속에서 삼위일체를 비유했다. 샘은 시내가 아니고, 시내는 호수가 아니며, 호수는 시내가 아니지만 세 나일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나일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샘, 시내, 호수는 각각 그 자체로써 나일강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샘을 시내로부터나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는 것 같이 시내는 호수로부터 꺼낼 수 없고, 호수를 샘과 시내로부터 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틴 루터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계시가 나타나 있고 또 볼 수 있다. 피조물들의 자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하고, 그것들의 형태는 아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그것들의 유용성과 능력은 성령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비록 가장 작은 풀잎이나 양귀비의 씨 속에도 현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연에서의 삼위일체 흔적을 말했다.
미국 창조 연구소(ICR)의 소장이었던 헨리 모리스는 우주와 만물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의 예증으로 ‘공간, 물질,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우주, ‘삼차원’(가로, 세로, 높이)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지는 시간, ‘본성, 본체,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사람 등을 내세웠다. 그 외에 세 잎사귀의 클로버, 삼각형과 같이 세 개의 것이 모여 전체가 하나를 이루는 사물들, 그리고 ‘고체, 액체, 기체,’ 삼원색의 ‘빨강, 노랑, 파랑’ 등을 들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의 제 8권 이후에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문제를 푸는데 있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음을 밝힌다. 그 중 흔적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발췌하여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 안에서는 한 위격보다 세 위격이 더 크지 않다는 것을 이성에 의해서 밝힌다.
둘째,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모든 물체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믿음으로 그를 알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알지 못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사랑에는 마치 삼위일체의 형적처럼 세 가지 면이 있음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삼위일체” 15권 2절의 제목으로 “하나님은 비록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항상 찾아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을 피조물에서 찾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이 ’와 ‘사랑받는 대상’ 과 ‘사랑’이라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제 8권). 또 사람의 마음을 분석해 보면 ‘마음’과 ‘마음이 자체를 아는 그 지식’과 ‘마음이 자체와 자체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 이 셋이 동등하며 한 본질이다”(9권). 더 나아가서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는 더욱 명백한 삼위일체이다”(제 10권). 그리고 “외면적 인간에게서도 ‘보이는 물체와’ ‘보는 사람의 눈에 인상으로 박히는 그 형태’와 ‘이 둘을 결부하는 의지의 목적’, 이 셋으로 되는 삼위일체를 볼 수 있다”(제 11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아 안에 있는 세 가지 형태인 존재와 지식과 의욕(esse, nosse, velle)을 가지고 삼위일체적 흔적을 말한다. 나는 존재하며 그것을 알고 의욕을 가진다. 이 세 가지 안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삶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마음과 지식과 사랑(mens, notitia, amor)도 삼위일체의 흔적이다. 마음이 그 자체를 알아야 하며,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식 행동에서 사랑을 중요시한 것은 플라톤이었으나, 어거스틴도 지식과 사랑을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것으로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한 요한 서신으로부터 이들 생각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이야말로 삼위일체의 지식에 도달하는 길이라 볼 정도였다. 지식은 복음주의를 말할 때 거부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기억과 지식, 의지(memoria, intelligentia, voluntas)도 흔적이다. 어거스틴은 지각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보았다. 그 지각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진리와 선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영혼은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결과 자체도 알게 된다. 그것은 이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성은 주로 추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대하여 지각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유하는 기능을 말하는 인식과도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사유의 근원이며, 따라서 사유적 지식을 넘어서 있다. 이와 같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ia)는 무의식 중의 명상과 직관적 비전을 의미한다. 중세기 초에는 주관적인 종교적 의식의 현상에 관심이 집중된다. ‘인식, 고찰, 명상,’ ‘신앙, 이성, 명상’ 또는 신비주의의 ‘정화, 조명, 직관’이 삼위일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2) 칼 바르트
어거스틴이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데 비해 자연 계시와 자연신학 모두에 부정적이었던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당연히 피조 세계 속에서 찾는 삼위일체의 흔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바르트는 사변적(思辨的) 사유나 자연계의 예증으로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흔적을 거부한다. 절대적 그리스도 중심이요 하나님의 계시의 신학에 토대를 둔 기독론 중심의 바르트에게 있어 어쩌면 흔적에 대한 추적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바르트가 삼위일체의 뿌리는 계시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바르트가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계시의 예증이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바르트는 이 흔적의 문제를 별도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별히 자연과 문화와 역사, 종교 그리고 인간 영혼의 5 개 영역에 내재한 흔적의 문제를 다룬다. 