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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게시판 스크랩 [디토씨의 문화여행] 바이에른의 작은 기적
휘목 추천 0 조회 26 13.03.07 10: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주세페 베르디 탄생 200주년 기념공연 <레퀴엠> 리뷰

FESTKONZERT ZUM 200. GEBURTSTAG VON GIUSEPPE VERDI
Giuseppe Verdi <Messa da requiem>
- 2013년 2월 26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가극장 공연

주빈 메타 Zubin Mehta 지휘
쇠렌 에크호프 S?ren Eckhoff 합창지휘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 Krassimira Stoyanova (소프라노)
예카테리나 구바노바 Ekaterina Gubanova (메조소프라노)
조셉 칼레야 Joseph Calleja (테너)
연광철 Kwangchul Youn (베이스)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 및 오페라 합창단

2주간의 이탈리아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베르디의 <레퀴엠>을 들으러 독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뮌헨으로 가는 기차간에서 나는 잡지 하나를 펼쳐들었다. 이탈리아의 시사주간지 레스프레소(L'espresso). 오성운동의 당수 베페 그릴로가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표지를 떡하니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코디미언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답답한 정치현실에 지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말투나 행동, 공약 등을 보면 좀 어이가 없지만,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은 대개 판타지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갈구하는 법이다. EU 특히 독일이 요구하는 긴축정책을 단호히 거부하고, 기성정치인들을 ‘기생충’으로 몰아붙이는 오성운동은 이번 총선에서 약진을 이뤄 870만 표를 획득했다. 당연히 이 ‘광대’같은 베페 그릴로에게 이탈리아의 지식인들, 특히 진보지식인층의 눈이 고울 리야 없겠다. 그렇다고 광대놀음 외에 딱히 묘수가 없는 것도 이 나라의 현실. 총선결과는 기존의 좌우 양대 정치세력이 5:5로 대치하는 가운데, 오성운동이 제3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도저도 아닌 ‘우울한 무승부’에 TV와 신문에는 장탄식이 흘러 넘쳤다. 이탈리아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내가 지켜보기에도 답답한 결과였다.
레스프레소의 권말칼럼은 유명하다. 1985년부터 움베르토 에코가 쓰고 있다 - La bustina di Minerva. 그의 칼럼은 날카롭다. 정신은 예민하고, 언어는 정교하며, 풍자는 신랄하고 또 예술적이다. 이번에는 베를루스코니의(이탈리아인들의) 묘한 외국어 발음습관을 들추는 것으로 시작하더니, 공감(empathy)과 동정(sympathy)을 개념적으로 준별하며 언어학자다운 현란한 풀이를 덧붙였다. 변변찮은 이태리어 실력 때문에 그 문장의 감칠맛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좌 - ‘츠나미 그릴로 Tsunami Grillo’. 코미디언 출신으로 정치에 투신한 ‘오성운동’의 당수 베페 그릴로를 표지모델로 삼은 레스프레소. 진보성향의 신문 레푸블리카에서 발간하는 시사경제주간지다. 우 - 레스프레소에서 가장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권말칼럼)
어느덧 기차가 오스트리아를 지나 독일땅 로젠하임으로 들어선다. 이제 몇 십분만 더 가면 뮌헨이다. 왠지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턱하니 놓인다. 옛날에는 문명의 음지(독일)에서 태양과 생명력의 땅(이탈리아)으로 진입하던 순례의 이 코스가 요즘은 어쩐지 서로 처지가 뒤바뀐 것 같다. 무질서와 혼란이 주는 이탈리아 특유의 독특한 매력을 뿌리치고 고요한 질서가 넘치는 독일로 들어오면서, 지난 이탈리아 여정 동안 알게 모르게 근육 속에 쌓인 피로감과 불안이 한번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독일이라면, 이 땅이라면 정말 아무 걱정 없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그런 기대가 넘실거린다. 괜히 고향 땅에 온 듯한 호기로운 착각이 드는 건 왜일까.
(막스 요제프 광장에 면한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장엄한 위용)
막스-요제프 플라츠 한 켠의 숙소에 도착했다. 무거운 트렁크를 끌면서도 눈을 돌려 광장을 한 바퀴 휙하고 둘러본다. 이 땅 바이에른, 이 도시 뮌헨이 주는 감동은 정말이지 각별하다. 밀라노와도 다르고, 파리와도 확연히 다른 감동이 있다. 독일에서는 대도시라고 하지만 우리 눈에는 별로 크지 않은 도시. 사실 ‘관광객의 눈’으로 보면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랬다. 큰 맥주홀이 있고, 중세풍의 높다란 건물이 줄지어 서 있고, 북독일보다 넉넉한 품성과 몸매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그런 곳. 그리고 ‘피나코텍’이라 불리는 유명 갤러리들이 어느 한 군데 줄지어 모여 있으나 사실 파리나 피렌체보다 컬렉션의 수준은 한참 떨어지는 곳. 뭐 뮌헨에 대한 나의 첫 인상도 겨우 이 정도였다.

