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마당 제30호-겨울에 잃어버린 것들 2/이어령

[하서문학]

하서문학회 평창문예대학

나눔 마당 - 名詩 ‧ 名文 감상

제 30 호(2014. 11. 26)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 2/이어령

나는 한 남자를 알고 있다. 그러나 굳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 그 남자에게 하나의 고유명사를 붙인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조그만 한 컷의 삽화,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한 컷의 삽화다. 그 남자는 언제 보아도 가난하다. 그런데도 그가 언제나 부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그의 일생은 아주 어린 시절, 변변히 자기 이름도 쓸 수 없었던 그런 어린 시절, 어느 겨울날 아침에 선고를 받았다. 그는 겨울에 아버지로부터 값비싼 털모자를 선물로 받았다. 그 모자가 에스키모인들이 쓰는 것 같은 수달피 가죽의 털모자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얀 방울 술이 달린 스키이 모자였는지, 또 그렇지 않으면 셀룰로이드 안경이 달린 파일럿 모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시골에선 아주 보기 드문 모자, 서울 백화점에서 산 값비싼 겨울 털모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어느 겨울날 아침, 이 모자를 자랑하려고 밖에 나갔다가 일생을 지배하는 그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얼음이 깔린 마을의 공터에 아이들이 모여서 팽이를 치고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그들의 팽이가 어떻게 생겼으며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시골 아이들은 장난감 가게에서 팽이를 사지 않는다. 돈이 없다는 이유도 있지마는 그들은 팽이를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산에서 팔뚝만 한 나뭇가지를 잘라다가 배추 밑동을 깎듯이 낫으로 깎아 원추형을 만든다. 그리고 뾰족한 부분에 부서진 자전거에서 빼낸 쇠구슬(베어링)을 박는다. 그것을 구할 수 없으면 못을 박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든 팽이에 손때가 묻고 길이 들면, 무슨 신경을 가진 곤충처럼 그것은 부드러운 날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것이다

똑같이 기계로 깎은 팽이가 아니므로 그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도는 시간도 또한 제각기 다르다. 아이들은 이 팽이를 가지고 경주를 한다. 그래서 가장 오래 돌고 힘이 세고 또 가장 길이 잘 든 팽이를 가진 아이는 마을 아이들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털모자를 쓴 아이는 지주의 아들이었다. 으레 팽이는 장난감 가게에서 사오게 마련이었다. 그 애는 다른 아이들처럼 나무를 어떻게 찍어야 하고 낫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 애는 나무 팽이를 만들지 못한다.

나는 그 남자의 비극을 알고 있다. 그 겨울날 아침에 일어난 사건을, 그 운명과도 같은 사건을 나는 알고 있다. 털모자를 쓴 아이는 그 마을에서 제일 잘 도는 팽이를 갖고 싶었고, 가난한 농가의 아이들은 포근하고 멋진 그 털모자를 부러워했다. 겨울이었던 것이다. 나무도 창문도 강물도 모든 것이 얼어붙어 꼼짝도 않은 겨울이었던 것이다. 그런 날 아침에 요술사의 채찍 같은 팽이채가 침묵의 얼어붙은 허공을 자르고 울리면 팽이가 돌아가는 것이다. 얼음판 위에서 무슨 신경을 가진 곤충처럼 팽이가, 그리고 모든 것들이 돌아가는 것이다. 털모자를 쓴 아이는 황홀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경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을 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그 팽이와 값비싼 모자를 바꾼 것이다. 모자의 털이 수달피와 같은 값 비싼 가죽이었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털이라 하더라도 돌아가는 그 팽이만큼 겨울 추위를 잊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도 팽이보다 털모자가 더 귀중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이 더 값비싸다거나 그런 모자를 살 만한 돈이면 시골 아이들이 깎아서 만든 그따위 팽이쯤은 수백 개를 사고도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겨울 아침 햇살에 번쩍이는 빙판 위를 돌아가는 팽이만이 그에게는 즐겁고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움직이는 것, 겨울의 그 침묵에서 움직이는 것을...