다만 바르트는 그것을 발견해서도 안 되며 확인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약성서가 증거 하는 계시의 구체적 내용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계시 이외의 다른 어떤 근원이 있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성서의 증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아버지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만 전달됨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단지 철학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을 계시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인 하나님, 곧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제시해 주었다. 그 하나님이 먼저 우주적 아버지로 있다가 맨 나중에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는 예수의 아버지요 따라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서적 계시 외에는 어떤 다른 계시나 삼위일체론의 기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밖 어떤 흔적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과거에 어거스틴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이 흔적을 찾으려고 고민하였고 사실 그러한 흔적을 자연과 문화와 역사와 종교와 심리 안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어떠한 유형이든 간에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모든 흔적이 의심스럽다. 계시를 떠나 피조자의 계시에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그 교리의 제이의 기원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인정한다면 당장 혼란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흔적 중에서 어느 흔적이 가장 본상(本相)에 가까울까 하는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노력은 불가피하게 인간학이나 우주학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는 비유나 흔적을 말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체를 분명하게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제이의 기원을 추구하게 되며, 그 교리를 변명하고 증명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성서가 증거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이다.
흔적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되면 가장 중요한 계시의 내용을 경시하게 된다. 문이 열려지면 그 문으로 존재의 유비가 들어온다. 계시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예화가 따른다. 이것은 계시를 경시하는 행동이다. 계시는 정당하게 해석될 것이지 예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흔적에 대한 길고도 자세한 고찰 끝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즉 “이 흔적은 분명하고 의존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불림을 받을 자격이 있는 그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삼위일체 교리의 범위 안에서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이다. 그러나 흔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안에서의 피조자의 흔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지함에 있어서 우리는 제 1의 기원과 함께 제 2기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의 단 하나의 기원을 주장 한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들 옛 신학적 추적을 모두 부질없는 유희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바르트는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의 발견자들이 계시와 나란히 3위 일체의 다른 제 2의 다른 뿌리를 만들어낼 의사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이 이 다른 뿌리를 유일하고 참된 것으로 만들려고 했거나 3위 일체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즉 바르트도 창조 안에 수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작은 빛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논쟁 파트너였던 브룬너(Emil Brunner)의 입장에 보다 가깝게 접근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작은 빛을 찾는 작업으로서의 의미는 가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바르트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베스티기움(Vestigium)에 의한 신학적 언어가 계시의 해석(interpretation)을 넘어서 계시의 예증(illustration)을 주장하는 경우로 영역을 침범해 들어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계속 우려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해석이란 ‘같은 것’을 다른 것으로 말함을 의미하며 예증은 같은 것을 ‘다른 말’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해석은 본질이 변하지 않으나 예증은 본질이 변할 우려가 있다. 융엘(E. Jüngel)은 해석은 계시가 인간의 말을 정복하는 것이고 예증은 인간의 말이 계시를 정복하는 것이라고 바르트의 해석과 예증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입장과 바르트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베스티기움’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3)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 종교 개혁 시대를 중심으로
(1) 종교 개혁 시대의 상황
인류의 과학적 사고에 혁명이 일어난 것은 16-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 시대를 살다간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us, 1473-1543)로부터 뉴턴(Issac Newton, 1642-1727)에 이르는 동안 이룩된 고전적 근대 과학(classical-modern science)은 고대 및 중세 과학의 대부분을 무효화시켰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5)와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6 세기의 초·중반을 살다간 인물들이다. 루터와 칼빈은 근대 과학을 향해 꿈틀거리며 역동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자연 과학의 바람을 결코 피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던 시대를 살았다. 비록 자연과학도는 아니었으나 당대 영적 지성의 상징적 인물들이었던 루터와 칼빈은 과학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신앙적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칼빈의 경우 점성술이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다.
