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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종종 끝없는 사기꾼과의 대결
(결론: 사기꾼과 공산당에 자비를 베푸는 일은 독사에게 맨손에 직접 먹이를 붙여 주는 것과 같다.)
이재원 씀(2022.01.12.수, 맑음, -5~7℃)
~OECD회원국 중 사기범죄율 1위로, 돈과 명예, 지위를 위하여 거짓과 사기와 위증을 친구나 친족, 선·후배 지인 및 동료들에게도 써 먹는 대표적 종족인 한국인들. 그런데 기묘하게도 희망이 가득 찬 종족이기도 하다. 너무나 뻔한 사기가 신기하게도 너무나 쉽게 매우 잘 통한다는 것은 그만큼 주변인을 잘 믿는 착한 심성의 시민들이 우리 주변에 매우 많다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도덕교사 출신은 한편으론 이점에 집중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거의 절대 다수 대부분의 우리 한국인들은 부모로부터 거래의 조건 등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심지어 사기꾼 조차도 사기는 잘 치는데 상대방에 대하여 법적 공격을 할 줄 모른다. 이는 1:1의 자유교환 대치개념을 체득하지 못해서 그렇다. 사기를 당하더라도 거래의 조건에서 1:1의 자유교환 대치개념을 법적 계약으로 고정하는 setting 과정이 있으면 상대가 누구라도 쉽게 복구할 수 있다. 항상 결과로 그대로 드러나는데 한국인들은 습관적으로 언제나 결정적 순간엔 꼭 자기 타산적인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말들은 절대 먼저 믿으서는 안되며, 거래로 할 수 없이 절차로 믿어야만 한다면, 그래도 일단 믿지 않고 시작하는게 사기를 덜 당한다.~
(조선인들은 고종 황제란 임금부터 나라를 자기 부인을 칼로 쳐 죽인 종족에 돈받고 팔아먹은 놈이야. 그리고 어떤 누구도 해방운동은 전혀 안 했어. 현대 역사 교과서를 아무리 살펴도 해방운동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들리는 해방운동이란 것도 다 사기이고 무위도식만 하다가 국외에서 돈 문제로 서로 총쏘고 자중지란하는 놈팽이들의 아지트로, 빈한하게 장사나 노가다로 겨우 먹고사는 해외동포들에 대한 대민 갈취와 공갈과 협박과 약탈수준이야. 그리고 나의 경험상 조선인들은 남녀불문 지위고하로 자신이 불리하든 유리하든 결정적 순간엔 반드시 배신을 때린다. 가정에서부터도 부부간의 사랑과 존경이 뭔지 모르고 그냥 밥이나 짐승처럼 제때 챙겨 먹고, 돈 받는 조직에서도 동료에 대한 존경과 신뢰, 고마움이 전무하다. 줄곧 자신의 출세와 안위만 노린다. 급하면 선배 따위는 당연하고 자신에게 자리와 월급을 준 사장도 배신한다. 깊이 있는 가치를 역사적으로 가져 본 적이 전혀 없는 종족이다. 특히 친구나 후배, 형제에게 빌려 간 돈은 웃으며 공짜라 여기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감옥에 가도 안 갚는다. 평시엔 의형제처럼 화기가 애애하게 넘치게 행하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의 쇼(show)도 봄비에 눈 녹듯이 바로 사라진다. 혹시 OECD급의 다른 나라들의 종족들도 이런가 나는 이게 더 궁금하다.)
이글은 도덕교사출신으로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하여 쓴 글이다.
참고로 모든 힘의 원천은 명분과 도덕성에서 잠재되어 나온다.
상관도 신임을 잃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죽은 상관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인으로서 평생 동안 형제, 친지, 지인들로 부터 단한번도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사려분별이 굉장히 출중한 분이다.
사기를 행한 자보다 당한자가 더 문제이며, 후손들은 사기 당한 부모나 선조를 더 비(非)용서하고 바보 취급 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책임하고 분별력이 없는 자들로, 당대의 본인은 물론 그의 모든 직계들에게 악몽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동서남북으로 사기꾼들이 무수히 누적 점철되어 있다. 수뇌부 정치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친형제 및 죽마고우마저도 사기본성이 뜨글거린다.
아마 1989년 아니면 1990년 5월경으로 어느 주말 토요일로 느낀다. 교외 학교행사하나로 왁자지껄하게 학생들과 교사들과의 모임이 있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몇몇 교사의 부인들이 보였다. 무슨 행사내용인지 전혀 기억이 안 나고 그냥 그날 정신없이 바빴다는 느낌만 든다. ‘부인들이 왜 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다음 주 월요일 출근하고 오전 일과 후 다수의 교사들과 재밌게 이야기 하던 중 수학교사 鄭○○ 선생이 날 보고 웃으면서 어제 자기 부인이 부장님을 유심히 보았는데 하나 특이한 평이 있었다고 일러 주었다. 별로 관심도 없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내용을 전달해 주었다.
그 내용이 황당하지만 정확한 내용에 가까웠다. 내용인즉 ‘언젠가는 분명히 사기를 아주 크게 당할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지만 기분이 상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교사를 하지 않고 사업이나 힘 있는 공직에 투신했다면 그말은 적중했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사람을 잘 믿는 이상한 특성이 있다. 내가 생각해도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착하다. 그 수준이 현생인류 직전의 네안데르탈인 급이다. 그래서 사기에 도가 튼 친구들은 그 느낌을 바로 알아 조그마한 어떤 유혹의 미끼를 들고 분명 접근을 했을 것이다. 사기의 본질은 돈이지만 그 접근루트에는 수 만가지 방법과 차원이 있다. 공직자인 경우엔 상대방이 술과 여자도 동원하기 때문에, 어리숙하게 공부만 한 순진한 친구들은 바로 통째로 잘 걸린다.
사업을 하는 경우에 한때는 약속어음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수 많은 사업자가 사기꾼들의 약속어음 부도 때문에 파산을 당했다. 유대인과 일본상인에겐 신용의 증표로 통하는 약속어음이 한국에선 사기꾼들의 부도수단으로 악용되었다. 한국인들은 원래 이런 수준이다. 이러니 나라가 한때 통째로 왜인들에게 망하고, 여전히 남북분단국가이지만, 말만 줄곧 시끄럽지 남한이나 북한이나 통일을 할 마음과 의지는 전혀 없는 인류정치사에 유례가 드물 정도로 없는 아주 매우 특이하고 희귀한 이기적 유전 종족이다. 그러면서도 특히 공짜 욕심이 많아 스스로도 사기술에 잘 걸려들기도 한다. 심지어 유대인의 당사자 이익 교환 대치 개념이나 중국인의 교토삼굴이나 일본인처럼 생사결단의 단칼 프로 상인 정신이 없어, 국제정치에서도 동네 농사꾼 마냥 삼세판을 노리다가 매번 초판에 먹칠로 당한다.
그래도 이글을 위하여 말을 이어보자. 분석을 하면 남을 믿고 도와주는 일에도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이 있다.
먼저 사적인 면에서의 경우 1988학년도 내가 나의 반 몇몇의 학생회비를 수령하여 공금으로 몇 푼의 돈을 가지고 있을 때, 동갑이고 나름 친한 교사가 나에게 그 돈을 잠시 빌려 달라고 하였다. 마산에 갈 일이 있는데 그 돈을 빌려주면 다녀 온 후 갚겠다고 하였다. 물론 이건 아니다 싶어 행정실에 납부할 테니 행정실에서 빌려 가라고 하였다. 그리곤 며칠 후 교무실에 금전도난사고가 생겼다. 내 옆의 다섯 살 아랫 영어 교사인데 자기 반의 학생회비 받은 돈을 서랍에 넣고 퇴근 했는데 다음 날 출근해 보니 돈이 사라진 것이다. 금액이 한달 월급 정도라 교사들이 갹출하여 일부 금액을 보태 주었다.