그 사건이 그의 아버지를 실망하게 한 것이다. 그는 많은 땅을 상속받아야 할 맏아들이었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 재산을 지키고 늘려야 할 장손이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가 실없이 값비싼 털모자와 팽이를 바꾸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와 집안 식구들은 너무나 낙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를 바라보고 생각했던 것도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날 그는 심한 매를 맞았고, 아궁이의 장작불 속에서 그의 팽이채와 박달나무 팽이는 재가 되었다. 눈물 자국처럼 재가 되었다. 그 뒤에도 놀림을 당하고 그러다가 끝내는 육친들로부터 돌림을 받는 생이 그 겨울날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하찮은 일, 작은 사건이, 우연한 그 겨울날 아침에 그의 전 생애의 운명을 선고해 버린 것이다.

털모자와 팽이를 바꾸었듯이 그는 일생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름진 많은 땅을 휴지나 다름없는 원고지와 바꾸었다. 땅을 탕진한 지주의 아들은 시인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많은 집과 많은 가구를 한 번 울렸다 영원히 사라지는 하나의 소리와 바꿔버렸다. 그는 음악가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화수분 단지처럼 하얀 쌀이 쏟아지는 정미소를 팔아서 허공 속에서 외치고, 발을 구르고, 웃고, 눈물을 흘리는 몇 시간의 열정을 사려고 했다. 그는 연극배우가 되어 무대 위에서 살려고 했던 것이다.

털모자와 팽이를 바꾸던 어느 겨울날 아침의 햇살은 평생을 두고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털모자는 탐욕하고 기름기 많으며 목이 굵고 광대뼈가 나온 그 많은 사람들의 때 묻은 손으로 넘어갔다. 그 대신 그의 손에서는 하찮은 나무 조각일망정 무슨 신경을 가진 곤충처럼 끝없이 하나의 팽이가 돌고 있었다. 그는 시인도, 음악가도, 무대 배우도 되지는 못하였다.

한 줄의 아름다운 시, 흐느끼는 한 가닥의 선율, 폭발하고 타오르고 맞부딪치는 한 장면의 드라마. 끝내 그런 팽이들은 얼어붙은 겨울의 땅, 그 미끄러운 삶의 땅 위에서 돌지는 못했다. 박달나무 팽이는 하나의 불꽃으로, 연기로, 그리고 재가 돼 버렸다.

그는 털모자를 잃은 것뿐이었다. 에스키모인들이 쓰던 수달피 가죽 같은 털모자였는지, 하얀 방울 술이 달린 스키이 모자였는지, 혹은 셀룰로이드 안경이 달린 파일럿 모자였는지, 그 남자도 우리도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다.

다만 값비싼 모자를 팽이 때문에 그는 잃은 것이다. 한 생애를 잃은 것이다. 그의 혈족을, 재산을, 집을, 땅을 잃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가 언제나 가난하면서도 또 무엇인가를 들고, 털모자 같은 것을 들고 팽이와 바꾸려고 두리번거리면서 도시의 겨울 골목을 지난 것을 본다. 술집의 창문들에 하나씩 불이 꺼져 가고 있는 겨울밤의 골목길을 그는 서성대면서, 불타버린 잿더미를 들추고 하나의 팽이채와 박달나무 팽이를 끄집어내려고 한다.

그러다가 언젠가 빛나는 겨울 아침에 그는 채찍을 다시 한 번 내리칠 것이고, 팽이는 곤충의 날개 깃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그 추운 겨울이 끝없이 그의 발밑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것이다.

이어령(1934.1.15.~ ) 언론인, 문학평론가. 충남 아산 출생. 부여고등학교, 서울대 대학원 졸업. 서울신문 등 논설위원. 이화여대 교수. 제1대 문화부장관. 예술원 회원. 이화여대 석좌교수. 『전후문학의 새 물결』(1962), 『통금시대의 문학』(1966), 『문학을 보는 새로운 시선』(1976), 『저항의 문학』(1986), 『시 다시 읽기 : 한국 시의 기호론적 접근』(1995) 등 다수의 평론집. 1969년 동화출판공사에서 『이어령전작집』 전12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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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돌리기 잘하는 친구가 여자 친구들 환심을 받곤 했죠..좋은글 잘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