과학이 꿈틀대던 루터와 칼빈 시대는 천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였다. 루터와 칼빈은 과연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과연 알고 있었을까? 쿠페르니쿠스의 태양계 중심설은 신학과 종교와 자연과학의 긴장과 충돌을 상징한다. 당시는 모든 천체는 지구를 돈다는 지구 중심설이 성서의 지지를 받는 듯 여겨지던 시대이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지동설을 담은 새로운 천문학 개론서를 낸 것은 1514년이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Brief Treatise(Commentarieolus, 짧은 논문)이라는 논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주장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43)는 코페르니쿠스 사후(死後) 루터파 개신교 목사였던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에 의해 출간되었다. 당시 이것은 성서의 권위와 신빙성에 대한 중대한 위협과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루터와 칼빈은 과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알고 있었을까? 이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루터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정죄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분명치가 않다. 루터가 천문학 서적의 기본 원리들을 이해할 만한 학식을 지닌 사람인 것은 분명하나 우리는 그가 천문학적 주제를 탐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오히려 개신교 수학 강사 레티쿠스(Georg Johachim Rheticus, 1514-1574)가 코페르니쿠스의 수제자로 성서와 지동설을 양립하고자 노력한 사람임이 호이까스의 노력으로 발견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루터는 결코 자연에 무지한 학자가 아니었다. 루터는 어거스틴처럼 모든 자연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존재함도 인정하였다.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 본질의 완전성과 아들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이 현존함을 인정하였다. 다만 루터의 관심의 중심은 달랐다. 루터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관심보다 과학의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 좀더 집중한다. 아란트(Charles P. Arand)는 루터의 창조론(Luther's Thought on Creation) 강좌에서 루터의 요리문답 제 1조에 나타난 창조론과 그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면서 루터는 후기 작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아란트는 창조주와 창조물 간의 경계와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과의 구분 그리고 하나님의 가면(Larva Dei)으로서의 피조물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피조물은 존재의 낮은 질서에 속한 것에 멈추지 않는다. 피조물은 오히려 신적 선하심의 도구이다. 그렇다고 인간이나 피조물이 창조의 중심이 아니다. 루터는 철저히 인간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 초점을 맞춘다.
루터에게 있어 창조주 하나님은 광대한 은하수로부터 미세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물을 만드신 분이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 또한 창조주는 인간들을 다른 창조물로부터 구분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일부분이 아니요 세계는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다. 이것은 과정 신학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루터의 창조 신학에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처럼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루터는 아버지를 문법, 아들을 변증법, 성령을 수사학으로 비유하곤 했다.
그럼 칼빈은 어떠했는가.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 ⌜과학과 신학의 전쟁 역사⌟(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1896)에서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통상 시편 93편 1절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에 도전했고 어느 누가 감히 성경의 권위 위에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올려놓으려 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안티기독교인이었던 러셀(B. Russel)은 서양 철학사에서 화이트가 주장한 이 내용을 반복해서 칼빈을 공격하였다. 심지어 최근의 토마스 쿤(T. S. Kuhn) 조차 이 구절로 칼빈을 공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심코 칼빈을 반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고 인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꼼꼼히 살펴본 적은 없는 듯하다. 칼빈의 어느 책에도 위의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칼빈은 시편 93편 1절에 대한 주석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지동설을 유지하고 천동설을 주장하는 해석학적 오류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사실에 대한 분명한 강조를 말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하고자 감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문헌은 결코 없다. 로젠(E. Rogen)은 화이트와 반대로 칼빈의 모든 텍스트를 찾아보았으나 칼빈이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들어본 일도 없고 따라서 그에 대해 어떤 태도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호이까스(R. Hooykaas)도 칼빈은 한번도 코페르니쿠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칼빈이 말했다는 ‘인용구’는 모두 가공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칼빈이 죽기 25년전(1539) 마르틴 루터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비록 코페르니쿠스가 카톨릭의 인물이었고 칼빈보다 루터가 카톨릭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도 칼빈이 코페르니쿠스를 전혀 몰랐다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칼빈의 저서나 관련 문헌에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일까? 여기서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칼빈이 설혹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해도 그리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 아래에서 그런 과학적인 것들은 공적으로 논평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후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그의 태양 중심설은 지지자들을 거의 얻지 못하였다. 겨우 한 대학교(스페인의 Salamanka 대학)에서 가르쳐졌으며 보댕(Jean Bodin, 1530-1596)이나 몽테뉴(1533-1592) 같은 16세기 후기의 학자들도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침묵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이후 반세기가 지나서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에 의해서 본격 부활된다. 신학자로서의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관심의 대상이었더라도 자신의 저작 가운데서는 간과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저서에 나오지도 않는 이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했다는 낭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인용이 되었던 것일까? 샤프(John Sharp)는 멜랑히톤의 물리학 서론(Intia Doctrineae Physicae)에서 인용된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세상이었다. 칼빈은 과학을 무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칼빈은 자연과학에 대해 열려있었으며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칼빈은 과학적 연구를 적극 권장하였으며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물질 세계와 인간의 몸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증거한다. 칼빈은 천문학과 의학 연구를 모두 적극 추천한다.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더 많은 증거와 지혜와 섭리를 알게 되는 일이었다. 과학이 하나님의 과학이 아닌 것이 아니었다. 칼빈과 루터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창조 신앙의 반열에 있었다.
