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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_내일을 꿈꿀 수 있는 세상
마태복음 27:3-5
3. 그 때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그래서 은전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4.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5. 유다는 그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윤 대통령의 방일 굴욕 외교로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시민사회는 어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한일 정상회담 규탄, 윤석열 정부 망국외교 심판, 강제동원 해법 폐기, 일본 사죄배상 촉구 3차 범국민대회'를 열고 3.16 외교 참사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1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시민들은 윤 대통령을 향해 "조선 총독이냐"며 "대통령직에서 내려와라" "심판하자" "몰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제2의 을사늑약을 규탄했습니다. 역사의 시계를 120년 전으로 돌리려는 친일 정부와 친일 여당의 기도는 우리 국민들에 의해 철저히 심판 받을 것입니다.
3월 9일 이재명 대표의 경기지사 시절 초대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전 아무개 씨가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되었습니다. 사망 현장에서는 전 씨가 쓴 노트 6쪽 분량의 유서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전 씨는 유서 첫 장에 이재명 대표를 향한 심경을, 나머지 다섯 장에는 검찰 수사에 대한 억울함과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각각 썼다고 합니다. 유족 측이 유서 공개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어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파악되지 않고 있죠.
10일 수사당국 등에 따르면 전 씨가 남긴 유서에는 "검찰 수사가 조작됐다" "사건 조작이 너무 많다" "나는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인데 검찰 수사 대상이 돼 억울하다" "(사건 당시) 행정기획국장이어서 권한도 없었는데 피의자로 입건됐다"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등 극도의 억울함과 고통을 토로하는 내용이 담겼다고 합니다. 유서에는 이 대표에 대해 "이제 정치를 내려놓으시라" "더 이상 희생은 없어야 한다"는 내용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어떤 맥락에서 나온 대목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전 씨는 경기주택도시공사(GH)에서 경영기획본부장이자 사장 직무대행을 맡다가 지난해 12월 말 퇴직했고 퇴직 전후에 이른바 '성남FC 의혹' 사건의 주요 관계자로 지목돼 검찰 조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검찰은 이재명 수사에 8개 부서의 검사 65명과 수사관과 158명 등 총 223명 투입하였습니다. 1년 반 동안 332건의 압수수색을 하였지만 드러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경기도와 성남시 공직자들에 대해서도 무차별 압수수색과 소환조사를 벌이며 말단 직원들까지 기소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언론은 검찰 정보를 확인 없이 확대 재생산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유서 관련 보도에도 검찰의 책임은 쏙 빼고 이재명 대표에게 책임을 씌우는데 올인하고 있죠.
전 씨의 죽음은 결국 이 대표를 향해 걸리라는 식으로 검찰이 벌여온 투망식 수사에 따른 결과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사 도중 받게 된 유무형의 인권 침해로 인한 극도의 억울함과 모멸감, 별건 수사로 돈 문제 등 개인적 치부가 노출되는 데 따른 불안감, 가족‧친척‧지인들에 대한 미안함 등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는 지금까지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부지기수였던 거죠. 특히 윤석열 검찰에서 이런 비극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내일’이라는 드라마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자살 예정자를 살리는 저승사자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드라마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된 삶에 지친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현장에 저승의 위기관리팀에 소속된 저승사자들이 개입해 자살로부터 그들을 구하는 줄거리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이 내일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이야기죠.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심금을 울립니다. 그러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는데 저는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학폭으로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보낸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서도 고통을 겪는 이야기, 계속 실패하는 공시생,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아파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참전용사와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과거를 상기시켰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모른척 외면하고 있는 ‘나라를 위해 희생하기도 하였고, 또는 희생당하기도 했던 이야기’입니다
이 드라마는 누구에게는 내일에 대한 설레임이 누군가에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힘든 삶이 될 수 있음을 공감하게 합니다. 한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20년 가까이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자살율이 높다는 것은 내일에 대한 설레임이나 기대 보다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죠.
2021년 한국의 자살률은 26.0명이었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한 해 26명이 자살했다는 의미죠. 같은 기간 OECD 국가 평균 자살률은 11.3명이었으니 두 배가 넘는 수치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해 1만3천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특히 10∼30대의 젊은 층의 사망 원인 중 자살이 1위라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나라 중 자살률이 이렇게 높은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면서도 자살률이 높은 모순적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죠.
