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희랍에 반해 희랍을 읊었던 영국의 시인 바이런(G. G. Byron)에게 왜 그렇게 희랍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헬레니즘에 심취했다거나 희랍의 태양에 반했다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한데 그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테네 부둣가의 한 노점에 들렀을 때, 노점상 할머니가 잘못 접힌 옷깃을 바로 잡아주던 그 티없는 인정이 희랍을 못 견디게 좋아하게 된 동기다.」 라고 대답했다고 쓴 글이 있었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노점상은 있게 마련이며 가식이나 위선이 없는 가장 그 나라다운 풍물(風物)이요 풍미(風味)요 인심(人心)이요 인정(人情)의 원천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노점상을 들러보기로 했는데 이것이 어떤 곳은 이미 관광자원이 되어 있기도 한 곳이 많다.
마침 자카르타에는 유명하다는 노점상과 야시장, 선술집(아가씨 집)들을 정책적으로 새로 지은 장소로 옮긴다고 기존의 것을 철거한 때라 바지를 걷어 올리고 신발을 손에 들고 진흙탕 길을 헤매기도 했지만 그 원형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었다.
인도네시아 또는 인니(印尼)라고도 불리며 동남아시아에서 오세아니아까지 이어진 섬나라이다. 17,000여개의 섬이 국토로 세계에서 섬이 가장 많은 나라다. 주요 섬들은 수마트라, 자와(자바), 보르네오, 술라웨시, 뉴기니 등이다.
당시 내가 다녔던 항로는 일본에서 적재한 도요타(豊田) 자동차를 태국의 방콕에서 양하하고, 다시 시멘트를 싣고 인니의 수도인 자카르타항에서 내려주고 보르네오에서 원목을 싣고 일본이나 한국 부산으로 올라오는 코스였다.
지금이야 이곳의 ‘발리(Bali)’는 세계적 관광명소이라 각광받고 있지만 내가 다녔던 1970년대 초만 해도 최빈국의 하나로, 수출품으로는 오직 보르네오에서 생산되는 원목(합판의 원료)으로 한국에서도 많이 수입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이었던 부산의 동명목재는 전량 이곳에서 수입했으며 여러 번 실어나른 적이 있다.
현대의 수도 자카르타의 모습(빌려온 사진)
인도네시아는 과거 네덜란드로부터 300여 년간 식민지로 살았다. 그 기간 동안 지배국은 피지배국 사람들, 특히 남자들에게는 일을 하지 않고 먹고 노는 것만 가르쳤다.
아예 독립하려는 의지를 씨부터 말린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시원한 나무 밑에서 기타를 튕기며, 아니면 녹음기를 틀어놓고 음악을 즐기게 한 것이었다. 열대지방이라 남자들에게는 ‘만고땡’이었다. 그래서 전세계 음악 테잎 복사판이 없는 것이 없었고, 미국 · 일본 · 서구 등 생산지에서 신곡이 발매되면 1주일 만에 그 복사판이 인도네시아의 시중에 나왔다. 나도 여러 개를 산 기억이 있다. 싸고 음질도 좋았다. 당시 일본의 유명한 가수, 아오에 미나(青江 三奈)나 森 進一(모리 신이치)의 테이프는 지금도 먼지를 둘러쓴 채 남아 있다.
일은 여자들에게 시켰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을 지낸 수카루노. 수하르토 등 이전의 독립운동가들은 식민지 시절 네덜란드로 유학한 부유한 집 자녀들이었다고 한다. 자국(自國)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국노의 자녀들인 셈이다. 그러나 역시 배웠기에 국가독립의 필요성을 알고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다.