다만 칼빈은 성경을 관점과 관심이 다른 책으로 보았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었다. 성경은 전문 과학 서적처럼 대할 책이 아니었다. 칼빈은 분명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자연은 조금 일그러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아름다운 책으로 본 것이다. 피조세계의 연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훌륭한 도구였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었다. 1645년과 그 이듬해 과학에 헌신한 사람들의 부정기적 모임으로 출발한 영국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 회원 대부분이 청교도적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1권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상세히 다루고 있고 여기서 어거스틴의 입장을 지지한다. 처음 칼빈이 제네바에 머물 때에 위(位)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기독교 강요에서는 이 용어의 사용을 옹호하며 이 용어를 싫어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은 어거스틴이 적극적 관심을 가졌던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에 대해서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어거스틴에 대해 해박한 칼빈의 지식으로 보아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Vestigium Trinitatis)에 대해 칼빈이 몰랐기 때문이라고는 결코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거스틴 견해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3위 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 세상 사물을 통해 유비(類比)시킬만한 예증을 자신이 찾아내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칼빈이 어거스틴의 견해가 틀렸다고 보았다면 적극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을 것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암묵적 동의했음이 틀림없다.
칼빈은 성서 해석에 있어 자연 과학을 결코 부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영국 왕립 협회(royal society) 회원의 압도적 다수는 칼빈주의 청교도들이었다. 하지만 칼빈은 과학과 과학자 만능의 엘리트주의자가 아니었다. 칼빈에게 있어 분명한 것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였다. 칼빈이 보기에 하나님의 영(靈)은 특별한 사람들만 배려한 고등 교육 기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보통 학교를 개설하시는 분이었다. 칼빈의 해석학에 대한 평택대 안명준 박사의 명쾌한 논문인 칼빈의 해석학에 있어서의 간결성과 용이성(Brevitas et Facilitas)의 방법론은 칼빈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모세는 지식인 뿐 아니라 무식자의 선생으로도 소명을 받았다. 칼빈은 천문학이나 기타 난해한 것을 배우려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보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2) 자연 과학에 대한 칼빈의 이해
그렇다면 칼빈은 자연 과학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까? 방델(F. Wendel)은 멜랑히톤(Philipp Melanchton)이 자연 과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반면 칼빈은 정치사, 교회사, 문학사와 언어학, 해석학, 철학 등 인문 분야의 방대한 학식에 비해 물리학 또는 자연과학 혹은 수학 등에는 조금도 진지한 관심을 보인 것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유명한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로이힐린(J. Reuchlin, 1455-1522)의 증손자로 어릴 때부터 신동의 소리를 듣고 자라며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에게까지 찬사를 들었던 박학다식의 멜랑히톤에 비해 칼빈이 자연과학 부문에 멜랑히톤 만큼 관심이 덜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저서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 과학에 대해 칼빈의 무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칼빈의 사상에는 분명 일관되게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그것은 과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분명하였다. 즉 칼빈에게 있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세상이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과학은 하나님의 피조의 질서이다. 하지만 칼빈에게 있어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것이 칼빈이 이교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이교도로부터 유래한 것을 모두 거부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일반 은총 교리는 헬라의 문학적이고 학문적인 유산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막았다. 최초의 타락이 과학 분야에 있어서도 붕괴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문주의자로서의 칼빈은 타락이 모든 것을 완전한 부패로 이끌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진리의 빛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교도에게도 비치고 있었다. 만약 성령을 신앙의 유일한 원천으로 본다면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지 않고 성령이 어디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든지 그 진리를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우주론을 성경에 투사시켜 읽던 당시의 일반적 관습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과 창세기의 세계상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었다.