전문가들은 양극화에 따른 상대적 빈곤 등을 자살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과 신분 격차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자살률을 2027년까지 30% 이상 낮추기로 하고 자살위험 요소 감소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감소 대책으로 번개탄 생산 금지안을 내놓아 비아냥을 샀습니다. 이는 근본적인 대책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자살의 원인이나 배경 등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인데 자살 도구나 수단만 규제하면 자살률이 과연 떨어지겠습니까?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 사람이 번개탄이 없다고 자살을 포기할까요? 핵심은 사람을 자살로 내모는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것이어야 하는데도 말이죠.
한국이 OECD에서 1등 하는 게 또 있습니다. 우울증 유병률이죠. 2021년 OECD 평균은 30%인데 한국은 36.8%입니다. 우울증이 있으면 자살 위험률이 4배나 높아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자살 원인 가운데 60% 이상이 우울증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죠.
우울증을 일으키는 요인 중 핵심은 삶의 만족도입니다. 통계청이 2019~2021년 조사한 자료를 보면, 한국인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5.9점입니다. OECD 평균인 6.7점에 크게 못 미치죠. 이 조사에서 눈에 띄는 항목이 있습니다. 사회적 고립도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어려울 때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 있냐”는 질문에 “없다”는 응답이 18.9%였다고 합니다.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에서는 2~4% 정도였죠.
한국의 자살 사망자 51.1%가 40~60대입니다. 직장갑질119가 노동자 161명의 자살 원인을 분석했는데, 가장 많은 이유가 과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자살률을 낮추겠다면서 동시에 노동개악을 거세기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정부는 노동시간 유연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에 과로의 위험성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죠. 주 52시간을 3개월 단위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이럴 경우 최장 4주 연속 69시간 근무가 가능해집니다. 심지어는 연속 휴식 시간조차 제한을 두지 않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합니다. 이는 현행 노동부 고시로 정해진 과로 산재 기준을 크게 벗어나는 것인데도 말이죠.
청소년 사망 중 60% 이상은 자살로 인한 것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을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교육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교육 개혁을 명분으로 이에 역행하는 정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고교 내신 성취평가(절대평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고교학점제인데 2025년부터 시행하겠다고 합니다.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고교 서열화가 심화되고, 중학교 때부터 입시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죠. 정부의 한쪽에선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걱정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몰고 있습니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도 유달리 높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60대는 33.7명, 70대는 46.2명, 80세 이상은 67.4명입니다. OECD 평균보다 2~3배는 높죠. 최근 정부는 적자가 쌓인다는 이유로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제도를 폐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부산과 서울 등 지자체는 국비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정부는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노인 무임승차 정책으로 노인 자살자 수가 크게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노인들이 교통비 제약 없이 이동하면서 외부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고 우울증 감소로 이어졌다는 것이죠. 이를 비용으로 환산하면 연간 3,600억 원 정도입니다. 노인 자살률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노인 무임승차제도는 보편적인 노인복지의 일환으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국비 지원은 당연한 것인데도 정부는 자신들을 찍어준 노인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중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그 수가 하루에 36.6명, 시간당으로는 1.5명입니다. 정신건강, 경제적 궁핍, 질병, 가정불화, 학업이나 업무 스트레스 등 원인이야 다양하고 복합적입니다. 누군가는 기득권 카르텔에 대항한다고 찍혀서 검찰 조사를 받다가 죽음을 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기득권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이죠. 아프고 상처 입은 이들을 보듬기 위해서는 사회 안전망이 촘촘하고 튼튼하게 구축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약자들을 위한 예산이 많이 편성되어야 하는 데 오히려 지금 우리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예산을 없애고, 부자 감세 등 가진 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일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자살과 관련된 인물은 총 6명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5명, 신약에서 1명입니다.
구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자살자는 아비멜렉입니다. 기드온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배다른 형제 70명을 죽이고 권력을 쥔자죠. 집권 3년 차에 자신을 도왔던 세겜성이 돌아서자 아비멜렉은 세겜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데베스성으로 처들어갑니다. 거기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머리를 맞아 절명하기 직전, 여자의 손에 죽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병기병의 손을 빌어 자결하죠(삿 9장).
