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2대 무왕 대무예(大武藝, ?~737)는 나라를 잘 다스린 임금이지만, 친동생인 대문예(大文藝)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비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당시 초강대국인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왕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다
대무예는 발해의 시조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719)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719년 왕위에 올라 737년에 붕어했지만, 태어난 연도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동생 대문예가 발해 역사상 처음으로 705년 당나라에 숙위(宿衛, 당나라 궁정에 머물며 당과의 교섭을 맡은 자)를 하러 간 것을 고려할 때, 705년보다 15~25년 정도 앞선 680년대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대무예는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당나라 영주(營州, 지금의 조양)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하겠다.
대무예는 독립국가 건설을 방해하는 당나라 군대를 격퇴하며 발해가 건국되는 과정을 몸소 체험하며 성장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후계자로 키워진 만큼, 누구보다 독립국가의 소중함을 절실히 이해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30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만큼, 정치 초보자의 어리숙함이 아닌 노련한 정치가로서 임금의 역할을 수행했다.
영토를 크게 넓힌 무왕
무왕은 왕위에 오르자, 인안(仁安)이란 연호(年號)를 제정했다. 동아시아에서 연호를 제정한다는 의미는 독립된 천하의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구려가 태왕(太王, 황제와 같은 의미)이란 호칭을 사용하던 4세기 후반부터 멸망 때까지, 신라가 법흥왕 23년(536년)에서 진덕여왕 2년(648년)까지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발해의 경우는 699년 고왕이 천통이란 연호를 사용한 이래로 멸망 시까지 줄곧 연호를 사용했다. 무왕은 연호 사용을 지속함으로써, 발해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제국의 위상을 과시했다.
무왕은 왕위에 오른 후, 대외확장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그는 727년 발해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낸다. 이때 보낸 국서(國書)에서 “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국을 감독하니 고구려의 옛 거주지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고 표현할 만큼 그의 팽창정책은 성공적이었다. 발해는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옛 고구려 영토를 빠르게 회복했다. [신당서]에는 그가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이민족(東北諸夷)들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다고 했다.
발해의 성장은 흑수말갈과 당나라를 긴장시켰다. 흑수말갈은 사람들이 거칠고 수렵을 잘하며 보전(步戰)에 능해, 고구려 동북쪽에 위치한 말갈 부족들 가운데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다. 한편 당나라는 발해가 곧 과거 고구려처럼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며, 동북지역에 걸친 자신들의 이익을 훼손할 수 있는 두려운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결국 발해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흑수말갈과, 발해를 견제할 필요성을 가진 당나라는 서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722년 흑수말갈의 추장 아속리계는 당나라를 직접 방문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그에게 벼슬과 선물을 듬뿍 주는 등 크게 환대했다. 726년에는 당나라가 흑수말갈을 흑수주(黑水州)로 삼는다고 공포하여,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특별한 관계임을 선언했다.
흑수말갈 공격 때문에 빚어진 형제간의 갈등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서도, 발해에 통보하지 않은 것은 장차 두 세력이 발해를 공격해올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무왕은 곧 아우 대문예를 시켜 흑수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런데 아우 대문예는 일찍이 당나라의 수도에서 오래 머문 바가 있어서, 당나라의 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는 출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흑수말갈을 공격한다면 당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당나라와의 전쟁은 발해를 멸망시키는 길이 될 수 있다. 당나라는 발해에 비해 월등히 군사가 많다. 지난날 고구려가 강성하여 30만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와 싸웠지만 결국 멸망했다. 지금 발해의 군사 수는 고구려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우리는 당나라에 대항해 싸워서는 안 된다.”