뮌헨은 자신의 속살을 남에게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 도시다. 한 사나흘 잠시 머물다 떠날 단기 여행자들에게 자신의 깊은 생각과 숨은 매력을 보여줄 그런 친절함은 애초에 없다. 이탈리아처럼 태양이 높아 자연이 아름다운 곳도 아니고, 딱히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곳도 아니며, 그 밖에 특별히 사람들을 열광시킬만한 엄청난 랜드마크가 있는 도시도 아니니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독일문화에 매료된 모든 이들은 이 도시 뮌헨 앞에서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격하고 근본적인 감동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그건 시간이 좀 필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당신이 뮌헨 말고 독일의 다른 도시가 더 좋다거나, 오스트리아 빈이 더 마음에 든다면, 아직 당신은 - 어떤 의미에서 - 행운아다. 이런저런 감동적인 독일어 영화를 섭렵해 왔지만, 최고의 한 편을 아직 남겨둔 상태와 같다고나 할까. 뮌헨은 가장 고결하고 심오한 형태의 우아함을 몸 속 깊은 곳에 DNA처럼 품고 있는, 독일적 감동의 최종 종착지이자 완성형과도 같은 도시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뮌헨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뮌헨 신시청사 Neues Rathaus)

호텔에 바삐 체크인을 하고는 구겨진 양복을 열심히 다려 펴고는 길을 건너 극장으로 향한다. 급하게 도착해 짐도 풀고, 마감을 앞둔 원고도 부지런히 보내고, 몇 통의 업무메일에 대한 답도 보내느라 사실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만 뻥 뚫린 광장에 나와 찬 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그런데 광장 주변에 왠 경찰들과 시커먼 관용차들이 잔뜩 깔려있다. 방송카메라도 몇 대 왔다갔다 한다. 어깨에 카메라를 들쳐 맨 ZDF 방송사 기자에게 물었다. 누가 오냐고. ‘이탈리아 대통령이 온다!’

