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변경하던 중 혼란이 생겨, 박형준의 딸을 정선미라고 했네요. 죄송합니다. 박형준의 딸은 당연히 박선미겠죠. 1회에서도 고쳐놨습니다. 정선미가 더 부드러운 느낌에 그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끊어서 올리니 매일 쓰게 되고 긴장도 있고 그렇네요.
그림자 살인(2)
이 와중에 살인 사건이 한 건 더 발생했다. 첫 번째 살인이 있고 거의 한 달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피살자는 자신이 살던 집 앞의 놀이터에서 발견되었다.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 했다. 주머니 속에는 지갑도 없었다.
김종우는 이정태가 끝까지 범행을 부정하자 마지막 수단에 희망을 걸었다. 목격자인 김현주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나 김현주는 경찰서로 다시 불려오게 되었다. 김종우는 김현주에게 이정태를 보였다. 이정태는 다른 형사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이정태 쪽에선 당연히 김현주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아니에요. 내가 본 사람이 아니에요.”
김현주의 냉랭한 답변이었다.
“몽타주 하고도 전혀 닮지 않았잖아요.”
“혹시나 해서요. 직접 보면 다를 수도 있으니까.”
방을 나온 김종우와 김현주는 복도를 걸어갔다. 그때 4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저쪽 복도에서 동료 형사와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남자는 최근 놀이터에서 피살된 남자의 친구로 참고인 자격으로 불려왔다.
“어떻게 됐어?”
동료가 물었다.
“아니래.”
복도가 그리 넓지 않아 그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다 잠깐 지체됐다.
첫 번째 살인이 발생한 지 한 달 하고도 반이 흘렀다. 경찰에서는 여전히 이정태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아 속을 태우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이정태를 계속 잡아 둘 근거가 없었다.
김종우는 그 시각, 김현주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김현주는 5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지은 지 족히 십 년은 넘어 보이는 낡은 아파트였다. 늦은 오후였다. 비까지 온 터라 건물은 검은 흔적으로 그 모양새가 더 엉망이었다.
김현주가 문을 열었다. 떨고 있었다. 거실을 둘러보니 옷가지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누군가가 침입을 한 것이다. 컵은 부서져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좁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침대에는 기다란 머리카락 몇 올이 선명히 놓여 있었다. 얼핏 여자 머리카락 같았는데, 김현주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화장대 거울에는 빨간 립스틱으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욕지거리들이 조잡하게 쓰여 있었다. 늦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베란다 쪽 문을 잠그지 않아 열어두었다는데, 그곳으로 침입한 것 같았다. 2층이었으니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현주는 차츰 안정을 취해갔다.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이 살인을 저지른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서로 꺼내지 않았다.
김현주는 흐트러진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김종우는 잠깐 도와주다가 액자 사진을 보았다. 귀여운 소녀와 파란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의 사진이었다. 김현주는 커피라도 대접하겠다고 했다.
환한 불빛이 식탁보에 그림자를 펼쳤다. 동그란 잔 속에 든 커피가 원을 그렸다. 김현주는 김종우의 맞은 편에 조용히 앉았다. 벽에는 모네의 ‘아르장퇴유 부근의 양귀비꽃’이란 그림이 담긴 달력이 걸려 있었다. 하늘거리는 붉은 꽃잎들 사이로 희미하게 걸어가는 여자와 소녀. 확실치는 않지만 모녀 관계처럼 보인다. 그들 모두 노란 테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림 속 여자는 파란 양산을 펼친 채였다. 완만하게 흩어진 구름 속으로 연 청색 하늘이 간간이 비쳤다. 모든 형태가 불확실하게 서로의 공간을 넘나들고 있었다. 김종우가 맡고 있는 지금 이 사건처럼.
김현주의 집을 나와 자동차 안에서 김종우는 김현주를 걱정하고 있었다. 김현주의 집을 침입한 이가 단순한 빈집털이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범인은 김현주가 목격자라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쉽사리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김현주의 증언이 생각났다. 김현주가 사건이 발생한 건물 옆을 지나가다가 건물에서 튀어나온 어떤 남자와 부딪쳐 넘어졌다고. 그 남자가 김현주를 봤다면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때부터 김현주 앞에 살인범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김종우는 김현주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김현주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날은 김현주가 술에 취해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 가던 골목길을 꺾어 들어갔다. 괜히 불안하던 김종우는 조심스럽게 뒤를 따르다 흰 모자를 눌러쓴 회색 체육복 차림의 남자가 갑자기 김현주가 꺾어 들어간 골목길 쪽으로 급히 걸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김종우는 위험을 느꼈다. 김현주가 꺾어 들었던 골목길 앞에 섰지만 김현주를 볼 수 없었다. 김현주를 따라가던 체육복 차림의 남자도 마찬가지로 볼 수 없었다. 김종우는 다급해져 김현주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달려갔다. 김현주가 살고 있는 집의 창문은 캄캄했다. 김현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싶었다.