두 번째는 사울 왕입니다. 다윗과의 애증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다 블레셋과의 전투 중 최후를 맞게 됩니다.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아들 세명을 잃고, 자신도 화살에 맞아 부상당합니다. 사울은 적에게 붙잡혀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노라고 무기 당번에게 자신을 찌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무기 당번이 망설이자 손수 칼을 뽑아 자결하였죠.
세 번째는 사울 왕의 무기 당번입니다. 그는 사울이 죽는 것을 보고 자기 칼을 뽑아 자결하였습니다(삼상 31장).
네 번째는 아히도벨이란 사람입니다. 다윗에게 반역한 셋째아들 압살롬에게 다윗을 궤멸시킬 모략을 제시했으나 압살롬이 자신의 계략을 수용하지 않자, 압살롬이 멸망할 것을 직감하고 목을 매 자살합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라고 조언한 인물이죠(삼하 17장).
다섯 번째는 시므리왕 입니다. 쿠데타로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되어 24년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바아사가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엘라 왕 2년 차에 그의 군대 장관이던 시므리가 술에 취한 왕을 죽이고 바아사 가문의 모든 남자를 죽입니다. 하지만 시므리의 왕위는 단지 7일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강력한 장수 오므리가 깁브돈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하다 말고 돌아와 시므리의 쿠데타를 종식시켰기 때문입니다.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들어가 스스로 타 죽습니다(왕상 16장).
신약성서에서 자살 사건의 주인공은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회계를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배반자로 지목당한 사람이죠. 예수의 말씀대로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군졸들과 무리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죠. 거기서 예수님을 잡아가도록 앞잡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관정으로 끌려가 온갖 모욕을 당하시며 심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기로 결정합니다(마 26:66). 가룟 유다는 저들의 결정을 목격하며 당황하였고 자책감을 갖게 됩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들을 돌이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 하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몸값으로 받은 은전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이라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몸값으로 받은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설명합니다.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말이죠(행 1:18).
성서에 나오는 6명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모두가 정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정치가 아닌 불의한 권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비멜렉과 시므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사람입니다. 아히도벨은 쿠데타에 협력한 신하죠. 사울 왕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다윗과 경쟁했던 인물로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한 인물입니다. 절차적 정당성은 있으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왕입니다. 무기 당번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없이 그저 충성스런 신하였을 따름입니다.
신약성서의 가룟 유다는 조금 다른 이유로 죽음을 택합니다. 마태복음에 따른다면 유다는 ‘열성적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메시아 왕국의 출현을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가 어긋나자 실망하여 스승을 배신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일각에서는 예수님이 위기에 빠지면 달리 행동할 것을 기대 하였을 거라고도 추론합니다. 어쨌든 유다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후회하며 자살을 택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건 성서에서 건 자살은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 중 가장 가난한 계층에 해당하는 '의료급여 수급자'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41.3명 이었습니다. 이는 상위구간의 10만 명당 17.0명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던 거죠. 상위 구간에 속한 사람들의 자살은 정신적 문제나 급격한 경제적 몰락, 혹은 검찰 조사 등 스트레스와 연관이 많습니다.
그러니 정부가 약속한 대로 국민 자살률을 낮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재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수준을 높여주고, 빈곤선 아래로 추락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합니다. 질병이나 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을 낮추는 각종 예방대책과 조치를 강화하고,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질병과 장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도록 도우면서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도록 각종 사회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죠.
우울과 불안, 수면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이대로 사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증상 자체를 완화하는 치료도 필수적이지만 평소에 자신의 생명이 그럼에도 지켜야 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과연 이런 일에 관심을 갖고 나설까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황당한 대책들로는 어림없습니다. 이 정부가 자신들을 돌이켜 보고 회개하지 않는 한 우리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점점 커지게 될 것입니다.
‘내일’이라는 드라마는 고통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들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합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성서의 가르침이나 자기가 지은 업대로 열매를 따 먹게 된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바꿀 수 없는 우주의 원리입니다.
백성들을 괴롭혀 자살하게 하거나 그런 환경을 만들며 자산들의 욕망을 채우는 자들은 그 죄의 대가를 스스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소외 계층, 가난하고 병들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이들의 내일을 되찾아 주려 애쓰는 모든 사람들 위에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3. 3. 19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