(당일 극장 앞 광장은 대통령 의전차량과 경찰진, 취재기자들로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알고 보니 조르지오 나폴레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이 독일을, 그것도 남부 바이에른의 뮌헨을 국빈방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타노가 오니 당연히 요아힘 가우크 독일대통령도 올 것이고, 그럼 바이에른 주지사(여기서는 명칭이 프레지던트다) 호르스트 제호퍼도 올 것이다. 하룻밤에 ‘프레지던트’ 세 명과 함께 공연을 보다니...
수 개월 전에 미리 티켓을 구해놓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던 공연이었다. 독일 최고의 가극장인 바이에른슈타츠오퍼가 베르디 200주년을 기념한다는데 어디 보통 아티스트들이 나오겠는가. 지휘봉은 이 극장의 음악감독이었던 주빈 메타가, 솔리스트들은 우리 시대 최고의 성악가들이 총출동했다. 소프라노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와 메조-소프라노 에카테리나 구바노바는 거의 ‘레퀴엠 듀오’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여러차례 이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여가수들. 특히 스토야노바는 얀손스, 래틀과 베를린필, 빈필 등을 넘나들며 수차례 이 작품을 노래했던 명실상부 세계적인 프리마돈나이다. 테너 솔로는 2011년 최고 화제의 공연이었던 BBC 프롬스 피날레 <레퀴엠>의 독창자인 조셉 칼레야. 사실 칼레야는 끝까지 마음을 졸이게 했는데, 2월초 예정되어 있던 라 스칼라 오페라에서의 단독 리사이틀을 건강문제로 취소해버린 직후 뮌헨으로 넘어온 터였다. 다행히 예정된 벨리니 오페라를 잘 소화하고, 페이스북에서도 ‘컨디션 최고!’를 외치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베이스 독창자는 한국의 연광철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오페라 가수로, 그 빛나는 캐리어는 이미 전무(全無)의 위업을 세웠고, 아마도 후무(後無)하리라고 본다. 베를린에서 캐리어를 시작해, 지금은 뮌헨, 빈, 바이로이트, 잘츠부르크, 밀라노, 뉴욕, 파리, 마드리드, 암스테르담 등 세계 각지의 최고 무대에서 모두 그를 만날 수 있다. 바렌보임과 틸레만이 가장 신뢰하는 베이스이며, 라 스칼라 시즌 개막공연(일명 ‘프리마’라고 부른다)에서 노래한 유일한 우리나라 가수. 그리고 2014/15 시즌 프리마에서 다시 한번 스칼라 극장에 오르기로 예정되어 있다. 메트에서 <루치아>를 노래할 때에는 뉴욕타임즈가 이 놀라운 음성에 주목하여 한 면을 할애해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아마 축구선수였다면 연일 우리 신문과 방송의 톱을 분주하게 채웠겠지만, 왠일인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덜 주목받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다. 그러나 어떠랴. 그는 우리 시대 모두가 자랑스러워할만한 가장 국제적인 오페라 가수로, 지금도 전 세계의 톱클래스 무대에서 감동의 음성을 전파하고 있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성악가이다.

(공연 시작 직전 임석내빈인 양국의 대통령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바이에른슈타츠오퍼의 총감독 클라우스 바흘러)

(양국 대통령 임석 하에 식전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잘 찾아보시면 ‘친절한 디토씨’도 보입니다 ^^; [출처 - 독일연방대통령 홈페이지])

이제 음악이 시작되었다. 고요한 입당송으로 시작된 진혼미사곡은 곧 제2곡 진노의 날(Dies Irae)로 진입한다. 팀파니가 거친 연타로 격정적인 숨을 토해내는 사이 합창단과 솔리스트들이 한데 뒤엉킨 장엄한 절규가 극장을 꽉 채웠다. 구바노바가 입을 열었다. ‘리베르 스크립투스 프로페레투르...보라, 이 문서에 모든 행실이 기록되어 있나니’ 최후의 심판, 그 진노의 날을 맞아 준열한 심판의 계시가 그녀의 음성을 타고 지상으로 강림했다. 오케스트라가 다시 한번 ‘진노의 날’의 계시를 토해내는 사이 어느 덧 솔리스트들은 신 앞에 선 나약한 인간으로 변신해 자비를 갈구하고 있었다.

여기선 테너가 나설 차례다.

Ingemisco tamquam reus
Culpa rubet vultus meus
Supplicanti parce, Deus.

죄 많은 자, 저는 탄식합니다.
이 모든 고통과 수치심으로
신 앞에 갈구하오니, 저를 구원해주옵소서.

스토익한 북유럽의 기독교와 달리 이탈리안 카톨릭의 모습이란 바로 이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그건 이론적인 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의 정서적인 무언가를 의미한다. 신은 위대하며, 인간은 그 신 앞에 간절히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와 구원을 바라게 된다. 마치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 앞에서 용서를 비는 무력하지만 순수한 자식처럼, 애닳프고 애절한 간구가 이같은 절절한 음악을 만들었다.
 

