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총
이재영
학교 수업이 끝난 하굣길은 즐거운 얘기로 와글거린다.
“어제 삼촌이 농구공 사줬다.” 근상이 생글거렸다. 모레가 어린이날이다.
“그랬어? 공은 좋은 거야?” 세희가 반겼다. 6학년치고는 키가 크다.
“응, 가볍고 탱글탱글해. 너는 뭐 안 받았어?”
“응. 나는 외할머니가 필요한 거 사라고 돈 주고 가셨어.”
“그래? 정훈이 너도 삼촌 있지? 무슨 선물 받았어?”
“요새 바쁜가 봐. 그저께 근로자 날에도 특근한댔어.”
정훈의 삼촌은 정밀금속 회사에 다닌다. 선반 기계로 쇠를 깎아 작은 부품을 만든다. 실은 어제 와서 선물을 하나 주고 갔다.
정훈의 아빠는 작년에 오래 다니던 회사를 나와서 엄마와 세탁소를 차렸고, 근상의 아빠는 괜찮은 회사 부장이다. 세희와 단둘이 사는 세희 엄마는 미용실을 운영한다.
“세희야 너도 농구 하러 올래? 둘이서 하면 공 주우러 다니기 바쁠 거야.”
근상이 엄살을 떨며 세희를 부추겼다.
“그래 알았어. 집에 갔다 바로 농구장으로 갈게.” 세희가 밝게 웃었다.
정훈이 집에 들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가는데, 세희도 운동복 차림으로 오고 있다.
근상이 골대에 공을 던지자 링을 맞고 튕겨 나온 공이 멀리 데굴데굴 굴러간다.
“근상아! 공 좀 줘봐.”
세희의 부름에 근상이 뒤돌아보고, 한 손으로 힘껏 던졌다. 세희 옆을 비켜 던져진 공이 정훈에게로 굴러왔다.
“야, 제대로 던져야지!” 정훈이 공을 주워들며 웃었다.
양손으로 잡은 공을 가슴에 붙이더니, 세희를 향해 살짝 밀어 던졌다. 공은 수평으로 세희의 가슴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정훈이 너 패스 잘하네.” 가볍게 공을 잡은 세희가 하얀 이를 드러냈다.
“응, 티브이에서 배웠어. 이건 체스트 패스야.” “다른 패스도 있어?”
“응. 나한테 패스해봐.” 세희가 금방 보고 배운 대로 정확히 던졌다.
“이건 바운드 패스라는 건데, 공을 땅에 튕겨서 던져 주는 거야.”
정훈이 양손으로 공을 세희 앞쪽 땅바닥을 향해 힘껏 던졌다. 퉁겨진 공이 세희 가슴 높이로 튀어 올랐고, 세희는 쉽게 잡았다.
“야~ 둘 다 너무 잘한다! 우리 농구팀 하나 만들어도 되겠다. 히히.”
근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바로 그때, “야, 너희들 제법 하는데?”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돌아보니, 문도가 다른 두 명과 함께 걸어왔다. 문도는 한 해 선배로 작년에 두어 블록 떨어진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다. 세 명이 같은 중학교 교복 차림이다.
문도는 학교 짱으로 통했는데, 애들에게 금품을 요구하고 말 안 들으면 때리기도 했다. 세희와 어울리는 정훈과 근상에게는 잔심부름만 시켰다.
“세희도 농구 하는구나. 많이 컸네.”
문도가 야릇한 시선으로 세희를 훑어봤다. 정훈과 근상은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여긴 어쩐 일이에요?” 세희가 별로 달갑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응, 이발 좀 하러. 얘들도 앞으로 보끌레에서 이발할 거야.”
문도가 자랑스레 말했다. 보끌레는 세희 엄마 미용실 이름이다.
“근데, 이발 안 하고 여기는 왜 왔어요?”
“지금 손님 있다고 30분 있다 오래. 편 갈라서 내기 시합 한판 하자. 어때?”
“우리는 오늘 처음 하는 건데요?”
“누가 너희랑 우리 셋하고 하재? 세희는 우리 편, 창호 네가 쟤네 편해라.”
