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654년(진덕여왕8년, 무열왕元년)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654년 창건하고 죽림사(竹林寺, 竹園精舍)라 했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고승인 황면(黃面)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 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했다.
서기 829년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되어 왕이 친히 찾아와 크게 칭송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 유수와 산초가 모두 약수요, 약초아님이 없습니다."라 말하니
왕이 기뻐하고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載藥山 靈井寺)라 명명하고 절을 크게 부흥 시켰다.
중요문화재로는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 : 국보 제75호)·
3층석탑(보물 제467호)·
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酬忠樓(수충루)를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사천왕문 사이로 경내가 살며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수충루는 밀양시 교동에 있는 밀양향교 풍화루와 부북면 후사포리에 소재한 예림서원 독서루와 더불어 다른 사찰에서 볼 수없는 서원의 정문 형태로 된 누각이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도와 의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를 구하고자 서생포 가등청정의 적진으로 네차례나 회담을 하기 위해 들어 갔고 1597 정유년 외장 가등청정이 "조선에 국보가 있느냐?"고 묻자 "가등청정 당신의 목이 바로 조선민족의 국보다."하고 할을 하며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604년 2월에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국서를 받들고
8월 일본으로 탐적사(강화정사)로 가서 8개월 동안 각고의 노력끝에 포로로 잡혀간 동포 3,000여명과 함께 귀국하는 등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그 해 6월에 선조에게 복명하니 가의대부(嘉義大夫) 영의정을 하사 받았으나 3일 만에 관직을 사양하고 그 해 10월에서야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영정에 분향 참배하고 다시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결가부좌한 채 무량선정에 들다가 광해군 2년(1610) 열반에 드시니 법랍 51년 세수 67세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다.
당시 조정에서는 국장으로 장례를 지내고 밀양 표충사(祠)와 묘향산 수충사(祠)에 서원 편액을 내리며 유교식 제향으로 봉행토록 했습니다.
숭유억불 조선시대의 당시 사회로서는 승려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였던 것이다.
또한 사명대사가 태어났던 밀양 무안면에 표충사당과 표충비 이를 수호할 표충사를 지었다.
그 후 오랫동안 당쟁으로 조선의 중신들은 구국의 영혼인 삼대성사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1839년(헌종5년)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당 천유(月坡堂 天有)선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예조에 소청을 올리면서 무안면에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그 당시 폐사로 있었던 영정사 경내로 사당과 서원을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변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중앙에 사명대사 동쪽에는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서쪽에는 임란 때 금산전투에서 800 의승병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기허당의 영정을 함께 모심으로 삼대성사를 추모하는 서원이면서 그 관리와 제향을 사찰에서 맡는 유불의 이원적 구조로서 불교의 호국사상과 중생구제사상 그리고 유교사상의 의(義)와 공존하게 되므로 표충사(寺) 안에는 표충사(祠)와 표충서원이 있게 되었으며, 본사인 통도사와 더불어 동부 경남을 대표하는 명산 대찰인 것이다.
고려 문종대(1047~82)에는 당대의 고승인 혜린(惠燐)이 이곳에서 수도했고,
충렬왕대(1275~1308)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보각국존 일연스님이 주석하고 천의국사가 대를 이어 주석하면서 불법을 크게 중흥하니 1286년 충렬왕이 '동방제일선찰'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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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휴정 [休靜, 1520-1604.1.23]
본관 : 완산(完山), 안주(安州) 출생
속성 : 최(崔)
자 : 현응(玄應)
법호 : 청허(淸虛), 서산(西山)
아명 : 여신(汝信)
1534년(중종 29년)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錄)]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년)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 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명종 11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하여 명나라 군대와 합세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인하여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지만
1594년(선조27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표충사(表忠 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담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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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유정 [惟政, 1544~1610]
속성 : 임(任)
본관 : 풍천(?川)
자 : 이환(離幻)
호 : 사명당(泗溟堂:四溟堂)·송운(松雲)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속명 : 임응규(任應奎)
증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로 경남 밀양(密陽) 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년)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년)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휴정 (休靜:西山大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上東菴)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門徒)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선조 27년)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건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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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허대사
본관 : 밀양
속성 : 박(朴)
속명 : 영규(靈圭)
법호 : 기허당(騎虛堂)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휴정(休靜)대사의 고제(高弟)로 공주(公州) 청련암에서 수도하였으며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淸州)를 수복하였다.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錦山) 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격전 끝에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을 일으켜 전국의 승병들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700의총(義塚)에 묻히고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법도(法徒) ·대인(大仁) 등에 의하여 진락산(進樂山)에 영각(影閣)이 세워졌으며, 의선(毅禪)이란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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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정
종정은 불교종단에서 종단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직위를 말하며 종통(宗統)을 계승하며 불교계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다.
종정의 직위에 오르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먼저 나이가 65세 이상이어야 하고, 법랍은 40세가 넘어야 한다. 또한 법계대종사 등의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덕이 있고 행동이 원만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종정 추대위원회에서 추대되는데, 위원회는 총무원장과 중앙종회의장·호계위원장 등과 중앙종회에서 선출된 31명의 위원 및 원로회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임기는 5년이며, 중임할 수 있다.
초대종정 효봉(曉峰: 1962. 4. 11) (1888-1966)
효봉(曉峰禪師)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에서 아버지 수안(遂安) 이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씨의 사이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스님은 스물 여섯에 졸업한 후 서른 여섯이 될 때까지 10년간(1913∼1923)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 평양의 고등법원 에서 법관으로 종사했다.
1923년 스님의 나이 서른 여섯 살 때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 날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자신의 존 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하게 되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러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스님을 찾아갔다.
이날로 삭발, 석두스님으로부터 사미계(五戒)를 받고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서른 여덟에 오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는 '늦깎이'라고 한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잠자지 않으면서 분발, 깨달음을 위한 좌선(坐禪)에만 전념했다.
보운암에서 그해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의 길에 나선다.
그러나 불가의 수행의 일은 남의 말에 팔릴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스스로 참구(參究)하면서 실답게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정진한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반만에 드디어 토굴의 벽이 무너진다.
필사적인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던 것 이다.
다음은 스님의 오도송이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海底燕巢鹿抱卵
타는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火中蛛室魚煎茶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此家消息誰能識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白雲西飛月東走
스님의 마흔 다섯 되던 1932년 4월 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고 설악산 의 봉정암, 오대산의 상원사 등의 청정한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7년 스님의 나이 쉰살 되던 해, 운수의 발길이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게 되었다.
스님은 선원(禪院)인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시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이셨다.
8.15 광복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도 인재 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개원하게 되는데 스님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조계산을 떠나 가야산으로 갔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겼다.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2일),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시고 일흔 아홉의 생애를 마치고 앉은 채 입적하셨으니 법랍은 41세였다.
내가 말한 모든 법 吾說一切法
그거 다 군더더기 都是早騈拇
오늘 일을 묻는가 若問今日事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月印於千江
제자들이 스님의 사리를 거두어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에 사리탑을 만들어 나누어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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