테너의 애절한 기도를 받아 이번엔 베이스다. 심오하고 깊은 목소리답게 그 내용도 보다 사색적이다. 테너가 애원이라면, 베이스의 그것은 자기성찰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Confutatis maledictis
Flammis acribus addictis
Voca me cum benedictis.

사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분노의 지옥불로 떨어질 때
성인(聖人)들과 함께 저를 불러주소서

성스러움과 자애로움이 뒤섞인 환한 기운이 연광철의 목소리를 타고 우리들의 가슴 속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그의 목소리는 구릿빛이 아니라 은빛이다. 금속성이 아니라 깊고 둥근 청자다. 그가 <루치아>의 라이몬도 신부를 불렀을 때, <운명의 힘>의 과르디아노 신부를 노래했을 때, 또 <파르지팔>의 저 유명한 성배기사 구르네만츠로 ‘바이로이트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을 들었을 때, 모든 이들을 감동시킨 것은 그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한없는 사랑과 자애로움, 그리고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기품이었다. 흔들림 없는 인격처럼 단단하고 심오한 그 목소리에서 한없는 부성애(父性愛)가 느껴졌다.

이제 음악은 제2곡의 하이라이트인 ‘눈물의 날’ 라크리모사로 정점을 이룬다. 신도가 아닌 나조차도 감격어린 순간으로 만들어주는 최고의 음악이다.

 
베르디의 음악은 이제 완전히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흘러나간다. 주빈 메타의 격렬한 지휘봉과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솔리스트들의 놀라운 가창, 강력한 응집력의 합창단이 토해내는 음악은 놀랍기만 하다. 오페르토리오, 상투스, 아뉴스 데이, 룩스 아테르나를 거친 음악은 드디어 마지막 ‘리베라 메(참회문, 저희를 용서해주옵소서)’에 이른다.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가 입을 열어 첫 소절의 참회를 낭송하는 가운데, ‘진노의 날’의 주제가 다시 한번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소프라노는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거듭 참회의 말을 뇌까린다. 곧이어 웅장한 푸가를 타고 네 솔리스트들의 음성이 교차로 이어지며 진혼미사곡은 끝을 향해 달린다.

(베르디 <레퀴엠> 중 ‘Libera me', 소프라노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 외)
음악이 끝나고, 주빈 메타의 손이 서서히 내려온다. 장엄한 침묵이 이어진 후, 객석을 타고 서서히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브라보’니 하는 외침은 없다. 여기는 독일이다. 숨쉴 틈없는 압도적인 밀도의 박수소리와 목질의 마루바닥을 세차게 두들기는 구둣발 소리가 그들만의 브라보다.

(베르디 <레퀴엠> 공연 후 커튼콜 장면. 관객 전원이 기립하여 박수를 보내고 있다.)


(공연 후 수십 명의 현지팬들에 둘러쌓인 베이스 연광철)

공연 후 연선생님을 따로 뵈었다. 무대에서 내려오셨으니 이제는 ‘베이스 연광철’이 아니라 ‘연선생님’이 된다. 공교롭게도 같은 호텔이어서 선생님과 긴 시간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식사 자리에는 소프라노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도 나타났다. 그녀도 바로 이 호텔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어젯밤의 프리마 돈나가 바로 옆 테이블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 모습이란....눈인사를 보내며 입모양으로 짧게 ‘브라바’를 외쳐줬다. 환한 웃음으로 답해주는 그녀는 몇 달 뒤 이 극장에서 <시몬 보카네그라>의 히로인 아멜리아 그리말디를 노래하게 된다. 그리고 내 맞은 편에 앉아있는 베이스 선생께서는 켄트 나가노 지휘 <트리스탄>의 마르케 왕이시기도 하다. 공연과 콘서트를 보러 전 세계 수많은 극장을 돌아다녔던 나였지만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바이에른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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