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私學-사립 학교).
문종 때에 태사 중서령(太師中書令) 최충(崔沖)이 후대들을 모아 열성으로 교육하였는데 선비(靑衿)와 평민의 자제가 그의 집과 마을에 차고 넘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재(九齋)로 나누었는데 곧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이었으며 이를 시중 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 불렀다.
양반의 자제(衣冠子弟)들로서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먼저 이 도중(徒中-단체)에 속하여 공부하였다. 해마다 여름철에는 절간을 얻어서 하기학습을 조직하고 도중에서 급제하고 학업이 우수하며 재능이 많으나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을 택하여 교도(敎導)로 삼았다.
그들이 배우는 것은 9경(九經-주역, 상서, 시전, 주례, 예기, 춘추,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과 3사(三史-사기, 한서, 후한서)이며 간혹 선배가 왔을 때에는 촛불(燈燭)에 금을 그어 시 짓기(시간을 따지기 위한 방법) 내기를 한다. 지은 시는 차례대로 방을 내어 이름을 부르고 들어가서 곧 술자리를 베푼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좌우로 벌려 있고 술상을 받들고 오고 가는데 예의가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와의 사이에 질서가 있고 종일토록 시 읊기를 서로 주고 받으니 보는 사람들이 다 아름답게 생각하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후부터는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면 다 구재(九齋)에 적을 둔 사람이었는데 이를 최문헌 공도(崔文憲公徒)라고 불렀다.
또 이 밖에도 문관들로서 도(徒)를 세운 자가 있으니 곧 홍문 공도(弘文公徒)는 시중 정배걸(鄭倍傑)이 세운 것인데 다른 명칭으로 웅천도(熊川徒)라고도 한다. 또한 광헌 공도(匡憲公徒)는 참정(參政) 노단(盧旦)이 세운 것이요, 남산도(南山徒)는 제주(祭酒) 김상빈(金尙賓)이 세운 것이요, 서원도(西園徒)는 복야(僕射) 김무체(金無滯)가 세운 것이요, 문충 공도(文忠公徒)는 시중 은정(殷鼎)이 세운 것이요, 양신 공도(良愼公徒)는 평장(平章) 김의진(金義珍)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낭중 박명보(郞中朴明保)가 세운 것이라고도 하며, 정경 공도(貞敬公徒)는 평장(平章) 황영(黃瑩)이 세운 것이요, 충평 공도(忠平公徒)는 유감(柳監)이 세운 것이요, 정헌 공도(貞憲公徒)는 시중(侍中) 문정(文正)이 세운 것이요, 서시랑도(徐侍郞徒)는 서석(徐碩)이 세운 것이요, 구산도(龜山徒)는 누가 세운 것인지 자세하지 않다. 이에 문헌공 최충도를 합하여 세상에서 12도라고 일컬었는데 그 중에서도 문헌공 최충도가 가장 흥성하였다.
인종 11년(1133) 6월에 결정하기를 “각 도(徒)의 유생 중에서 본래 수업(受業)하던 스승을 배반하고 다른 도에 옮겨 속한 자는 동당감시(東堂監試)에 응시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17년 6월에 결정하기를 “동당감시가 있은 후에는 모든 도(徒)의 유생들이 총 회합할 시일을 국자감에서 알려 주어 50일 동안 학습시킨 다음 해산시킨다. 그런데 절(寺)에 모여서 30일 동안 학습하고 사사 시험(私試-정식 과거가 아닌 시험)에서 시(詩) 15수 이상을 지은 자들에게 대하여는 교도(敎導)가 정밀히 이를 심사하여 각기 그 이름 아래에 접사(接寺-절에서 학습) 며칠, 사사 시험(私試)이 몇 수라고 기록하고 의견을 붙여 보고한 다음에야 비로소 모임에 참가하게 한다. 모든 도의 교도(敎導)로서 접소(接所-글방)를 떠나지 않고 학업을 장려한 자에게 대하여는 학관(學官)이 결원이 있을 때에 그를 우선적으로 그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표창하는 뜻을 보인다”고 하였다.
공민왕 6년(1358) 7월에 한림원(翰林院)에서 말하기를
“그전에는 하기학습(夏習)이 끝난 후에 반드시 지제고(知制誥)로 하여금 시험관을 삼아 학생들의 실력을 시험하였는데 근래에는 폐지하고 실행하지 않으니 이를 복구시키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7년 6월에 12도(徒)에 삭시(朔試-매달 초하룻날에 보인 시험)를 실시하였다.
공양왕 3년(1392) 6월에 12도를 폐지하였다.
< 고려사 선거지 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