그리곤 며칠 후 나 역시 아침에 출근하니 나의 책상 제일 서랍이 망실이 되어 있었다. 누가 고의로 열다가 손괴를 입힌 것이다. 경계용으로 공지하여 교무실의 교사들이 다 알게 되었지만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책상서랍망실의 이런 일은 밀양에서 근무할 적에도 교무실에서 83학년도와 84학년도에 걸쳐 두 번 있었다. 기타 등등 사적으로의 관계는 만사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 가깝다는 친구라도 사기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교무실에서 분실사고가 계속 일어난다면 이를 기록해두고 결국은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당시 그 정도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냥 내부단속만 했는데, 몇 년후 상기(想起)하니 이런 조치로는 도덕적으로도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상대방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기를 치든말든 공적인 면에서는 당연한 자신의 일 이외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조력하거나 마쳐 놓아야 한다. 남이 알든 모르든 자신이 그 누구라도 크고 작은 일을 피하지 않도록 할 큰 이유가 있다. 이는 소소하게 작아 보이는 일로도 크고 작은 모든 사고를 미연(未然)에 방지(防止)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모르고 지나친 미미한 일이 어이없게도 큰 사고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대업(大業)은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이 있는 그 이유이다.
몇몇 나의 예들을 들어 보겠다.
1986년경일 것이다. 당시 나는 밀양의 사립학교에 근무하면서 저녁에 한문서당에 다니고 있었다. 주5일 강좌로 4년에 이미 접어들어 대학과 논어는 이미 마쳤고, 맹자를 거의 마무리하고 있었다. 간혹 시전과 중용도 별외로 듣곤 했다. 훈장선생은 밀양이 자랑하는 거유(巨儒)로 영남학파의 마지막 세대였다. 유학의 수도격인 안동에도 자주 초빙되어 갈 정도이다. 경남 고성 태생으로 전통의 유향 밀양에 터를 잡고 여생을 보내는 분이다. 한문강독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나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존함은 起洪 최○태이다. 외모도 훈남이고 체급도 헤비급이었다. 왕년엔 씨름도 무패일 정도로 잘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목소리도 성량이 풍부하고 맑고 좋았다. 국졸 후 사부님을 모시고 한학만 연마하신 분인데 궁상각치우 오음계 운율로 강독해 주는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한시는 당연하고 주역강의도 베토벤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웅장한 태양 속에 고요히 빛나는 은하수의 물결처럼 처리하였다.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초(超)고급의 사부급 인물이시다. 재야(在野)의 슈퍼 그랜드 마스터인 것이다. 유향의 도시 밀양의 보석처럼 빛나는 명실상부한 보배인 분이다. 성리학을 떠나서 풍수와 점혈의 명리학을 거친 기문둔갑까지도 강의하는 분이다. 전달력이 상상이상이다. 큰 체구에서 나오는 태수와 음수의 오음계를 구름처럼 타는 몸이다. 나의 경우 모교에서의 학사와 석사, 아시아 최고급인 서울대에서의 1정 자격연수(180시간), 자타가 인정하는 한강 이남의 최고대학 부산대에서의 부전공 자격연수(38학점, 570시간), 프랑스의 파리 소르본 대학 이상으로 막먹는 한국교원대대학원에서의 석사 졸업 등을 거치면서 기라성 같은 분들은 대학 은사로 두었지만 강독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도 밀양의 한문사부님을 따를 수 없었다. 1년 365일 사계절과 하루 24시간의 해와 달의 음양 점혈 주천도수에 부합하는 지상(至上)의 강독으로 논어 공자의 눈높이 전달법 이상이었다. 그 정도이니 제자들이 학습이 부족해도 그 자리에서 바로 척척 다 알아들으니 배우는 이들을 보고 나무랄 일도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의의 물결이 마치 대자연의 큰흙이 주변 산야에 이야기를 하듯이 토담(土談)의 경지를 지녀 불경의 석가모니나 기독교의 예수급이었다.
어느 날 저녁 다소 일찍 서당에 갔다. 훈장선생님이 나보다 먼저 와 계셨다. 인사를 올리고 맹자를 펼쳐 몇 자 보니 선생이 날 보고 한 말씀 했다. “이 선생, 아파트가 자네 소유인가?”라고 물었다. “예, 저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씀이 역작이었다. 자기가 농장을 하나 소유하고 있는데, 그 농장에 새 경제작물을 심어 소득이 좀 더 나는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데 자금이 조금 부족하다면서 자금 대출에 내가 보증을 서 달라는 것이다. 이건 완전히 날강도이다. 나는 간단히 말했다. “제가 지금 집이 좁아 더 큰 평수로 임대로 이사를 가려고 합니다. 곧 매매가 이루어지는데 보증을 해 주면 매매가 안 됩니다.” 그리고 더 대화가 없었다. 며칠 후 밀양법원에 사무직으로 20년 가까이 근무하는 나의 제종숙부님을 만나 나의 훈장이 어떤 분인지 물어 보았다. 나의 숙부님의 답변이 바로 나왔다. “그 새끼? 믿지 마라. 돈을 빌려주면 절대 안 갚는다.” 영남 최고의 거유라고 하지만 공익과 사익의 전체적 조망에 좁은 식견과 안목으로 본능위주로 움직이며, 도덕적 결여와 분별의 부족으로 치명성을 드러내는 한국유생들의 본질적 폐습으로 누대(累代)로 계속 범(犯)하는 고질(痼疾)의 순환적 한계를 본 것이다. 사통팔달의 유학대가 고수라도 돈이 없으면 거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아동용 만화에서 흔히 보듯이 사무라이 검술고수라도 총 한방에 그 자리에서 그냥 바로 즉사로 가는 것이다. 참고로 사서와 시경 및 서경과 주역 등은 사회를 윤택하게 하는 자연적 자유인 Natural Liberty가 전혀 없다. 그러니 사서와 3경 등을 달달 외우는 유학의 달인이 착한 제자에게 사기를 치려고 한 것이다. 사기(詐欺)는 악의 하나로서 타협이나 협조의 대상이 아니다. 바로 징벌이나 소멸의 대상이다.
다음은 1997년경일 것이다. 고향에 계신 나의 종조부님이 별세하였다. 나와는 별로 친근감도 없고 길에서 등등 명절에도 몇 번 뵈도 용돈 한번 나에게 준 적이 없는 분이다. 항상 그냥 지나간 분이다. 그래도 나이 여든이 훌쩍 넘어 별세했다니 가 봤다. 장례를 마치고 아파트 거실 상가(喪家)에서 당숙들과 재밌게 이야기 하다가 전혀 안면이 없는 친지 하나를 만났다. 큰 평수라서 거실도 넓었다. 나보다 촌수가 하나 아래인데 첨보고 나이도 아재들보다 더 들어 보여 실수로 형님으로 불러 주었다. 그러자 그 녀석이 ‘옳지’하며 기특해했다. 나의 실수로 조카를 형님으로 부른 격이다. 그래도 뭐 다음 기회에 바로 잡을 생각을 하면서 그냥 보내고 있는데 이 녀석이 갑자기 나에게 “어이 동생!!! 차 좀 빌려 다오.”라고 하였다. 남의 차를 빌려 달라니 이런 개상놈이 다 있나. 나는 즉각 답했다. “난 차가 없습니다.”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당시엔 내가 차가 없었다. 그후론 그 녀석을 본 적도 없고, 만나면 항렬을 바로 잡을 생각이다.
또 하나 더 있다. 사립에서 공립에 왔다. 그러다보니 사립학교 퇴직금이 목돈으로 생겼다. 돈엔 사기꾼이 바로 붙는다. 길을 가다가 처의 외삼촌을 만났다. 범어사 올라가는 입구 길목에서 술장사를 하는 분인데 장사가 신통찮아 병원의 운전기사를 겸하는 중이었다. 이분이 나의 근황을 물었다. 사립에서 공립으로 갔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말을 해 왔다. 사립에서 받은 퇴직금을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 나는 즉각 답했다. “공립학교 행정실로 자동 이관했습니다.” 실로 서글픈 일이다.
