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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1일 일요일
늘푸른 역사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작업이 바로 인원 모집이다. 일찍이 장소나 탐방지를 물색하고
해설사나 음식점 등을 알아보고 섭외하는 과정이 이루워지지만, 탐방 인원을 모집하기엔 여러 달을 기다리며 신청 받기도
하고, 신청한 일부는 당일 전에 사정으로 참여를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50회로 준비한 단양지방 탐방 역시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인원을 맞춰 다녀 올 수 있었는데, 여행 일주일 전까지도
확실하게 가실만한 회원의 수는 14명 내외에 불과해 장웅상 교육국장님과 홍민자 수석부회장님, 김성신 외무부회장님과
삼각 연락을 통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김성신 외무부회장님은 법학과를 상대로 나는 국문과나 동문회로 홍민자
수석부회장님과 장웅상 교육국장님은 기존 회원을 상대로 전화연락과 심지어는 반 협박과 출석수업에서 홍보 등의 노력으로
무산될 위기를 넘길수 있었다.
그렇게해서 단양 여행은 시작 되었는데, 출발 장소인 성남시학습관 미금역 4번 출구에 세워진 관광버스에 출발시간 10분전인
7시 50분까지도 10여명 내외가 도착해, 안오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회원님들이 한분 한분 도착 할 때마다 반가움에
기쁜 손을 흔들어야했다. 어느덧 시간은 8시 10분을 향해가는데 그제서야 24명의 인원이 도착해 출발을 할수있었다.고고싱!!~
단양으로 달리는 관광버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한사람이 더 타기로한 용인 휴게소로 달려가고, 차안에선 기존에 하던 방식대로
회원들 소개와 인사를 하고 있는데 기사님이 아차 했는지 용인 휴게소를 지나쳐,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용인 휴게소로 다시 돌아와
법학과 윤병화 학우님을 차에 태우고 단양에 일정보다 조금 늦게 탐방을 시작하게 되었다.
도담삼봉
첫번째 탐방지인 도담 삼봉은 명승 제 44호로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 앞 남한강 줄기에 있는 세개의 작은 섬이다.
이 곳에서 해설사님을 만나 도담삼봉에 전해 내려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내용이 조선초 개국 공신
정도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 대표적인 예는 정도전의 고향이 단양이고 도담삼봉이 아름다워 호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정선에서 삼봉이 흘러와 단양군에서 정선에 세를 냈는데 여덟살배기 정도전이 회의장에 나타나 단양군에 물길을 막고있으니 도로
가져가라 했는데 가져 갈 수없어 그때부터 세금을 안냈다는 얘기가 주를 이룬다. 단양군청 홈페이지에도 그렇게 소개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91년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예외는 아니다. 사전의 ‘정도전’
항목을 보면 “(정도전의) 선향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정도전 연구의 권위자인 한영우 교수인데, 그는 학계에 정도전을 본격 소개한 『정도전 사상의 연구』(서울대출판부, 1973)에서
‘도담삼봉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도담 삼봉과 정도전의 관계를 조사하던 중 또 다른 학설이 제기 되었는데 사실에 가까워 소개하기로 한다.
『삼봉집』에 수록된 ‘이사[移家]’라는 시를 보면 ‘오 년에 세 번이나 집을 옮겼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곳에도 예의 ‘삼봉’이
등장한다. 이 시에는 특이하게도 다음과 같은 문집 편찬자의 주석이 붙어 있다.
“공이 삼봉재(三峰齋)에서 글을 강론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많이 따랐다. 이때에 향인으로 재상(宰相)이 된 자가 미워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공은 제생(諸生)들을 데리고 부평부사(富平府使) 정의(鄭義)에게 가서 의지하여 부(府)의 남촌에
살았는데, 전임 재상 왕모(王某)가 그 땅을 자기 별장으로 만들려고 또 재옥을 철거하여 공은 또 김포(金浦)로 거처를 옮겼다.
임술년(1382)”
삼봉재에 살던 정도전이 한 권력자가 집을 철거하자 부평으로 이사갔다가 그곳에서도 여의치 않자 다시 김포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삼봉재의 위치를 단양으로 보느냐, 삼각산으로 보느냐인데, 임시 거처를 찾아 전전했던 당시 상황을
미루어본다면 부평이나 김포 인근인 삼각산이 옳을 듯하다.