칼빈은 당시 천문학 체계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천문학적 내용을 기술하는 데 있어 통속적으로 글을 썼고 상식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언어로 기록한 반면 천문학자들은 전문가들로, 인간의 두뇌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도의 언어로 기술하였다고 보았다.
칼빈의 해석 방법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가 누구에게든지 이해할 수 있게 묘사되었다는 종교 개혁 이론에 기초한다. 성령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공통된 학교를 개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주제를 선정하였을 것이다. 즉 모세는 교육받은 자의 교사만은 아니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교사였다. 그러므로 모세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평범한 언어를 채택했다. 그렇다면 성경은 보통사람들을 위한 책이므로 천문학 및 다른 어려운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시편 주석에서도 칼빈은 성경의 저자들이 과학적 사건에 대해 감관이 느끼는 대로 묘사했지 과학적 용어로 묘사하려 하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성령께서는 천문학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가장 단순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교훈을 내리기 위해 성령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아무도 그 말씀이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셨다.”
(3)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해석 방법
① 칼빈의 적응(accommodation) 방법
그렇다면 과학의 영역 해석에 대한 칼빈의 방법론은 무엇이었을까? 맥그라스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3 가지 칼빈의 공헌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칼빈은 자연에 대한 과학연구에 대해 긍정적 활력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둘째, 칼빈은 과학 연구의 장애물을 제거한 인물이다.
셀째, 칼빈은 성경을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을 위해 보통학교를 개설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적응의 방법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할 때 겪는 것과 동일한 문제에 부딪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낮추어 내려 오사 우리의 연약한 점에 자신을 맞추신다. 이것은 유아원 선생님이 유아 언어로 말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면서 자녀들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제한 된 지성의 어린 아이에게 그들의 이해와 경험을 능가하는 말과 개념을 사용할 경우 의사 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 수준에 맞는 방법이 요구된다. 이 접근 방법은 칼빈에 의해 적응이라는 용어로 언급된다.
적응(Accommodation)은 라틴어의 수사학자나 법학자들이 청중들의 상황, 구조, 성격, 지적수준, 감정 상태 등에 적응 시키며, 조절하며 적합하게 진행하는 사용법이다. 이 적응의 원리를 일찍부터 이용한 사람 중에는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m), 어거스틴(Augustine) 등의 교부들이 있었다.
칼빈은 신학 언어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칼빈은 “신인동형설”(anthrophomorphism)의 언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원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신인동형적으로 손과 발이 달린 한 인간으로 언급하거나 희생 제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이 적응의 원리에 근거할 때 이해가 가능해진다. 적응의 방법은 일상의 언어와 전문가 사이의 담론의 긴장을 해소하는 도구가 된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어거스틴의 장황한 설명을 반대했다. 칼빈은 신인동형설이라는 언어 자체는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그런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② 창세기 1장 주석에 나타난 해석 방법으로서의 칼빈의 적응(accommodation)
창조에 대해 칼빈은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의 이해를 받아들인다. 이들 견해의 특징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칼빈에게 있어 물체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조화의 하나님이요 완벽한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과학의 문제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므로서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단지 미개인까지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 방식으로 성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해와 달에 대해 칼빈은 창세기가 철학적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밝게 우리들에게 비추는지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신비한 세계를 더욱 탐구하려면 성경이 아니라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보기에 창세기를 서술한 모세는 과학의 언어가 아닌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만일 모세가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그에게 호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들의 수준과 능력에 적응한다. 이것을 문자적 묘사로 보면 안 된다. 창세기의 기자는 학식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원시적인 사람들의 교사로도 임명되었다. 그 때문에 창세기 저자는 배우지 못한 조잡한 교육 수준의 입장에 서지 않고는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김성봉 박사(안양대 신학대학원)는 칼빈의 이와 같은 적응의 방법이 현재의 삶을 위한 목회적 관심까지 염두에 둔 해석 방법임을 상세히 분석한다. 그렇게 볼 때에 칼빈에게 있어 창조의 6일은 24시간의 여섯 단위가 아니었다. 칼빈은 순간 창조 개념을 반대하였다. 성경은 기원전 4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었다. 확장된 시간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사고 방식에 적응한 것이었다. 칼빈은 그에 따라 궁창 위의 물도 구름에 적응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창조과학(creation science)과 조금 다른 해석 방법이다. 즉 칼빈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적응된 것이다.