남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여교사가 한 분 있었다. 부친이 의사는 아니지만 큰 개인병원의 전문의료기사로 여태껏 돈도 많이 모았고, 친오빠도 부친의 여망대로 서울대 의대를 나와 장래가 창창한 집안이었다. 여교사 본인도 인물이 출중하고 귀품이 넘쳤다. 성격도 명랑하고 별일 없는 나에게도 잘 대해 주었다. 남동생도 서울에서 명문사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녔다. 그런데 이런 분이 이상한 녀석의 구애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혼을 대뜸 하여 스스로 고생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남편도 명문 국립대 상대를 나와 나름 괜찮은 화재보험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 후 곧 그만 두고 더 큰 돈을 번답시고 부동산 컨설턴트로 사무실을 꾸려 독립을 했다. 그 뒤 얼마나 벌었는지 모른다. 졸지에 이 여교사는 전혀 해 보지도 않은 생고생을 하게 되었다. 부산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25평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간 것도 모자라 말 많은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함께 살아야 하였다. 내가 보기도 황당했지만 본인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달랐다. 딸네 집에 방문을 하고 자기 차에 오르면서 ‘내 딸이 사기를 당해 결혼을 했다.’고 탄식을 하였다. 몇 년 후 혼자 길을 가는데 그분이 차를 몰고 가다 나를 보고 차를 세워 나에게 반갑게 안부를 물어 왔다. 잠시 길에서 스쳐 만났지만 이젠 나이 탓인지 예전의 매혹적인 모습이 많이 가셨다. 이처럼 배우자의 튼실한 경제력에 빨대를 꼽아 자신의 부모까지 부양케 하고, 자신은 이것저것 해 보면서 손쉽게 먹고 살겠다는 것은 표시가 잘 안 나는 엄청난 악질 사기이다.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더 큰 부(富)를 형성할 수 있는 자본축적에 손실이 커 종신토록 심신이 피폐해진다. 수명도 단축된다.
이처럼 사기를 당하면 너무나 억울하다. 더구나 집안의 가장이 사기를 당하면 진짜 모든 식구가 지옥의 나락으로 빠진다. 나의 아버지는 생전에 크고 작은 사기를 많이 당했다. 결혼 후 젊음 시절 당한 뇌염 후유증으로 2급 뇌병변인데다 몸도 반신불수로 힘들게 살다가 2018.12.27.(목, 음력 11/21)에 영면, 만 86세에 가신 분이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도매업을 하는 부친을 도와 가며 직접 배운 상술로 그럭저럭 버티고 살아 왔다. 장사가 비교적 잘 되어 사기를 이래저래 당하면서도 100% 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대로 별 탈 없이 버텨왔다. 수년간 당하기만 하다가 결국 사법서사 밑의 브로커 한 분을 잘 사궈 서로 공생하면서 법원소액재판 등으로 손실도 많이 만회하였다. 사기를 덜 당하니 돈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나의 부모님들은 돈이 모여도 투자개념이 전혀 없었다. 설날 할아버지 집에 가서 아버지 형제간에 이야기하다가 나의 어머니가 돈이 있다고 자랑을 했다. 이게 화근이 되었다. 며칠 후 숙부님 내외가 판잣집인 우리 집에 찾아 왔다. 말이 친형제이지 독립 후론 서로 만난 적도 거의 없고 그냥 어릴 적의 정만 있는 정도이다. 양과자를 선물로 사 왔다. 나의 부모님은 생전에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달달했다. 숙부내외가 악덕 사기를 치기 위해 고급 양과자를 들고 나의 부모님을 만나러 온 것이다. 반신불수이고 가난한 형님내외가 고생고생해서 모은 돈을 노리고 온 것이다. 이건 큰 범죄로 결국은 그 자식들의 장래까지 망친 것이다. 이런데도 우리 가족은 그 낌새를 전혀 몰랐다. 철저한 바보였던 것이다. 믿으면 안 되는 형제에 대한 방어가 전무했다.
뇌병변 반신불수로 여태 옳게 인간 대접 한 번 제대로 못 받고, 이제나마 사법서사 밑의 브로커의 도움으로 서로 공생하면서 돈 모으는 기술을 약간이나마 터득한 것이다. 이런 돈을 사업을 한다는 친동생이 몇 달 후 꼭 갚는다며 빌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엔 그런 친동생의 개인 사업에 무한연대채무보증까지 서서 고생고생해서 겨우 마련한 도로가의 집마저 생기자마자 들어가 살아 보지도 못하고 날려 버렸다. 그 집에 잠깐 간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1층엔 상점이 두 칸 가능한 2층으로 된 양옥인데 부산대학으로 가는 대로의 길가라서 앞으로의 경제적 가치가 우리 가족으로선 분에 넘치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크나 큰 기회였다. 그때가 1981년도이니 41년 전이다. 조금 멀리 장전래미안이 보이는 사거리 신한은행(당시엔 조흥은행) 북쪽 100M내외 부산대쪽 거리 장전파출소지구대 옆 건물로 현재는 넓이를 더 넓혀 LAPUTA 기계식 주차장 하얀 건물로 되어 있다. 당시 완공 후 나부터 먼저 가보았다. 1층에 있는데 나의 삼촌이 왔다. 집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갔다.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별로 다른 말은 없었다. 당시 나는 군대를 제대한 1년 대입 재수 경험의 복학생으로 4학년 한 학기를 남긴 나름 명문사학의 대학졸업반이었다. 전투경찰로 군필까지 했지만 삼촌의 래방 목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곤 며칠 후 그 집으로 나의 아버지가 연대보증을 선 것이다. 그래도 삼촌은 감언이설로 나의 어머니를 꼬아 돈을 더 빌려갔다. 이제는 이웃의 돈까지 빌리게 하여 그 돈도 일부 받아 갔다. 죽 여태 가난하게만 살아 온 별 볼일 없는 뇌병변 반신불수의 형의 돈과 집을 친동생이 다 가져가고 부도를 내어 파산을 당하게 한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차 속았다 싶어 너무나 당황하여 나의 할아버지에게 고하니 이미 할아버지마저도 자기 집으로 보증을 서 준 후였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무한보증이 아니고 유한보증이라서 할아버지 스스로 여윳돈으로 복구를 바로 했다.