대체로 그 나라 서민들의 수준은 부두 노동자들을 보면 짐작이 되는데, 가난이 덕지덕지 묻은 사람들이었다. 더운 지방이니까 런닝샤스와 빤스 하나면 일년은 거뜬히 견디지 않을까 싶었다. 작업 중 날라 온 점심은 바나나 잎에 싼 알랑미밥 한 줌에 바나나 혹은 과일조각 같은 것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줄이 닿으면 선박에서 식사를 하려 눈에 불을 켠다. 선측에서 작업과 관계있는 자에게는 선주(船主)나 화주(貨主)의 의뢰에 따라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박 중 하루 일과가 끝나면 현지 경비원과 본선 당직자를 제외하곤 없다. 무단으로 아무나 배에 오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Mr. Rachman, 처음 입항했을 때 생글생글 웃으며 접근해 온 젊은녀석이다. 경비와도 아는 사이가 분명했기에 올라왔을 것이다. 토막 영어(英語)와 일어(日語)지만 눈치까지 섞으면 의미는 통했다.
20살이랬다. 당직 중에 잡담으로 시간도 보내며 이곳 사정에 대해서 물어 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가 38세인데 9남매란다. 정말일까? 그도 만약 부자가 되면 Wife를 셋 정도 두겠단다. 꿈이 좋다. 말라 부지껭이 같은 놈이… . 열심히 일한다지만 그래도 그의 아버지가 월2만원 정도의 수입이 있는 Engineer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중류정도는 된다고 한다.
보통 남자는 22-25세 사이에 여자는 17-22세 사이에 결혼한단다. 그 녀석은 25살에 하겠다는군. 늘 그랬듯이 외국에서 내 집을 소개할 때는 부산의 좋은 공공기관 건물이나 번듯한 3. 4층짜리 빌딩 사진을 뵈주며 ‘내 집’이라고 했다. 보는 사람의 눈이 둥그래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놈이나 나나 허풍쟁이이기는 마찬가지다.
부두에 늘어선 바지선(빌려온 사진)
참 재수 없는 날이었다. 조타실의 Stop Watch(초시계). 망원경 2개. 해도(海圖) 확대경을 도난 당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이것들이 없으면 당장 항해가 불가능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정황으로 봐서 어쩌면 선내의 누군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져든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항해 계기(計器)는 2등항해사 담당이니까 일차적인 책임은 내게 있다. 그러기에 더더욱 Capt.(선장) 보기가 민망스럽고 면목이 없다. 대실수였다. 내일 곧 출항해야 하는데… .
부득이 선교(Bridge)가 근무처인 세 항해사와 3명의 조타수들이 공동 변상하기로 하고 일화 9,000엥을 빌려 시내에 나갔다.
공식적으로 대리점을 통해 신청하면 되지만 시간도 없고, 선주(船主)을 통해야 함으로 그럴 수는 없었다. 급하면 지프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Mr. Rachman의 소개로 그의 친구집이란 곳에서 쌍안경 6,000RP(루피아), 시계 4,200RP 확대경 66RP를 주고 샀다.
깜짝 놀란 것은 바로 우리가 분실한 것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게 전부 그렇게 해서 나온 물건들임을 직감한다. 그렇다고 “이게 우리가 도난당한 것이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또 하나 바로 이 Rachman, 이 놈이 장본인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종일 우울했다. 말이 조금 통한다는 것을 핑계로 접근, 친해진 척 하면서 정황을 파악하고는 직접 자신이 하지는 않고 제삼자를 시켜 훔쳐가는 모양이다. 쥐새끼 같은 놈이었다. 그런 작자를 아무런 의심없이 믿은 내가 몇십 배나 더 멍청이인 줄은 당한 후에야 알았다.
바이런이 노점상의 할매 때문에 희랍에 매료되었다면 나는 이 녀석 때문에 위대한 자연 명물을 간직한 인도네시아를 경멸하게 된 셈이다.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갔다. 직원이 돈을 받아 확인하고 편지에 우표를 붙이고는 스템프 망치를 들고 기다린다. 담배나 뭐든 와이로(뇌물)이 있어야 Stamp를 꽝 찍어준다.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듯이-. 뭘 줘도 우표값 보다는 많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두었다 우표를 떼고 편지는 버린다는 것이다. 선원들이 분명히 띄웠는데 답장이 없다고 죄 없는 가족들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래도 저녁때 시원한 소나기(Squal)가 한줄금 쏟아지고 나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이 맛으로 사나보다. 이런 넘들이 이 시원함을 헛방으로 만들었다.