칼빈의 시대 루터란주의자들은 이미 지동설을 책망하고 있었다. 칼빈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주장을 창세기 주석에서 비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듯 이것은 화이트의 일방적 주장일 뿐 창세기 주석 어디에도 이런 구체적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앞으로 좀더 검토해볼 여지를 남기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설령 칼빈이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잘못 해석 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고 본다. 칼빈은 당시 천문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달이 불명료한 물체라는 것을 인정하나 캄캄한 물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은 달이 불타고 있는 물체일 것이라 보았다. 즉 달은 발광체라고 말한다. 성경이 달을 광명(창 1:15-16)이라고 부르니 성경에 적응하면 달이 광명이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천문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생긴다. 물론 지구도 광명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달이나 지구가 그 중심에 뜨거운 마그마를 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또한 그 실체에 대한 해답이 간단하지는 않다. 즉 발광체든 아니든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과학자들의 견해도 결국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과학자들도 당연히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과학자들을 모두 오류 투성이의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칼빈도 당연히 제한적 지식 아래 잘못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적응 이론 아래에서 칼빈은 자신이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있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에 대해 자유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런 것이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성경 주석이 미숙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성경 원문을 철저하게 연구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탁월한 성경 원문 연구가였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당시 유럽의 인문주의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대충 넘어가는 수준의 능력이나 성품을 지닌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칼빈은 성령이 “저속하고 교육받지 못한 무리들로 하여금 배우는 길을 막아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거리는 쪽을 선택했다”고 주석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떠는 방식으로 몸을 떠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칼빈이 보기에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지동설에 대한 비판에 대항해서 수학적 물리적으로 난해한 점들까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 모세나 선지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었을까?
생물의 “종류(ןים, min)”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1절에 처음 나타난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종류대로의 창조의 문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종류는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םיהלא, Elohim, 40회)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10회)이다. 그럼에도 칼빈은 이 언어를 아주 일반적으로 평이하게 서술한다. 진화론은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1859)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자연 과학의 주요 이슈가 된다. 칼빈의 시대는 아직 진화론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대였다.
칼빈은 종류대로라는 이 단어를 주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석을 기록하는데 있어 당시의 수준에서 단순한 언어로 묘사하려는 입장을 지속한 듯하다.
칼빈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불충분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 계시란 칼빈에게 있어 약간의 섬광과 같은 것으로 비쳐진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러한 광명 속에서 명백히 계시되어지지만 우리의 눈이 신앙을 통해 하나님이 내적 계시에 의해 조명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설명한다(롬 1:19). 칼빈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계시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3. 나가면서: 복음주의 과학관과 적응 방법의 사용
그렇다면 적응의 방법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맥그라스는 “적응”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핵심적인 중요한 논제는 아니었으나 성서 해석과 신학 구조와 관련되어 지속적인 이슈였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신학자 딜렌버거(John Dillenberger)가 보기에도 적응의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자연 과학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이슈의 하나였다. 적응의 방법이 앞으로도 신학의 주요 해석 방법이 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부분에 있어서도 적응의 방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종교 개혁의 중심에 섰던 칼빈도 결코 과학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열린 신학자였으며 과학 연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신학자였다. 물론 칼빈도 간혹 과학적 이론을 바르게 그의 해석에 사용하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적응의 방법 아래에서 그런 작은 오류는 그의 신앙이나 성경 해석 방법에 누(累)가 될 수 없었다. 칼빈은 성서의 기록자들조차 “잘못된 견해에 적응하면서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창조과학자들이 특별히 주목해 귀담아 들어야 될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과학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늘 긍정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은 하나님의 지혜를 들어낼 수 있으며 특별 계시로 재해석되어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였다. 과학의 문제에 있어 해석 방법과 관련하여 적응의 방법을 일관되게 사용한 칼빈은 과학 혁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를 살면서 적응이라는 해석 방법을 통해 성경 해석이 모든 역사, 온누리를 향한 적응된 해석이 되어야 함을 자신의 저작에 일관적으로 흐르게 적용하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루터와 달리 칼빈이 보기에는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도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 될 신학자는 아니었다. 과학의 생소한 이론이나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적응의 방법은 때를 기다린다. 그는 모든 학문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보았던 것이다.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때 우리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의도적이지 않은 이상 실수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진다. 하나님조차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하여 낮아지셨는데 우리 인간이 어찌 실수가 없겠는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어떤 근본주의적 분리주의 경향도 교만의 반영일 수 있다. 칼빈은 이점을 잘 아는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은 칼빈 시대나 모세 시대만의 하나님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상황과 과학의 발달을 분명 예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성경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현재의 책이요 미래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학 만능, 과학주의가 만연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적응은 어떤 것일까? 또 미래에의 적응은 무엇일까?