어릴 때부터 같이 고생한 방위병 출신의 두 살 터울의 나의 동생도 하나 있는데 두형제가 보고도 몰랐다. 숙부내외가 어리숙한 형 내외를 달달한 양과자로 꼬아 이런 짓을 할지는 상상도 못했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숙부 처가의 장모와 여형제 2명에게도 돈을 빌려 갚지 않아서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 당시에 유럽철학의 지성인 칸트를 공부하고 헤겔을 보는 내 정도라면 그런 상황을 전혀 몰랐더라도 본능적 느낌으로 위험한 분위기를 즉각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태 전에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충분히 알아야 하는, 당시대에 남들이 좀처럼 가기 어려운 지성의 전당 상아탑 졸업을 목전에 둔 만 26세의 나이인데도 예지력이 모자라니 그대로 무방비로 전멸의 수준까지 참담하게 전 재산을 사기 당한 것이다. 삼촌이 이미 성인이 되어 군필까지 하고 사회진출을 앞두고, 이제 쉽게 번창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두 조카의 장래까지 무자비하게 삼킨 것이다. 이 사건은 나의 두뇌까지 파괴 시킨 것이다. 정신적 내상은 완치 불가로 무조건 평생을 간다.(문제는 이집 말고도 한집이 더 있었다. 사상구에 60평의 대지에 3층 연립으로 6가구의 아파트형 연립을 나의 아버지가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 건축을 했는데 이 집도 삼촌의 장난으로 날아 갔다고 한다. 1980년 당시에 이집을 은행 담보로 나의 어버지를 꼬아 1000만원을 대출을 받아 간 후, 이 대출을 연기한다고 인감증명서와 도장을 다시 받아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1000만원을 대출을 받아 모조리 자기가 착복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40년이 지난 후 나의 어머니 푸념으로 알게 되었다. 뇌병변 반신불수 나의 아버지, 한글만 겨우 아는 무지한 나의 어머니가 본인들은 물론이고 두 아들의 장래까지 망치고 말았다. 이런 줄도 모르고 삼촌을 볼때마다 부실한 나의 부모 대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믿음과 예의를 지킨 것이 너무나 큰 나의 실수 였다. 불구 친형의 재산을 자기가 탕진하는 수준으로 다 써면서도 조카인 나에게 용돈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조카로서 삼촌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빈천하게 허름한 판잣집에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부모님이 돈에 여유가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심지어 이재(理財)에 밝은 내 동생도 몰랐다. 나의 동생 마저도 아버지 몫으로 넘어 온 할아버지 유산 1,350만원 가운데 1000만원을 자신의 독립자금으로 가져가 버렸다. 심지어 이런 사태마저도 아버지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서 나는 전혀 몰랐다. 이 역시 아버지의 푸념으로 30년 후에나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노인이 된 반신불수의 아버지가 돈이 없어 생활이 너무 힘드니 저절로 푸념으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면 1983년 8월 초 할아버지 별세후 어느 날 늦은 오후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개당 3kg 나가는 물건들을 혼자 한참 옮기고 있는데 동생이 걸어왔다. 그리곤 하는 말이 할아버지 유산 가운데 자기가 1000만원 가져 갔다고 나에게 일러 주고는 '그래? ~~~!!! 알겠다.'는 나의 답을 듣고 가버렸다. 1000만원? 순간 황당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당시 1983년도 1000만원이라면 제법 큰돈이다. 철공소 직원 한달 임금이 8만원 정도이고, 대졸 초임교사 한달 봉급이 16만원 수준이었다. 그때 내가 밀양에 교사로 있었는데 밀양읍내 20평 아파트의 매매가가 600만원 정도이고, 내가 1년 거치 19년 상환의 18평 아파트의 입주조건인 340만원을 맞추기 위해 매월 10만원 정도의 장기 적금을 1982년부터 열심히 들 때이다. 그때 나는 군경력이 3년이 있었기 때문에 5년차 대우를 받아 절약을 철저히 하면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하여튼 동생이 나에게 할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1000만원을 자기가 가져 갔다고 전달한 그날, 저녁에 일을 다 마치고 와서도 백열등의 어두운 방에서 흑백TV를 보고 있는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에겐 전혀 물어 보지도 않았다. 전혀 정보제공이 안 되었다. 동생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여전히 모를 뻔 했다. 본인들이 부실하니 아버지의 친동생은 물론이고 심지어 차남인 아들까지 돈을 그저 빼 먹은 것이다. 가족 간의 대화도 언제나 일차적인 의식주 중심뿐이었다. 가정의 수준에서 자녀들의 의식이 더 성장하기엔 내용 자체가 빈약했다. 주변 환경의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교무실의 교사들 가운데도 시골출신이나 빈한한 가정의 출신인 경우 언행에서 빈티가 흐름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그럴적 마다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저몄다. 의식주 등 언행이나 복장, 심지어 돈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 등은 물론 글쓰기나 가정의 장식을 꾸미는 수준에서도 그대로 여과 없이 다 드러난다. 이는 개선이나 치료가 불가능을 넘어 불능이다. 무조건 종명토록 간다. 성인 후에 고급독서를 장기간 열심히 하더라도 성장기의 고름 흔적이 가득하다. 특히 보고서의 품격도 넘을 수 없는 벽이 보인다. 정신적 한계는 그토록 무자비하다. 자수성가를 하거나 노력하여 고위직이 되더라도 프로적 상급이 될 수 없는 빈한한 대화와 체품이 본인과 상대를 아울러 함께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그런 인물도 퇴직을 하고나면 어릴적 함께 논 동급들과만 끼리끼리 논다. 같은 서울대학 명문학과를 나와도 소리 없는 레거시(legacy)그룹엔 아예 초청도 되지 않는다. 레거시 그룹이 본능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밑에서 올라 온 친구들은 비록 그가 무소불위의 황제급이라도 신분상 자신들보다 엄청 아래의 태생적 하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치이념이다. 그래도 신(神, God)이 준 세월은 공평하게 흐른다. 우리 가족에게도 세월이 더 흘러 나의 아버지가 병환으로 만 86세에 돌아 가기 전에 7년 7개월의 요양병원비를 장남인 내가 독박으로 내는 통에 나의 살림도 꽤나 어려웠다. 당시엔 그래도 고참교사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충당이 되었지만 별도의 저축은 불가능했다. 친형제마저도 믿음과 신용이 깨져버리니 혈족에 대한 애정이 싹 가셔 버렸다. 심지어 1983년 당시 할아버지 사후 직후 삼촌이 두번이나 나의 아버지를 찾아와서 형제간에 갈 유산을 자기가 다 가져 가는데 협조를 하여 성공하면 그동안 빚진 것을 2개월 안에 다 돌려 주겠다고 회유를 하였지만 실패를 하고, 유산 정리 당일날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전 재산을 남겨 주기로 했다면서 가짜 유언서를 들고 쇼를 하다가 백부와 배다른 서울 삼촌의 반대로 실패를 했다. 서울 삼촌은 사기죄로 고소까지 준비를 했다고 한다. 덕분에 서울에 사는 이복 고모와 할아버지 동거녀를 비롯하여 정확히 6명에 1/n로 분할처리되었다. 기타 혹은 아버지의 몫을 삼촌이 가져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의 동생이 가져가는 것이 훨씬 더 나에겐 좋은 것이다. 나 역시 동생에게는 그런 일로 나무라지는 않았다. 삼촌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나의 아버지의 잔여재산이 모두 나의 명의로 되어 있었지만, 나의 동생에겐 아버지의 유산을 정확하게 2등분하여 2층 집을 하나 마련해 주었다. 이는 동생보다는 나의 조카인 질녀의 백부로서 동생의 자녀로 하나 뿐인 그의 딸을 위한 것이다. 적어도 딸인 질녀에게만은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또 인간 역사에서 남자인 경우엔 나처럼 회복이 얼마든지 가능해도, 여자인 경우엔 학력이 높아도 경제적 상처에 대한 회복이 불가능하다. 여자가 돈에 힘들면 불행이 찾아 오는 법이다. 백부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또 할아버지의 동거녀인 경우는 자식들이 특별 대접하여 헤어질 적에 섭섭하지 않게 경제적인 배려를 별도로 마련해 주어야하는 것이 도의인데 나의 아버지의 형제수준이 그 정도는 안 되었다. 유산인 경우 자식들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생전에 혹시 동거녀로부터 배신을 당하더라도 직접 미리 손을 충분히 써 주고 가야 하는데, 나의 조부님 역시 그 정도는 안 되었다. 모조리 소탐대실의 인생을 사는 분들이다. 유전적 조선인(朝鮮人) 답게 로고스(Logos)가 없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잔여 재산의 주인 명칭이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고, 이미 다른 형제가 선수를 쳐서 재산을 가져 갔음에도 전혀 문제를 달지 않고 그대로 공평하게 나누기를 한 경우는 한국인으로서는 내가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전히 유일 할 것이다. 12촌내의 우리 집안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으면 그냥 그것이 그대로 끝이었다. 나는 누누이 보아 왔다. 형제간의 우애보다는 자신의 전답이 더 중요한 것이다. 방계는 아무리 우애가 깊어도 방계(傍系)인 것이다.)