종합하면, ‘삼봉’은 개경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산이며, 파주 임진강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또 삼봉을 중심으로 오 년 동안
세 번의 이사를 했는데, 그가 머물렀던 곳은 삼봉, 부평, 김포로 한강 주변 지역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봉’은 삼각산, 즉
오늘의 북한산을 지칭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로 이뤄졌다 해서 예부터 삼각산으로 불렸다. ‘삼봉’으로 약칭되기도 했는데,
이 같은 사례는 목은 이색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정도전의 스승으로 학문과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색은 17세 되던 해
삼각산에서 학업을 연마한 적이 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그의 문집 『목은집』에는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며’라는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에는 ‘삼봉이 태초 때부터 깎여 나왔는데[三峰削出太初時]’라는 구절이 보인다. 삼각산과 삼봉이 함께 쓰였다는
증거다.
정도전의 문집에 나타난 ‘삼봉’은 단양의 도담삼봉이 아닌 삼각산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당연히 『삼봉집』에 도담삼봉이나
단양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정도전의 호 ‘삼봉’이 도담삼봉과는 거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 때문인지 처음 ‘도담삼봉설’을 제기하였던 한영우 교수는 나중에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한 교수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지식산업사, 1999)에서 정도전 출생과 호에 관련한 전설이 사실과 다른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삼봉이라는
호는 단양의 삼봉에서 차명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옛집인 개경 부근의 삼각산에서 차명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발짝 물러났다.
(출처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조운찬 기자 기사 내용 중 발췌 )
석문
두번째 탐방지인 석문은 도담삼봉을 끼고있는 도담리 건너 편 하괴리 산 중턱에 위치한 단양 석문은 석회암
카르스트가 만들어 낸 자연 경관으로 중간에 석회암은 비바람에 사라지고 동굴 천장만 남아있는 형태로 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단양 석문은 초입의 오르는 길이 계단으로 너무 가파롭고 힘이들어 중간의 팔각정에서 더이상 찾아가기를
포기하고쉬고 있는데 삼삼오오 다녀온 회원들의 경탄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해 끝까지 찾아 갔는데. 동굴 사이로 툭터진
공간에 남한강의 물줄기와 건너편 도담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월의 상큼한 바람과 신선한 공기 초록으로 뒤덥힌 숲과
어울어져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환상적인 모습을
볼 수있었다.
다누리아쿠아리움
세번째 탐방지는 국내 최대 민물고기 생태관인 다누리 아쿠아리움이다. 관광버스에서 내린 일행이 처음부터 놀라게 한것은
광장에설치되었던 쏘가리 모양의 지하계단 장식인데 고래만한 크기의 황쏘가리가 광장 한가운데 실물과 흡사하게 위용을 뽑내고
있자니 회원들의 시선이 그 곳으로 몰린다.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아쿠아리움에 들어 섰을 때 또 한번 놀라는
것은 초대형 수족관에 수많은 민물고기들의 볼 수 있었다. 오대양 육대주의 다양한 민물고기와 낚시 장비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는데 강태공이 꿈인 사람들은 한번 쯤 가 볼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온달 동굴과 고구려 촬영 세트장
점심식사는 남한강 지천에 널리 잡히는 다슬기로 만든 탕종류에 제육 볶음으로 음식 맛이 일품인데 단양으로 내려오는
동안에 차안에서 선임된 다섯분의 부회장님들과 회원님들이 막걸리에 쏘맥, 박세원 선배가 가져온 양주등 기분 좋게 식사와 함께
한 잔 하는 시간을 누리고 흥겨운 마음으로 온달 동굴로 향했다. 이곳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는 온달장군이 고구려 영양왕 때
쌓았다는 온달 산성이 있는데 주변에 있다는 이유로 이름이 붙혀진 온달 동굴이 있다. 천연기념물 261호인 이 동굴은 길이 760
미터이고 약 4억 5천만년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로 동굴 내부의 시원함이 땀방울을 식혀준다. 동굴 입구의 매표소를 지나면
고구려 시대와 중국의 명대나 당대의 건축물이 보이는데 이 곳 온달 산성 입구에 관광 차원에서 유치한 거대한 고구려 성을
재현한 세트장이다 지금도 곳곳에 추가로 건축물을 짓고있었다.