김현주의 집 앞에 섰을 때였다. 어둠 속에 잠긴 복도였다. 계단 창문으로 다행히 김현주가 보였다. 김현주의 손에는 음료수가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때 위층 계단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계단 쪽으로 시선을 던진 김종우는 위층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발자국도 다음 층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김종우는 그 발자국을 따라 계단을 뛰어올랐고 어느 순간 그 발자국이 딱 멈춰 섰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을 압박하는 정적뿐이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열쇠로 잠겨져 있다면 그 놈은 지금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김종우 쪽으로 달려드는 길 이외에는. 김종우는 천천히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그때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김종우는 재빨리 그것을 피했다. 생각 외로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날쌨다. 김종우를 뿌리치고 달아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종우는 그의 목을 낚아챘다. 김종우의 손에서 달아나려 하던 그는 발을 헛디뎠고 결국 계단을 굴러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칼은 계단 난간 틈 사이로 떨어졌다. 계단을 피해 빈 공간으로 절묘하게 떨어졌다. 누군가가 아파트 내로 들어서고 있다면. 김종우는 계단 밑을 보았다. 다행히 칼은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칼이 떨어진 바로 옆에서 김현주가 놀란 얼굴로 김종우 쪽을 보고 있었다.
김종우는 바닥에 쓰러져 있던 자의 모자를 벗겨냈다. 달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가 아니었다. 박선미였다.
김종우는 박선미를 꼭대기 끝 층 복도로 데려갔다. 옥상 문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간신히 열고 들어간 옥상은 썰렁했다. 밤바람은 시원했다. 달빛이 옥상의 면들을 여러 직사각형으로 나눴다. 가장 큰 직사각형 속으로 그들은 들어갔다. 옥상 끝 부분이었다. 박선미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네가 좀 전에 무슨 짓을 한 건 줄이나 아냐?”
박선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날 죽이려고 한 거냐?”
“아저씰 죽이려는 게 아니였어요.”
“그럼?”
“그 여자요.”
그 여자는 김현주를 가리키고 있었다.
“왜?”
박선미가 눈을 치켜떴다.
“그 여자가 그 놈을 풀어주게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이정태 그 놈이 범인이라구요. 정말 모르시겠어요? 그날 그 놈은 우리 아빠하고 만났단 말이에요. 날 그렇게 만든 놈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아빠하고 그 놈은 분명 싸웠어요. 아빠가 좋은 말로 보냈을 리 없잖아요. 그러다가 이정태가 죽인 거라구요.”
“아니라는데 계속 고집 피울래.”
“이정태와 짠 게 틀림없어요. 내 말이 맞다니까요. 뭘 모르는 건 아저씨라구요.”
순간 김종우는 박선미의 상상에 말문이 막혔다.
“그런다고 네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아. 네가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아. 정말 그 여잘 죽이기라도 할 생각이었냐?”
박선미는 여전히 분한 얼굴이었다. 정말 위험한 소녀였다. 김현주의 집에 침입해 그 난장판을 벌여놓은 것도 박선미 짓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이정태가 경찰서에 잡혀 있었다는 것과 김현주가 이정태는 범인이 아니라고 한 사실을.
“엄마가 말해줬어요. 이정태가 경찰서에 잡혀 있다고. 제가 이정태를 잡는다고 또 집을 나가려고 하니까. 그리고 두 번째 건 아빠 친구가 알려 줬어요.”
“아빠 친구라니?”
“아빠한테는 절친한 친구 분이 계셨어요. 그 분이 제게 이정태를 풀어주게 도와준 사람이 김현주라고 했어요. 그 분이 김현주의 집도 가르쳐 줬어요.”
“그 사람 이름 혹시 아니?”
“잠깐만요……. 아, 생각났어요. 이진철이라고 들은 거 같아요.”
김종우는 피살자에게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는 박선미의 말에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박선미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김종우는 서로 돌아왔다. 자신의 자리에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이진철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답을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의자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몸 속 깊이 누적되어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때 뭔가 떠올랐다. 이진철이 어떻게 알았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진철이 박선미를 이용해서 김현주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점이다.
김종우는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건너편 후배 형사에게 말했다.
“이진철이란 사람 조사 좀 해봐.”
“그게 누군데요?”
“박형민의 친한 친구였대.”
“알았습니다. 근데 방금 이진철이라고 했습니까?”
“그래.”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어디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들으니까 생각이 안 나서. 어쨌든 조사해 보겠습니다.”
이진철이란 인물은 조사할 것도 없었다. 후배 형사는 다른 형사에게 이진철을 언급했고 그가 이진철을 떠올렸던 것이다.
“너도 왜 전에 복도에서 봤잖아. 놀이터 피살 사건 그거 참고인 자격으로 온 사람.”
김종우는 그때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