동남아 항로를 뛸 동안에는 그래도 짭짤한 부수입이 있었다. 소위 ‘밀무역(밀수)’이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산 사구려 화장품이나 여인들이 좋아하는 립스틱, 속 눈섭 같은 것들이 인기가 있었으니 동남아에서 팔고, 올라갈 때는 태국의 특산품인 목각(木刻) 제품이나 진짜인지 모조인지 모르지만 상아(象牙) 제품들을 사와 일본이나 한국에서 팔면 그런대로 술값과 유흥비는 충당이 되곤 했다.
부산에서 출항할 때는 여인들의 속 눈섭 상자가 수십개나 되었다. 아예 갑판부와 기관부가 단체(?)로 구입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하자면 이것도 국제무역의 일종임으로 정식 세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요상스럽게도 어느 나라 세관이건 자국내로 들어오는 것(수입품)은 규제가 까다롭기 그지 없었지만 나가는 것(수출품)은 말이 없었다.
세상일이 그렇듯이 국가간의 무역에는 허가받은 수출입업자들이 있기 마련이듯이 이런 밀무역에도 그들대로의 기업(?)이 있고 루트가 있었다. 수입업자는 현지인이지만 수출업자는 본선 선원 중에 있다. 이 항로에 경험이 많고 나이도 좀 듬직한 사람이다. 계급장을 떼야 겨우 한 몫을 끼일 수 있다. 선장도 예외는 아니다. 체면상 그럴 수는 없지만 간혹 용돈이 아쉬우면 바로 얘기하지는 못하고 이등항해사나 삼등항해사를 통해 몇 몫을 얻어야 한다.
한때 우리나라가 볼펜 끝에 붙은 알(심)을 일본에서 수입하던 시절, 한 주먹만 봉투에 넣어 주머니에 끼워오면 여러 수천 개가 되므로 인기가 있은 적이 있었다. 여인들의 속 눈섭 한 상자이면 300개가 들어있다. 10상자 이면 3,000여개. 상자를 뜯어 낱개로 몇 개 주머니에 넣고 나가면 그날은 술 뿐만이 아니라 아가씨까지 공짜인 경우도 있다. 아마도 자카르타 시내 아가씨들 속 눈섭은 모두 이래서 달고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사 오는 것 중 목각(木刻) 제품으로는 태국에서 만든 코끼리가 인기가 있었다. 원가가 얼만지 지금 기억은 없지만 배에 와서 작업하던 인부들이 사 간다. 일본에서 개당 2000엥 정도 받았으니 여남은 곱절은 남았다.
시멘트를 싣고 본선 옆에 접선한 목선들(빌여온 사진)
유명했던 일본 고베[神戶] 지하철 고가도 밑 모도마치[元町]의 ‘진주 할매집’의 호르몬야키(곱창구이)에다 소주 한 잔을 얼큰하게 할 수 있었다.
이 호르몬야키는 한국의 ‘소곱창구이’인데 고추장과 마늘이 많이 들어 칼칼하게 매운 맛에다 약간 질기다. 그런데 이것을 일본 서민 술꾼들이 즐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질긴 탓에 불평이 있었지만 진주집 할매왈, “야, 이 사람들아 사자나 호랭이가 짐승을 잡으면 어디부터 묵더나? 살괘기가 아니고 창자(내장)잖아. 그만큼 내장이 맛이 있고 아다리(걸림 : 우리말의 먹은 음식이 얹힘)가 절대 없기 때문이지. 그냥 우물우물해서 침만 발라 넘겨도 아무 탈없어.”
거기에다 이것이 정력에 좋다는 얘기를 곁들임으로 이름도 근사하게 ‘호르몬야끼’로 불리며 일본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다. 해가 지면 퇴근하던 길에 이찌곱부(한 잔)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구나 인근에는 부산의 국제시장처럼 싸고 흔한 각종 물건들이 수두룩 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었다
첫댓글 자카르타의 이 곳 저 곳을 다니며 구경 잘 했습니다.
어딜가나 불법은 판을 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멍청이로 만들고....
인도네시아 특히 자카르타의 옛 모습을 잘 읽었습니다. 오래 되었지만 여행객으로 잠깐 지나가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