하지만 무왕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출전을 강요했다. 대문예는 군사를 이끌고 흑수말갈과의 국경에 도달해서, 다시금 글을 올려 흑수말갈 공격에 반대했다. 그러자 무왕은 친척 형인 대일하(大壹夏)로 사령관을 교체하고, 대문예를 불러들여 그를 처벌하고자 했다. 그러자 대문예는 두려워서 그만 당나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당나라와의 전쟁
무왕은 720년 당나라에서 거란(契丹)을 함께 공격하자는 제안을 해오자, 거절을 한 바 있다. 그것은 거란이 멸망하면, 당나라의 다음 목표가 발해가 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흑수말갈을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발해의 안전이 다시 위태로울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당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흑수말갈을 공격하지 못한다면, 이미 굴복시켰던 다른 말갈족들의 이탈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공격 강행을 명령한 것이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망명을 한 대문예를 당나라에서 크게 환영해 받아들이자, 무왕은 크게 화가 나서 당나라에게 대문예를 죽여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무왕의 요청을 거절하고 대문예를 잠시 피신시켰다. 그리고 발해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를 죽이지는 못하지만 영남(嶺南, 남중국)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대문예가 영남 땅으로 가지도 않은 것을 안 무왕은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강력히 항의를 했다.
730년 당나라의 간섭을 받던 거란이 당나라와 대립하던 유목제국인 돌궐 편에 서서 당나라에 맞서게 되었다. 무왕은 거란을 지원했으나, 732년 3월 거란이 당나라에 크게 패하고, 이웃한 해족(奚族)마저 당나라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동안 당나라는 발해에게 대문예에 대한 정보를 흘린 관리를 처벌하고, 대문예를 일시 유배하는 등, 외교상의 명분에서 계속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힘에서 자신감을 얻은 당나라는 732년 7월 발해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에 대한 처벌 요구를 중단하도록 요구하고, 만약 발해가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 발해를 향해 쳐들어가겠다고 협박을 해왔다. 게다가 발해의 흑수말갈 공격에도 불구하고, 728년 흑수말갈은 다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과 협력관계를 강화했다.
이렇게 발해 주변의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무왕은 결국 중대 결단을 내렸다. 당나라가 장차 발해를 공격해올 경우, 전진기지가 될 산둥반도 북쪽에 위치한 등주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732년 9월 장문휴(張文休) 장군이 이끈 발해군은 발해만과 황해를 구분 짓는 묘도열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했다. 발해군은 등주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성을 함락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대문예를 시켜 유주(幽州, 하북성 일대)의 군대를 동원해 발해군을 막게 했다.
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던 무왕
대문예가 당나라 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무왕은 너무나도 크게 분노했다. 동생이 정책 차이로 인해 당나라로 망명한 것도 용서 못할 일이지만, 이제 당나라의 앞잡이가 된 것은 용서가 아니라 처벌을 해야 할 일이었다. 무왕은 자객단을 당나라로 파견했다. 발해의 자객들은 천진교 남쪽에서 대문예를 죽이려고 덤볐으나, 그를 호위하는 당나라 병사들 때문에 암살에 실패하고, 낙양 근처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암살에 실패하자, 무왕은 733년 3월 당나라와 맞서는 거란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거란, 발해, 돌궐까지 힘을 합쳐 당과 맞서, 당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위급함을 느끼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나라는 신라에 함께 10만 대군을 동원해 발해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추운 날씨 탓에 그들은 힘 한번 써보지 못했다. 무왕은 다시 군대를 보내 당나라의 마도산(馬都山, 현 하북성 진황도시에 위치한 도산)을 공격했다.
미움보다 더 중요한 국익
하지만 734년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변했다. 당나라가 거란을 크게 격파하면서,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 거란이라는 걸림돌이 사라졌다. 또한 돌궐마저 카한이 죽임을 당하면서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국제 정세가 변해가자, 무왕도 달라졌다.
736년 무왕은 그간 전쟁에서 당나라 포로를 돌려보내면서 당나라에 화해를 요청했다. 당나라도 그간 붙잡아 두었던 발해 사신을 풀어주었다. 737년 무왕의 아들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이 되자, 발해는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동생에 대한 미움이 컸던 무왕이지만, 무엇보다 우선시한 것은 그보다 나라의 이익이었다. 무왕이 흑수말갈을 강력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당나라가 발해를 앞뒤에서 견제하려는 정책은 무산되었다. 등주 공격을 계기로 741년까지 흑수말갈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무왕은 당시 최강대국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도 마다치 않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당나라가 발해를 결코 얕잡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무왕이 흑수말갈 공격을 주저했더라면, 또 당나라의 눈치만을 보고 움츠렸다면, 발해는 주변의 여러 부족들과 소국을 거느린 강대국으로 결코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발해의 국가적 위상을 크게 높인 임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