구인사.
마지막 방문지인 구인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세시 반경으로 단양 지방에서 제일 유명한 절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절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사찰인지라 처음에는 한번 다녀온 곳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친숙한 절이다. 만약에
백양사나 내장사 기타 여러군데의 익숙한 절 모양을 하고 있었으면 틀림없이 착각했으리라. 한번 다녀 갔을 거라고, 하도
여러군데 사찰을 탐방하다보니 가끔 착각을 한다. 그런데 구인사는 다르다 확연히 구분되는 사찰의 규모나 아름다움, 걸맞는
주변경관...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소백산 국망봉 줄기 연화봉에 자리잡은 구인사는 대한불교 천태종의 본산이다. 천태종은
594년 중국의 지자대사가 불교의 선과 교를 합하여 만든 종파로 지자대사가 머물던 천태산에서 그 이름를 따 천태종이라 불렀는데
고려 숙종 2년에 대각국사 의천스님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천태종이 시작되었다. 1945년 상월 원각스님이 지금의 구인사 자리에
칡덩굴을 이용해 암자를 지은 것이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소백산 자락의 정취가 물씬 담겨있는 구인사의 푸른 하늘과
아름답게 꾸며진 경관, 웅장한 규모나 크기에 입이 벌어진다.
구인사에서 내려와 오후 5시 30분에 모두 모여 단양에서 성남으로 향했다. 하늘은 어느덧 일기예보처럼 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고속도로에 들어서 치약휴게소로 향해 들어섯을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있었다. 오전에 장웅상교수님이 준비한 간식거리들이
미흡했는지교수님이 휴게소에서 식사를 하자는 제안을 하시길래 그러자하여 들린 것이다. 꿀맛같은 모듬우동을 게눈 감치듯
폭풍흡입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성남으로 달려왔다. 오는내내 사행시와 퀴즈 부회장님들의 사회와 무반주 노래를 들으며 성남에
도착하니 비는 더욱 세차졌고 차에서 내린 일행들과 작별에 정을 나누기도 어렵게, 내리는 비 사이로 헤처가는데 장교수님이
전화를 주신다. 장창호 총학생회장님이 집까지 데려다 주신다는 연락을 받고 그냥 갈까 망서리다. 비에 졌는 카메라 가방을 보니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아 몸을 부탁하여 집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후기
제50회 단양행사를 준비해준 장웅상교수님과 모자르는 인원을 채우기위해 노력해준 홍민자 수석부회장님 법학과 김성신
회장님께 머리숙여 감사드리고 후배의 협박에 등떠밀려 다녀온 송주성, 신현숙 선배와 김봉일 후배, 국문과 일을 책임지는
김점숙회장님, 문교과 최용석회장님과 출석수업중에 늘푸른역사여행에 동참해 줄것 을 호소했을 때 선불을 내며 참여해주신
조형자 14학번 후배님께도 감사드리고 김성신회장님과 나와의 의리를 져버리지 못해 부부가 함께 참여해주신 김효남 부회장님
송재근 부회장님 부부께도 감사드리며, 부회장직을 수락해주신 이향화 부회장님, 윤병화부회장님. 홍보국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하신 임영순 행정실장님 38따라지 내오른팔 윤혜숙 총무님 왼팔 강명희 교육국장과 법학과, 중문과 3학년학우님, 국문과에
복학하신 최은주 후배님,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신 박세원 선배님과 송기식선배님 등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늘푸른 역사문화여행 동아리 회장 김관수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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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진 사진과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입니다.
저희는 5월112일 일요일 입니다, 수정 바래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다녀왔고요. 얼떨결에 부회장이라는 중책도 맡게되었는데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글과 사진 잘 봤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회장님.^^
아이스림 사주셨던 저희 딸도 너무 즐겁다고 자랑을 많이 했습니다. 후기 읽으니 추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교육국장님. 늘 든든한 지원 고맙고 감사합니다. ^^