우리 가족들의 그 뒤의 후유증은 실로 답이 전혀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복구가 불가하여 나락으로 빠졌다. 그래도 사법서사 밑의 브로커와 공생하면서 외상으로 준 대금을 줄곧 받아 가며 빈한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살아 왔다. 그 브로커는 더 살판이 났다. 차용증을 반드시 받고 외상을 얼마든지 더 주라면서 모든 외상값을 다 찾아주겠다고 호언하였고 또 그렇게 해 주었다. 그도 실적을 우리 집말고도 여기저기서 세워 수수료로 자기 아들 학비를 대었다. 그중에 야비한 업자들에게 더 만만하게 보이고, 단골거래 업자들의 요구를 거절 못하고 외상 주기를 좋아한 나의 부모님이 가장 돈이 되는 단골이었다. 돈을 받아 올 때 너무 신이 나 함박 웃으면서 수수료를 꼬박꼬박 정확하게 받아 갔지만, 우리 가족에겐 신(神)이 보낸 천사인 셈이다. 무지막지하고 막가파인 이 천사(天使)가 돈을 좀처럼 갚지 않으려는 사기성이 넘치는 3류 장사꾼들에게 자신이 잘 아는 친지 검사의 명함을 보이면서 '너희들은 고의로 가난하고 불쌍한 장애인의 돈을 등쳐먹었기에 사기로 일단 구속부터 한다.'니까 모두들 벌벌 메웠다. 당시엔 검사가 단독으로 피의자 호출은 물론이고, 심문시 검사의 맘에 안들면 72시간 내 피의자 신체구금이 그 자리에서 즉각 가능했다. 이에 모두들 화들짝 놀라 해당 장사꾼들은 사색이 되었다. 어떤 이는 스스로 먼저 찾아와 돈을 갚고 또 외상으로 가져갔다. 이때 나의 아버지는 차용증만큼은 꼭 받았다. 그것 참 기묘한 상거래 술이다. 희한하게도 부모님의 무능으로 여기저기 늘러 있는 상당히 큰 외상값들이 사정없이 피폭적으로 망해가는 우리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살린 것이다. 외상값을 주고 또 외상을 가져가는 소탐(小貪)의 업자들과 법률 브로커의 공생적 도움으로 작지만 그래도 적자를 조금조금씩 만회할 수 있었다. 물자가 흐르는 '장사'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돈과 물자가 흐르는 장사야말로 신이 빈자들에게 내린 축복의 길이다. 좌파사회주의자들은 이런 것을 싫어 한다. 그런 면에선 조선의 유생들은 모조리 좌파 중에서도 교조적 사회주의자들이다. 그러니까 공자나 맹자 등 사서를 실컷 공부하고도 백성부강의 길을 아예 원초적으로 싹부터 잘라 막아버린 것이다.
이처럼 하물며 무시당할만한 작고 보잘 것 없는 빈한한 가족도 이러할지 언데, 기업의 오너나 국가 지도자가 사기에 걸려들거나 사기를 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 보자.
기업가는 일종의 대부(大夫) 이상의 제후(諸侯)격이다. 그 제후의 가문과 영역에 제후 하나를 보고 수많은 식솔들이 밥을 먹고 산다. 정치가는 더 하다. 훈련받은 최고의 엘리트들이 내공을 쌓아 검정을 받아가며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네들이 사기에 걸려들거나 사기를 치면 곤란하다.
다음의 예들을 보자.
먼저 '대통령'이란 자리를 말해야겠다.
대통령이란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역사와 이야기하는 자리이다.
대통령 자신이 바로 '역사 그 자체'라는 곳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사기를 치거나, 사기를 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대중국 전국시대의 맹자의 말처럼 필부(匹夫)라도 군주 시해(弑害)가 가능할 것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다음 이야기를 숙독했으면 한다.
- 97 외환위기는 야당 김대중 후보의 비협조 때문이었다.(김영삼 대통령의 퇴임 직전 말이다. 이분은 본인의 무능력에 사기를 당한 것이다. 참고로 김대중, 김영삼 이 두분은 6.25사변 때 병역미필이다. 상시 전쟁 분단국에서의 병역미필!!! 이런 류의 자들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조건 정상이다. 이는 마치 약혼을 한 자가 간통이나 간음을 한 경우과 동급이다.)
-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 능력도, 의지도 없다. 내가 단연코 장담한다.(김대중 대통령 당시 방북 후 소감이다. 삼척동자라도 사상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상밖의 무책임한 짓이다. 노벨평화상으로 세계가 공식 인정하는 한국 민주화의 대부가 이런 말을 하다니? 누가 사기를 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스스로 무덤을 팟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버린 것 같은 국가안보에 형편없는 치명적 소리를 작심으로 한 것이다. 더 결정타는 다음이다. 퇴임 즈음에 기자가 물었다. '우리 한민족의 장차 정치 시스템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답 '그때의 우리 민족이 결정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이는 사상의 기저를 의심할 만하다. 이런 말로 체제이념에서 사후에도 요주의인물이 되었다. 전남의 작은 바다 섬 출신이지만 머리가 홀로 명석하여 돌대가리 수준의 한국정치수준에선 국제정치 이해도가 매우 높아 보이지만 정통파는 아니고, 멘토도 없이 홀로 공부하여 길을 잘못 든 세미프로 사이비 국제파 수준이다. 그기다가 대통령 되기 이전의 미국, 영국, 일본에서의 정치적 체류기간도 상당한데도 어이없게도 국제금융지식이 거의 바닥수준이었다. 망명 비슷하게 선진국에 가 있어봤자 만나는 자들의 수준이 다들 2급 이하이니 별로 배우거나 느낀 바가 자기 중심의 국내적 재해석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분이 대통령이 된 덕분에 호남인들의 5·18 광주사태 한(恨)도 어느 정도 풀었고, 추후 대한민국 역사에 큰 균형적 주춧돌이 마련되었다. 또 정치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호남의 인재들이 중앙무대에 대거 진출하여 큰 부와 명성을 예전보다는 쉽게 이루게 하였다. 실(失)보다 득(得)을 훨씬 많이 이루었지만 북한문제만큼은 요주의 반면교사이다. 0.0002% 결핍으로 결코 채울 수 없이 그만큼 부족하지만 대역전의 역전(逆轉)의 주인공으로 신(神)이 내린 정객으로 완벽히 자기 잘못을 증발시킨 대승대첩(大勝大捷)의 극동의 프로 정치수완가이다. 정치의 평생대권숙적 김영삼의 실책 97' 외환위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Lone★Star 사태 암수(暗數) 등등 정치가 다 그렇듯 신이 축복이 대한민국에 훈풍으로 미치길 바랄 뿐이다.)
- 내가 직접 사인을 했기 때문에 다음 정부는 북한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노무현 대통령 당시 방북 후 발표이다. 차기 이명박 정부의 비협조로 박친 김정일이 천안함 침몰사태를 야기했다. 원인은 노무현 대통령인데, 욕은 후임 이명박 대통령이 통째로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또하나 알 수 없는 일은 서울 및 수도권방위의 요충인 서부 휴전선의 인계철선(引繼鐵線) 전방 미군을 후방 2선으로 옮긴 것이다. 옮긴 사유가 우리 군의 자존심 문제라고 하던데 이거 무슨 소리인지 그 진의가 매우 의심스럽다. 무임의 매우 강력하고 엄청난 핵폭급 안전장치를 스스로 제거한 것으로 병법에 바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사람은 본인과 가족 등이 자기들 형편에 해서는 안 될 실수를 저질렸다. 바로 퇴임 직전에 미국 뉴욕 허드슨 강가 부촌에 자녀들의 집을 빌라로 2채나 마련하려고 박연차 태광실업회장이란 신발공장 장사꾼에게로부터 640만 달러를 3차례에 걸쳐 뇌물로 받았다. 이는 막판에 스스로 지옥문을 열고 들어 간 격이다. 정신이 출신성분상 빈곤한 자가 대통령이 된 경우에 종종하는 실수에 해당이 된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된 자가 장사꾼의 돈을 암맘리에 받는데 가족회의를 하는 등 직접 관여한 주제에 검찰수사 도중에 면피를 하려고 고향마을 산 절벽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는 통에 공소가 강제 종료되고, 도리어 부정과 타협하지 않아 자살했다는 식으로 엉뚱하게 포장되어, 좌익정치단체의 성물 명소로 둔갑이 되어 보통 시민들의 추념 방문지가 되고 있다. 이는 온전한 대국민(對國民) 사기극으로 좌익들의 대표적 성공 선전작품이다. 별도의 성역 추념으로 나라발전에 도리어 누(累)가 되고 있다. 고향에 있는 무덤을 작고(作故)하신 다른 대통령들처럼 국립묘지로 옮겨야 마땅하다. 그의 대통령 업적을 1기와 2기로 나누어 2기인 후반부엔 좋은 점수를 주고 싶어도 여전히 국방과 대북정치엔 누구의 영향인지 가름하기 어려워도 스스로 실책을 줄곧 자행(恣行)하고, 갑자기 면피용 자살을 하는 통에 퇴임 후의 종결적 3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못하고 죽었다.)