적응이란 단순히 소극적인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는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촉진하였고 학문의 영역을 회복 시켰을 뿐 아니라 학문을 부자유스러운 속박에서 건져내었고 칼빈주의는 학문적 갈등에 대한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학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학문의 최종적 결과 또한 학문의 자유 아래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적극적으로 과학의 문제에 뛰어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쟁과 협상 없이 승리하는 전쟁이란 없다. 칼빈이 말한 ‘성령의 겸손(condescension)’에 의지하여 학문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겸손히 기다리는 것과 복음의 마지노선을 지키며 양보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진리는 적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분명 칼빈이 사용한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적응의 방법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현대적 이슈를 해석함에 있어서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먼저, 사랑과 평화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사랑과 평화의 질서였다. 이 사랑과 평화는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와해(瓦解)되었다. 적응의 방법은 이 하나님의 본래 사랑과 평화가 어디에 있는 지를 추적한다. 즉 기독론적 사랑과 평화가 창조와 구속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는 개념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 관계가 없다.
지명수 박사(안양대)는 모든 복음이 그 핵심 내용에 있어 동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초의 축복은 가장 넓은 함의와 적용을 갖는 말씀으로 보고 이 최초의 축복을 최초의 복음, 창조의 복음이라고 불렀다. 이 창조의 복음은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축복이 포함될 것이다. 이것은 생태계나 생명 윤리 등을 다룰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신현수 박사(평택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의 실현의 행위로서 샬롬(shalom)의 신학을 제안한다. 구약의 평화는 기본적인 어떤 것으로 사회적, 역사적 및 다른 형태의 변화도 그것의 기본 의미를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생명, 갈증 혹은 기쁨 등과 같이 변화 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다. 평화는 모든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의 부분으로 공동체의 완전함, 건강함, 흠이 없음을 추구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과학관 안에서도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와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하나님의 샬롬의 과학, 하나님의 과학으로서의 샬롬, 즉 하나님의 질서의 샬롬을 촉구한다 할 수 있겠다. 기원과 윤리와 현대적 이슈를 다룸에 있어 과학의 질서 안에 내재된 창조의 샬롬, 하나님의 샬롬을 찾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복음주의는 자연 안에서 찾게 되는 이것들이 성경의 완전한 충족성에 비해서는 비록 작은 빛이기는 하나 여전히 피조된 세계 안에 펼쳐진 자연 계시 안에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록 피조 세계가 샬롬의 질서를 많이 상실하고 파괴된 채로 방치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의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지향하는 가는 복음주의자들의 끝없는 고민이다.
기독 과학 철학자 델 라치(Del Ratzsch)가 말하는 ‘사랑 안에서 진리 말하기/발에 관한 몇 가지 생각’(Speaking the Truth in Love/Some Thoughts About Feet)도 흥미 있는 제안으로 그 중 하나의 도구일 수도 있다. 델 라치는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논쟁 할 때의 세 가지 원칙으로 첫째. 말할 때(Speak) 공동체 내부를 쉽게 깨뜨리는 누(累)를 범하지 말 것(토끼 발을 모두 잘라 버리는 발이 되지 말 것) 둘째, 당신의 입에 당신의 과학적, 신학적 또는 철학적 발을 집어넣지 말고 참 진리(the truth)를 찾도록 애쓸 것(입에 이런 것들이 들어가면 말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어 짐) 셋째, 사랑 안에서(in love) 한 몸을 이루는 (복음의) 친구들에게 총을 쏘지 말 것(그것은 자신의 발을 쏘는 것이요 엽총으로 티눈을 잘라내는 격이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중에 델 라치가 보기에 제일은 사랑이다. 필자가 보기에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한 몸이다.
둘째는 겸손과 기다림의 방법이다.