문도가 함께 온 두 명 중에 키 큰 애를 턱으로 가리켰다.
“무슨 내기 할 건데요?” 정훈이 어쩔 수 없어 작은 내기이기만 바라며 물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후딱 끝내고 내기는 좀 크게 하자. 열 골 먼저 넣으면 이기고, 진 팀이 10만 원 빵. 어때?”
“그래, 좋아. 열 골 까짓거, 십 분이면 끝나겠다. 하하.”
창호가 웃으며 세희 공을 뺏어 들고는 농구에 자신 있는 것처럼 설쳤다.
“10만 원이나요?” 근상이 울상을 지었다.
“질 생각부터 하냐? 창호가 4만 원 내고, 너희 둘은 3만 원씩만 내. 됐지?”
문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경기가 시작되자 창호가 펄펄 날면서 골을 넣었다. 5분도 안 돼서 3대 1로 앞섰다.
웬일인가 싶었는데, 10분이 지나자 비실거리던 문도가 본색을 드러냈다.
치고 들어오는데, 가로막을 수도 없어 팔만 벌리면, 슬쩍 비켜 슛을 쏴 넣었다.
결국, 20분 만에 10대 6으로 문도 팀이 이겼다. 아무래도 창호와 짠 것 같다.
“지금 돈 없는데요?” 정훈이 땀을 훔치며 말했다.
“우리 아파트 알지? 내일 6시에 농구장으로 와. 세희도 오고. 한 게임 더 하게.”
“또 내기해요?”
“아니야. 오늘은 처음이라 기념으로 내기했고, 그냥 시합하고 놀자.”
“6시까지 가려면 저녁 먹을 시간이 어중간한데요?”
“저녁 먹지 말고 와. 시합 끝나면 중국집 자장면 사 줄게. 탕수육도 시켜 먹고.”
세희를 쳐다보고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함께 가게 돼서 좋아 죽겠나 보다. 창호 돈은 안 받고 애들 돈 6만 원만 써도 충분하겠다. 야비하고 밉상인 녀석!
문도와 졸개는 보끌레로 가고, 세 친구는 벤치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3만 원 어떡하냐? 저금통이 빈 통인데.” 근상이 울상을 지었다.
“문도는 왜 우리 미용실에 온다는 거야! 저기, 내가 2만 원 보탤게.”
세희가 자기 때문인 양 미안해서 함께 분담하겠다고 했다.
“정말? 고맙다, 세희야. 그래도, 내 몫 2만 원은 어떻게 만들지? 큰일이네.”
“너는 용돈 좀 아껴 써라. 내가 2만 원 빌려줄게. 정훈이 너도 빌려줄까? 내가 6만 원 다 가져올게. 다음에 천천히 갚아.”
“그래, 고마워 세희야. 근데 말이야, 쟤네 또 올 텐데, 계속 당하고 있어야 하냐?”
정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게. 파출소에 꼬질러 버려?” 근상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쟤네 지금 만 13세야. 죄지어도 촉법소년이라서 감옥 안 가. 보호 처분으로 끝나고 말아. 벌주려면 만 14세 되는 내년까지 기다려야 해.”
세희가 제법 어른처럼 말하며 머리를 저었다.
“맞다! 촉법소년이네. 1년은 더 참아야겠다. 어이구 지겨워.”
근상이 입을 삐죽거렸고, 정훈은 입술을 깨물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다.
집에 온 정훈은 책상 서랍에서 어제 삼촌이 준 선물을 꺼냈다. 장난감 권총인데, 손잡이가 사각형 투박한 모양으로, 직접 깎아 만든 것 같다.
안전핀을 풀고 팔을 뻗어 벽에 걸린 동그란 다트 과녁판을 겨냥했다. 방아쇠를 당기자, “딱”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날아갔다.
과녁판 중앙에 꽂힌 건 놀랍게도 재봉틀 바늘이다. 머리 부분이 크고 둥근 것으로 미루어, 가죽 제품을 박음질하는 공업용 바늘 같다.
다음 날 세 친구는 문도네 아파트 농구장으로 갔다. 조금 일러서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코트가 엄청 좋네. 흙도 안 묻는다.” 근상이 우레탄 바닥에 공을 튕겨본다.