-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북한과 종전선언을 해야 한다.(무한히 발전해야만 하는, 타국과 경쟁해야만 온전히 살아남는 자유진영의 지도자로서는 절대 금물인 비루한 한계가 있는 좌익 가난한 자의 사회주의 논리를 종국적 골수신념으로 가지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가붕괴 미래 포석용 암수로 폭발진동이 매우 강한, 위험하고 우익인 상대인 자유진영을 교묘히 속이려는 요상한 국방논리이다. 종전선언은 공산당이 매우 불리할 때 공산당이 강자에게 쓰는 전략전술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진지론 급으로, 보통의 공산당원은 전혀 알 수 없는 먼 미래용 포석으로 레닌(Lenin)용 전략적 수뇌 급의 비책 술수이다. 종전선언이란 극단이념을 품은 것으로 미군철수를 1차로 교묘히 유도하고 사회주의로 행하는 국론분열을 노린 엄청나고 사악한 술수이다. 하지만 종전선언을 하는 그 순간 남북한이 동시에 안으로 붕괴할 조짐이 보인다. 남한은 군인정신이 방향을 잃고, 북한정권도 내부로부터 기합이 텅 빠져 오히려 먼저 무너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북괴가 오히려 이를 미국 핑계로 교묘히 응하는 척하면서 계속 피하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역으로 북괴가 상상이상으로 매우 영리하다. 마지막 끝까지 결코 스스로는 망하지 않으려는 공산왕조집단답다. 요약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좀비만도 못한 구(舊)한말의 고종 황제를 보는 거 같다. 외치엔 국방과 외교가 위험하고 내치엔 대통령으론 여러모로 지진아 급이다. 대통령이 가장 우선적으로 똑똑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을 재임기간 내내 줄곧 망치고만 있다. 아마 어쩌면 어떤 목적으로 일부러 하는 짓인지도 모른다. 의식자체가 교활할 정도로 어눌하게 필요한 핵심은 교묘히 피하면서, 추후라도 자신의 목적을 노리는 속이 아주 크게 엉큼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는 첫째가 헌법에서 ‘자유’를 삭제하려고 하였다. 이에 국민적 분노가 일어나자 슬그머니 초중등 교과서에서 자유를 지웠다. 나는 놀란 것이 이에 동조하는 대학교수 및 좌파 지식인들이 생각 이상으로 여기저기서 많았다는 것이다. '자유'는 freedom과 liberty로 지난한 인류역사에서 만인들의 오랜 숙고적 바램으로 모든 서민들을 위한 사변철학에 있어서 최고의 정치 가치 덕목이다. 반만년의 우리 역사에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출범과 동시에 겨우 얻은 '자유'를 통째로 지우려 하다니 이상하고 비정상적이고 매우 위험한 집단 종족들이다. 결론적 두뇌가 파충류 좀비 급이다. 여하튼 대한민국을 통째로 말아먹으려고 시도한 체제부정의 요주의 대표적 인간저해 사기꾼이다. 이런 자가 국군통수권자로 계속 있다간 설사 북괴의 남침이 대거 있더라도 국군들에게 싸우지 말고 전쟁을 피하고 무조건 후퇴하라고 말할 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자(仁慈)로 가장한 자생적 좌파공산주의자이다. 그래도 결과론적으로 잘한 것이 아슬아슬하게 하나 있다면 바로 북한에 본의 아니게 사기를 친 것이다. 북한을 거지취급하면서, 왕창 도와드리고 싶지만 미국이 반대하니 어쩔 수 없다면서 말이다. 북한을 국제적으로 크게 도와 주려다 오히려 공인 걸인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삶의 현장에서 일상 생활에 불철주야로 바빠 정신에 여유가 없는 일반 시민들은 좀처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텔스모드 사기꾼으로, 결국 공산북한정권집단에게 마저도 공짜 그대로 받아 먹었다간 북괴체제붕괴를 앞 당길 국제적 사기를 친 꼴이 문재인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되었다. 결론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정신구조는 김일성주의자 신영복 통혁당을 추존하는 한국 좌파 사기꾼 지식인 중심무리에 온전히 물든 자로 정신적 고향이 미군의 원폭투하소문에 놀라 부모가 남으로 탈출한 북한 흥남부두에 초점을 두고 있는 대통령으론 매우 괴이하고 위험한 자이다. 가장이 사기를 당하면 그 가족은 바로 그날부터 암흑의 지옥을 맛 본다. 이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사기를 주체적으로 당해 5년 임기 종료 전에 반드시 자유시민사회의 공공선을 허무는데, 이탈리아 공산당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진지론 급적 사고를 연가시에 뇌가 중독마비된 사마귀처럼 칠 것이다. 이에 대한 치유책으론 차기 정부부터 줄곧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시장경제로 국민적 부를 G9급으로 영속적으로 늘리고, 중동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암암리에 미국의 묵인 하에 수백기의 핵무기 핵무장을 비책으로 해 놓는 하는 수밖엔 없다. 그러면 자기면역으로 이 사회가 지속적으로 온전하게 된다. 신영복 등 한국 종북 좌파를 거름으로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신 수준이 간첩수준이며, 여자로 치면 어느 가난하고 빈천한 여자가 어떤 부잣집에 후처로 시집을 와서 자기 남편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상시로 간음을 하는 자이다. 그런데 남편의 원수는 이 여자를 첨엔 전혀 알지도 못했고, 단 한 번도 이 여자를 유혹한 적도 없고, 더욱이 재미로 간통을 해주어도 관심도 전혀 없다. 남편 득으로 큰 부자로 살면서 간통이나 간음을 대놓고 하는 더러운 년이라고 보기 때문에 언제라도 버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스스로 이 남자와 간음을 하면서 스스로 죽기 전에 첩으로 붙여 살기를 간청한 경우이다. 이런 자가 5년간 한국의 19대 대통령이다니 대한민국 전체가 아슬아슬하다.)