심오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조차 우리 인간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었다.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부족해서 였다. 적응을 오해하여 성경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잘못 정죄하는 누(累)를 범하면 안 된다. 창조와 과학의 이슈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최고의 과학교과서라기보다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부러 어리석은 인류 역사 모든 인간 남녀노소에게 적응한 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함부로 과학적 원리에 적용시키는 누를 범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성경적이다. 적응의 이론은 인간이 지닌 능력과 한계를 모두 인정하고 성경이 명확하게 계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잘못 적용하여 잘못된 정죄의 오류에 빠지지 말게 하며 겸손히 때를 기다린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는 자연 계시가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에 있어 완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앞서 자신의 주장을 계시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일반 계시의 점진성을 따라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과 신학의 충돌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부분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세속 도시의 발달에 대해 부정적인 프랑스의 자크 엘룰(Jacque Ellul)은 현대의 과학 기술이 기독교적인 인간관, 사회관과 충돌한다고 보는 반면 하비 콕스(Harvey Cox)는 기독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많은 학자들이 양편의 입장으로 갈라서게 된다. 세속 도시와 과학 기술의 부산물 가운데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보게 되는 면에서 복음주의는 양쪽 측면을 관찰하면서 좀더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림이 옳다.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발생하는 성경 해석 상의 모순과 대립을 감정적으로 대처해서 자신의 견해만 진리라 여기고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판넨베르그도 이런 적응 이론이 성경의 영감론을 반대하는 게 아니요 말씀 가운데 모순과 대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셋째, 명료성이다.
겸손과 기다림으로서의 적응은 단순한 소극적 대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료성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당시의 창조 섭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명료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진화론이 과연 성경적 이론 인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문제는 명료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즉 성경과 과학과 피조된 인간에 부여된 양심에 따라 종합적으로 살펴 볼 때에 진화론은 결코 복음주의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다. 여기서 진화론은 명료하게 부정된다. 진화를 부정하는 것은 복음주의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다만 그럼 언제 우주와 생명과 인간이 창조되었는가의 문제는 복음주의자들 안에서도 첨예한 문제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겸손과 기다림의 적응이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이때는 겸손과 기다림 자체가 명료함인 것이다.
넷째, 적응의 적극성이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를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깨닫게 만드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과학에 대해 게으르지 말고 연구하며 접근해 갈 것을 요구한다. 과학은 가만히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늘 방향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접근한다. 적응 이론은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 성경과 과학과 삶 안에서 우리가 가장 합당한 대답을 이끌어낼 것을 요구한다. 즉 적응 이론이 세상을 향한 결코 소극적 대처 방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신학적 해석학에 있어 적응의 방법은 우리들에게 자연 계시에 대한 긍정적 수용을 통해 창조와 과학을 해석하는 데 있어 더욱 적극적인 접촉점(the pont of contact)을 찾아내기를 촉구한다.
마지막으로 적응의 방법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준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들이 성서 문자주의자가 되려는 유혹을 방지한다. 더불어 구원의 핵심이 아닌 창조의 영역의 문제(adiaphora)에 있어서는 보다 적극성과 자유함을 가지고 자연의 노예나 폭군이 아닌 사랑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유대 카발라주의자들이 말하는 침쭘(TZIMTZUM)의 원리도 하나님은 성경에 일부러 모든 것을 담지 않았으므로 우리 인간은 좀더 자유함을 가지고 조금씩 하나님께 다가가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에게 베푸신 신비의 역사를 깨닫기를 원하는 소망의 원리가 있음을 담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생태와 환경은 단순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 자체가 다차원적이다. 이런 다변적 환경에서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과 청지기적 사명은 분명 적응의 원리의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과 관련된 성서 해석에 있어 적응의 해석 방법과 이론은 과학 기술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조덕영 목사
첫댓글 카페지기가 회원님께 드리는 글
전혀 후원이 없습니다 오늘은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먹을게 없으니 늘 아쉬운 소리를 하게됩니다
쌀도 김치도 없어 사야하고 집세..임대료와 통신비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요즘은 쌀을 보내시는분도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가 무척 어렵고 힘든때라
그저 어떻게든 견뎌 보려고 참아 가는데 정작 가난한 사람에게는 재난 지원금도
안주고 돈 벌던 사람들에게만 정부는 도와준다고하니 답답하네요
오늘은 천사의 손길이 되어 주시는 분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절함으로 기대합니다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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