그때 호수 쪽 숲길에서 문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왔냐? 돈 후딱 주라.”
“여기요.” 세희가 얼른 6만 원을 꺼내 줬다.
“저기요, 문도 형.” 정훈이 뭔가 말하려고 불렀다.
“응, 그래. 이따 다시 보자.” 문도가 손을 저으며 왔던 길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무슨 일이래? 다른 애들도 안 보이고.”
“뭔 일 있나 본데, 저쪽으로 가보자.”
숲길로 조금 가자, 길가 숲속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6만 원이요. 이제 가도 되겠죠?”
“그래, 좋아. 다음 주에 또 6만 원이야. 안 가져왔다간 맞는다!”
문도의 물음에 어떤 남자애가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
셋은 깜짝 놀라 몸을 낮추고 소리 나는 쪽을 살폈다. 나뭇가지 사이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문도네 세 명이 보였다.
그 앞 조경석에 같은 교복 입은 덩치 큰 학생이 앉아있다. 문도네 학교 상급생이 후배들 돈을 뺏는 것 같다.
“선배님, 1주일에 6만 원이면 셋이 나눠도 2만 원씩인데, 좀 줄이면 안 될까요?” 문도가 애걸하다시피 말했다.
“이 새끼가!” 상급생이 일어서며 문도를 걷어차고 마구 밟았다.
“억, 으윽.” 문도가 몸을 움츠려 얼굴을 감쌌다. 두 친구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맨다.
얄미운 문도가 맞으니 통쾌해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그런지 되레 안쓰럽다.
세희와 근상이 목을 움츠리고 도망가자는 눈짓으로 정훈을 쳐다봤다.
그때, “야, 그만두지 못해?”
정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깜짝 놀란 상급생이 주춤하더니, 이게 웬 녀석이냐는 듯 노려봤다.
“너 뭐냐? 꼬마야.” 어이없어 히죽거리며 걷어찰 듯 다리를 뒤로 뺐다.
그런데, 정훈의 팔이 앞으로 뻗치며,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쥔 권총에서 바늘이 튀어 나갔다.
“억. 이 새끼가!” 상급생이 바늘이 박힌 다리를 거머잡고 비틀거리며 부르짖었다.
모두 놀라서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바라봤다.
“더는 문도 형 건들지 말아요. 안 그랬다간 두 다리가 성치 못할 거니까.”
“뭐가 어째? 너, 이리 와! 당장 파출소 가자. 너 이제 죽었다. 으윽!”
“그래? 파출소 가서 다 일러볼까? 나는 열두 살이라 촉법소년이야. 선배는 열네 살 넘어서 보호 처분 안 돼. 알잖아?”
정훈이 빤히 노려보며 당당히 대들었다.
“뭐라고? 이, 이게!”
주먹은 쥐었지만, 말뜻을 알아들은 상급생이 풀이 죽어 팔을 내렸다.
그러자, 정훈이 문도를 돌아보고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실은 문도 형한테 쏘려던 건데, 과녁이 바뀌었네요.”
“뭐? 나를 쏴?” 문도가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이 총, 형이 가져. 아홉 발 남았으니까, 저 선배가 또 협박하면 그냥 쏴버려요. 형은 열세 살이라 아직 촉법소년이니까.”
정훈이 바늘 총을 돌려 손잡이를 문도에게 내밀었다.
“응? 저, 정훈아! 아...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갑작스러운 정훈의 행동에 놀랐던 문도가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렸다.
깊이 후회하는지 눈에 눈물이 다 글썽거린다.
(2023년 신춘문예 낙선작입니다. 계묘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첫댓글 아스라한 유년시절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네, 뱃사공님. 말씀 감사합니다.
촉법소년 문제, 지금 검토 중인 거처럼 연령을 낮추려는 것보다, 12살이 되면 바늘 총 한 개씩 전부 나눠주는 게 해결방안이 아닐지 한번 제안해 본 동화입니다. ㅎ
대단하십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시는 그 역사적인 투지에 박수 보냅니다.
네, 작년까지는 그랬는데, 올해부터는 안 그러려고 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