6공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5공의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 달 사이로 차례로 영면했다. 두 사람 모두 화장(火葬)을 하고 영면한 것은 좋은데, 군사 쿠데타 거행 후 영면하는 자가 남들에게 용서를 구하면 안 된다. 용서는 일반 시민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평가는 사후에 누구나 하더라도 자신이 주도한 일이나 여파로 대량 살상을 초래한 경우, 용서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 만약 자유를 위하여 거사를 했다면 그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처럼 그냥 죽으면 된다. 그런 면에서 용서를 구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거사마저도 전두환 눈치를 보고 한 격이 되고 말았다. 이승에서는 무조건 벌을 받고 용서는 저승에 가서 받아라.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 노태우 이 두 자는 김영삼 정권 때 사형으로 대법원 판결을 받고 처단했어야 한다. 나라의 먼 미래와 지금 당장의 장래를 위하여 사형만이 답이었다. 나는 왜 이런 자들이 천수를 누릴 수 있는지 의아하다. 나의 가족들만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아버지 6순 잔치때 형제자격으로 방문한 숙부님 내외는 세 자녀들의 도움으로 미국여행을 다녀온 여담으로 미국의 진풍경을 자랑 삼아 이야기 할 적에 2급 뇌병변의 반신불수 나의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어머니는 재밌게 들었다. 부모님의 수준이 이러할 진데 과연 내가 무엇을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겠는가. 저변 바탕의 지원에 큰 하자들이 연이어들 있으니 누추한 부모와 교활한 친지들이 후대의 발전에 도움보다는 계속 누(漏)가 되고 있는 꼴이다. 삼각돛대처럼 자력으로 역풍을 뚫고 나아 가야하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말이다. 참고로 전두환의 경우는 본인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인 보안사령관으로 재직 했기 때문에 유신 다음의 대통령으로 가는 길을 당시의 3김 등의 실세 정치인들에게 양보해도 바보소리를 듣게 되고 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해도 역적소리를 듣게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암맘리에 성장한 하나회의 군 후배들의 저력을 믿고 그 후원으로 대권의 모험을 이판사판으로 감행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자로 사후 본인의 무덤이 없더라도 상대방들에게 용서를 구하면 안 된다. 그건 바로 구걸(求乞)이다. 이승에서는 무조건 벌을 받고 용서는 저승에 가서 받아야 한다. 안개정국의 난세의 대통령은 안개정국 난세의 대통령 답게 사라져야 한다. 그래도 전두환과 노태우가 본의 아니게 기상천외하게 대한민국 전체 역사에서 아주 매우 잘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5공과 6공의 공화국 헌법으로 민주정의 기초와 실체를 명실상부한 자유 민주주의의 실체법으로 확립하고 간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를 민중들이 오매불망 염원하는 것과 민중들이 시민이 되어 실체를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 둘은 이를 본의 아니게 죄를 뒤집어 쓰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운 좋게 실천하고 간 것이다. 못난 민생들이 쓰러져 가면서 피흘리며 가는 대하 드라마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들은 조선시대 조상들을 잘못 만나 모두가 사기를 당한 꼴로 미국국제유대자본가들에게 돈을 빌려 올 적에 상존하는 북괴의 위협 때문에 이자를 다른 나라보다 몇 % 더 내고 빌려 온다. 만나도 추잡하고 비열한 조상들을 만났다.
나의 경우 교사만 줄곧 한 덕에 사기를 당해도 덜 당했다. 만약 사업이나 돈이 되는 공직에 들어갔다면 아마도 나 역시도 사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로 나의 숙부도 절친 동창에게 큰돈을 사기 당했다. 그 친구는 돈을 전혀 갚지 않고 교도소를 다녀왔다. 못난 형에게 받은 돈으로 더 큰 미끼를 물려고 하다가 절친 동창에게 사기를 당해 고스란히 그대로 같다 바친 것이다. 거상(巨商)인 나의 할아버지도 사기를 여러 번 당했다. 6·25사변 때 서울에서 대구까지 물건을 기차로 한량 주문하여 받았는데 중간에 사변이 터져 그 물건이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졌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 왈(曰) ‘나라에 전쟁이 터졌는데 그깟 물건이 무슨 대수요?’ 대전에서 역무원들이 사변소식을 듣고 다 훔쳐 간 것이다. 나라가 안 망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원래 부모님이 부실하면 자라는 아이들은 혹시나 하며 백부나 숙부들에게 기대를 하곤 한다. 하지만 어떤 백부도 숙부도 조카를 위하여 대학등록금을 한 두 번은 몰라도 계속 줄곧 대준 이는 없다. 나의 경우는 백부와 숙부 모두가 있지만 용돈도 받은 적이 없다. 이런 숙부가 1991년경 자기 아들이 대졸 후 취직이 되었다고 나보고 취업신원보증을 서 달라고 교무실로 부탁전화가 왔다. 너무나 황당하고 모욕적인 이야기이다. 그런 것은 보증보험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난 간단히 답했다. ‘보증은 부모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삼촌은 나의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상대를 너무나 얕보고 무례하다. 다행히 어머니가 놀라서 바로 거절했고 불이 나게 교무실로 나에게 전화하여 거절하게 했다. 수학교사 鄭○○ 선생 사모님의 예언적 말씀이 너무나 정확했다. 마치 뱀이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들을 노리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꼴과 진배가 없다.
이처럼 사기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인간의 삶을 위하여 우리 전체가 지향해야 할 바른 모습이라면 각자 알아서 도생하라는 적자생존의 세계를 떠나, 크면 큰 만큼 작으면 작은 만큼 그 이상으로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의 자본축적을 불신과 패악으로 저해하고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엄청 방해가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풀이는 모든 것의 다방면에 정치와 법률 등등 무수히 다각도로 있지만 위의 법률 브로커의 예에서 보듯이 우선 각 개인의 타인에 대한 공격과 자기 방어력 신장도 함양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행정과 교육 등에서 무엇보다 필요하다.
부연하면 사회전체에 사기적 그물망을 씌우는 조직적이고 계급적인 사회주의보다, 보다 나은 개인들을 위하여 자유와 개방을 지향하고 통상 등 나의 모든 자유와 누구에게나 진출을 개방하는 자유경쟁의 공화정의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뇌병변 및 반신불수의 나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면서도 집단 농장이나 배급요양소가 아닌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온존히 자유를 누리고 빈한하지만 일방적인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의 처신대로 마음 놓고 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저급했지만 그래도 아시아 전체에서도 자유의 지수가 가장 높은 자유대한민국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한국이 아니고 제반 아시아의 다른 나라였다면 노동력이 마이너스로 부실한 나의 아버지 같은 경우는 인생에서 일찍이 낙오하여 86세까지는 도저히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후반기부터는 법률 브로커의 도움으로 법률구조의 원리를 실제적으로 알아 사기를 덜 당해 장사로 돈도 다시 모아 다시 지은 자기 집에서 자기가 번 돈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가신 것이다. 이건 자유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자유란 신이 인간에게만 준 유일한 복음적 선물이다. 그리고 자유 중에 최고의 자유는 '제3자 간에 화폐로 거래하는 통상'이다. 이것은 과거 소련의 공산사회주의에서도 횡행하던 러시아의 암묵적 지하시장과 작금의 동토 북한의 국경도시 길거리 노전상의 여러 장마당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다. 거지(乞人)도 사회주의보다는 돈이 통상으로 여기저기서 남아돌아가는 자본주의가 훨씬 낫다.
위와 같은 나의 개인사? 말하기 곤란한 더 큰 내용도 더 이상으로 많다. 부모님이 방어벽이 안 되니 그 손실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왔다. 그래도 아쉽지만 나름 부모원망 별로 않고, 보이지 않는 신의 보호 아래 씩씩하게 자라왔다. 특이한 점이 있으면 잊기 쉽지 않는 내용은 그대로 망각을 한다. 살기 위한 나의 두뇌의 작용이라 본다. 아쉬운 것은 나름의 타고난 나의 착한 성품이라면 조금이라도 유복한 가정에서 큰 상처 없이 자랐거나, 혹은 서구의 명문귀족처럼 유년기부터 넉넉한 자존감을 배아(胚芽)할 수 있었다면 더 남에게 작은 부문까지 도움이 되는 힘 있고 고귀한 성품과 자질을 함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쉽게 잘 사귀고, 남을 잘 믿고 무엇보다 타고난 성격이 단순담백(單純淡白)하여 꽤 어려운 양보도 잘한 내가, 안 당해야 하는 과거의 상처들이 너무나 깊고도 깊어 가끔은 자주 무의식의 통증은 느낀다. 20대에서 30대 때는 무너진 성벽에서 검게 불타고 붉게 무너진 산등성이의 성마루 성채에서 찢어진 갑옷 속에 한손에 칼을 내리 휘어잡고, 홀로 서 있는 악몽에 수 없이 깨어났다. 왜 그럴까? 그때마다 꿈속에서 하늘을 가득 메운 까마귀들 아래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도망갔다가 홀로 돌아와 서 있는 패전의 병사와 같았다. 길고 긴 허탄(虛誕)이 나를 꿈속에서 여러가지 모양에서 헤매게 하고 있다.
개인사에서의 사기도 문제지만, 나라가 통째로 사기 당한 일도 비일비재하다. 구 소련과 오늘날의 중공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북한은 물론이고 태평양 전쟁 시의 일본도 그랬다. 세계지도를 자세히 보면 유라시아 등에서도 통상의 자유와 헤겔의 절대정신이 요원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일은 누가 신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별 볼 일없다. 지나가는 구름 보고 기도하는 격이다. 인간 각자인 개인 스스로가 그런 사기에 걸려들지 않도록 자신의 정신가치를 높여 여기 있는 나부터 지나가는 소소한 피해라도 당하지 않도록 처신하는 수밖엔 없다. 신의 보호를 요청할 따름일 뿐이다.
참고로 난 주변인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한국인들을 믿지 않는다. 그냥 같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고려 말 몽골과의 전쟁에서도 강화도 무신(武臣)들은 약자들만 골라 전선에 투입시켰다. 임진왜란 때엔 더 했다. 구심점이 전혀 없는 양반들과 왕족들은 당연하고 도망간 장수와 군졸들이 한둘이 아니다. 결정타는 1910년에 단체로 매국을 했다. 6.25땐 징집대상자들은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일본도 그렇다. 이들은 국가 간의 전쟁에서도 선진포고라는 것은 전혀 모른다. 북방 오랑캐도 이 정도는 아니다. 태평양 전쟁 시엔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포로(捕虜)는 물론이고 백성과 아군마저도 급하면 옥쇄(玉碎)로 살육(殺戮)을 했다. 중국은 5,0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졌지만 자유의식이 전혀 없다. 시민권과 개인을 위한 자유(自由)라고 할 만한 희미한 인자(因子)라도, 아니면 그러한 비슷한 종류라도 조금만이라도 있었다면 이미 중공(中共)이 벌써 아닐 것이다. 아시아 존(Zone)에서 가장 문명국인 한·중·일이 이 모양 이 꼴인데 다른 지역은 논할 필요도 없다. 이네들을 인류(人類)라고 하기엔 자유(自由)라는 현자(賢者)의 돌(philosopher’s stone)인 유전적 결정타가 한 결 같이 애초부터 결핍되어 있다. 중동, 인도, 중국, 일본, 한국 등 동남아를 비롯하여 인간들이 바이러스처럼 우글우글하지만 단 한명도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종족들이다. 그러니까 숙부란 놈이 어릴 때부터 부실한 부모를 만나 굶어 가면서 야위어 고생하다가 이제 겨우 운이 좋아 살만하고 판잣집에서 막 사회에 진출하려는 가난한 두 조카들의 앞길을 완전히 틀어막고, 20대 중반 후 2급 뇌병변으로 단 한 번도 옳게 인간대접을 못 받고 오른 손쪽을 거의 못 쓰고 다리마저 불구인 반신불수 장애인으로 바보처럼 보이는 빈한한 친형을 단과자로 부부가 같이 와서 꼬아 사기를 치고, 무한연대보증으로 족쇄까지 채워 형의 마지막 돈까지 다 긁어 간다. 양아치급인 이 비슷한 일들이 앞으로도 세계도처에서 계속 일어날 것이다. 이념이 없는 정치는 물론이고, 석사학위를 사학과 국립대 등 두군데에서나 졸업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상아탑인 학문의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물론 각자 스스로들 조심해야 하긴 하지만 결론적으론 나의 아버지 마냥 당하는 자가 바보인 것이다. 왜냐면 사기에 안 당하고 잘 사는 분들도 우리들의 이웃에 엄청 많기 때문이다. 큰 것도 중요하지만 평상시에도 돈에 관계가 되는 것은 자녀와도 충분하게 대화를 하고 유사시를 위한 중요한 정보제공 등등 작은 것부터 잘 챙겨놓아야 한다.
뇌병변 반신불수인 불구의 장애인 형을 등쳐 먹은 나의 삼촌 행위로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하여 이글을 팩트(Facts)로 쓸 수가 있게 되었다. 결론적인 내용을 또 부연하면 구한말 대한제국 때 조선 한국인들은 임금부터 나라를 돈 받고 팔아먹은 희기한 존재들이다. 실로 뼛속 마지막 바닥까지 사기근성이 깊이 배어 있는 족속들이다. 이러니 자연(自然)히 남북 통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례로 북한 외국주재 고위간부나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으로 오려고 해외주재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하면 매우 귀찮아하고, 신분을 아는 경우 심지어 근처의 북한 대사관에 밀고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하여 바로 북한 보위부에 체포되어 북송되거나 혹은 갈곳이 없어 제3국에 타진을 하거나, 떠돌이 생활자로 전락을 하여 여기저기로 돌아 다닌다. 주요 영미권 외신에서 수없이 보도된 일이며, 국제외교전 무대에서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모두 신뢰를 완전히 잃은 나라로 똑같이 분류된지 이미 옛날이다. 어이없게도 군미필자가 대권에 버젓이 도전을 해도 아무런 생각 없이 찍어주는 희안(稀罕)할 만큼 정신문화가 박약한 매우 드문 나라의 수준의 백성들이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군미필 대통령은 약혼을 해 놓고 부정(不貞)과 간음을 한 자와 진배가 없다. 적어도 사기를 쳐도 나의 삼촌처럼, 혹은 밀양 서당훈장처럼은 치지 말자. 나의 삼촌이나 밀양 서당훈장은 전형적인 한국형 사기꾼이다. 장애인 형을 속여 신불자로 만든 것도 모자라 조카까지 이용하여 자기 아들 취업용 보증을 부탁하는거나, 자기 농장이나 자기 아파트만의 보증으로도 충분할 텐데, 한문을 배우는 순진해 보이는 젊은 교사의 아파트를 저당잡혀 그 돈으로 농사자금인지 사업자금인지 모르겠지만 대출을 받아 남의 인생에 갈고리를 걸려고 하는 형태는 법망을 피하는 교묘한 술수의 국내통용의 도적사기꾼이다. 상대방의 동정과 약점을 악용하는 평생 신용불신의 수준이다. 철학으로 말하면 존재론적 로고스(logos)가 유전적으로 결핍(缺乏)되어 있는 족속이다. 그래도 꼭 사기를 치고 싶으면 미국 국제금융 유대인단처럼 실력을 배양하여 세계를 상대로, 아니면 국가기관을 상대로 쳐라. 아무도 모른다. 사기를 당하고도 횡령한 돈으로 피해국에 IMF구제금융지원을 해주거나, 자국(自國)에 세금을 왕창 가득 내면 피해국가의 국민들은 고마워 어쩔줄 모르거나, 국가기관 국세청에서는 희대의 납세영웅이라고 신문에 기사도 내게 하고 광고도 해 준다. 재수 좋으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도덕교과서에도 위인이나 큰 애국자처럼 지면에 실려 PPT나 동영상 등으로 수업도 하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서 고르기나 단답 등 서술형 문제로, 아니면 수행평가 주제로 선정되어 학생들이 자기 점수를 위해 열심히 암기하고 배운다. 부와 명예는 당연하고 무공훈장을 능가하는 시민적 지지를 받는다. 이 정도가 되면 한국을 떠나서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 '주디스 슈클라'도 생전에 '만들어진 묻지마 정의'에서 자주 강조했듯이 최고의 금자탑으로 쳐 줄 것이다. 사기든 말든 바로 선량한 이웃과 인류의 지복(至福)을 위하여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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